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끌림 - 1994-2005 Travel Notes
이병률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5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한 권의 시집을 떠 올린다. 작가의 사진을 보며 음유시인의 분위기를 읽는다. 아니 그는 진정 음유시인이다. 1994년에서 2005년까지 70여 개 국 300여 도시를 떠돌아 다니며 사진을 찍고 시를 쓰는 사람! 길에서 만난 사람들의 소소한이야기, 평범하게 말하면 여행 기록문이다. 그런데 산문보다는 운문에 가까운 독특함이 있다. 알고보니 작가는 신춘문예로 등단한 시인이었다. 어쩐지 다르더라 했지! FM음악프로그램에서 작가의 경력도 가진 사람. 글과 사진에 매료될수록 자꾸 작가에게 빠져든다. 여느 기행문처럼 들뜨거나 시끌벅적하지 않다. 애잔하면서 고요한 독백체로 친근하고 가슴 찡한 구어체로 사람을 잡아끄는 매력이 있다. 그 사람을 잘은 모르지만 한 번쯤 데이트를, 아니 연애를 해보면 어떨가 싶은 사람.........'끌림!'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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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추픽추가 있는 페루, 작가가 그 곳에서 만났다는 옥수수 청년 이야기. '앞으로 낯선 곳으로 여행을 갔을 때 말이 통하지 않을때, 그럴 땐 똑같이 생긴 뭔가를 두 개 산 다음 그 중 하나에 마음을 담아서 건네면 된다. 환하게 웃으면서 그러면 된다. (#33 옥수수 청년) 따로 슬픈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닌 데 작은 감동 하나가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꾸 눈시울을 적시고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작가가 파리의 빈민가에서 살때, 작은 일에도 화를 자주 내던 식료품가게 할아버지가 하루는 신문지랑 잡지를 가득 실은 수레를 끌고 가다가 2층이 무너져 내리는 바람에 압사하고 만다. 그 책들 속에는 작가가 버린 한국 잡지도 보였고 작가는 안타까움에 목이 멘다. 그러니까 잘 살기 위해선 뭔가를 자꾸 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는 교훈과 내가 죽더라도 아무도 목이 메게 하거나 다리에 힘이 풀리게 하면 안 되겠다는 교훈을 얻은 거야. 아랍 가게 할아버지로부터. #29 산더미
글 속에 인용한 티베트 속담도 나는 참 좋다. '내일과 다음 생 중에, 어느 것이 먼저 찾아올 지 우리는 결코 알 수가 없다!' ( #26 내일과 다음 생 가운데) 내일로 또는 다음으로 미루고 있는 어떤 일을 얼른 실천하도록 재촉해 주기 때문이다.
어쩌면 작가는 타국에서 여행 중에 생일을 맞이했는지도 모른다. 엄마표 진수성찬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전혀 초라하지도 않다. 오히려 안분지족의 생일상으로 뿌듯하다. 행복은, 만족은 내 마음먹기에 달려 있는 것이다. 오늘 오랜만에 밥이 먹고 싶어서 쌀파는 곳을 겨우 찾아낸 다음 쌀을 사서 밥을 하고 계란 프라이 두 개를 해서 들고는 가을 잎들이 뚝뚝 떨어져 내리는 공원에 가서 먹었는데 나는 그 정도 행복이면 돼요. 달걀 두 개의 값과 양과 맛을 넘어서지 않는 행복. (#56 생일)
짧은 몇 마디에 섬짓할 정도로 광대한 뜻을 품은 글 귀도 좋다. 시간은 누구의 사정을 봐주지도, 기다려 주지도 않는다. 먼 훗날은 그냥 멀리에 있는 줄만 알았어요. 근데 벌써 여기까지 와버렸잖아요.(#43 먼 훗날) 이래도 다음으로 미룰 것인가!
언젠가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어딘가 먼 곳으로 여행을 갔다가 너무나도 소중하게 생각한 걸 그만, 두고 온 거다. 도저히 포기할 수 없는 건데 과연 나는 찾으러 갈 성격인가, 아닌가 하는 생각.
여러 번 생각해봤는데, 어떤 결론에 이르게 됐느냐 하면 그게 한낱 물건이면 비행기 값도 계산해야 되고, 또 시간적인 것도 계산에 넣어야 되고......, 결국은 물건일 경우, 가지 않을 것 같단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하지만 사람인 경우, 사람 문제인 경우엔 조금 다를 거란 생각. 아니, 조금이 아니라 많이 다를 거란 생각. 소중한 누군가를 그 곳에 두고 왔다든가 내가 좋아하는 누군가가 그 곳에 남아 있다면
언제건 다시 그 곳을 찾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 물론 그 사람을 데려올 수 있을 지 그건 장담 못하겠지만 사람이기 때문에 그 곳까지 날아갈 수 있을 거란 생각. 아마 나만 그런 생각을 하지는 않을 거란 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