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상 자신의 위치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용기가 미국과 유럽의 지식인들에게 결여돼 있다고 지젝은 비판한다.

그런 집단 퍼포먼스는 본질적으로 파시스트적인 게 아닐뿐더러, 좌파나 우파가 전유할 수 있는 ‘중립적인’ 것도 아니다. 본래 노동자 운동에서 태어난 집단 퍼포먼스를 훔쳐서 전유한 것이 나치즘이었을 뿐이다.(『실재의 사막』, 109쪽)

니체식 계보학은 ‘원조’의 오용과 왜곡을 찾아낸다. 그리고 그것들 간의 ‘단절’을 강조한다. ‘원조’라는 건 그런 오용·왜곡이 그 부정적 결과를 소급하여 덮어씌운 것에 불과하다.

급진적 좌파의 이력을 가진 인사들이 성숙한 실용적 정치를 주장하면서 자신의 입장을 옮겨갈 때, 그 사이 ‘잠복기’에 나타나는 것이 자기 몸에 대한 강박적 관심이라는 것이 지젝의 지적이다.

매일 우리는 물론 자기 의견이 옳지 않을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과 마주치게 된다. 물론 그의 의견은 옳은 것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건 자신의 의견이 아니니까.(『실재의 사막』, 112쪽)

즉, 어떤 의견을 내세울 때는 그것이 옳다는 믿음을 수반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건 의견도 아니다. 그런 걸 두고 체스터턴은 ‘불경스럽다’고 말한다.

지젝은 이러한 비판이 해체주의적 수사학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고 말한다. 겉보기에는 자신의 발언 위치를 상대화하면서 스스로를 낮추는 것처럼 보이지만, 한편으론 정반대로 그런 발언 위치를 특권화하기에 ‘불경스럽다’.

"자유민주주의자는 안전한 주관적인 위치에 있으면서 아이러니하게도 모든 전면적 개입을, 모든 ‘독단적인’ 편들기를 완전히 묵살하는 것이다."(『실재의 사막』, 112쪽) 하지만 근본주의자는 한쪽 발만 적당히 담그고 있는 것이 아니라 두 발 다 담그는 것이다.

부패한 기존의 정치질서에 반대하는 모든 캠페인이 결과적으로는 포퓰리즘적 극우파로 귀결되고 마는 것이다

"우리는 현실적인, 체념할 줄 아는 지혜의 정신으로 이 부패를 인정하고 용인할 것인가, 아니면 민주주의의 부패와 그것을 제거하려는 우파의 캠페인이라는 악순환을 깨기 위해 민주주의에 대한 좌파적 대안을 정식화할 수 있는 용기를 발휘할 것인가?"(『실재의 사막』, 114쪽)

‘종교와 싸우는in fighting religion’ 무신론자들은 종교가 자유를 억압한다는 명분으로 종교와 투쟁하지만, 정작 그 과정에서 그들의 자유를 잃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체스터턴이 말하는 무신론의 역설이다

"‘테러리스트’들이 타인에 대한 사랑 때문에 이 세상을 파괴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한다면, 테러와 싸우는 우리의 전사들은 무슬림 타자에 대한 증오 때문에 자신들의 민주주의 세계를 파괴할 준비가 되어 있다."(『실재의 사막』, 123쪽)

‘소외된’ 상품화의 속박에서 탈출하는 유일한 방법은 새로운 집단성을 창조하는 것이란 점이다.

이데올로기적 대타자의 존재에 대한 포스트모던적 의심에 해줘야 할 적절한 대답은 ‘존재하지 않는 건 주체 그 자체야’이다…….(『실재의 사막』, 124~125쪽)

선의 진정한 위대함은 그것이 ‘진정한 자아’ 속으로 가는 ‘내면의 여행’으로 환원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 반대로 선 명상의 목표는 자아를 완전히 비우는 것이며, 발견할 ‘자아’와 ‘내면의 진실’은 없다는 점을 인정하는 것이다.(『실재의 사막』, 125쪽)

‘생명의 신성함’을 주장하며 그것에 기생하는 초월적 힘들의 위협으로부터 생명을 수호하려는 이들은 결국 ‘우리가 고통 없이, 안전하게, 그리고 지루하게 살아가게 될 관리된 세상’으로 귀결하게 된다. 그 공식적 목표인 ‘오래 사는 즐거운 삶’을 위해 모든 실제 쾌락이 금지되거나 엄격하게 통제되는(흡연, 마약, 음식 등) 세상으로 말이다.(『실재의 사막』, 130쪽)

탈레반 포로들을 배제·격리 수용하지만 또 다른 한편으론 난민들에게 ‘인도주의적’ 원조를 베풀기도 한다. 공통적인 것은 두 경우 모두 ‘온전한 인간성full humanity’을 박탈당했다는 것. 그런 점에서 ‘강제수용소’와 ‘난민수용소’는 모순적으로 보이지만 결국 하나다. 이 둘은 변증법적으로 통일된다.

아마 ‘지역 주민’에 대한 호모 사케르적 취급의 궁극적 이미지는 아프가니스탄 하늘 위를 날아가는 미군 전투기의 이미지일 것이다. 그것이 무엇을 떨어뜨릴지, 폭탄일지 구호식량 꾸러미일지는 결코 확신할 수 없다.(『실재의 사막』, 134쪽)

‘능동적’ 행위자의 ‘수동적(마조히즘적)’ 욕망이 생각보다는 뿌리 깊은 근거를 갖고 있다는 게 지젝의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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