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경애가 그 ‘봉인‘이라는 말을 얼마나 필사적으로 붙들었는지는 아무도 모를 것이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방식에는 육체 너머의 것이 있다는 것, 어떤 사랑은 멈춰진 기억을 밀고 나가는 것만으로도 계속될 수 있다는 것. 사라진 누군가는 그렇게 기억하는 사람의 인생에서 다시 한번 살게 된다는 것.
그 겨울 차를 함께 마시고 선배가 전화를 받으며 산주를 만나러가는 장면을 경애는 쓰디쓴 모욕감 같은 것을 밀어넣으며 지켜보았다. 그런 상황에서도 선배가 통화하는 저편에는 산주가 있겠구나, 하는 안도의 마음이 들었다. 그것은 분명한 안심이었고 이후에 산주를 완전히는 잃지 않는 것에 경애가 매달리게 된 이유이기도 했다. 물론 그렇게 선배를 만나고 뒤돌아 걷는 사이사이 그만할까, 하는 말이 올라오기도 했다. 완전히 끝을 낼까,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사람처럼, 하지만 그런 종결을 선택하는 것은 불가능하게 느껴졌다. 산주를 죽은 사람처럼 만들고 상관없이 살아간다는 것이. 그건 적어도 스스로를 피조라고 불렀던 어느 시절 누군가를 잃어본사람에게는 가능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