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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인 조르바 니코스 카잔차키스 전집 1
니코스 카잔차키스 지음, 이윤기 옮김 / 열린책들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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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년 전,  어느 보도 한구석에서  탁발하는 두타스님의 머리 위로 한 기독교인이 손을 올리며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외치는 사진을 본 적이 있다.    미친 듯이 회개를 부르짖으며 자신의 맹신을 스님의 머리에 짓이겨대는 한 기독교인의 무례함에 나는 화가 나거나 씁쓸해하기 보다는, 그 상황을 무심히 받아들이는 듯한 스님의 도량에 감동하여  아름다운 모습이라고 내심 흐뭇해하였다.    그러나 후일 두타스님의 인터뷰를 통해 그의 말씀을 듣고, 내가 느꼈던 아름다움의 선명함이 많이 바래져버렸다.    굳이 그 맹신자와의 만남을 전생의 업보를 푸는 과정으로까지 거창하게 설명함으로서, 대소사에 시시비비를 가리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떠올리는 '굴욕'의 이미지가 그때 그 스님의 가슴속에  가득 차 있었음을 시인한 셈이 되었고, 애써 담담했던 그의 표정이란 결국 그의 참담함과 분노를 감추기 위한 방편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또한, 그 무례의 행위를 인연에 따른 전생의 업보로만 제 식대로 간단히 해결해버리는 스님의 종교적 해석에는 타인에 대한 연민이 부족한, 오만함의 기운이 얼핏 감지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자신이 옳다고 신봉하는 종교를 남에게 권하는 것은, 그 정도가 지나치지만 않다면 보통사람들에게도 인지상정으로 받아들여지는 일이다.    하물며 한 종교에 입신하여 엄격하게 구도하는 수행자라면 타 종교인의 광신을 지나친 열정 정도로 배려해주고  타인을 있는 그대로 존중해주는 불교의 참된 자비심이 가슴에 있어야 하지 않을까? 

세상사를 논할 때 우리는 흔히 모순되는 말을 얘기하며 듣고, 또 그때마다 오가는 말에 크게 고개를 끄덕이곤 한다.    인생이 알고보면 사소할 뿐 별거 아니다,에서 끄덕.    한 인생을 끝까지 살아내는 것보다 더 고단한 일이 있을까,에서 끄덕.    물질이란 시시각각 변하는 허상일 뿐 정신의 고양이 우선이다,에서 끄덕.    물질이란, 한 예로 육체란, 존재의 정신을 표현하고 그것에 이음줄을 대는 유일한 도구이므로 소홀히 대할 수 없다,에서 끄덕.    순간의 삶이 중요하다,에서 끄덕.    허망한 삶보다는 굳건한 내세가 더 중요하다,에서 끄덕.    꽃보다 사람이 아름답다,에서 끄덕.    사람이란 알고보면 영화 도그빌의 주민일 따름이다,에서 끄덕.    돈오돈수이다,에서 끄덕.    돈오점수이다,에서 끄덕. 

오랜 세월을 지배해온 서양의 사상 중 고집스럽게 불변하는 것들 중의 하나는, 바로 칼로 자른 듯한 유별난 이분법이다.    주관과 객관, 물질과 정신, 생과 사, 너와 나, 안과 밖을 세심히 분류하고, 전혀 교집합이 없이 동떨어진 안심지역으로 이동시키려는 노력이 오늘날까지도 지치지 않고 이어져 내려온다.    이 유구한 전통에는 하늘과 땅을 절대 맞닿을 수 없게 처음부터 두 동강낸 기독교의 공로가 아주 클 것이다.   끝간데 없이 자유를 갈망하고, 터무니 없는 호기심에 시달리고, 사방을 둘러 싼 장막을 북북 찢어발기고서 뛰쳐나가고 싶어하는 설명 불가능한 모험심 때문에 좌불안석인 인간이 감수해야 할 불행의 가장 큰 몫은 바로 이 이분법에 대한 철저한 복종의식 때문이다. 

아무런 동의 없이 천편일률적으로 배분된 의자에 별 따짐 없이 제몸을 맞추려고만 드는 뭇인간들 사이에서, 몇몇은 까닭 모르는 불편함을 의식하고 그 불편함에서 벗어나보려 애쓴다.    어떤 이는 욱신거리는 등에 쿠션을 대어보기도 하고, 어떤 이는 의자의 높이를 조금 낮춰보려 한다.    어떤 이는 저린 다리를 풀어보려 의자를 엉덩이에 꽁꽁 묶은 채 옹색하게 걸어도 보고,  또 어떤 이는, 아주 드물게도, 의자에서 슬그머니 일어나 맨 바닥에 제 등뼈만으로 꼿꼿이 앉아보려고도 한다.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만난 조르바는 바로 이 의자를 단숨에 박차고 뛰어나온 사람이다.    그는 애초에 주어진 그 의자가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님을 직관으로 알아차렸다.    오랜 굴종의 틀에서 감히 벗어나기를 두려워하는 길들여진 사회적 죄수들 사이에서, 그 만은 거리낌 없이 부조리한 복종을 떨치고 일어났다. 

조르바는 매우 단순하고 소박한 사람이다.    세상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뒤죽박죽 엉킨, 제 몸보다 더 큰 실타래를 붙잡고 평생 한 올 한 올 풀다가 제 풀에 지쳐 쓰러지는 그런 대책없는 사람은 그의 성정과 관계가 멀다.    그의 과거는 그대로 순순히 흘러가고 마는, 회한 없는 과거일 뿐이다.    그의 미래 또한, 미리 생각만으로도  주눅 들고 필요 이상의 각오를 단단히 해 두어야 하는 미지의 두려움이 결코 아니다.    그는 현재 만을 온전히 느끼고, 책임지고, 살아낸다.    거추장스런 과거의 짐이 없기 때문에 그가 보고, 만지고, 흡입하는 모든 것이 처음 느끼는 경건함과 아름다움과 놀라움의 연속이다.    매일 다니는 바닷가의 풍경은 어제의 풍경이 아니어서 경탄의 대상이 되고, 아침에 뜨는 해는 오늘 만의 해이기 때문에 그것 역시 반갑고 아름다운 새로움이다.    마찬가지로 홀가분한 미래의 여백에 그는 미리 선을 긋고 그림을 그려놓으려 하지 않는다.    비어있음을 불편해하고 두려워하는 미성숙한 인간의 속성을 예사롭게 무시하고 넘어섰기에, 그의 몸은 거리낌 없이 가볍고 자유로울 수 있었다. 

조르바는 불이(不二)의 세계에서 사는 사람이다.    '좋은 사람이든 나쁜 놈이든 그것들이 불쌍하고, 태연해야지 하면서도 사람만 보면 가슴이 뭉클해진다'는 그의 말에는 전혀 현학적인 우월성이 없다.    '싸우고 물고 소리치고 바라는 모든 허깨비들에 대한, 살아있는 모든 것들에 대한 부처님의 자비심'이 그의 가슴에는 넘치도록 가득 차 있다.    누가 성지에서 가져왔다고 속인 가짜 십자가 조각일 망정 마음 먹기에 따라 진짜보다 더한 것이 될수도 있다는 대단한 자신감은 그의 유연한 너그러움으로부터 힘을 얻는다.    '조국 같은 게 있는 한 인간은 짐승, 그것도 앞뒤 헤아릴줄 모르는 짐승의 신세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그의 일갈은 편협된 이데올로기와 독선적인 종교, 경도된 애국심이 얼마나 많은 피와 재와 눈물을 만들어냈는지 역사책을 들춰보지 않더라도 많은 이가 수긋이 긍정하는 부분이다.    그리고 그 무의미하고 진저리나도록 잔인한 악순환이 지금껏 얼마나 계속되고 있는지.... 

조르바에게 만물은 곧 하나이기에 늙은 퇴기 부불리나의 쭈굴쭈굴한 젖가슴은 그의 눈을 거쳐 싱싱한 처녀의 수줍음이 되고, 외로운 과부의 한숨소리도 그의 귀에 닿고 나면 만족스런 노랫가락으로 변하고 만다.    그가 정의하는 하느님은 잔뜩 경직되어 있는 그리스정교의 그 하느님이 아니다.   사람의 근심과 고통을 차마 외면하지 못하는 신,  무수한 저마다의 쓸쓸함을 아픔으로 헤아려주고 함께 온몸으로 겪어주는 제우스 적인 신이 바로 그의 하느님이다.    사람들과 부대끼고 깊은 연민으로 그들을 어루만지는 고대의 신이야말로 튼튼하게 짜여진 도덕의 그물을 휙 내던져버릴 수 있고, 그래서 그에게 하느님은 악마와 하나인 것이다. 

카잔차키스에게 왜 그는 그리스인 조르바일까?    짐승의 차원에서 벗어나려고 조국을 내팽개친 그를 잘 알고 있음에도 왜 그는 세계인 조르바, 혹은 자유인 조르바가 아닌, 단순히 그리스인 조르바일까?    조르바의 자유분방함에 그리스인이란 딱지를 굳이 붙여놓은 이유는 무엇일까? 

카잔차키스가 말하는 그리스인은 위축되고 마냥 순종만 하는, 이미 꿈과 이상과 용기를 잃어버린 현시대의 그리스인은 아닐 것이다.    그의 그리스인이란,  당당하고 독립적이고 거침없는 고대의 사람들일 것이다.    맑은 지중해의 푸른 빛처럼 순수한 사유를 즐길줄 알았던 사람들.    창백한 대리석으로 인체의 아름다움과 건축의 정교함을 우아하게 표현해낼줄 알았던 사람들.    짱짱한 돛배 하나에 몸을 싣고 앞으로 앞으로 구호를 거칠게 외칠수 있었던 사람들.    디오니소스와 아폴론이 사이좋게 공존할 수 있었던 세계의 사람들.    하늘에 올라가보려 발돋음하는 구차한 짓을 집어치우고, 직접 하늘의 신들을 땅 위로 불러들여 먹고 마시며 어울려 춤을 출수 있었던 사람들.    삶이 주는 슬픔을 피하지 않고 스스로 감내하며, 때때로 맞춤한 신들에게 위로의 수고를 떠맡도록 눈 부릅 뜨고 요구할 줄도 알았던 사람들.    인간의 서툼과 이기심과 허튼 욕망까지도 감싸고 연민하고 두텁게 사랑했던 사람들. 

결국 카잔차키스가 조우한 그리스인 조르바는 온갖 법칙과 미신, 공포, 회유를 단호히 뿌리쳐버린 참사람으로서의 삶, 그 자체였다.    또한 무거운 머리에 짓눌린 한 현학자의 좁은 가슴을 활짝 열어젖힐수 있게 도움을 준 환한 빛의 눈부심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는 허망과 허상에 긴 끈으로 맞동여매인 자신의 몸뚱이가 자유롭다고만 여기고 한 곳에서 빙빙 돌기만 했던 우스꽝스러운 자칭 철학자의 빈손에 그 줄의 무게를 느끼게 해준 눈 밝은 스승이었을 것이다. 

카잔차키스는 마침내 그를 붙잡은 긴 끈을 풀어냈을까?     아직도 소심하게 꽁꽁 동여 매듭진 끈을 풀기 위해 두 손이 부르트게 고분분투하는 것은 아닐까?     혹여 그렇다면, 옆에 놓여 있는 알렉산더왕의 검을 이제 그만 치켜들었으면 하는, 조르바의  안타까운 바람이 내 눈에 보이는 듯 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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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 1
한승원 지음 / 열림원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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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 벌교에 가면 한광석이 있다.   삼십 년 째 전통염색에 넋이 나간 사람이다.   그가 물들인 쪽빛 모시를 보고 이 시대의 탁월한 시인 김지하와 소설가 조정래조차 마땅한 표현을 찾지 못하고 "아아, 이것을 무어라 해야 좋을까"  가슴을 내리치며 말의 입성을 포기해버렸다.   이 쪽빛을 자연에서 찾아낸 한광석은 '이는 청(靑)도 아니요, 벽(碧)도 아니요, 남(藍)도 아닌 까마득한 색'이란 애매모호한 명칭을 시도한다.     하늘과 같지만 같지 않은 그저 까마득한 색.   한 줄기 느낌을 부여잡고 나는 감히 태허(太虛)라 명명해본다.

태허(一)에 머물러있는(止) 正과 북 치고(鼓) 노래하니 즐겁다는 喜를 이름으로,  추사 김정희는 태어났다.   왕족과 혈의 연이 끊기지 않아서 낯선 이와 인사 때마다 잊지 않고 내뱉는 '월성위궁의 주인'이라는 자부심을 딛고, 그는  당대 석학인 채제공이 부추긴 자신의  천재성을 일찌기 간파하여 그에 상응하는 지독한 탐구의 궤적으로 생을 일관한다.

그는 북학파의 거두인 박제가의 훈도를 귀 활짝 열고 들었다.   북경 사신 행차에 부친 곁을 수행하면서 세상의 광활한 넓이와 깊이를 실감나게 뼛속에 새길 줄도 알았다.   집요하게 파고 또 파서 땅속 깊이 묻힌 원석을 기어이 캐어내고 다시 우러르는 보석으로 세공하여 그것으로 보는 사람의 눈을 부시게 하였다.   그는 의심했고, 경계했다.   주어진 모든 것을 샅샅이 분해하고 추려내어, 그 만의 방식으로 멋스럽게 재활했다.   철저한 고증으로 자신의 집터를 닦고, 짱짱한 범규로 기둥을 세우고, 잡다한 유행을 가리는 지붕을 덮고, 도도한 미학으로 벽을 장식했다.

빈틈없이 갑갑한 방 안에서 그는 오히려 바깥세상을 갑갑해하여, 한껏 비웃어주며 살았다.   윤택하고 분명한 그의 글씨와 엄격하면서도 호사스러운 진한 난의 향기에 취해, 한 겹 창호지 너머의 창밖으로 손조차 내밀려들지 않았다.   뼈를 저리는 북풍한설은 운치있는 풍경화에 불과했고, 사람의 텁텁한 살냄새마저 진한 묵향에 눌리고 가리워졌다.   그의 법도는 치밀하게 날이 섰고, 그 날 선 법도 안에서 그는 스스럼없이 당당했다.

불행이자 다행인 제주도 유배생활이 없었다면 그는 그저 글씨 잘 쓰는 사람, 경학에 밝은 사람으로 역사 속에 끄적끄적 흔적으로 밖에 남지 못했을 것이다.   구 년 동안의 외로움과 억울함, 오롯이 실재하는 육체적, 정신적인 고통, 언제 닥칠지 모르는 죽음에 대한 공포는 그토록 고고했던 그의 법도를 해체시켰고, 텅 빈 세상을 그대로 직시할 수 있는 혜안을 주었다.

이제 그의 글씨는 미술평론가 유흥준의 표현처럼 불필요한 기름기를 쫙 빼어 개성적인 기의 압축으로 종이에 새기듯 강단지다.   화려함에서 탈피한 그의 난은 모든 껍데기를 벗어던진 채, 무뚝뚝하고 퉁명스럽다.   여전히 강직하지만 그러나 교만하지 않은 품성으로 허공을 치달려 두터운 땅의 집착에서 벗어나려 한다.

'세한도'에 존재하는 그의 집은 반듯하고 각진 네모 집이 아니다.  바람이 통과하는 헐렁하고 빈틈 많은 집이다.   그 집은 그가 언제고 세상을 버린 후에 들어갈 안식처로서의 설계도였을 것이다.   그 의미심장한 동그라미의 출입문을 지친 몸뚱이가 지나갈 수 있도록 그가 여생을 비우고 다시 비우는 연습으로 일관했을 것이라, 나는 생각한다.

한동안 잊고 살았던 추사의 모습을 새삼 되돌리게 해준 것은 한승원의 소설이다.   이 소설은 영특한 추사의 어린시절부터 기고만장했던 젊은 시절의 패기와 늘그막의 시난고난한 일정까지 장중하고 깊이있게 그려놓았다.

해붕스님과의 설전에서 무례하도록 따지고 들이대는 젊은 추사의 모습이 잡티 없는 순수로 다가왔고, 그 추사의 옷매듭을 지그시 바라보며 작은 옷매듭 속에 묶여있는 조선 유학자들의 삶을 속으로 웃어주는 해붕스님을 따라 나도 배시시 웃었다.   안하무인인 양 시비하는 추사의 기세를 '반딧불로 수미산을 태우려고 덤벼드는 천둥벌거숭이'쯤으로 취급해버리는 벽파스님의 느긋한 너털웃음이 귓가에 들리는 듯 하여 나도 모르게 피식피식 웃음이 새어나왔다.   심지어 풀죽은 유배길에서조차 추사가 다녀간 흔적은 남겨야 한다며 대둔사 대웅전의 현판을 기어이 제 글씨로 바꾸어 단 그 서슬퍼런 자존감에 일순 경외심마저 느끼게 됐다.   하나의 세계를 토해내듯 형상화한 불이선란의 탄생을 지켜보며 추사의 가슴처럼 내 가슴까지 두근거렸다.

추사와 초의와의 우정은 쓸쓸한 사람에게 마땅한 시샘거리이다.   탐색의 시간을 훌쩍 건너뛰어 첫눈빛 하나만으로 서로를'내 멋진 벗'으로 분류해버리는 그들의 고수적인 교류가 부럽다.   우악스런 수인사가 혈관을 뚫고 피를 나눈 것이었고, 그 피가 어렵고 못날수록 서로에게 더욱 진하게 흐르는 것이 또한 부럽다.   가장 사랑하는 여인의 맨살과 가슴에까지라도 함께 나누면서 얼싸안고 춤을 추고 싶은 벗의 존재가 과연 범인에게는 가능한 것일까?

변덕스러운 차 맛에 '고소함과 배릿함'이란 언어의 테두리를 둘러 주었다.   소설가 한승원 덕분이다.   글씨와 그림으로만 추측했던 뼈대 뿐인 추사의 형상을 이 노작가는 피가 돌고, 살이 붙고, 마마자국 선명한 콧김나는 사람의 모습으로 우리 곁에 서게 해주었다.   푹신한 비단신을 미련없이 벗어던지고 거친 돌박길을 끙끙 기어오르는 추사의 고집이 짐짓 외면하고 싶어질 정도로 처연하고 숭고하다.   쓰리고 피흘리는 발바닥을 아프게 쥐어싸며 힘겹게 오르는 그 길이 결국은 그가 그토록 염원하던 해탈의 길임을, 그리하여 홀로 오른 산 정상에 서서 내려다보는 꾸물꾸물한 만물의 세계가 한치 가감없는 허무의 그림자임을.....수굿이 감내하는 추사의 뒷모습이 손에 잡힐 듯 아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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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의자 X의 헌신 - 제134회 나오키상 수상작 탐정 갈릴레오 시리즈 3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억관 옮김 / 현대문학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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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남자가 있다.   그는 고등학교 수학 선생이다.   그리고 수학을 사랑한다.   그에게 있어서 수학이라는 것은, 목숨을 잇기 위해서라면 누구나 감수해야 할 부잡스럽고 천박한 일상의 흐름을, 그 뻔한 통속성을 견디기 위한 힘을 주었다.   또, 하찮은 감정의 기복에 들쑥날쑥하는 대다수의 생을 무시해도 좋을 확고한 의미를 부여했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종이와 연필, 그리고 방해받지 않는 시간뿐이다.   그는 살아 숨쉬는 수를 호흡하고, 수를 어루만지며, 수를 빛으로 치장한다.   그의 존재 의미는 곧 수학이다.

그러나 수학에 대한 그의 사랑이 한결같은 것은 아니었다.   백년에 한번 나올까말까 한다는 수학의 천재란 소리를 명함처럼 달고 다니던 그와 수학과의 사랑은 이내 조금씩 비틀어지기 시작했다.   부모를 보살펴야 한다는 윤리적 입장을 앞세우느라 수학을 등뒤로 밀어두었고, 호구지책을 마련한다는 핑계로 수학자로서 입신할 생각을 버렸다.  

 증명의 아름다움이 무언지도 모른 채, 뜻도 모르는 숫자의 나열만을 무작정 머릿속에 쑤셔넣으려는 학생들을 가르치며 그는 자신의 삶이 점점 초라해져 간다고 느꼈다.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하고 평가받을 기회도 얻지 못하며, 수학 자체가 아니라 수학이라는 세계의 입구가 어디 있는지 알려고도 들지않는 학생들과 소모적인 반복을 일삼으며, 그는 지쳐버렸다.   그의 유일한 즐거움이자 삶의 빛인 수학이 자신과 영 상관없는 길을 간다고 느끼자, 그는 삶이 짐스러워졌고 그만 놓아버리고 싶었다. 

목을 매달 준비를 끝내고 후련하게 받침대에 오르는 그 순간, 우연히 한 모녀가 찾아왔다.   단지 이웃이라는 것 뿐 아무 인연도 없는 그녀들을 처음 보자마자, 그는 다시 살아보고자 하는 강렬한 욕망이 일었다.   그때까지 어떠한 모습에서도 아름다움을 발견하지 못했고 감동한 적도 없던 그에게 그 모녀는 숭고한 미 자체였다.   기적처럼 행복감이 밀려들었다.  

물론 그는 그 모녀와 어떤 관계도, 의도도, 구체적인 인연도 원하지 않았다.   그저 손대지 않고 바라보는 것 만으로도 행복한, 아름다운 대상이었다.   그는 깨달았다.   그녀들이 곧 잃어버린 수학이라는 것을.   아무 것이 안 보여도, 아무 소리가 안 들려도, 심지어 손발이 꽁꽁 묶여있다 할지라도 그 어떤 힘도 건드릴 수 없는 것.   그의 머릿속에 다소곳이 자리잡으며 무한으로 펼쳐져 있는 수학의 광맥.   누구에게 인정받을 필요도 없고, 평가 받기에는 그 자체로서 너무나 순수한 수학이 항상 그를 쳐다보고 있었던 것을 그는 여지껏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살인이 일어났다.   그 모녀가 저지른 우발적인 살인이었다.   그는 서슴없이 그녀들을 돕기로 한다.   그는 모녀의 죄를 은폐하기 위하여 맹목적이다.   통상적인 선악의 구별이나 윤리적 인과관계 쯤이야 그에게는 사소하다.   그가 지키고자 하는 모녀의 행복한 생활은 그런 윤리의 잣대와는 무관하게 신성 불가침이다.   어떠한 세속의 얼룩으로도 감히 범하지 못할 순수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그는 수학의 도움을 받아 그 수학의 형상인 모녀를 구하려 애쓴다.   섬세하고 치밀한 사고력으로 그는 살인 은폐의 방정식을 짠다.   모순 덩어리의 이미 주어진 방정식을 아무도 그 모순을 발견할 수 없도록 그는 교묘하게 다듬고, 완벽하게 재구성하여 드디어 세상에 내어놓는다.

과연 그 방정식은 성공할 수 있을까?   천재 수학자의 치밀한 완전범죄의 방정식, 그리고 그의 수식을 풀기 위해 고분분투하는 옛 친구이자 역시 천재인 한 물리학자, 게다가 아무리 너그럽게 보아도 역시 미련하달 수 밖에 없는 경찰들.   자, 우리도 한 번 이 방정식 풀이에 참여해 봄이 어떨까?   소위 고등학교식 방정식 풀이만으로도 미리 경기부터 일으키고 보는 독자가 있다면, 걱정 마시라!   그냥 책장을 훌렁훌렁 넘기기만 해도 계산은 끝난다.   게다가 그 풀이가 아주 미묘하고, 재미있다.   덤으로 가슴 저리도록 아름답기까지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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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방 - 우리 시대 대표 작가 6인의 책과 서재 이야기
박래부 지음, 안희원 그림, 박신우 사진 / 서해문집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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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시력은 좋은 편이 아니다.   두 쪽 중에 왼쪽은 없다 치부하는게 낫고, 다행히 오른쪽은 '나 눈이다' 하고 제 구실을 곧잘 하는 편이다.    심한 좌우 시력의 편차 때문에 안경을 쓰는 것이 내 앞길의 선명도에 보탬이 될 터인데, 나는 평소에 안경을 쓰지 않는다.   아주 중요한 일, 집중해야 할 경우 또는 보고싶은 것을 빤히 쳐다볼 때에만 무슨 의식처럼 안경을 찾는다.    길거리에서 아는 사람들이 보고도 모른척 한다고 나를 꾸짖지만, 굳이 안경까지 쓰고 아는 사람들을 구별하여 아는 척 해가며 발걸음을 멈추고 싶지 않다.    잡다한 것을 다 상관하고 똑바로 보아야만 직성이 풀리는 성질이 아닌데다, 워낙 부족한 내 두뇌의 용량을 아는지라, 가뜩이나 좁은곳에 별 하찮은 것들을 마구잡이로 담아넣고 싶지 않다는 나름대로의 삶의 지혜이기 때문이다.   또, 열번 보아도 다시 보면 까무룩하여 새삼스럽게 누구더라? 어디더라? 하는 얼굴기억능력의 저조함과 방향감각상실증, 타고난 무관심 때문에 쓰나 안쓰나 매한가지인 안경의 필요성을 못느껴서이기도 하다.       

   

책상과 운전대를 떠나면 즉시 벗어버리는 안경이 꼭 필요할 때가 있다.     그것은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볼 때와 그와 연관된 것을 살필 때이다.    나는 내 좋은 사람을 포착하면 기필코 그의 주거지를 방문하고야 만다.    현관문을  들어서자마자 어색해하는 그를 밀쳐내고 나는 천장에서 침대밑 바닥까지,  창문을 통과하는 햇살의 양까지 꼼꼼하게, 낱낱이, 그를 연구한다.    콧등에 안경을 처억, 걸쳐놓고.      왜?     그를 알고 싶으니까.     그를 이해하고 싶으니까.

    

늦은 저녁에 뭐 없나 하고 슬슬 인터넷 서점을 뒤져보다가 내 눈에 번쩍 뜨인 것은, 와! 작가의 서재탐방이다!     일찌기 각종 작가에 대한 각종 평전과 분석은 무슨 공식처럼 나열해 있으면서도, 정작 그다음으로 내가 고대하던 그들의 실생활터의 단계에서는 탐구는 커녕 변변한 구경조차 하기 힘들었던 차에, 다짜고짜 그들의 서재 방문이라니.    내 눈이 번쩍 뜨일수 밖에.    더군다나 전부 279페이지에 여섯 작가가 들어 있으니까 저자의 말 같은 페이지 빼고도 대략 한 작가당 40페이지가 넘으니, 그럭저럭 좋은 서재구경은 될 성 싶었다.

   

흥분한 마음에 미리 이틀동안 안경을 쓴 채로 기다리고 기다려서 받고보니, 하얀 거죽에 그림으로 그린 책장들과  그 속을 빼곡하게 채운 책과 파일들이 보기에 흐뭇했다.    부제목이 '우리 시대 대표 작가 6인의 책과 서재이야기'다    물론 내가  좋아하는 작가는 그중 2명 뿐이었지만, 어떤 연유에서든지 우리 시대의 한국대표 작가들중의 몇명임에는 틀림이 없고, 다른것도 아닌 그들의 책과 서재 이야기라........하하하.

    

처음 나온 이문열의 방을 보고 내 고개가 갸우뚱, 했다.    사다리를 걸칠 정도로 높게 쌓아올린 책장과 책들을 포착한 첫머리 사진은 좋았는데, 그 다음은 멀끔한 집 외관 사진, 그 다음은 이미 보여준 사진 그대로 그린 알록달록한 그림 한 장이 한 페이지 전체를 차지하고(도대체 왜?), 내가 보고싶었던 책제목이 뚜렷이 보이는 책장 사진은 겨우 두 단 짜리로 밑구석에 조그맣게, 끝나고 만다.    큰 사전 몇 개 진열된, 미리 정리되어버린 썰렁한 책상 하나가 나오더니, 뜬금없이 잔디밭에 잘생긴 소나무가 떠억 버티고 서서 또 한 페이지.     저자의 서재 묘사라는게 이렇다,  '옆방은 역사와 철학, 20세기 관련 서적들로 채워져 있었다.  그의 해박한 고전지식은 독자를 풍부한 인문교양에 빠져들게 한다'        아, 내가 보고 싶은 것은 그 옆방에 무슨 역사책이, 무슨 철학책이 채워져 있는지, 지금 그가 일하고 있는 책상 위는 어떻게 되어 있는지, 그 사진을, 그 목록을, 그 묘사를 원하는 것이지, 이미 다 아는 작가의 경력 해설이나 생뚱맞은 전원주택 잡지식의 집구경이 아니란 말이오, 박래부씨!

    

실망을 간신히 누르고 다음 김영하의 방을 들렀는데, 허참!  내 고개는 심하게 기울어져 버렸다.    뭐 서재도 아니고, 어두운 것 빼고는 한없이 평범한 대학 연구실과 한없이 평범한 책장과 책들, 한없이 평범한 신변잡기식의 사진과 대화들.     어찌나 평범하든지 구석에 놓인  먼지털이까지 천연색 그림으로 한 페이지를 너끈히 장식해 버리더라.     이 방에서 얻은 것이라곤 '서울 6백년사' 라는 책의 정보뿐이었는데, 얄궂게도 이 책마저 품절이라서 주문 불가능이라나.

그외 강은교, 김용택, 공지영, 신경숙의 방들도 거의 체념식으로 둘러봤는데, 별 번쩍임이 없었다.   그중 김용택의 방은 좀 나아보였는데 그것도 저자의 구성이 좋다기 보다는, 김용택의 삶과 그의 주거지가 탁월하게 아름답고 서정적이어서일 것이다.

     

방문 허락이 될리 없는 그들의 방을 손가락 물고 궁금해 하기 보다 저자의 애매모호한 개인적 느낌의 말을 가려 읽으며 몇장이나마 사진으로라도 흘끗거리기는 했으니 그런대로 아주 나쁘지는 않다.   적어도 신경숙의 더듬거리는 말투가, 공지영의 당돌한 태도가, 김용택의 푸근한 가슴이 어디에서 태어난 것인지 사실적 확인은 가능했으니까.     다만, 어머니의 자궁처럼 깊고, 어둡다못해 푸르른 막막한 공간에서 솟아오르는 생명의 치열함을 그 탄생의 에너지를 어느 방에서도 나는 찾을 수가 없었으니, 이는 결코 박래부의 잘못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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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든
헨리 데이빗 소로우 지음, 강승영 옮김 / 이레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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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시절, 나는 별 이상한 곳을 되는대로 기웃거리며 살았다. '생의 모든 형태를 부러워하여, 다른 사람이 하는 것을 보면 무엇이나 그것을 하고 싶었던, 이룩해 놓았으면 싶었던 것이 아니라 그것을 해보고 싶었던' 앙드레 지드의 '네 갈래 길 위의 개방된 주막'과도 같은 넋을 타고 난 사람 같았다. 정작 내 전공인 '순수수학'과는 무관하게 프랑스사, 영미문학연구, 중세철학, 현대물리학같은 엉뚱한 과목을 이수하기 일쑤였고, 급기야는 미대 속으로 기어들어가 '건축과 인테리어'까지 듣고 말았다.

주어진 15평으로 '제집짓기'(설계도와 축소 형태의 모형만으로)를 하였는데, 그 새 또 한눈 파느라 학기말을 훌쩍 넘겨서야 교수님께 넘긴 내 집의 모형은 그냥 투박한, 울퉁불퉁한 통나무 집이었다. 더 이상 줄일 것도 없이 엄격하게 가난한 기본 생활가구와 사방 벽을 도배해 놓은 듯한 책 선반들. 결국 그것은 월든 호숫가에 있는 소로우의 집과 내가 도저히 버릴 수 없는취미(책 쌓아놓기), 그리고 이상적인 나의 미래상을 골고루 섞어 놓은 나름대로의 진지한 작품이었다. 소로우를 읽은 적이 없는(확실하다!) 교수님이 내게 던져준 것은 C-.

모든 시대의 인테리어 업계와는 도무지 상극인 소로우가 월든 호숫가에 집을 지은 것은 그의 나이 28세인 1845년 이었다. 그는 고작 28달러 12 1/2센트를 들여 호숫가 숲속에 그의 통나무집을 지었고, 그 '안락한' 집에 칩거하며 꼬박 2년을 보냈다. 그는 '인간생활의 공정하고도 현명한 관찰자'가 되기 위하여 '자발적인 빈곤'을 택함으로서, '새로운 유행에 따라 요리가 되고 있는' '버릇없고 무식하고 천박한 삶'을 거부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보여 주었다. 그의 숲속 생활은 '인생을 깊고 강인하게' 살기를, '본질적인 사실들만을 직면'함으로서 '인생을 의도적으로 살아보기'를 원하는, 그의 생활철학의 실험이었다.

어엿한 제집을 소유하였음으로 그는 집세 걱정이 없었고, 의복의 본질을 잘 파악하였음으로 옷을 새로 마련할 필요가 없었으며, '경험의 결과가 아니라 일종의 본능'인 육식에 대한 거부감과 극히 간소한 음식에의 기호때문에 작은 콩밭을 슬렁슬렁 일구어 소출한 것으로도 식비 충당이 가능하였다. 자신으로서는 만족스러운 의식주의 해결때문에 거친 노동을 하지 않아도 좋았고, '사람의 가치는 피부에 있는 것이 아니므로 어떤 사람의 피부를 만져본다고 그의 가치를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알기에 외로움 때문에 일부러 사람을 찿아 나서지도 않았다.

그는 그의 인생에 '넓은 여백'을 마련하여 '발돋음하고 서듯이'하는 독서를 즐기고, 야생동물들과 교감하며, 근처 숲과 호수를 탐색하면서 벌거벗은 자연을 한 편의 아름다운 서정시로도 만들어 놓았다. 비록 그가 2년의 짧은 세월을 뒤로 한 채 사람 사는 마을로 돌아갔지만, 15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빈집은 또 다른 소로우를 기다리고 있다.

왜 뛰는 지도 모르고 헉헉거리며 열심히 달리기만 하는 당신, 제발 멈춰 서서 숨을 고르라. 그리고 소로우에게 길을 물어 그 빈집을 찿으라. 그 집은 당신이 미리 겁을 먹을 만큼 초라하지도, 전혀 허술하지도 않다. 또 '산 넘고 물 건너' 한참을 가야할 만큼 가는 길이 멀지도, 팍팍하지도 않다.

앞사람 발꿈치에만 눈을 박은 채 정신없이 달려가다 넘어지고야 마는 인생보다는, 오롯한 내 집 앞에 뒷짐지고 당당히 서서 무심하게 뜨고 지는 해를 바라보며 그 햇살에 젖어보는 것이, 그리고 그 햇살의 눈부심 너머에 있는 넉넉한 우주의 존재를 두 팔 벌려 맘껏 껴안아보는 것이, 진정 내 숨소리를 쿵쿵,느끼며 산다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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