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에 대한 기억의 재구성

 

 

그녀는 말한다

일흔 넘은 아버지가 기억을 잃기 시작했어

아버지 기억나?

밤 열 두 시 넘어 담배 심부름

무섭다고 버티자 짓밟고 때렸지

나는 그런 기억일랑 없다

가장 가까운 기억은 나겠지?

대학 3학년 때 졸린 목에 남은

흔적과 함께 애인과 데이트했어

내가 설마하니 그랬을 리 없다

그녀는 칠십 넘어 기억을 잃어가는

아버지를 향해 기억을 들이댄다

 

 

나는 내 아버지를 기억해 본 적이 없다

내 아버지는 쓰다가 틀린 글씨처럼

지우고 다시 쓰면 깨끗하게 정리된

나만의 노트를 갖게 된다고 믿었다

그녀의 열린 기억 앞에서 나는 문득

닫힌 기억 속의 내 아버지를 보았다

나를 해친 적 없는 내 아버지를 보았다

 

내 아버지는 반 백 년을 살았다

가난과 술과 불화가 붙어 다니던 시절

쓸 만한 것이라곤 없었다

쓸 만한 것이라곤 나뿐이었다

고 생각했던 그 시절

젖으면 얼어버릴 겨울비 같은 기억들은

맞고 싶지 않았다

 

그는 원하는 만큼 살았던 시절이 짧았다

귀한 아들이라고 오냐오냐 키워 결국은

저 꼴이라고 사람들은 입을 모았다

주저앉은 정신과 혼미한 술을 적당량 버무린

일상이 전부였던 내 아버지

왕자와의 사랑을 위해 목소리를 바쳤던

인어공주처럼

아버지는 술을 위해 정신을 바쳤다

 

공포를 어쩌지 못해 사납게 달려들어도

나를 해친 적 없었던 내 아버지

절망에 질질 끌려 다니며 만신창이가 되어도

주눅 든 사남매와 비쩍 마른 엄마와

말수 적은 할머니가

살려고 발버둥 치면 칠수록

부질없는 듯 주저앉았던 내 아버지

 

그녀의 아버지를 읽으며 처음으로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재구성한다

마흔 다섯 초가을 어느 주말에 나는

폐기처분 된 스팸문자를 복구하듯이

내 아버지를 떠올리고 있었다

 

 

 

 

 

9.13 토요일 오전에 신문에 난 칼럼을 읽은 후 부정에서 긍정으로 가는 아버지를 붙잡아 적어두다. 캄캄한 동굴 같았던 시절이 조금은 환해질 수도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