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들 제 갈 곳으로 가고

별 거 없을 거라고 해도

남은 쓸쓸함을 떨치지 못하네

 

그러나

있음에 쓸쓸하지 않지는 않았네

잠시의 남겨짐조차 탄식이라니

 

인생이란 화려한 무대 뒤의 대기실

관객들은 저마다 돌아가고

언제나 기다림은 공연보다 길다

 

그러니

낙심하거나 회피하지 말고

가라앉은 것들에게 말을 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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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 위엔 온종일 흐린 하늘

말랑말랑함이란 없는

차분한 일요일 오후

지나온 것들이 진실이 아님을

이제 안다고 해도

달라질 건 없다는 듯

  

하루종일 흐린 하늘은

지나온 길들을 의심하고

가는 길들을 멈추게 하고

가야할 길들을 감추며

짙은 잿빛이 더해지고

어제는 멀어지고 있다

 

네게 품었던 소망은

비눗방울처럼 반짝이다가

기어코 사라지는 

애써 반짝일 수 있는

인위적인 것이더냐

의무의 무게이더냐

 

소박한 꿈은

화려한 치장을 걸치고

집을 나서는 여인네처럼

눈길을 끌고 있었을 뿐

영혼이 빠져 감흥이 없다

수고가 빠져 보람이 없다

 

딸아 아들아

짧지만 걸어온 길 위에

때로 주어진 영광의 그늘에

머물러 떠나지 않은 것이더냐

어제의 소요도 오늘의 고요도

처음처럼 걸을 이유가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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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봄 단층짜리 낮은 건물을 짓고

앞뒤에 마당을 갖게 된 그녀

그녀가 창조해 낸 세계 속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

나는 그녀의 빈 마당처럼

채우지도 비우지도 못한 채

서성거렸다

 

 

뜨거운 그 봄

불에 데인 듯한 그 봄

뜨거움을 뜨거움으로 맞던 여름

차가운 평형의 시간이 오는 가을

어느 날 들어선 그녀의 마당은

시도된 것들과 시도되려는 것들로

군데군데 채워져 있었다

 

 

다 저녁 찾아간 캄캄함 속에서도

알은척을 하던 바깥에 속한 이들이여

잔디보다 먼저 자리잡은 꽃들과

바탕을 메우듯 들어앉은 나무들

나는 이러므로 이러하노라

말하지 않아 더 좋은 것들을

그녀의 건물과 마당에서 배운다

 

 

웬만만 하면 식물은 죽지 않아요

그녀의 관심에 나는 대답한다

웬만만 하면 말이예요

돌아오는 길, 나도 웬만만 하면

잘 살아야 하는 거라고

어디서든 웬만만 해도 되는 거라고

나를 흔드는 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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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농장의 수확물을 거두는 날

연휴 첫날 다음날 비 예보인 날

우리의 연례행사가 시작되었다

 

 

남편은 총감독이자 가장 큰 일꾼

아이들은 골을 맡아 고구마를 캐고

이어서 아들은 땅콩을 캐 흙을 턴다

 

 

나는 그동안 따지 못한 쌈들을 따고

목화솜들을 몇 개 따고 아직도 새롭다

끝물인 토마토를 따고 가지를 딴다

 

 

한켠엔 파라솔과 새로 산 돗자리가

펼쳐지고 그 위엔 과자와 맥주 두 캔

막걸리 한 병과 치킨 한 상자가 있다

 

 

바람은 해보다 가깝게 피부에 닿고

우리는 해가 그리워 자꾸만 파라솔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싶어진다

 

 

몇 번이나 뒤집어지는 파라솔 갓을

남편은 몇 번이나 제자리로 돌려놓고

우리는 그 아래서 춥다가 행복해한다

 

 

치킨을 먹으며 아이들은 배부터 채우고

한 시간이나 늦게 배달된 자장면을 먹고

캔 맥주 한 통과 막걸리 한 사발도 마신다

 

 

가족의 이름이 적힌 팻말 밭에 자란 작물들아

봄부터 가을까지 한 시기를 무던히도 견뎠구나

이 하루가 그 긴 시간을 건너왔다는 것이로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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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가 어찌되든

삶의 근거가 되기를

숙제처럼 마무리하기를

첨부서류를 추가하듯

 

여기여야 한다고

강요하는 진실

근거를 갖기를

복선과 같은 근거를

 

관계란 농사와 같아

씨를 뿌리고 가꾸어

그 씨를 거두는 것처럼

자연의 시간이 흐르고

인공의 시간이 흘러

돌아와야 하는 것

 

그러니 먼저

자리를 뜨지 말기를

씨를 뿌린 후 돌아서지 말고

싹을 위해 풀을 버려두지 말고

긴 기다림 끝에 만날 것들을

쉽게 털어버리지 말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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