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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을 품은 집, 장경판전 ㅣ 문학의 즐거움 56
조경희 지음, 김태현 그림 / 개암나무 / 2020년 5월
평점 :
https://blog.naver.com/gustn3377/221991600938
"자신의 운명을 바꿀만한 중요한 순간이 오면, 미련 없이 자신을 버려야 해. 그래야 새롭게 태어날 수 있단다."
소화는 아버지와 둘이 살고 있었다. 소화의 아버지는 목수였지만, 소화가 생기고 난 뒤 오래 집을 비울 수 없어 매품팔이를 하며 생계를 이어나가고 있어다.
그날도 어찌 보면 크게 다르지 않은 매품팔이를 하는 날이었다. 매질을 하는 사람이 악독한 점박이였던걸 빼면 말이다. 이번에도 거뜬히 돌아올 줄 알았던 아버지는 결국,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가버리고 말았다.
소화의 역경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이번 매값으로 남은 빚을 모두 탕감해 주겠다던 빚쟁이 할아버지가 찾아와 집과 딸인 소화로 남은 빚은 셈하겠다는 소리를 늘어놓았다. 다른 이들의 위협과 만류로 소화는 지킬 수 있었지만, 아버지와의 추억이 가득 담긴 집을 잃고 말았다.
이제 소화에게는 항상 자신에게 따스했던 아버지도, 아버지와 함께 했던 집도 모두 사라져버렸다.
그러던 중 아버지의 친구인 대목장 아저씨가 어느 절의 새로운 건물을 짓기 위해 떠난다는 소식을 들었고, 소화는 자신도 데려가 달라고 말한다.
하지만 아저씨는 댕기나 하는 여자아이들이 하기엔 버거운 일이라며 거절했고, 그때 소화는 아버지의 말을 떠올리고는 머리를 싹둑 잘라낸다.
"자신의 운명을 바꿀만한 중요한 순간이 오면, 미련 없이 자신을 버려야 해."
그렇게 소화는 대목장 아저씨를 따라 해인사의 장경판전을 짓기 위해 떠나게 된다.
*매품팔이 : 돈을 받고 곤장을 대신 맞아주는 것
'바람을 품은 집'이라는 말이 소화의 가슴속에 울려 퍼졌다. 되새길수록 참으로 아름다운 말이었다. 장경판전은 불어오는 바람뿐 아니라 모든 이들의 가슴속에 간직한 바람을 품은 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팔만대장경은 역사를 배울 때 꼭 등장하는 문화재 중 하나이다. 이 문화재가 보관되어 있는 곳, 그곳이 바로 장경판전이다.
장경판전은 국보 제52호로 합천 해인사에 위치한 국보 제32호 팔만대장경이 살고 있는 집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팔만대장경은 알아도 장경판전은 잘 모르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관심이 없는 사람들에게 장경판전이란 옛 선조들의 지혜가 담겨있다는 건축물 정도로만 해석될 수 있다. 하지만 작가는 장경판전을 그저 건축물이 아닌 그 시대 사람들의 삶과 바람을 엿볼 수 있는 의미 있는 곳으로 생각하게 만들어 주었다.
우리는 항상 그 자리에 있던 것들에 대해 무뎌진다. 사람이든 건물이든. 항상 그곳에 있는 것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 익숙함에 생각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던 것들이 어떤 의미를 가졌었는지, 어떤 소망이 있었는지 그 처음을 떠올릴 수 있다면, 그 당연했던 것들이 새롭게 느껴질 것이다.
이 책을 읽고 나서, 그냥 역사적 건축물에 지나지 않았던 장경판전이 나에게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오기 시작한 것처럼.
'바람을 담은 집'
팔만대장경이 오래도록 보관될 수 있도록 바람이 잘 통하는 집이며, 오래도록 후대에 전해지길 바라는 바람, 자신의 신념이 담겼으면 하는 바람, 꿈을 찾고 싶은 바람 등 장경판전을 지은 모든 이들의 크고 작은 소망들이 가득 담긴 집. 그것이 바람을 담은 집, 장경판전이다.
어느 것 하나도 그냥 만들어지는 것이 없다. 누군가의 손을 통해 만들어진 그 무언가에는 분명히 크고 작은 바람들이 담겨 있을 것이다.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들에 대해 조금씩 생각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게 해줬던 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