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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인 조르바 ㅣ 니코스 카잔차키스 전집 1
니코스 카잔차키스 지음, 이윤기 옮김 / 열린책들 / 2008년 4월
평점 :
몇년 전, 어느 보도 한구석에서 탁발하는 두타스님의 머리 위로 한 기독교인이 손을 올리며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외치는 사진을 본 적이 있다. 미친 듯이 회개를 부르짖으며 자신의 맹신을 스님의 머리에 짓이겨대는 한 기독교인의 무례함에 나는 화가 나거나 씁쓸해하기 보다는, 그 상황을 무심히 받아들이는 듯한 스님의 도량에 감동하여 아름다운 모습이라고 내심 흐뭇해하였다. 그러나 후일 두타스님의 인터뷰를 통해 그의 말씀을 듣고, 내가 느꼈던 아름다움의 선명함이 많이 바래져버렸다. 굳이 그 맹신자와의 만남을 전생의 업보를 푸는 과정으로까지 거창하게 설명함으로서, 대소사에 시시비비를 가리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떠올리는 '굴욕'의 이미지가 그때 그 스님의 가슴속에 가득 차 있었음을 시인한 셈이 되었고, 애써 담담했던 그의 표정이란 결국 그의 참담함과 분노를 감추기 위한 방편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또한, 그 무례의 행위를 인연에 따른 전생의 업보로만 제 식대로 간단히 해결해버리는 스님의 종교적 해석에는 타인에 대한 연민이 부족한, 오만함의 기운이 얼핏 감지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자신이 옳다고 신봉하는 종교를 남에게 권하는 것은, 그 정도가 지나치지만 않다면 보통사람들에게도 인지상정으로 받아들여지는 일이다. 하물며 한 종교에 입신하여 엄격하게 구도하는 수행자라면 타 종교인의 광신을 지나친 열정 정도로 배려해주고 타인을 있는 그대로 존중해주는 불교의 참된 자비심이 가슴에 있어야 하지 않을까?
세상사를 논할 때 우리는 흔히 모순되는 말을 얘기하며 듣고, 또 그때마다 오가는 말에 크게 고개를 끄덕이곤 한다. 인생이 알고보면 사소할 뿐 별거 아니다,에서 끄덕. 한 인생을 끝까지 살아내는 것보다 더 고단한 일이 있을까,에서 끄덕. 물질이란 시시각각 변하는 허상일 뿐 정신의 고양이 우선이다,에서 끄덕. 물질이란, 한 예로 육체란, 존재의 정신을 표현하고 그것에 이음줄을 대는 유일한 도구이므로 소홀히 대할 수 없다,에서 끄덕. 순간의 삶이 중요하다,에서 끄덕. 허망한 삶보다는 굳건한 내세가 더 중요하다,에서 끄덕. 꽃보다 사람이 아름답다,에서 끄덕. 사람이란 알고보면 영화 도그빌의 주민일 따름이다,에서 끄덕. 돈오돈수이다,에서 끄덕. 돈오점수이다,에서 끄덕.
오랜 세월을 지배해온 서양의 사상 중 고집스럽게 불변하는 것들 중의 하나는, 바로 칼로 자른 듯한 유별난 이분법이다. 주관과 객관, 물질과 정신, 생과 사, 너와 나, 안과 밖을 세심히 분류하고, 전혀 교집합이 없이 동떨어진 안심지역으로 이동시키려는 노력이 오늘날까지도 지치지 않고 이어져 내려온다. 이 유구한 전통에는 하늘과 땅을 절대 맞닿을 수 없게 처음부터 두 동강낸 기독교의 공로가 아주 클 것이다. 끝간데 없이 자유를 갈망하고, 터무니 없는 호기심에 시달리고, 사방을 둘러 싼 장막을 북북 찢어발기고서 뛰쳐나가고 싶어하는 설명 불가능한 모험심 때문에 좌불안석인 인간이 감수해야 할 불행의 가장 큰 몫은 바로 이 이분법에 대한 철저한 복종의식 때문이다.
아무런 동의 없이 천편일률적으로 배분된 의자에 별 따짐 없이 제몸을 맞추려고만 드는 뭇인간들 사이에서, 몇몇은 까닭 모르는 불편함을 의식하고 그 불편함에서 벗어나보려 애쓴다. 어떤 이는 욱신거리는 등에 쿠션을 대어보기도 하고, 어떤 이는 의자의 높이를 조금 낮춰보려 한다. 어떤 이는 저린 다리를 풀어보려 의자를 엉덩이에 꽁꽁 묶은 채 옹색하게 걸어도 보고, 또 어떤 이는, 아주 드물게도, 의자에서 슬그머니 일어나 맨 바닥에 제 등뼈만으로 꼿꼿이 앉아보려고도 한다.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만난 조르바는 바로 이 의자를 단숨에 박차고 뛰어나온 사람이다. 그는 애초에 주어진 그 의자가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님을 직관으로 알아차렸다. 오랜 굴종의 틀에서 감히 벗어나기를 두려워하는 길들여진 사회적 죄수들 사이에서, 그 만은 거리낌 없이 부조리한 복종을 떨치고 일어났다.
조르바는 매우 단순하고 소박한 사람이다. 세상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뒤죽박죽 엉킨, 제 몸보다 더 큰 실타래를 붙잡고 평생 한 올 한 올 풀다가 제 풀에 지쳐 쓰러지는 그런 대책없는 사람은 그의 성정과 관계가 멀다. 그의 과거는 그대로 순순히 흘러가고 마는, 회한 없는 과거일 뿐이다. 그의 미래 또한, 미리 생각만으로도 주눅 들고 필요 이상의 각오를 단단히 해 두어야 하는 미지의 두려움이 결코 아니다. 그는 현재 만을 온전히 느끼고, 책임지고, 살아낸다. 거추장스런 과거의 짐이 없기 때문에 그가 보고, 만지고, 흡입하는 모든 것이 처음 느끼는 경건함과 아름다움과 놀라움의 연속이다. 매일 다니는 바닷가의 풍경은 어제의 풍경이 아니어서 경탄의 대상이 되고, 아침에 뜨는 해는 오늘 만의 해이기 때문에 그것 역시 반갑고 아름다운 새로움이다. 마찬가지로 홀가분한 미래의 여백에 그는 미리 선을 긋고 그림을 그려놓으려 하지 않는다. 비어있음을 불편해하고 두려워하는 미성숙한 인간의 속성을 예사롭게 무시하고 넘어섰기에, 그의 몸은 거리낌 없이 가볍고 자유로울 수 있었다.
조르바는 불이(不二)의 세계에서 사는 사람이다. '좋은 사람이든 나쁜 놈이든 그것들이 불쌍하고, 태연해야지 하면서도 사람만 보면 가슴이 뭉클해진다'는 그의 말에는 전혀 현학적인 우월성이 없다. '싸우고 물고 소리치고 바라는 모든 허깨비들에 대한, 살아있는 모든 것들에 대한 부처님의 자비심'이 그의 가슴에는 넘치도록 가득 차 있다. 누가 성지에서 가져왔다고 속인 가짜 십자가 조각일 망정 마음 먹기에 따라 진짜보다 더한 것이 될수도 있다는 대단한 자신감은 그의 유연한 너그러움으로부터 힘을 얻는다. '조국 같은 게 있는 한 인간은 짐승, 그것도 앞뒤 헤아릴줄 모르는 짐승의 신세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그의 일갈은 편협된 이데올로기와 독선적인 종교, 경도된 애국심이 얼마나 많은 피와 재와 눈물을 만들어냈는지 역사책을 들춰보지 않더라도 많은 이가 수긋이 긍정하는 부분이다. 그리고 그 무의미하고 진저리나도록 잔인한 악순환이 지금껏 얼마나 계속되고 있는지....
조르바에게 만물은 곧 하나이기에 늙은 퇴기 부불리나의 쭈굴쭈굴한 젖가슴은 그의 눈을 거쳐 싱싱한 처녀의 수줍음이 되고, 외로운 과부의 한숨소리도 그의 귀에 닿고 나면 만족스런 노랫가락으로 변하고 만다. 그가 정의하는 하느님은 잔뜩 경직되어 있는 그리스정교의 그 하느님이 아니다. 사람의 근심과 고통을 차마 외면하지 못하는 신, 무수한 저마다의 쓸쓸함을 아픔으로 헤아려주고 함께 온몸으로 겪어주는 제우스 적인 신이 바로 그의 하느님이다. 사람들과 부대끼고 깊은 연민으로 그들을 어루만지는 고대의 신이야말로 튼튼하게 짜여진 도덕의 그물을 휙 내던져버릴 수 있고, 그래서 그에게 하느님은 악마와 하나인 것이다.
카잔차키스에게 왜 그는 그리스인 조르바일까? 짐승의 차원에서 벗어나려고 조국을 내팽개친 그를 잘 알고 있음에도 왜 그는 세계인 조르바, 혹은 자유인 조르바가 아닌, 단순히 그리스인 조르바일까? 조르바의 자유분방함에 그리스인이란 딱지를 굳이 붙여놓은 이유는 무엇일까?
카잔차키스가 말하는 그리스인은 위축되고 마냥 순종만 하는, 이미 꿈과 이상과 용기를 잃어버린 현시대의 그리스인은 아닐 것이다. 그의 그리스인이란, 당당하고 독립적이고 거침없는 고대의 사람들일 것이다. 맑은 지중해의 푸른 빛처럼 순수한 사유를 즐길줄 알았던 사람들. 창백한 대리석으로 인체의 아름다움과 건축의 정교함을 우아하게 표현해낼줄 알았던 사람들. 짱짱한 돛배 하나에 몸을 싣고 앞으로 앞으로 구호를 거칠게 외칠수 있었던 사람들. 디오니소스와 아폴론이 사이좋게 공존할 수 있었던 세계의 사람들. 하늘에 올라가보려 발돋음하는 구차한 짓을 집어치우고, 직접 하늘의 신들을 땅 위로 불러들여 먹고 마시며 어울려 춤을 출수 있었던 사람들. 삶이 주는 슬픔을 피하지 않고 스스로 감내하며, 때때로 맞춤한 신들에게 위로의 수고를 떠맡도록 눈 부릅 뜨고 요구할 줄도 알았던 사람들. 인간의 서툼과 이기심과 허튼 욕망까지도 감싸고 연민하고 두텁게 사랑했던 사람들.
결국 카잔차키스가 조우한 그리스인 조르바는 온갖 법칙과 미신, 공포, 회유를 단호히 뿌리쳐버린 참사람으로서의 삶, 그 자체였다. 또한 무거운 머리에 짓눌린 한 현학자의 좁은 가슴을 활짝 열어젖힐수 있게 도움을 준 환한 빛의 눈부심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는 허망과 허상에 긴 끈으로 맞동여매인 자신의 몸뚱이가 자유롭다고만 여기고 한 곳에서 빙빙 돌기만 했던 우스꽝스러운 자칭 철학자의 빈손에 그 줄의 무게를 느끼게 해준 눈 밝은 스승이었을 것이다.
카잔차키스는 마침내 그를 붙잡은 긴 끈을 풀어냈을까? 아직도 소심하게 꽁꽁 동여 매듭진 끈을 풀기 위해 두 손이 부르트게 고분분투하는 것은 아닐까? 혹여 그렇다면, 옆에 놓여 있는 알렉산더왕의 검을 이제 그만 치켜들었으면 하는, 조르바의 안타까운 바람이 내 눈에 보이는 듯 선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