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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머무는 마음 - 시가 피어나고 그림이 머무는 자리
나태주 지음, 나난 그림 / OTD / 2026년 9월
평점 :

메마른 장작이 수레에 실려가듯 만원버스에 실려 출근하던 어느 날이었다.
무심코 바라본 창 밖 교보생명에 이불을 덮은듯 커다란 현수막이 걸려있었다.
그곳에 써있던 시 하나.
<풀꽃>-나태주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그 시를 본 순간 나는 메마른 장작이 아니라 나무의 기둥이 되고, 줄기가 되고, 잎이 돋고, 꽃이 피는것 같았다.
뛰어난 사람들만 인정받고, 각광받고, 예쁨받는 세상에서 '자세히 보면 너도 예쁘다' 라는 말이
나를 자세하게 지켜봐준 누군가가 넌 참 괜찮은 사람이야. 라고 조용히 위로 해 주는것만 같았다.
나태주 시인의 글은 이렇듯 거창한 말로 마음을 움직이지 않는다.
편안하고 담백하고 소박한 말로, 오히려 그래서 더 깊은 온기를 건넨다.
『오래 머무는 마음』에는 아주 작고 평범한 것들, 우리가 무심코 지나치기 쉬운 순간과 사람을 한 번 더 바라보게 하는 글들이 담겨 있다.

요즘은 한 편의 영상도 끝까지 보기 어려운 시대다.
짧은 영상조차 취향에 맞지 않으면 몇 초 만에 넘겨버린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 잊고 있던 감각이 살아나는것 같았다.
작은것들을 손바닥에 조심스레 올려두고 사랑스런 눈으로 요리 조리 살펴보는 듯한 느낌에 행복감이 밀려왔다.


나난의 그림 역시 그 글들 사이에 조용히 머물며, 말로 다 설명하지 못한 감정을 대신 건네준다.
그리고 이 책에서 뜻밖의 반가운 사람을 만났다.
바로 나난 작가.
고등학교 시절, 패션 잡지가 아닌 젊은이들의 문화가 담긴 『런치박스』라는 잡지를 무척 좋아했다.
홍대 어딘가에 있을 것 같은 자유분방한 에디터들이 만든, 젊음과 열정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잡지였다.
입시 압박에 답답했던 내게 『런치박스』는 일종의 탈출구였다.
그리고 그곳에서 만난 이름이 ‘나난’이었다.
자유분방하면서도 자기만의 색이 분명한 그 언니가 너무 멋있어서, 언젠가 꼭 한번 만나보고 싶다고 생각했었다. ㅎㅎ
그 잡지를 통해 내게 남은 몇 가지 키워드가 있다면 나난과 프리다 칼로였다.
특히 잡지에서 연재했던 프리다 칼로에 관한 글과 그림을 보며 처음 그녀를 알게 되었고,
어린 나에게는 꽤나 충격적인 만남이었다.
그렇게 나난이라는 이름을 마음 한구석에 간직한 채 20여 년을 살았다.
그리고 『오래 머무는 마음』에서 그림을 그린 ‘나난’이라는 이름을 발견했을 때,
‘어? 내가 아는 그 나난?’
혼자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20여 년 만에 혼자 다시 만난 기분이었다.
꺅.
나난 언니, 정말 멋진 작가로 잘 살고 계셨구나.
그래서인지 나난 작가의 그림은 내게 단순히 시를 예쁘게 꾸며주는 삽화가 아니었다.
그림 사이사이에서 오래전 내가 좋아했던 잡지와, 그때의 나 까지 함께 떠올랐다..)
우리는 많은 것을 만나고 또 빠르게 스쳐보내며 살아간다.
자연도, 계절도, 사랑도, 행복했던 순간도 그렇다.
그런데 『오래 머무는 마음』은 그렇게 스쳐 지나가는 것들에게 다시 한번 마음을 내어주는 책처럼 느껴졌다.
무심코 지나쳤던 것들에 가만히 시선을 건네고, 그 안에 있던 감정과 아름다움에 다시 생명을 불어넣어 주는 것 같았다.
꼭 대단한 사랑이나 특별한 추억이 아니어도
누군가 건넨 따뜻한 말 한마디,
무심히 바라본 풍경,
소소한 하루의 기쁨처럼
아주 작은 것들도 오래 마음에 남기도 한다.
그리고 연인의 사랑에 대한 시를 읽으며
전생 같던 연애시절의 감정이
새록새록 솟아나는 기분이었다.
아, 나에게도 이런 시절이 있었지.ㅋ
그때의 설렘과 서툼과 애틋함이 다시 살아나는 듯했다.
그래서 이 책은 단순히 ‘좋은 시를 읽는 책’이라기보다, 무심히 지나쳤던 것들을 다시 바라보게 하는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작은 것에 오래 마음을 두다 보면 우리의 감각도 조금씩 풍성해진다.
평범한 하루가 조금 다르게 보이고, 익숙한 사람이 새롭게 보이고, 지나간 기억 속에서도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마음 하나가 모습을 드러낸다.
어쩌면 ‘오래 머무는 마음’이란 그런 것이 아닐까.
무언가를 붙잡아 두는 것이 아니라,
한 번 더 바라보고, 한 번 더 마음을 내어주는 것.
책장을 덮고 나니 제목처럼 한동안 이 책의 문장과 그림이 마음에 오래 머물렀다.
그리고 나도 누군가에게
쉽게 스쳐 지나가는 사람이 아니라,
오래 바라보고 싶은 사람,
오래 기억하고 싶은 사람,
오래 마음에 머무는 사람이 되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