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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든
헨리 데이빗 소로우 지음, 강승영 옮김 / 이레 / 2004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대학시절, 나는 별 이상한 곳을 되는대로 기웃거리며 살았다. '생의 모든 형태를 부러워하여, 다른 사람이 하는 것을 보면 무엇이나 그것을 하고 싶었던, 이룩해 놓았으면 싶었던 것이 아니라 그것을 해보고 싶었던' 앙드레 지드의 '네 갈래 길 위의 개방된 주막'과도 같은 넋을 타고 난 사람 같았다. 정작 내 전공인 '순수수학'과는 무관하게 프랑스사, 영미문학연구, 중세철학, 현대물리학같은 엉뚱한 과목을 이수하기 일쑤였고, 급기야는 미대 속으로 기어들어가 '건축과 인테리어'까지 듣고 말았다.
주어진 15평으로 '제집짓기'(설계도와 축소 형태의 모형만으로)를 하였는데, 그 새 또 한눈 파느라 학기말을 훌쩍 넘겨서야 교수님께 넘긴 내 집의 모형은 그냥 투박한, 울퉁불퉁한 통나무 집이었다. 더 이상 줄일 것도 없이 엄격하게 가난한 기본 생활가구와 사방 벽을 도배해 놓은 듯한 책 선반들. 결국 그것은 월든 호숫가에 있는 소로우의 집과 내가 도저히 버릴 수 없는취미(책 쌓아놓기), 그리고 이상적인 나의 미래상을 골고루 섞어 놓은 나름대로의 진지한 작품이었다. 소로우를 읽은 적이 없는(확실하다!) 교수님이 내게 던져준 것은 C-.
모든 시대의 인테리어 업계와는 도무지 상극인 소로우가 월든 호숫가에 집을 지은 것은 그의 나이 28세인 1845년 이었다. 그는 고작 28달러 12 1/2센트를 들여 호숫가 숲속에 그의 통나무집을 지었고, 그 '안락한' 집에 칩거하며 꼬박 2년을 보냈다. 그는 '인간생활의 공정하고도 현명한 관찰자'가 되기 위하여 '자발적인 빈곤'을 택함으로서, '새로운 유행에 따라 요리가 되고 있는' '버릇없고 무식하고 천박한 삶'을 거부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보여 주었다. 그의 숲속 생활은 '인생을 깊고 강인하게' 살기를, '본질적인 사실들만을 직면'함으로서 '인생을 의도적으로 살아보기'를 원하는, 그의 생활철학의 실험이었다.
어엿한 제집을 소유하였음으로 그는 집세 걱정이 없었고, 의복의 본질을 잘 파악하였음으로 옷을 새로 마련할 필요가 없었으며, '경험의 결과가 아니라 일종의 본능'인 육식에 대한 거부감과 극히 간소한 음식에의 기호때문에 작은 콩밭을 슬렁슬렁 일구어 소출한 것으로도 식비 충당이 가능하였다. 자신으로서는 만족스러운 의식주의 해결때문에 거친 노동을 하지 않아도 좋았고, '사람의 가치는 피부에 있는 것이 아니므로 어떤 사람의 피부를 만져본다고 그의 가치를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알기에 외로움 때문에 일부러 사람을 찿아 나서지도 않았다.
그는 그의 인생에 '넓은 여백'을 마련하여 '발돋음하고 서듯이'하는 독서를 즐기고, 야생동물들과 교감하며, 근처 숲과 호수를 탐색하면서 벌거벗은 자연을 한 편의 아름다운 서정시로도 만들어 놓았다. 비록 그가 2년의 짧은 세월을 뒤로 한 채 사람 사는 마을로 돌아갔지만, 15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빈집은 또 다른 소로우를 기다리고 있다.
왜 뛰는 지도 모르고 헉헉거리며 열심히 달리기만 하는 당신, 제발 멈춰 서서 숨을 고르라. 그리고 소로우에게 길을 물어 그 빈집을 찿으라. 그 집은 당신이 미리 겁을 먹을 만큼 초라하지도, 전혀 허술하지도 않다. 또 '산 넘고 물 건너' 한참을 가야할 만큼 가는 길이 멀지도, 팍팍하지도 않다.
앞사람 발꿈치에만 눈을 박은 채 정신없이 달려가다 넘어지고야 마는 인생보다는, 오롯한 내 집 앞에 뒷짐지고 당당히 서서 무심하게 뜨고 지는 해를 바라보며 그 햇살에 젖어보는 것이, 그리고 그 햇살의 눈부심 너머에 있는 넉넉한 우주의 존재를 두 팔 벌려 맘껏 껴안아보는 것이, 진정 내 숨소리를 쿵쿵,느끼며 산다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