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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uneral March 2 : 장송행진곡
피오렌티 지음 / 마루&마야 / 2017년 7월
평점 :
“널 위해서라면 난 뭐든 할 수 있어. …살인도 할 수 있어.”
그 남자, 레온 마티아스 폰 베르히만. 은빛 도는 애시브라운 머리칼에 바다 빛 눈동자의 매력적인 독일남자. 독일 내 가장 주목 받는 피아니스트 유망주. 전 유럽의 음악과 출판, 미디어, 공연 예술 분야에서 독일을 대표하는 베르히만 그룹, 독일의 유서 깊은 귀족 가문인 베르히만 가문의 후계자.
“제발… 내 인생에 더는 들어오지 마!”
그 여자, 레오니 예음 크뤼거. 가난한 동양계 혼혈아. 입양아 출신. 훔퍼딩크 마이스터 콘서바토리(훔퍼딩크 음악대학 예비 과정) 피아노 전공 재학생.
사랑하는 여자를 향한 한 남자의 광기 어린 사랑과 집착, 소유욕을 제대로 느낄 수 있는 소설 <장송행진곡>. <장송행진곡>은 장송행진곡의 곡조처럼 비극적이고, 죽음의 그림자가 어린 침울함이 곳곳에 묻어난 소설입니다. 책 표지의 발췌글이나 강렬한 프롤로그에서 그러한 전개를 예감할 수 있듯이 말입니다.
여주인공 레오니는 입양아입니다. 독일 아버지와 한국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지만 아버지는 한 번도 본 적이 없고, 어머니에 대한 기억도 없이 아주 어릴 적 독일로 입양되었습니다. 한때는 부유한 집에 입양되어 행복한 유년을 보낸 적도 있으나, 불의의 사고로 양부모를 잃으면서 크뤼거 부부에게 재입양이 되었습니다. 남들 보기에는 아무 문제 없어 보이는 가정이지만 학대와 차별을 받아왔는데, 반항하거나 엇나가지 않은 채 독립할 날만을 기다리며 감내하는 당찬 인물입니다.―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 양모인 브리기테의 학대를 녹음할 정도로 주도면밀한 면모를 지니기도 했습니다.―
레오니는 훔퍼딩크 마이스터 콘서바토리(훔퍼딩크 음악대학 예비 과정)에서 피아노를 전공하는데, 장학금을 받을 정도로 전도유망한 학생인 데다 노력파입니다. 물론 레온이 그녀의 학교로 오게 되면서 장학생 자리를 내어 주게 되지만 말입니다.
레오니는 학교 내 가장 인기인이자 선망의 대상인 레온의 어두운 이면을 우연히 엿보게 되면서 그를 무서워하고 피합니다. 동시에 그의 재능을 동경하고 시기합니다. 레온이 그녀가 재학 중인 마이스터 콘서바토리로 오게 되면서 그녀가 받던 장학금은 물론이고 연습실까지 그에게 빼앗기기까지 했으니 그녀의 상실감은 이루 말할 수 없죠. 몰래 그의 연주를 엿듣곤 하는데, 아무리 노력해도 다다를 수 없을 레온의 완벽한 연주 실력에 감동과 슬픔, 안타까움 등의 혼란스런 감정을 느낍니다.
레온은 레오니의 연주를 듣고 흥미를 가지게 되어 그녀를 쭉 지켜봐왔습니다. 책 속 표현에 따르면 순수한 차가움을 지니고 태어난 그는 내면 깊이 존재하는 광기를 숨긴 채, 그가 미치지 않고 평탄한 삶을 살아갈 수 있게끔 그를 지탱해줄 존재를 끊임없이 갈구해왔습니다. 그 존재가 바로 레오니였던 것이었던 거죠. 유일무이한 존재인 레오니를 향한 레온의 집착은 지금껏 봐왔던 남주들과는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집요하고 잔인한 면이 있습니다. 레오니에게 상처 주거나 그에게 거슬리는 인물들을 응징하는 레온의 광기는 극단적이고 섬뜩하기까지 합니다.
레온이 출중한 외모와 실력을 겸비하고 훌륭한 가문을 배경으로 뒀다고는 하나, 레온의 이면을 엿본 레오니는 그녀에게 호감을 표하며 다가오는 레온을 두려워하며 피하려고만 하지만, 만만찮은 레온은 레오니가 그를 멀리하는 것을 두고 보지 않습니다. 갖은 수를 써 그녀를 자신의 곁에 두죠.
자신을 거부하는 레오니를 사로잡기 위해, 그를 좋아하는 하이케를 이용해 질투작전을 펼치거나 그를 의지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어 레오니가 그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 만드는 레온의 집요함이란……. 태생부터 최고의 자리에 있었던 레온은 그가 원하기도 전에 무엇이든 주어졌기에 레오니를 만나기 전에는 누군가를 간절히 원한다는 느낌을 받아본 적이 없습니다. 그렇기에 레오니를 원하는 레온의 모습은 그의 몇 안 되는 인간적인 모습이기도 하지만 잔악함을 드러내는 방아쇠가 되기도 합니다.
레온을 가까이하지 않으려 했던 레오니는 결국 레온의 계략에 의해 그를 받아들입니다만, 솔직히 레오니의 이러한 심리가 잘 이해되진 않았습니다. 레온과 하이케 사이를 질투해 눈물까지 흘리는데, 언제 레온을 그렇게까지 좋아하게 되었나 싶었다고 할까……. 외적인 조건만으로 봐선 레온이 충분히 매력적인 인물임에 분명하지만 레오니는 외적인데 끌리는 캐릭터도 아닐뿐더러 때때로 레온을 섬뜩하게 느끼며 피했었기에 뜬금없게 다가온 부분이 없지 않습니다. 레온에게 점점 끌리게 된 그녀의 심리가 더 두드러지게 묘사되었다면 더 설득력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레온의 표현처럼 그를 이용하는 계약적인 관계로 시작되었다고 할지라도 하이케와 함께 있는 레온을 보면서 질투를 느끼고, 똑같이 질투 작전을 펼치는 그녀의 행동은 두 사람의 관계가 단순히 레온의 밀어붙임으로 이루어진 게 아님을 방증하듯이 레오니의 심경변화의 과정이 디테일하게 묘사되었으면 좋았을 듯합니다.
계기가 어떻게 되었든 결국 레오니는 레온을 받아들입니다. 레오니가 레온의 권유대로 그녀의 진로를 프랑크푸르트 음대에서 원래 가길 희망했던 슈투르가르트 국립음대로 다시 바꾸는 장면에서 그를 온전히 받아들이기로 했다는 것을 결정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양부모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함부르크를 떠나 슈투트가르트 국립음대에 장학생으로 편입하길 희망했던 레오니가 장학금을 받기가 요원해진 상황에서 ―레온이 그녀를 따라 함부르크 음대에서 슈투트가르트로 진로를 바꿔서― 크뤼거 가족 중 유일하게 그녀를 인간적으로 대하는 사촌 엘리어스가 ―엘리어스가 레오니에게 연심을 품고 있었기에 프랑크푸르트지사로 발령이 나자 그녀와 떨어지기 싫어서― 프랑크푸르트 음대 지원을 권하자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던 중이었음.)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함께 하기로 약속하자마자 두 사람에게 파국의 그림자가 다가옵니다. 양부모의 죽음과 비운의 사고는 레오니와 레온에게 깊은 상처를 남기고 오랜 이별을 겪게 합니다. 그리고 2권에서 새로운 환경에서 살아가는 두 사람의 재회 및 연이어 일어나는 사건들이 ―레오니의 출생의 비밀과 두 사람의 사랑을 위협하는 존재로부터의 덫 등― 꽤 흥미롭게 그려집니다.
오히려 사건 위주보다는 심리 위주였던 1권보다 여러 사건이 연이어 일어나는 2권의 심리 묘사나 갈등이 더 설득력 있게 그려진 듯합니다. 레온의 잔악한 부분조차 어루만지며 레온의 말을 믿고 그를 온전하게 품어주며 그 속에서 행복을 찾으려는 레오니의 선택은 레온이 그토록 바랐던 미치지 않고 사랑하는 이와의 평탄한 삶이 실현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전반부보다 후반부가 심리 묘사는 디테일해져서 좋았는데, 후반부에 펼쳐지는 사건들이 치밀함이 부족하게 다가왔습니다. 나름 반전이라고 할 수 있는 레오니의 출생의 비밀도 그렇고, 크뤼거 부부의 친딸인 마르티나로 인해 위험에 처한 레오니를 구출하는 과정이 허무하게 끝난 듯해 다소 임팩트가 부족했습니다. 레오니를 위해 레온이 치밀하게 사전에 계획을 세워둔 덕분이라고는 하지만 그 과정의 치밀함이 드러나지 않아 약간 엉성하게 느껴졌고, 급하게 마무리 지은 듯도 했습니다. 소설로 따지면 위기-절정을 부분이라고 할 수 있는 만큼 사건의 과정이 좀 더 치밀하게 묘사되었더라면 박진감 있게 다가왔을 듯합니다.
레온이 워낙 강렬한 캐릭터이다 보니 레오니가 다소 밀리는 듯해서 아쉽긴 한데, 극으로 치닫는 어둠을 지닌 광기 어린 남자, 레온만큼은 꽤 매력적입니다. 암울하고 잔악함을 지닌 남주라는 느낌도 들지만, 사랑하는 여자를 위해서는 소중한 한 손도 피아니스트의 길도 포기하는 ‘한 여자를 향한 맹목적인 사랑’은 언제 봐도 흥미롭고 로맨틱합니다.
쌍둥이 형제를 죽이고 태어난 존재라는 둥 동생 다니엘을 익사시켰다는 둥, 레온은 아무런 잘못이 없음에도 마치 그의 곁에는 항상 죽음의 그림자가 따른다는 운명을 덧씌운 이들로 인해 레온이 빛나면 빛날수록 그 이면의 어둠 또한 깊어진 것은 아닌가 싶기도 했고, 레온의 잔악함조차도 애처롭게 보이기도 했습니다. 갈구할 대상을 찾아 결국은 안식을 얻은 레온이 다행스럽기도…….
인물의 심리 묘사나 여러 사건 전개에서 보이는 디테일함 부족과 결국은 수수께끼로 남을 죽음의 진상들이 아쉬움을 느끼게도 하지만, 한 번 읽으면 손을 떼기 어려울 정도로 술술 읽히고 몰입도도 좋은 편이라 재밌게 읽었습니다. 독일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만큼 배경 묘사에 공들인 작가의 노력도 엿보여서 좋았습니다. 취향에 있어서 호불호가 나뉠 수 있겠지만 여주를 향한 남주의 광기 어린 사랑, 집착, 소유욕을 좋아한다면 한 번쯤 읽어보셔도 좋을 듯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