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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정
산도르 마라이 지음, 김인순 옮김 / 솔출판사 / 200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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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먼저 줄거리를 보자. 여기 일흔 중반의 남자가 있다. 고독한 노년인 이 남자의 과거는 플라토닉러브에 비견될 친우가 있었고, 다음엔 사랑스런 부인이 있었다. 자신이 행복과 자만에 허우적거릴 즈음 그들은 사랑에 빠졌고, 그를 죽일 계획도 구상했었다. 헨릭을 죽이지 못한 이 친우는 동남아로 도주하고 부인은 팔 년의 세월의 병고 끝에 죽음을 맞는다.

상당히 구태의연한 줄거리이다. 작가가 말하려는 것은 무엇인가. 사십여년만에 돌아온 이 친구와의 담소로 일관되는데 헨릭은 진실을 얘기하려들고있다. 진실을 직시하려는가. 오늘 밤엔 질실만을 얘기하자면서 친우는 진실을 입에 담지 않는다. 예상했던 결과가 아니겠는가. 누가 진실을 직시하며 입에 담는가. 한 손에 잠시 얹힌 물처럼 진실은 자취를 감출것이 아니던가.

진실은 말로 하는게 아니다. 죽은 부인처럼 몸으로 얘기하는거라 작가가 소리친다. 우정어린 친구의 부인을 넘보려는 순간의 열정이었다면 삶은 가치 있는게 아닌가, 작가는 의향을 묻는다. 이 소설이 2001년도에 출판되어서 잠시 의아했는데, 1942년 작이라는것을 뒤늦게 알고 나서 이해가갔다. 요즘 소설이라기엔 다소 고리타분했기때문에 그러하다. 개인의 취향은 다양하면서도 천편일률적일거라 생각된다. 지루하진않으나 과연 심금을 울리는 소설일까. 책을 읽고 난 뒤의 사람들의 마음이란 낭만에만 차 있는가. 도대체 문학비평이란 칭찬만을 거듭하는가, 생각을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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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을 향하여
존 버거 지음, 이윤기 옮김 / 해냄 / 199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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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즈에 걸린 연인을 포기하지 않는 지노에게 주위사람들이 말한다. '지노, 넌 인생을 포기하고 있어.' 지노의 대답은 천연하다. '주위사람들이 나의 니농을 포기하고 있어.' 철도원인 아버지는 모토싸이클을 타고 지노와 딸인 니농의 결혼식장으로 질주하고 있다. 딸이 여왕이라도 된듯 느껴줄 향수를 사들고. 결별한 어머니도 기차를 타고 오는중이다. 과거가 있던 남편, 체코가 국적인 이 여인은 국가를 위해서, 자신이 춥게 걸어왔던 과거를 잊지못해 고국을 가버렸으나 에이즈가 발병한 딸의 결혼식을 보기위해 오고있다.

지노의 아버지는 처음엔 반대하다가 지노의 천성을 이해하고 경쾌하게 결혼을 저질러라한다. 낭만적이다. 세속의 눈으로 이보다 낭만적인 아버지가 또 어딨으랴. 뭐니해도 소설은 낭만이 가미되어야하는것인가. 균형의 문제일테지만 여기의 낭만은 슬픔을 동반하여서 그럴듯해보인다. 슬픔이되 아름다운것으로의 비상은 소설의 미덕중 하나가 아닐까. 소설이되 산문같은 글쓰기. 무거운 병에 걸렸으나 작게 토로하는 니농. 아름다운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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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테르부르크의 대가
존 쿳시 지음, 왕은철 옮김 / 책세상 / 200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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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도르 미하일로비치, 그에 대해서 나같은 무지한 독자는 무엇을 알고있는가. 세상이 그에대해 영혼의 작가라한다. 그렇다면 그런가보다. 그같은 존재는 어느방면에서든 한 사람은 있어야 할 것같다. 나와는 좀 먼 얘기는 아닌가. 비정상적인 삶을 살았더랜다. 의례히 그런 치가 있기마련 아닌가...

어느 날 도스또옙스키의 소설이 보고 싶었다. 왜인지 모르겠다. 그의 글을 잘 납득하지 못하는 나는 험준하고 견고한 산에 둘러쌓여 빠져나갈 궁리를 하는 하나의 미물이랄까. 남아공화국의 쿳시가 나에게 손을 내밀고 있다.

표도르에게 <악령> <까라마조프가의 형제> <미성년>의 모티프를 준 네차예프사건의 네차예프가 나온다. 사사건건 표도르와 논쟁하고 그가 상실한 용기와 행동을 상기시키는 세르게이 네차예프, 문학계의 대가인 도스또옙스키가 작아뵌다.

손으로 만지면 대일듯도 싶은 도스또옙스키. 역시나 자의식이 지나치게 강한 그는 페테르부르크에 왔다. 의붓아들이 죽었으므로. 죽음의 이유가 모호한것을 안것은 온 후이다. 그는 글을 쓰려는 실낱같은 마음을 품고 아들의 죽음을 맞는다. 죽은 아들을 팔아서라도 글은 써야한다. 그것이 장인정신이고 아니고는 중요치않다. 결과운운하는것도 무겁지 않다. 그는 써야하고 쓰고싶다.

라스꼴리니꼬프는 자신은 왜 사람을 미물다루듯하는 나폴레옹과 다른가 고민했었다. 도스또옙스키는 만물을 관장하는 하느님과 누가 더욱 교활한가를 내기하고 있는 것인가.

중요할듯한 문구가 보인다. 우리는 추락하는 순간 가장 강렬히 살아있다. 낙관과 비관은 종이 한 장 차이이다.. 이런 류인가.

작가가 표도르를 평가하고자 쓴 것은 아닐것이다. 정상과 비정상이란 모호함에 있어서도 그러하지만 훗날 그를 평하는 우리들처럼 지켜봐야 할것 아닌가. 무엇보다 그를 직적접인듯 만날수 있어 좋은 기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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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와 원숭이
페터 회 지음 / 까치 / 199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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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때는 소설을 쓰는 사람들의 혼란스러움이 얼마나 무거운 짐이 될까 생각하기도하고, 어떤 때는 그들은 그렇게라도 속내를 들어내고 위안을 받으니 복된 직업을 가졌구나, 생각하기도한다. 읽고난 뒤의 마음에 따라 달리 방향이 정해지는 잡념이지만 글로서 뭔가를 이루려는 진부함이 안스러운 요즘인것은 독자인 나마저도 초라함을 느끼게한다.

여담에 지나지 않지만, 톨스토이의 <안나 까레니나>를 책으로 봤을 때 감흥은 별스럽지는 않았다. 불후의 작품으로 당시의 획기적으로 충격을 주었다고, 전해져 내려오면서 더욱 공고해진 그 작품이 소피마르소가 투입돼 다시 영화화한다는 멋진 포스터를 보았을 때, 10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인 책보다 그 한장의 포스타가 마음을 다시 사로잡았다. 뒤로는 기차가 길게 서 있고, 소피의 아름다운 모습이 클로즈 업되었으며 브론스키역의 배우가 뒷 모습을 한, 안개 낀 정경이었는데, 영상의 힘이란 가공할만한 것임에 틀림없을것이다.

<여자와 원숭이>라는 단순한 제목의 이 소설은 제목만큼 단순치 못하다. 게다가 보통의 원숭이가 아닌 인간보다 더욱 명석한 두뇌를 가진 150킬로의 거대한 원숭이이다. 여주인공과 이 원숭이의 섹스는 역겹지 않아서 좋았다. 짐작하리만큼 인간은 동물보다 낫다고 단언할수 없는 메시지인것이다. 또한 인간이란 편협한 정의-과연 사람의 탈만 썼다고 인간에 포함시킬수 있을것인가-에 대해 숙고할 기회를 새삼가져서 만족스러웠다.

바쁜 도시인들, 그들은 자신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일이 아니면 눈앞에 원숭이가 날아가더라도 무관심하다. 날로 기계가 만물을 지배할것이며 더욱 더 세계는 메말라갈 것이다. 익숙하지만 익숙치 않게 보이려는 작가의 배려 혹은 각도를 달리해서 써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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