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로모션
사토 다카코 지음, 이규원 옮김 / 노블마인 / 2008년 3월
평점 :
절판


멍하니 카메라를 쳐다보는 한 소녀와 그녀를 카메라로 응시하는 한 소년의 그림이 그려진 수채화빛 표지처럼 사토 다카코의 <슬로모션>은 그녀 특유의 섬세함과 글을 이끌어 가는 세 인물의 독특한 캐릭터가 어우러져 물빛 머금은 수채화 한 폭을 감상하는 기분이었다. 반전도 격정도 없이 잔잔히 흐르는 이야기를 따라 한 장 한 장 술술 넘기며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책을 덮고 나서는 그 책을 손에 쥔 채, 오이카와가 그랬던 것처럼 한 동안 멍하니 앉아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손에 쥐어진 책을 놓을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깊은 사색에 빠졌다고나 할까? 15살 사춘기 소녀 가키모토 치사가 툭툭 내뱉듯 전해주는 이야기 속에서 결코 가벼이 여길 수 없는 여러 감정들이 전해져 와, 아이러니하게도 잔잔했던 책의 분위기와는 다른 격정적인 감정의 소용돌이에 빠져 있었다고 보는 게 더 정확할 지도 모르겠다. 내가 느낀 이 감정들을, 이 생각들을 어떻게 말로 풀어 나가야 할까? 나조차 내가 느낀 것들을 제대로 정리하지 못하겠는데, 과연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은 나와 같이 공감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어떤 그림이든 간에, 작가가 어떤 의도로 그렸던 간에 가장 중요한 것은 보는 이의 마음이라고 생각된다. 보는 이의 관점에 따라 미녀로 보이기도 하고 마녀로 보이기도 하는 그림처럼, 이 <슬로모션>이라는 수채화 또한 읽는 이마다 저마다의 감동을 느꼈으리라 생각한다. 그렇다면, 난 어떤 감상에 젖어들었을까?


글의 주된 화자는 열다섯 소녀 치사, 글의 주된 화제는 오토바이 사고로 인해 다리 한쪽을 절며 세상과 단절되다시피 살아가는 이복 오빠 잇페이와, 상처를 안은 채 뭐든 것을 슬로모션으로 하는 치사의 같은 반 친구 오이카와 슈코, 두 사람이다. 1인칭 관찰자 시점처럼 치사의 눈에 의해, 입에 의해 전해지는 스물두살과 열여섯살, 남과 여, 껑충이와 반토막, 균형이 전혀 안 맞는 콤비가 기적처럼 보조를 맞추며 슬로모션으로 걸어가는, 잇페이와 오이카와의 이야기는 그들의 상흔을, 그들의 외침을, 그리고 사회의 이질적인 모순을 느낄 수 있게 있게 하는 시간이었다.

치사는 불량스러웠던 오빠가 오토바이 사고 이후 세상과 단절된 채, 남의 시선은 아랑곳않고 생각없이 제 멋대로 살아가는 것만 같아 불만스럽고 한심스럽다. 거기다 그 여파가 자신에게까지 미치고 있다는 생각에 약간은 피해의식을 느끼기도 한다. 오빠의 사고 이후, 수녀같은 삶을 강요하며, 구속하는 아버지때문에 답답함을 느끼는 치사는 이런 삶 속에서 또래친구들과 어울리고, 자신이 좋아하는 수영을 함으로써 스트레스를 푼다. 겉으로는 소위 노는 무리들에 끼여 같이 노는 것처럼 보이지만 레이코의 말처럼 의외로 열심이고 성실하다. 수영클럽도 부지런히 나가고 이른 통금시간도 잘 지키고! 레이코 무리와 어울리며 겉으로는 불량스러워보이려고 하지만, 성실한 그녀의 모습을 보노라면, 남들에게서 자신을 보호하고자 하는 치사만의 허세는 아닐까? 치사는 인정하지 않을련지도 모르겠지만...! 오빠가 싫다, 사라지면 속 시원할 것 같다고 말하는 치사지만, 결코 그녀는 오빠를 미워하지도, 싫어하지도 않는 것 같다. 오빠의 불량스러움이 싫다면서, 비슷한 스타일을 좋아하고, 은근히 오빠의 동태를 신경쓰는 것을 보면 레이코의 말처럼 브라더컴플렉스일지도...이것 또한 치사는 인정하지 않겠지만! 말로는 오빠를 비난하기도 한심스러워도 하지만, 치사 본인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오빠를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런 그녀에게 오빠만큼이나 신경을 쓰이게 하는 존재, 모든 행동을 느리게 하는 슬로모션 소녀 오이카와! 남들의 시선을 신경쓰지 않으며 자신만의 시계로 세상을 살고 있는 것 같은 오이카와는 반 전체에서 은근히 소외당하는 비웃음거리이자 아웃사이더이다. 알게 모르게 신경쓰이면서도 그런 오이카와를 무시하려고 노력하던 치사는 아버지와의 트러블로 집 나간 오빠가 오이카와와 동거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세상 속에 스며들지 못하고 부유하고 있던 두 사람과, 자신은 남들과 다르다고 생각하면서도 어중간한 자신을 느끼는 치사가 공유하는 시간과 공간...그들의 상처!


오토바이 사고 이후, 자신의 사고를 찍은 사진과 비슷한 사진들을 찍다가 어느 새 이상적인 인물을 찾아 피사체를 인물로 바꾼 잇페이. 큰 부상이 아니었음에도 재활을 게을리 해 다리 한쪽을 저는 그는 보는 것과 달리 의외로 마음이 여린 사람인 것 같다. 겉으로는 세상과 단절된 척, 자신은 아무 상관없는 척 하지만, 엄마의 정이 그리운, 간혹 갖는 생모와의 시간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아픈 오이카와를 병간호할 줄 아는 자상한 사람이다. 어쩌면, 그는 다리를 전다는 것을 핑계로 세상과 단절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더 이상 상처받지 않기 위해...저는 다리로 달리다 넘어지면서 웃어댔지만, 그것은 세상을 향한, 그리고 나약한 자신을 향한 냉소였는지도 모른다. 그런 그가 생모에게 작별을 고하고 좋아했던 오이카와를 떠나고서 성장한다. 나약했던 자신을 버리고 세상과 맞서려고 한다. 자신의 저는 다리를 고치기 위한 병원비를 모으는 것을 시작으로 세상을 향해 한 발을 내 딛는다.


'오이카와 슈코의 세계, 회전이 느린 행성, 완결된 하나의 별'
"나는 '오이카와 행성'에 불시착한 채 현지의 법칙에 따르고 있다. 모든 것이 느리고 힘을 조금밖에 쓰지 않는다."
"'오이카와 행성'은 고체의 별이 아니라 이미 뒤틀리고 찌부러진 블랙홀일지도 모른다. 갈 수는 있어도 돌아올 수는
없을지도 모른다."

 오이카와와 보조를 맞추면서 그동안 느끼지 못했던 세상의 일면을 보는 것 같았던, 치사에게는 너무나 평화롭게 느껴졌던 오이카와 슈코의 세계. 하지만 정작 슬로모션의 주인공인 오이카와에게는...

 "그래서, 그래서, 절대로 화를 내지 않기로 했어. 모든 걸 다 천천히 하기로 했어. 걷는 것도, 말하는 것도. 테크노 로봇처럼 되면 안전할거라고 생각했어."

살인죄로 수감중인 아버지의 폭력성을 닮기 싫어 모든 것을 슬로모션으로 하는 오이카와.
오이카와에게 슬로모션은 폭력적인 아버지같이 되지 않기 위한 일종의 자기 방어, 자기 억제의 방법이었다.
그런 그녀를 이상하게 생각하며 비웃었던 친구들과 학교와, 세상과는 달리 그런 오이카와를 온전히 이해해줬던 잇페이, 그리고 그런 두 사람을 지켜보면서 오이카와뿐만 아니라 잇페이까지 이해할 수 있었던 치사.
세 사람이 그려가는 그들의 상흔, 사랑 그리고 치유...그들의 투명하고 수채화같은 청준의 한자락을 엿보면서 나 또한 세 사람을 이해하는 것은 물론이고, 세상에 상처받고 소외당하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있었고, 쉬이 지나치고 잊었던 것들에 대한 소중함을 되새기게 되는 시간이었다.


'엄마는 절대로 아무데도 가지 않는다. 아빠와 나를 두고 떠나지 않는다. 이혼하지 않는다. 미국에 가지 않는다. 어디에도 가지 않는다. 만약 중학생인 내가 연상의 남자를 선택한다면 엄마는 나한테 매달려서라도, 반쯤 죽여서라도 붙잡아둔다. 세상에 흔한 엄마.'
'나는 엄마가 만들어준 오믈렛과 시금치 소테를 먹는다. 당연한 것처럼 먹는다. 흔해빠진 행운을 묵묵히 먹는다. 나
는 꿈속의 꿈속에서도 엄마한테 머림받는 일이 없다. 그리고 그런 것은 지금까지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다. 오빠가 있어도. 오빠는 나를 싫어한 적은 없을까? 흔해빠진 행운을 너무나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여동생을.'

 

치사는 잇페이와 오이카와와 소통하면서 자신이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이고 누렸던 삶에 대해 되돌아보게 된다. 엄마의 사랑, 미처 엿보지 못했던 오빠의 아픔, 오이카와의 상처...

잇페이와 오이카와의 이별은 안타까웠다. 하지만 슬퍼하지는 않기로 했다. 그들을 다시 세상속으로 나오게 했고, 일어서도록 했으니깐...전학간 이후의 오이카와의 소식은 알 수 없지만, 잇페이가 재활을 시작으로 다시 일어서기를 마음먹은 것처럼 오이카와도 이겨내리라 믿는다. 치사가 예전과 같은 평범한 생활을 해가면서도 오이카와를 잊지 않는 것 처럼 오이카와도 잇페이, 치사와 함께 했던 시간들을 통해서 용기를 내고 있을지도 모른다. 세상을 향해 한발을 내 딛기 위해서...

치사, 잇페이, 오이카와 세 사람 모두 세상에 한발 정도를 빼고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각기 다른 세 사람이 서로 소통하고 이해하면서 서로를 상처를 어루만져줌으로써 더 이상은 세상을 회피하지 않고 당당히 맞서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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