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래 모든 민주적인 해방 기획은 막혀 있다는 점을 강조하던 유럽 지식계의 토포스topos는, 민주적 공간을 점진적이고 부분적으로 확대해가자는 정반대의 토포스 내에 재기입된다.
급진적 정치의 궁극적 목표는 사회적 배제의 경계선을 점차 옮기고, 배제된 자들에게 자신들의 정체성을 표현하고 의문을 던질 수 있는 주변적 공간을 마련해줌으로써 그들에게 힘을 실어주는 것이다.(『실재의 사막』, 142~143쪽)
변하지 않는 것. 단두대의 도끼가 아무리 개량·진화된다 하더라도 변하지 않는 원칙은 그 기능이 머리와 몸통 사이를 절단하는 데 소용된다는 점이다. 그것이 어떤 행위를 가능하게 하는 ‘기준’이다.
더쇼비츠의 솔직한 자유주의 논변에 반대하여, 우리는 역설적으로 명백해 보이는 ‘위선’을 고수해야 한다.
우리가 이 필사적인 선택을 보편적 원칙으로 승격시키지 말아야 한다는 점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우리는 다만 그 순간의 불가피하고 가혹한 위급함 때문에 고문을 해야 한다.(『실재의 사막』, 145~146쪽)
물론 단기적인 이득이라는 면에서는(수백 명의 목숨을 살린다거나) 고문을 합법화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이 우리의 상징세계에 미칠 장기적 영향은 어떨까? 우리는 어느 선에서 멈춰야 할까? 상습범들이나 이혼한 배우자에게서 아이를 납치하는 부모 등을 고문해선 왜 안 되는가?(『실재의 사막』, 147쪽)
나치의 담론은 두 가지 수준에서 작동하며, 명시적인 진술의 수준은 공개적으로 인정되지 않는 외설적 이면에 의해 보충된다는 것을 말이다."(『실재의 사막』, 148~149쪽)
테러와의 전쟁을 명분으로 앞세우면서 "이제 미국은 이런 언질을 파기했으며, 테러에 대한 전쟁의 일부로서 핵무기를 사용할 수 있는 첫 번째 국가가 될 준비가 되어 있다고 선언"한 셈이 됐다.
과거 핵무기의 지위가 ‘초월적’이었다면 이제는 ‘경험적’ 혹은 ‘병리적’ 차원으로 떨어졌다고 할 수 있다.
여자는 애인에게 그런 상황에서는 완전한 거짓말—아내에게 혼외정사의 사실을 아예 부인하는 것—이 그가 선택한 진실을 가장한 거짓말이라는 전략보다 훨씬 더 정직한 태도일 거라고 대꾸했는데, 이 주장은 완전히 정당한 것이다.(『실재의 사막』, 153쪽)
적은 그 정의상 언제나—적어도 어느 정도까지는—눈에 보이지 않는다. 적은 우리 중 하나처럼 보이며 직접 알아볼 수 없다. 정치투쟁의 커다란 문제와 과업이 알아볼 수 있는 적의 이미지를 제공하는/구성하는 일인 것은 그런 까닭에서다.(『실재의 사막』, 153쪽)
다원적 관용주의가 얼핏 ‘관용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근본주의를 적대자로 규정함으로써 ‘친구냐 적이냐’라는 슈미트식 이분법을 그대로 고수한다
그들의 단순한 주장은(그리고 윤리적인 행위에는 언제나 뭔가 단순한 면이 있다) "어떤 민족 전체를 지배하고, 쫓아내고, 굶기고, 모욕을 가하기 위해서" 싸우는 일에는 동의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실재의 사막』, 160~161쪽)
팔레스타인에 대한 이스라엘 공격의 진짜 목표는 테러 공격에 대한 예방이 아니라 오히려 평화적 해결의 봉쇄에 있다
이처럼 선을 긋는, 참여하기를 거부하는 제스처는 진정한 윤리적 행위이다. 성 바울의 표현을 빌리면, 정말로 유대인과 팔레스타인인의 구분이 사라지는 것, 정치공동체의 구성원과 호모 사케르의 구분이 사라지는 것은 바로 이런 행위 속에서이다.(『실재의 사막』, 164쪽)
(지젝에게 ‘행위act’란 그러한 좌표계를 변화시키는 돌파 행위를 말한다)
가장 나쁜 죄는 그런 행위들을 ‘죄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허위적 보편성 속에 희석시키는 것이다.
악순환을 깨뜨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갈등의 좌표 자체를 변화시키는 행위를 통하는 것뿐이다.
이스라엘의 과도한 군사활동은 결국 무능함의 표현이며, 과도해 보이는 외양과 달리 뚜렷한 목표가 없는 무력한 ‘행위로의 이행passage a l‘acte’이다.(『실재의 사막』, 180쪽)
반유대주의와 이스라엘이라는 국가가 취한 특정 조치에 대한 비판은 구별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가, 이 경우 홀로코스트 희생자들에 대한 기억을 모독하는 것은 오히려 이스라엘 자신이라고 주장해야 한다.
이스라엘은 홀로코스트 희생자들을 무자비하게 조작하고, 그들을 도구화해 현재의 정치적 조치를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삼고 있다.
"정치적 구분선은 더 이상 좌파와 우파 사이가 아니라 전 세계적인 ‘온건한’ 탈정치의 장과 극우적 재정치화 사이에 그어지게 되었다."(『실재의 사막』, 190쪽)
‘탈정치’에 대해서는 여러 차례 언급을 해왔는데, 이데올로기의 종언 이후 더 이상 좌우파의 투쟁이란 건 의미가 없으며 실제적인 행정에 의해 정치가 대체되어야 한다고 보는 입장을 가리킨다. ‘탈정치’란 말 자체가 ‘정치 이후’, 곧 ‘정치의 종언’을 뜻한다.
반면 ‘재정치화repoliticization’는 정치의 부활이자 복권이다. 정치는 살아 있으며 여전히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그렇게 정치가 귀환하는 방식이 보통 극우적 포퓰리즘의 형태를 띤다는 것이 지젝의 지적이다.
비극적인 것은 오늘날 ‘살아 있는’ 유일하게 진지한 정치세력이 새로운 포퓰리즘 우파라는 점이다. 권력의 자리를 빈자리로 남겨두고, 이 자리와 우리가 그것을 차지하는 일 사이에는 간극(바로 거세의 간극이다)이 있음을 받아들이는 민주주의의 게임을 계속하는 한, 우리는 모두 ‘피델 카스트로스fidel castros’, 즉 거세castration에 충실한 것 아닌가?(『실재의 사막』, 20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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