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장5는 감상에 빠지려는 마음을 다잡고 눈에 힘을 주었다.
유일하게 자신이 일꾼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는 9였다. 9의 눈을 보고 있으면 반장5는 벌거벗은 것 같은 기묘한 수치심을 느꼈다. 그것은 일꾼일 때 느꼈던 수치심과는 다른 종류의 감정이 었다. 애써 잊으려 했던 기억들이 불쑥 생각나거나, 힘들게 겨 우 옮겨놨던 바위가 처음 위치에 되돌아가 있는 것 같은 무력감 이 마음을 사로잡았다. 우연히 9의 눈빛과 마주치면 먼저 눈을 피하는 것은 반장5였다. 21은 아무 생각 없이 반장5를 보고 있 다. 9에게서 눈을 돌린 반장5의 눈빛이 21의 눈과 마주쳤다. 잠시 멍해 있던 반장5의 얼굴이 빠른 속도로 일그러졌다.
개새끼가! 뭘 쳐다봐?
평소보다 과격한 반장5의 구타가 오랫동안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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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경애가 그 ‘봉인‘이라는 말을 얼마나 필사적으로 붙들었는지는 아무도 모를 것이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방식에는 육체 너머의 것이 있다는 것, 어떤 사랑은 멈춰진 기억을 밀고 나가는 것만으로도 계속될 수 있다는 것. 사라진 누군가는 그렇게 기억하는 사람의 인생에서 다시 한번 살게 된다는 것.
그 겨울 차를 함께 마시고 선배가 전화를 받으며 산주를 만나러가는 장면을 경애는 쓰디쓴 모욕감 같은 것을 밀어넣으며 지켜보았다. 그런 상황에서도 선배가 통화하는 저편에는 산주가 있겠구나, 하는 안도의 마음이 들었다. 그것은 분명한 안심이었고 이후에 산주를 완전히는 잃지 않는 것에 경애가 매달리게 된 이유이기도 했다. 물론 그렇게 선배를 만나고 뒤돌아 걷는 사이사이 그만할까, 하는 말이 올라오기도 했다. 완전히 끝을 낼까,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사람처럼, 하지만 그런 종결을 선택하는 것은 불가능하게 느껴졌다. 산주를 죽은 사람처럼 만들고 상관없이 살아간다는 것이. 그건 적어도 스스로를 피조라고 불렀던 어느 시절 누군가를 잃어본사람에게는 가능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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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애의 마음
김금희 지음 / 창비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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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가 그렇게 쉬워질 수도 있다고 말할 때 상수는 가슴이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이동하는 기분이었다. 마음이 마치 계절이나 낮과 밤처럼 자연스럽게 변하는 것이 아니라 물리적으로 강제로 위치가 바뀌게 되는 것 같았다. 그건 엄마가 영영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과 다르게 마음이 아주 차가워지는 것이었다. 자기가 어머니에게 중요한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느끼며 누군가가 어깨를 툭 쳐낸 것처럼 한발 물러나 조용히 다른 곳으로 가야 하는 순간을 ‘각오‘ 하는 것이었다. 내쳐짐을 각오하는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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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말을 할 수도 없고 단 한 마디도 정확히 발음되지 않겠지만 상관없다. 나는 말한다. 그녀는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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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분명 장애가 있지. 타인의 장애를 이해한다는 것이 가능한일일까? 장애는 이해할 수 있는 게 아니야 오직 확인만 가능할뿐이지. 잘려져 나가거나 뽑혀져 없어져야만 비로소 알아볼 수있는 불구, 혹은 처음부터 남다른 기형의 조건들, 그들은 오직확연하게 다른 것만 분간할 수 있거든. 입속에 숨은 작은 혓바닥이 아무리 떨며 뒤틀려도 내 혀는 불구가 아니야. 그들은 내장애를 이해할 수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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