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가을, 하루 종일 비는 내리고

 

 

아침부터 추적추적 내리는 늦가을비는

날이 저물도록 계속된다

오전부터 붙들고 있는 아이들 공부계획도

날이 저물도록 끝나지 않는다

어둠은 베란다 밖 세상을 감추고

거실 안 내 모습만 덩그러니 남긴다.

방금전 높일 대로 높인 목소리는 이내

수그러들었지만 밤비처럼 외로웁다.

 

저녁을 준비해야 하는 시간

어쨌든 주방으로 가면 무엇이든 만들어

아무쪼록 노력의 결과만큼 먹을 것이다

아이들은 각자 자기 방에서 책임과 의무를

다하고 세상은 그렇게 할 일투성이로구나

늦가을, 하루 종일 비는 내리고 마음은

벌써 겨울을 느끼려드는구나

 

 

 

   11. 4 비오는 날 시작해 해 좋은 날에 고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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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버지에 대한 기억의 재구성

 

 

그녀는 말한다

일흔 넘은 아버지가 기억을 잃기 시작했어

아버지 기억나?

밤 열 두 시 넘어 담배 심부름

무섭다고 버티자 짓밟고 때렸지

나는 그런 기억일랑 없다

가장 가까운 기억은 나겠지?

대학 3학년 때 졸린 목에 남은

흔적과 함께 애인과 데이트했어

내가 설마하니 그랬을 리 없다

그녀는 칠십 넘어 기억을 잃어가는

아버지를 향해 기억을 들이댄다

 

 

나는 내 아버지를 기억해 본 적이 없다

내 아버지는 쓰다가 틀린 글씨처럼

지우고 다시 쓰면 깨끗하게 정리된

나만의 노트를 갖게 된다고 믿었다

그녀의 열린 기억 앞에서 나는 문득

닫힌 기억 속의 내 아버지를 보았다

나를 해친 적 없는 내 아버지를 보았다

 

내 아버지는 반 백 년을 살았다

가난과 술과 불화가 붙어 다니던 시절

쓸 만한 것이라곤 없었다

쓸 만한 것이라곤 나뿐이었다

고 생각했던 그 시절

젖으면 얼어버릴 겨울비 같은 기억들은

맞고 싶지 않았다

 

그는 원하는 만큼 살았던 시절이 짧았다

귀한 아들이라고 오냐오냐 키워 결국은

저 꼴이라고 사람들은 입을 모았다

주저앉은 정신과 혼미한 술을 적당량 버무린

일상이 전부였던 내 아버지

왕자와의 사랑을 위해 목소리를 바쳤던

인어공주처럼

아버지는 술을 위해 정신을 바쳤다

 

공포를 어쩌지 못해 사납게 달려들어도

나를 해친 적 없었던 내 아버지

절망에 질질 끌려 다니며 만신창이가 되어도

주눅 든 사남매와 비쩍 마른 엄마와

말수 적은 할머니가

살려고 발버둥 치면 칠수록

부질없는 듯 주저앉았던 내 아버지

 

그녀의 아버지를 읽으며 처음으로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재구성한다

마흔 다섯 초가을 어느 주말에 나는

폐기처분 된 스팸문자를 복구하듯이

내 아버지를 떠올리고 있었다

 

 

 

 

 

9.13 토요일 오전에 신문에 난 칼럼을 읽은 후 부정에서 긍정으로 가는 아버지를 붙잡아 적어두다. 캄캄한 동굴 같았던 시절이 조금은 환해질 수도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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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을이 깊어질 때

 

 

얼마 전까지는 드물게 보이더니

그사이 나무에서 빛나고

땅 아래서 빛나는 것들로

가을 거리는 눈부시게 환하다

우리는 소심한 눈길을 주며

흐르는 물처럼 멈추지 못하지만

가슴엔 어느새 한 그루 은행나무

 

가을이 깊어갈수록 점점 다가오는

겨울이 오늘도 나무를 온종일 흔든다

우수수 떨어지는 몸의 일부를

아픔 없이 미련 없이 보내는 나무

다 잃고서야 끝나는 나무의 한해

나는 봄부터 겨울까지 한해 내내

잃을 줄 모르고 얻으려고만 하는구나

 

 

 

      오랜만에 토요일 오전, 11월 8일 시를 고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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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여자가 사는 법

 

 

자기 온몸과 온혼을 불태워 존재함으로써

봄나무가 되었다는 겨울나무

그 여자는 그렇게 사는 줄 알았다

아직도 살아온 날들의 검증을 요구하는

세상에 대해 적어도 위로가 되었다

 

그 나무를 본 적이 있는가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묵묵히

존재의 무게를 감당하고 견디는 모습을.

언땅에 맨몸으로 서 있는 저 겨울나무처럼,

온몸으로 땡볕을 받고 있는 저 치자나무처럼

삶은 견딤을 통해서 이어진다

 

자신의 자리에서 기다릴 줄 알고

섣부른 말로 자신을 대신하지 않는 것

온 존재를 걸어 존재한다는 것은

바닥에 입 맞추며 엎드릴 줄 아는 것

그럴 마음도 없이

그 여자는 그렇게 살 것이라고 믿었다

 

 

     2014. 1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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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류를 내던 날에

 

 

일요일에 구인 공고를 보고

마음속으로 가늠하며

주저하고 있을 때

 

월요일에 뜻밖의 이에게

뜻밖의 전화를 받고

용기를 낸다

 

이틀이나 걸린 서류 준비는

그저 서류일 뿐이지만

보는 이는 관심 가는 곳이 있으리

몇 개월의 경력에도

의미를 부여해야만 하는 현실이

궁핍하지만.

 

누구나 시작이 있었을 터

늦거나 빠르거나일텐데

언제나 마음을 쓴다

서류를 들이밀고 나오며

 

일어나지 않은 상황에

마음을 다독이며

하루가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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