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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자의 기억법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가벼운 무게로, 그러나 묵직한 스릴을 던지는 장르의 충실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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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하의 책의 무게는 가볍다. 주말에 침대에 누워 짧은 시간이면 독파해 버릴 수 있는 정도의 얇은 두께이다. 그렇지만 내용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아니하다.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작가의 수수께끼가 펼쳐진 미로에 갇혀 헤매는 후유증에 걸린 느낌이 든다. 그래서인지 책을 덮더라도 머릿속에서 김영하의 이야기가 새로이 펼쳐진다. 활자 하나하나의 의미를 탐미하고자 책장을 새로이 펼 수밖에 없었다. -
‘살인자의 기억법’은 재미로 다섯 손가락 안에 꼽을 만한 소설이다. 화자이자 주인공부터가 흥미롭다. 김영하의 전작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에서 그려낸 주인공의 직업이 자살안내인이었던 것처럼, 작가가 제시한 이번 책에서의 주인공 또한 만만치 않다. 그는 다양한 인간상에 대한 통찰이 있는 것이 틀림이 없다. 이 책에서의 주인공은 30년 동안 꾸준히 살인을 해오다 25년 전에 은퇴한 70세의 연쇄살인범 김병수이다. 올해로 데뷔한 지 19년, 독보적인 스타일로 유명한 작가는 알츠하이머에 걸려 점점 사라지는 기억과 사투를 벌이는 연쇄살인범의 고독한 싸움을 아무렇지 않게 그려낸다. -
지인의 추천으로 우연히 펴게 된 책이었다. 소설은 일정 분량 이상이 아니라면 서사를 제대로 펼칠 수 없다는 고루한 생각에 평소 얇은 소설책을 그리 선호하지 않는 편이라 먼저 생각보다 짧은 분량에 놀랐고, 그 얇은 책이 그려낸 한 편의 스릴러가 이처럼 즐거운 여행이 되어 줄 수 있다는 것에 기대를 뛰어넘는 완독의 여운에 다시 한 번 놀랐다. 정말 좋았던 것은 소설적이지 못할 뻔 했으나 충분히 소설적인 동시에 현실적인 결말이었다. 독자들이 바라던 조우와는 조금 다르지만, 또 다른 그만의 멋으로 우아하게 그려낸 새로운 형태의 반전. 믿고 있었던 것을 손바닥 뒤집듯 손쉽게 파괴하고 유유자적하게 독자들을 바라보며 ‘어때?’라고 묻는 듯한 여유로운 결말. 불완전한 화자의 점점 바닥으로 무너져 내리는 서술, 아슬아슬한 신뢰와 불신의 외줄타기에서 독자들이 믿고 있는 판단을 책 전반에 걸쳐 끊임없이 의심하게 하는 서술. 내용 자체가 살인 등 범죄와 관련된 스릴러임과 동시에, 독자들이 스스로 자신의 판단을 신뢰하지 못하게 한다는 점에서 충분히 수작이라 할 수 있는 스릴러였다. -
살인이라는 극단적인 악을 마음껏 일삼던 주인공에게도 시간과 늙음은 넘을 수 없는 벽이었다. 치매라는 예상치 못한 시간의 강력한 반격 앞에 그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무너진다. "무서운 건 악이 아니오. 시간이지. 아무도 그걸 이길 수가 없거든."이라는 주인공의 외침은 소설의 마지막 장면과 겹치며 깊은 여운을 남긴다. 삶과 죽음, 선과 악, 기억과 시간이라는 철학적 주제 앞에 내가 도대체 지금까지 무엇을 읽었는지 자신에게 되묻게 되는 독자에게 또한 진짜 '치매' 비슷한 느낌마저 갖게 한다. -
문학평론가 권희철의 문장만큼 이 책을 잘 표현하는 언어는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 그를 인용해서 이 책의 기록을 마무리하려고 한다. ‘이것은 정교하게 다듬어진 공포의 기록이다. 누구도 이겨낼 수 없는 인생이 던진 악마적 농담. 두 겹의 악몽 혹은 두 겹의 감옥으로 이루어진, 웃을 수 없는 농담의 공포, 그것이 『살인자의 기억법』이 우리에게 건네는 악의적인 선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