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테스탄티즘은 가톨릭에 대한 반발로 출발하는데, 막스 베버가 지적했듯 그 근면과 금욕의 정신은 산업자본주의의 원동력이 되어 공업화 사회의 정신적 기반을 다졌다.
그는 《주택 문제Zur Wohnungsfrage》(1873)에서노동자는 집을 사적으로 소유하게 되면 농노 이하의 비참한 상태로 전락한다고 지적했다.
주택 융자를 통하여 집을 사고 기뻐하는 노동자는 자신의 현실이 농노보다 못하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집을 손에 넣었지만 그들의 집은 금전을 전혀 생산하지 못하는, 그야말로 썩어가는 물질일 뿐이며, 그들은 집이라는 거대한 쓰레기에 평생 동안 번 돈을 쏟아붓는 가련한 사람들이 된다.
르코르뷔지에의 후반부 작품이 곡선과 질감이 넘치는 강력한 느낌으로 변해가는 과정을 돌이켜보면 직선만으로는 표현할 수 없는 무게감이 느껴진다.
20세기 후반에 영향력이 있었던 이탈리아의 건축역사가 만프레도 타푸리Manfredo Tafuri는 ‘피라미드와 미로’
나는 하이데거에게서 ‘탑인가, 굴인가’, 또는 ‘형태인가, 체험인가’ 하는 두 가지 대립 항을 훌쩍 뛰어넘는 풍부한 지성을 느낀다. 내가 찾고 있는 굴로서의 건축은 굴이라기보다 하이데거가 말하는 ‘ 다리’에 가깝다.
굴속에는 사람을 감싸주는 듯한 부드러움과 일종의 습기가 필요하다.
싱글 스킨single skin이라고 부른다. 싱글 스킨으로 덮는 방식을 이용하면 단순한 보이드void16가 굴이 된다.
벽은 벽, 천장은 천장이라는 식으로 각각을 분절해놓으면 굴이 되지 않는다.
분절을 해놓으면 공간이 인공적인 딱딱한 느낌을 주기 때문에 굴이 될 수 없다.
같은 질감, 같은 모양, 같은 결을 가진 하나의 피부로 덮여 있어야 비로소 우리는 그것을 굴로 느낄 수 있다.
이렇게까지 집요하게 하나의 스킨으로 덮은 이유는 건축을 하나의 생물로 만들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나의 피부가 배, 등처럼 각각의 부위에 주어진 다른 환경 조건에 대응하면서 미묘한 생동감을 만들어낸다.
싱글 스킨이 미묘한 변화를 일으킴으로써 알몸 상태로도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건축을 두뇌로 디자인하면 자기도 모르게 분절을 하게 되고 차이를 주고 싶어진다. 이런 것을 생각해냈다고 자랑하고 싶은 것이다.
그와는 반대로, 나는 건축을 두뇌의 산물에서 해방시키고 싶다. 두뇌로 만든 건축은 논리가 지나치게 드러나 딱딱하고 어색한 느낌이 들지만 싱글 스킨으로 모든 것을 덮어버리면 건축에 생물적인 대범함과 부드러운 유연성이 탄생한다
이 건축에서는 내부와 외부의 바닥을 완전히 평평하게 하여 연결시키고 그 사이에 유리를 박아넣었다.
신전 자체의 디자인은 양쪽이 별 차이가 없다. 다만 아프리카 사람들은 지면 자체를 신성한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받침대를 만들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유럽 사람들은 지면을, 흙을 그다지 사랑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흙 위에 기단이라는 인공적인 받침대를 만들고 그 위에 신전을 건축했다. 흙을 부정한 것이라고 생각하여 흙과 신전을 분리시킨 것이다.
흙이라는 부정한 것 위에 단단하고 메마른 돌을 깔고 대지로부터 분리시키려 했다. 그 사고방식의 종착지가 20세기 모더니즘 건축의 ‘필로티’17다.
르코르뷔지에 또한 가느다란 기둥을 사용해서 건축을 대지로부터 분리하는 데에 집요하게 얽매였다.
모더니즘 건축과 고전주의건축은 사실 같은 종류다.
20세기의 건축역사가 에밀 카우프만Emil Kaufmann18이나 콜린 로우Colin Rowe19는 두 양식의 유사성을 다양한 관점에서 지적했다.
대나무를 건축 재료로 사용하고 싶어서라기보다 거기에 대숲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에서 대나무를 이용한다. 대나무라는 ‘재료’가 아니라 대숲이라는 ‘상태’다. 대나무의 질감보다 대숲의 빛과 소리와 감촉이 중심을 이룬다.
어린 시절에 텔레비전을 통해서 보았던 시간여행 터널과 비슷한 느낌을 주는, 뭔가 깊이가 있는 게이트를 통과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기분 전환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여 대숲을 준비했다.
치도리는 ‘수많은 새’라는 뜻이다. 새와 새가 나름대로 간격을 취하면서 하늘을 날아가는 모습과 비슷하다. 수많은 새들이 하나의 무리를 이루어 하늘을 날아가듯 작은 단편들이 모여 건축이라는 거대한 전체를 이루는 것이 나의 이상이다
건축을 할 때 틈새는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건축을 구성하는 입자 사이의 틈새를 통하여 빛이나 바람이나 냄새가 들어온다. 틈새가 없으면 인간은 질식해버린다.
나는 황금분할에 전혀 관심이 없다. 자연스럽고 적당한 비율의 직사각형 쪽이 여유가 느껴지고 안도감이 든다.
삼대가 함께 사는 대가족이라는 틀은 다양한 완충장치나 관계의 복층 구조에 의해 좀 더 편안한 분위기 안에서생활할 수 있다.
마키 교수는 건축사무소는 다섯 명의 배수의 인원이 적절하다고 했다. 우선 다섯 명이 시작을 한다. 다음에는 5×2로 열 명, 다음에는 5×3으로 열다섯 명, 이런 식으로 늘려가는 방식이 적당한 증원 방법이라는 것이다.
도면이나 투시도라는 물질성이 낮은 대상을 테이블 위에 놓아둘 경우, 아무것도 없는 것보다는 낫지만 효과가 부족하다.
그러나 3차원 모형이 놓여 있으면 그것이 설사 하룻밤 만에 만든 거칠고 조잡한 것이라 해도 ‘현장’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어 회의가 진지하게 진행된다.
인간이라는 생물에게는 ‘실질적인 물질’이 눈앞에 필요하다.
르코르뷔지에는 ‘선의 건축’을 매우 싫어했다. 그는 카쓰라리큐로 안내를 받았을 때에도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인상이 어떠냐고 묻자 실망스런 표정으로 단 한 마디, "선이 너무 많군요."라고 말했다고 한다.
1933년에 카쓰라리큐를 방문하여 눈물을 흘릴 정도로 감격한 브루노 타우트Bruno Taut27와는 엄청난 차이다.
그는 거의 같은 세대인 르코르뷔지에의 건축을 형식의 재미만을 추구하는 포르말리스트formalist(형식주의자)라고 비판했다
르코르뷔지에가 ‘형태’의 모더니즘이라고 한다면 타우트는 ‘관계關係파’, 요시다 데쓰로는 ‘선線파’의 모더니즘이다. 요시다 데쓰로와 타우트는 볼륨 volume30을 싫어했다. 나도 볼륨을 싫어한다.
각자의 마음속에서 ‘과거’는 진화하고, 끊임없이 바뀐다.
인간은 시간과 함께 바뀌고 흘러가는 존재라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
레비스트로스는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새롭게 만드는 유토피아적인 방법론과 브리콜라주의 방법론을 대비시켰다.
‘저렴함’은 자신과 세상이 쓸데없는 장식이나 매개체 없이, 낭비 없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낭비가 없는 그 저렴함이 아름다움과 연결된다.
모더니즘 미학의 본질은 낭비가 없는 것이며, 결국 저렴하다는 것이다. ‘지속가능성sustainability’이라는 이념의 기본도 사실은 ‘저렴함’이다.
자신과 세상을 낭비 없이 연결했을 때 자신과 세상 사이에 지속이 가능한, 오랫동안 유지할 수 있는 관계가 탄생한다.
어떤 관계가 오랫동안 지속이 될 수 있는지를 판단하는 중요한 지표가 ‘저렴함’이다.
그와 비교할 때 중국의 기와는 아름답다. 우선 얇고 약해 보이면서 얼룩이 있으며 크기도 각양각색이다. 기와조차 거대한 공장에서 제작하는 일본과는 근본적으로 제조 방법이 다르다.
직접 굽는 방식이니까 얼룩도 생기고 형태의 차이도 발생한다. 그런 개성과 엉성함이 지금의 건축에 가장 결여되어 있는 부분이다
빛이 주역이 되려면 프레임은 최대한 억제하고 자연스럽게 설치해야 한다.
디자인의 기본은 거부권이다. "이거 좋은데."라는 감각은 사실 그다지 창조적이지 않다. 이미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무엇인가를 ‘좋다’고 말하는 것이니까 그 ‘ YES’는 현상의 일부를 긍정하는 것뿐이며, 거기에서 무엇인가 새로운 것이 탄생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거부는 다르다. "이건 아닌 것 같아.", "이건 마음에 들지 않아."라는 마음은 현상에 대한 부정이다. 어떤 것이 좋은지는 아직 알 수 없다. 그렇게 간단히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도 현상을 부정할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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