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의 힘, 호박덩굴
호박덩굴이 담장을 뒤덮은 뒤곁
유난히 큰 호박 하나
당당하게 공중에 매달려 있다
흐트러짐 없이 정돈된 형태로
기울어짐 없이 균형된 자세로
여유있게 공중에 멈춰 있다
호박이란 애초 작은 씨앗에서
담장을 뒤덮도록 자라기까지
씨앗을 품은 제 열매를
다시 맺기까지
넉넉히 감당하는 덩굴이 있었다
주름의 꿈
나의 삶은 주름과 같아서
한동안은 일정한 폭으로 접혀 있다
어떤 날은 접힌 면을 펼쳐 내어
그 갑갑함을 털어내는 것이다
한동안은 반듯한 주름에 취해 있다
어떤 날은 보이지 않는 면을 뒤집어
혁명과 같은 날을 꿈꿔보는 것이다
존재의 근황
우리에게 존재형이 있다면
나는 의지형이리라
뚜렷하게 의지형이었으리라
대부분이 그러했으리라
십대의 골짜기를 지나
이십대의 고개를 넘어
삼십대의 다리를 건너
사십대의 중턱에 서니
내려가지도 올라가지도 못하다
아무 것도 결정하지 못하다가
잃어버린 것들이여
내것이 아닌 것들이여
몸은 마음을 받아주지 못하고
마음도 몸을 넘어서지 못하는데
존재의 도모는
혁명처럼 일어나지 않는다
갈 곳을 모르고
머무를 곳을 모르는데도
삶은 무심하게 계속된다
나보다 먼저 존재한다
새봄이 오면
지난겨울의 바람이
새잎을 자랑하리라 믿었다
꽃샘추위가 들른 이른 봄
양지 바른 곳에는
겨우내 묻혀있었을 씨들이
반짝이는 잎들을 돋우는데
나의 봄은
그렇게 오지는 않았다
소망과 노력과 인내의 씨는
세상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아무 거라도 풋풋한 놈 하나
봄의 손짓에 기지개를 펴며
소심하게 올라오지 않았다
아지랑이처럼 나른해질 뿐
지난겨울의 진실이
드러나는 것이라고
세상은 말하고 있었다
바람이 몹시 부는 날
바람이 몹시 불었다
열린 창문에서는 버티컬이 부딪치고
노오란 하늘이 드리워졌다
베란다 창 너머로 보이는 빈 주차장엔
바람이 바닥 것들을 질질 끌고 다녔다
어느새 하늘엔 삼월의 눈이 희끗희끗 날리고
먼 산엔 희뿌연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걸어서 돌아오는 귀가길에 바람과 함께
돌아온 아이는 오즈의 마법사라도 만났을까
저만큼 날아간 덕분에 엄마가 마중나왔다는
너스레를 아무렇지도 않게 떨었다
새 학년이 시작되고 새 직함을 받지 못한
딸아이는 점심도 거른 채 빈손으로 돌아왔다
미련은 너와 나를 미련하게 만든다
바람이 헝클어 놓은 머리카락처럼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은 바람 탓이라고
바람이 몹시 부는 날에 중얼거렸다
그게 아니라고 그게 아니라고
아무리 말해도 마음은 돌아앉지 못했다
아무래도 바람 탓이다
이 삼월이 추운 것은 바람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