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스는 "기계란 불필요한 부품이 없는 물체"라고 했다. 이 말을 듣자마자 시인의 의도를 알 수 있었다. "아름다움은 어떠한 상징이나 메시지도 전달하지 않는 원시 상태의 자연 안에 존재한다"고 했던 페터 한트케도 비슷한 생각이었을 것이다. 한트케는 사물의 의미를 찾지 못할 때화가 난다고 했다. - P29

방송에 따르면 윌리엄스의 시는 사물에는 사물 자체 외에 어떤 생각도들어 있지 않다는 확신에 근거한다고 한다. 윌리엄스 시의 목적은 사물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자신의 지각을 사물의 세계로 향하도록하는 것이다.
진행자는 윌리엄스의 작품은 겉으로 보기에는 담담하고 명료한데 바로 그 점 때문에 그의 텍스트가 감정에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한다고 말했다. - P29

내가 생각한 건물이 장소와 기능에 정확히 부합한다면 굳이 예술적 장식을 첨가하지 않더라도 건물 자체가힘을 가질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아름다움의 핵심은 물질의 농축성이다. - P30

칼비노의 말에서 내 관심을 끈 부분은 정확성에 대한 주장 또는 인내와 섬세함이라는 우리에게 친숙한 시의 측면이 아니라 우리가 사물을주의 깊게 관찰하고 사물에게 사물이 마땅히 받아야 할 관심을 준다면 사물 자체에서 풍성함과 다양성이 흘러나온다는 설명이다. - P31

케이지의 작업 방식은다르다. 그는 개념과 구조를 만들고 그 개념과 구조가 소리를 내며 연주되게 하였다. - P31

존 케이지에 대한 글을 읽으면서 내 작업실 근처의 산에서 진행했던 온천 프로젝트가 기억났다. 당시 나는 건물의 이미지를 먼저 떠올려서 그이미지를 프로젝트에 맞춰 조정하는 게 아니라 부지의 위치, 목적, 소재(산, 바위, 물)가 제기하는 기본 의문에 대답하면서 작업을 진행했다. 따라서 처음에는 기존 건축의 차원에서 시각적 요소가 없었다. - P31

스위스 건축가인 헤르초크와 드 뫼롱은 오늘날 건축은 더 이상 단일체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정밀한 사고의 행위를 통해 설계자의 머리에서 인공적으로 창조되어야 한다고 했다. 두 건축가의 주장은 뇌에서 만든 전체를 특별한 방식으로 반영하는 것이 건축이라는, 즉 건축을 사고의 형태로 보는 그들의 이론에 기반한다. - P32

나는 건축을 사고의 형태로 보는 두 건축가의 이론을 따를 생각은 없지만, 과거와 같은 건물의 전체성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그 이론의전제가 되는 생각에는 동의한다. - P32

나 개인적으로는 건축물의 자체적·물리적 전체성을 내 작업의 필수 목표로 삼고 있지만 쉽게 되는 일이 아니다. - P32

실제로 특별한 형태를 만들기 위해 많은 수고와 의지가 들어간 건물이지만 전혀 정이 가지 않는 건물이 있다. 설계를 맡은건축가가 현장에 있지 않더라도 그는 모든 디테일을 통해 끊임없이 나에게 말을 건다. 같은 말을 되풀이하는 그 모습에 나는 금세 흥미를 잃는다. - P33

좋은 건축은 방문자를 맞이하여 방문자가 건축을 경험하고 그안에 살도록 해야 한다. 온갖 회유책으로 끊임없이 말을 거는 건물은재미가 없다. - P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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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모든 민주적인 해방 기획은 막혀 있다는 점을 강조하던 유럽 지식계의 토포스topos는, 민주적 공간을 점진적이고 부분적으로 확대해가자는 정반대의 토포스 내에 재기입된다.

급진적 정치의 궁극적 목표는 사회적 배제의 경계선을 점차 옮기고, 배제된 자들에게 자신들의 정체성을 표현하고 의문을 던질 수 있는 주변적 공간을 마련해줌으로써 그들에게 힘을 실어주는 것이다.(『실재의 사막』, 142~143쪽)

변하지 않는 것. 단두대의 도끼가 아무리 개량·진화된다 하더라도 변하지 않는 원칙은 그 기능이 머리와 몸통 사이를 절단하는 데 소용된다는 점이다. 그것이 어떤 행위를 가능하게 하는 ‘기준’이다.

더쇼비츠의 솔직한 자유주의 논변에 반대하여, 우리는 역설적으로 명백해 보이는 ‘위선’을 고수해야 한다.

우리가 이 필사적인 선택을 보편적 원칙으로 승격시키지 말아야 한다는 점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우리는 다만 그 순간의 불가피하고 가혹한 위급함 때문에 고문을 해야 한다.(『실재의 사막』, 145~146쪽)

물론 단기적인 이득이라는 면에서는(수백 명의 목숨을 살린다거나) 고문을 합법화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이 우리의 상징세계에 미칠 장기적 영향은 어떨까? 우리는 어느 선에서 멈춰야 할까? 상습범들이나 이혼한 배우자에게서 아이를 납치하는 부모 등을 고문해선 왜 안 되는가?(『실재의 사막』, 147쪽)

나치의 담론은 두 가지 수준에서 작동하며, 명시적인 진술의 수준은 공개적으로 인정되지 않는 외설적 이면에 의해 보충된다는 것을 말이다."(『실재의 사막』, 148~149쪽)

테러와의 전쟁을 명분으로 앞세우면서 "이제 미국은 이런 언질을 파기했으며, 테러에 대한 전쟁의 일부로서 핵무기를 사용할 수 있는 첫 번째 국가가 될 준비가 되어 있다고 선언"한 셈이 됐다.

과거 핵무기의 지위가 ‘초월적’이었다면 이제는 ‘경험적’ 혹은 ‘병리적’ 차원으로 떨어졌다고 할 수 있다.

여자는 애인에게 그런 상황에서는 완전한 거짓말—아내에게 혼외정사의 사실을 아예 부인하는 것—이 그가 선택한 진실을 가장한 거짓말이라는 전략보다 훨씬 더 정직한 태도일 거라고 대꾸했는데, 이 주장은 완전히 정당한 것이다.(『실재의 사막』, 153쪽)

적은 그 정의상 언제나—적어도 어느 정도까지는—눈에 보이지 않는다. 적은 우리 중 하나처럼 보이며 직접 알아볼 수 없다. 정치투쟁의 커다란 문제와 과업이 알아볼 수 있는 적의 이미지를 제공하는/구성하는 일인 것은 그런 까닭에서다.(『실재의 사막』, 153쪽)

다원적 관용주의가 얼핏 ‘관용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근본주의를 적대자로 규정함으로써 ‘친구냐 적이냐’라는 슈미트식 이분법을 그대로 고수한다

그들의 단순한 주장은(그리고 윤리적인 행위에는 언제나 뭔가 단순한 면이 있다) "어떤 민족 전체를 지배하고, 쫓아내고, 굶기고, 모욕을 가하기 위해서" 싸우는 일에는 동의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실재의 사막』, 160~161쪽)

팔레스타인에 대한 이스라엘 공격의 진짜 목표는 테러 공격에 대한 예방이 아니라 오히려 평화적 해결의 봉쇄에 있다

이처럼 선을 긋는, 참여하기를 거부하는 제스처는 진정한 윤리적 행위이다. 성 바울의 표현을 빌리면, 정말로 유대인과 팔레스타인인의 구분이 사라지는 것, 정치공동체의 구성원과 호모 사케르의 구분이 사라지는 것은 바로 이런 행위 속에서이다.(『실재의 사막』, 164쪽)

(지젝에게 ‘행위act’란 그러한 좌표계를 변화시키는 돌파 행위를 말한다)

가장 나쁜 죄는 그런 행위들을 ‘죄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허위적 보편성 속에 희석시키는 것이다.

악순환을 깨뜨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갈등의 좌표 자체를 변화시키는 행위를 통하는 것뿐이다.

이스라엘의 과도한 군사활동은 결국 무능함의 표현이며, 과도해 보이는 외양과 달리 뚜렷한 목표가 없는 무력한 ‘행위로의 이행passage a l‘acte’이다.(『실재의 사막』, 180쪽)

반유대주의와 이스라엘이라는 국가가 취한 특정 조치에 대한 비판은 구별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가, 이 경우 홀로코스트 희생자들에 대한 기억을 모독하는 것은 오히려 이스라엘 자신이라고 주장해야 한다.

이스라엘은 홀로코스트 희생자들을 무자비하게 조작하고, 그들을 도구화해 현재의 정치적 조치를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삼고 있다.

"정치적 구분선은 더 이상 좌파와 우파 사이가 아니라 전 세계적인 ‘온건한’ 탈정치의 장과 극우적 재정치화 사이에 그어지게 되었다."(『실재의 사막』, 190쪽)

‘탈정치’에 대해서는 여러 차례 언급을 해왔는데, 이데올로기의 종언 이후 더 이상 좌우파의 투쟁이란 건 의미가 없으며 실제적인 행정에 의해 정치가 대체되어야 한다고 보는 입장을 가리킨다. ‘탈정치’란 말 자체가 ‘정치 이후’, 곧 ‘정치의 종언’을 뜻한다.

반면 ‘재정치화repoliticization’는 정치의 부활이자 복권이다. 정치는 살아 있으며 여전히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그렇게 정치가 귀환하는 방식이 보통 극우적 포퓰리즘의 형태를 띤다는 것이 지젝의 지적이다.

비극적인 것은 오늘날 ‘살아 있는’ 유일하게 진지한 정치세력이 새로운 포퓰리즘 우파라는 점이다. 권력의 자리를 빈자리로 남겨두고, 이 자리와 우리가 그것을 차지하는 일 사이에는 간극(바로 거세의 간극이다)이 있음을 받아들이는 민주주의의 게임을 계속하는 한, 우리는 모두 ‘피델 카스트로스fidel castros’, 즉 거세castration에 충실한 것 아닌가?(『실재의 사막』, 20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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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은 건축작업을 할 때마다 참고하는 건축적 분위기와 이미지의 저장고이다. - P8

나도 동일한 방식으로 소재를 사용하려고 노력한다. 건축 오브제의 차원에서 볼 때 소재에는 시적인 속성이 있다. 소재 자체가 시적인 것은아니고 건축가가 각 소재에 의미 있는 상황을 부여하는 경우에 그렇다. - P10

내가 소재에 주입하고자 하는 감각은 모든 구성의 원칙을 뛰어넘는다. 소재가 가진 유형성, 냄새, 음향적 특성은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적 요소에 불과하다. - P10

이 목적을 달성하려면 사용된 소재가 특정한 건축적 맥락에서 갖는 의미를 끊임없이 질문해 봐야 한다. 그 의문에 해답을 찾는다면 소재가일반적으로 사용되는 방식과 그 소재에 내재된 감각적 특성을 새롭게조명할 수 있다. - P10

건축에는 그 나름의 영역이 있으며 삶과 특별한 물리적 관계를 가진다. 나는 건축을 메시지나 상징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건축은 내부와 주변의 삶을 담는 봉투이자 배경이며 바닥에 닿는 발자국의 리듬, 작업의집중도, 수면의 침묵을 담는 예민한 그릇이다. - P12

미래에 존재하는 현실을 담는 디자인 드로잉은 내 작업에 있어서 중요하다. 내가 찾는 주요 분위기가 표현될 때까지 나는 계속 드로잉에 전념하다가 불필요한 요소들이 디자인을 손상시키기 시작할 때 드로잉을중단한다. - P13

드로잉에는 내가 추구하는 대상의 특성이 반드시 드러나야한다. 드로잉은 조각품을 만드는 조각가의 스케치처럼 단순히 아이디어를 끄적인 그림이 아니라 시공된 건축으로 끝나는 창조 작업의 필수요소이다. - P13

디테일은 공식적인 리듬, 즉 세밀히 분할된 구조를 만든다. 디테일은 적절한 지점에서 설계의 기본 아이디어가 요구하는 것, 예를 들면 결합 또는 분리, 긴장감 또는 가벼움, 마찰, 견고함, 취약성 등을 표현한다. - P15

성공적인 디테일은 장식으로만 머무르지 않는다. 시선을 자극하거나 눈에 거슬리지 않고 오히려 자신이 속한 전체에 대한 이해로 인도한다. - P15

낡은 계단의 철판을 지탱하는 두 개의 못과 같은 디테일은 우리의 관심을 사로잡는다. 어쩌면 처음느껴보는 감정이다. 여러 감정이 교차한다. 무언가가 마음을 움직인다. - P15

건축가들은 건물에 대해 자신이 고심한 합리적인 측면에 대해서는 말을 많이 하지만 그 뒤에 있는 비밀스러운 열정에 대해서는 말을 아낀다. - P19

설계는 질서의 체계에 대한 이해와 구축에 근거하는 부분이 많다. 그러나 우리가 추구하는 건축의 필수적인 본질은 감정과 통찰에서 비롯된다. - P21

직관이라는 귀중한 순간은 꾸준한 작업에서 나온다. 갑자기 출몰한 내면의 이미지 때문에 설계에 새로운 선이 하나 추가되면 설계 전체가 달라진다. 한순간에 새로운 형태가 나온다. - P21

건축의 공간 구성에는 기본적으로 두 가지 가능성이 존재한다. 첫째, 내부로 공간을 고립시키는 폐쇄적인 건축, 둘째, 무한히 연속적으로 연결된 공간을 포용하는 개방적인 건축이다. - P21

건축사를 비롯한 설계 관련 교육은 나름의 교육적 가치를 갖고 있다. 학교를 졸업하고 건축가로 활동하다 보면 건축의 역사에 담긴 지식과경험의 무한한 보고와 친숙해진다. 그 역사의 보고를 작업과 결합시킬때 진정한 우리만의 것을 만들 가능성이 높다. - P23

머릿속으로 건축을 떠올리다 보면 종종 숨막힐 듯 공허한 순간이 찾아온다. 내가 원하는 것과 전혀 다른 것만 생각나거나 아예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다. 그럴 때는 내가 습득한 모든학문적 건축 지식을 떨쳐버리려고 노력한다. - P23

건축이 만들어지는 창조의 행위는 모든 역사와 기술 지식을 초월한다. 창조 행위의 초점은 우리 시대의 여러 문제와의 소통이다. 건축은 창조되는 순간 매우 특별한 방식으로 현재와 연결된다. - P23

흘러간 시간에 대한 인식, 그 공간과 방에 있었던 삶에 대한 자각, 그 공간이 지닌 특별한 분위기가 남는다. 이런 순간에 건축의 미학적·실용적 가치, 양식적·역사적 의미는 중요하지 않다. - P24

나는 설계할 때 내가 원하는 건축과 연관성을 가진 내 기억 속의 이미지와 분위기로 방향을 잡는 편이다. 생각에 떠오르는 이미지들은 보통주관적인 경험에서 출발하며 건축의 세부 묘사가 수반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나는 풍성한 시각적 형태와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떠오른이미지의 의미를 설계하는 내내 고민한다. - P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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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자신의 위치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용기가 미국과 유럽의 지식인들에게 결여돼 있다고 지젝은 비판한다.

그런 집단 퍼포먼스는 본질적으로 파시스트적인 게 아닐뿐더러, 좌파나 우파가 전유할 수 있는 ‘중립적인’ 것도 아니다. 본래 노동자 운동에서 태어난 집단 퍼포먼스를 훔쳐서 전유한 것이 나치즘이었을 뿐이다.(『실재의 사막』, 109쪽)

니체식 계보학은 ‘원조’의 오용과 왜곡을 찾아낸다. 그리고 그것들 간의 ‘단절’을 강조한다. ‘원조’라는 건 그런 오용·왜곡이 그 부정적 결과를 소급하여 덮어씌운 것에 불과하다.

급진적 좌파의 이력을 가진 인사들이 성숙한 실용적 정치를 주장하면서 자신의 입장을 옮겨갈 때, 그 사이 ‘잠복기’에 나타나는 것이 자기 몸에 대한 강박적 관심이라는 것이 지젝의 지적이다.

매일 우리는 물론 자기 의견이 옳지 않을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과 마주치게 된다. 물론 그의 의견은 옳은 것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건 자신의 의견이 아니니까.(『실재의 사막』, 112쪽)

즉, 어떤 의견을 내세울 때는 그것이 옳다는 믿음을 수반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건 의견도 아니다. 그런 걸 두고 체스터턴은 ‘불경스럽다’고 말한다.

지젝은 이러한 비판이 해체주의적 수사학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고 말한다. 겉보기에는 자신의 발언 위치를 상대화하면서 스스로를 낮추는 것처럼 보이지만, 한편으론 정반대로 그런 발언 위치를 특권화하기에 ‘불경스럽다’.

"자유민주주의자는 안전한 주관적인 위치에 있으면서 아이러니하게도 모든 전면적 개입을, 모든 ‘독단적인’ 편들기를 완전히 묵살하는 것이다."(『실재의 사막』, 112쪽) 하지만 근본주의자는 한쪽 발만 적당히 담그고 있는 것이 아니라 두 발 다 담그는 것이다.

부패한 기존의 정치질서에 반대하는 모든 캠페인이 결과적으로는 포퓰리즘적 극우파로 귀결되고 마는 것이다

"우리는 현실적인, 체념할 줄 아는 지혜의 정신으로 이 부패를 인정하고 용인할 것인가, 아니면 민주주의의 부패와 그것을 제거하려는 우파의 캠페인이라는 악순환을 깨기 위해 민주주의에 대한 좌파적 대안을 정식화할 수 있는 용기를 발휘할 것인가?"(『실재의 사막』, 114쪽)

‘종교와 싸우는in fighting religion’ 무신론자들은 종교가 자유를 억압한다는 명분으로 종교와 투쟁하지만, 정작 그 과정에서 그들의 자유를 잃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체스터턴이 말하는 무신론의 역설이다

"‘테러리스트’들이 타인에 대한 사랑 때문에 이 세상을 파괴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한다면, 테러와 싸우는 우리의 전사들은 무슬림 타자에 대한 증오 때문에 자신들의 민주주의 세계를 파괴할 준비가 되어 있다."(『실재의 사막』, 123쪽)

‘소외된’ 상품화의 속박에서 탈출하는 유일한 방법은 새로운 집단성을 창조하는 것이란 점이다.

이데올로기적 대타자의 존재에 대한 포스트모던적 의심에 해줘야 할 적절한 대답은 ‘존재하지 않는 건 주체 그 자체야’이다…….(『실재의 사막』, 124~125쪽)

선의 진정한 위대함은 그것이 ‘진정한 자아’ 속으로 가는 ‘내면의 여행’으로 환원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 반대로 선 명상의 목표는 자아를 완전히 비우는 것이며, 발견할 ‘자아’와 ‘내면의 진실’은 없다는 점을 인정하는 것이다.(『실재의 사막』, 125쪽)

‘생명의 신성함’을 주장하며 그것에 기생하는 초월적 힘들의 위협으로부터 생명을 수호하려는 이들은 결국 ‘우리가 고통 없이, 안전하게, 그리고 지루하게 살아가게 될 관리된 세상’으로 귀결하게 된다. 그 공식적 목표인 ‘오래 사는 즐거운 삶’을 위해 모든 실제 쾌락이 금지되거나 엄격하게 통제되는(흡연, 마약, 음식 등) 세상으로 말이다.(『실재의 사막』, 130쪽)

탈레반 포로들을 배제·격리 수용하지만 또 다른 한편으론 난민들에게 ‘인도주의적’ 원조를 베풀기도 한다. 공통적인 것은 두 경우 모두 ‘온전한 인간성full humanity’을 박탈당했다는 것. 그런 점에서 ‘강제수용소’와 ‘난민수용소’는 모순적으로 보이지만 결국 하나다. 이 둘은 변증법적으로 통일된다.

아마 ‘지역 주민’에 대한 호모 사케르적 취급의 궁극적 이미지는 아프가니스탄 하늘 위를 날아가는 미군 전투기의 이미지일 것이다. 그것이 무엇을 떨어뜨릴지, 폭탄일지 구호식량 꾸러미일지는 결코 확신할 수 없다.(『실재의 사막』, 134쪽)

‘능동적’ 행위자의 ‘수동적(마조히즘적)’ 욕망이 생각보다는 뿌리 깊은 근거를 갖고 있다는 게 지젝의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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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 코르뷔지에의 사유
르 코르뷔지에 지음, 정진국 옮김 / 열화당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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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 코르뷔지에의 저서 중 우선 순위에서는 밀리지만 흥미로운 책. 사유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평화를 갈망한다. 주로 시대적 상황에 대한 인식이나 그에 관한 아이디어 등을 다루는 짧은 글들로 이루어져 있다. 역자의 주석이 친절하게 담겨 있어서 더 와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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