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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라임오렌지나무
이희재 지음 / 청년사 / 2003년 3월
절판


최대한 스트레스를 줄이라는 의사의 처방도 있고 해서, 나는 일부러 편한 책을 택했다.
마음에 감동을 주고, 수월하게 읽어넘길 수 있는 책, 그것이 나의 구매원칙이었다.
그래서 고르게 된 것이 이희재의 나의 라임 오렌지나무였는데,
평소 이희재의 그림체가 조금 진부하다고 생각했었는데다 책은 왜 하드커버로 해 놨는지,
아무튼 책도 비싼 편인 것 같아서 좀 망설이다가,
순전히 정신건강에는 이만한 책이 없을 거라는 믿음으로 이 책을 구입했다.

내가 왜 그랬을까,,,읽기 시작한 날 내가 엄마를 약간 서운하게 하는 사건이 있었다. 분명 서먹서먹한 상태는 내가 미안하다는 말을 해도 하루 이상은 갈텐데..기분이 너무 가라앉고 밤에는 잠도 오지 않아 결국 불을 켜고 책을 읽었다.

실직자 아버지, 직업전선에 대신 나가서 집안일과 직업 모두를 책임져야 하는 엄마와 누나들, 구두닦이를 하면서 돈을 벌거나 거리에 나가 나름대로의 장난을 치며 노는 아이들.
생계가 보장되지 않은 가정의 풍경은 언제나 어둡고, 가족들의 표정에는 외로움과 아픔이 언제나 가득 배어있어, 조금만 건드려도 눈물이 되고 폭력이 된다.
그런데 여기서 전혀 분위기 파악 못하고 사는 구성원이 하나 있으니, 그 이름이 바로 제제.
어른 하는 말은 잘도 따라하지만 마음은 너무나 순진한 다섯살 남자아이, 이 책의 주인공이다.
유난히 꿈이 많고 장난이 많은 이 아이는 가족들에겐 귀찮음, 무관심, 무시의 대상이 되지만
우연히 시장에서 만난 뽀르뚜가 아저씨에게 제제는 사랑스러운 '아이'일 뿐이다.

아저씨에게 주기 위해 힘들게 만든 풍선을 형이 터뜨리고,
누나에게 이가 빠질 정도로 매를 맞은 후 제제가 말한다.
'내가 처음으로 만든 풍선이었어. 첫번째 풍선만이 가장 아름다워. 첫 풍선이 소용없게 되면, 더이상 만들고 싶은 마음이 없어져'

언어폭력, 물리적 폭력으로 어린이 본연의 그 '첫번째 순수함'을 빼앗긴 아이는 결국 메마른 인성을 가진 슬픈 표정만을 만들어 낼 뿐이다. 아이는 너무 빨리 어른이 된다. 그리고 어린 마음을 지켜주고 진심으로 사랑했던 아저씨는 언제나 제제의 등교길을 걱정했던 그 기찻길에서 어느날 기차에 치어 제제의 곁을 떠나게 된다.
이미 어른이 되어버린 아이는, 자신을 무자비하게 구타했던 아버지가 취직이 된 후 용서를 구하며 다가와도 쉽게 마음을 열고 웃지 못한다.

얼마전 'TV책을 말하다'에서 신작 '별들의 들판'으로 대담을 하던 공지영에게 '왜 당신의 소설은 항상 약자만 다루느냐'는 질문이 주어졌다. 대답은 간단했다.
'강자를 대변하는 문학이란 없어요. 그 모습을 비추어 약자의 아픔을 끌어낼 수는 있겠죠. 문학이란 기본적으로 약자의 입장에 서 있습니다'

직업이 없는 가장, 기술이 없는 여성, 어른들로부터 보호받지 못하는 어린이, 돈은 있지만 가정이 없는 외로운 남자, 예쁜 선생님에 가려 아이들로부터도 외면받는 여선생,
모두가 외롭고 고단하다. 그리고 작가는 이들의 모습을 담담하게 그려나가며 가난이 어떤 상황을 낳는지, 어린이의 순수함이란 왜 보호받아야만 하는지를 묻는다.
약자에 대한 아픔의 공감이 문학의 시작이다. 그리고 그들의 삶이 내 삶처럼 뜨겁게 와 닿을 때, 그것이 바로 '정의'의 시작이다.

책을 다 읽고 나니 새벽 4시가 다 되었는데, 마지막 장면에 뽀르뚜가 아저씨가 죽었다는 걸 알고 나서,
한밤중에 혼자서 엉엉하는 소리를 내며 한참을 울었다.
다들 어릴때 읽는 소설이라는데, 나는 읽은 적이 없어서 그가 죽는다는게 내게는 큰 반전이었다 -.-
세상에 그렇게 좋은 사람이....

처음엔 다소 어설프게 그려놓은 것 같던 그림체도 어느새 많이 익숙해졌다. 가끔씩 나오는 구체적인 인물그림은 그가 역시 그림 그리는 사람임을 알게 해 줄 정도로 표정이 살아있었고, 때로는 장인정신 같은 것도 느껴졌다.
아, 엄마랑 서운했던 건 어떻게 됐냐고...다음날 저녁에 수다를 떨면서 다 풀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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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르치스와 골드문트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66
헤르만 헤세 지음, 임홍배 옮김 / 민음사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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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서점아저씨의 지나가는 말 한마디로도
깊은 생각을 하는 소심한 나.
하지만 어느순간 나는 ,
어떠한 현안들에 대해서도 날카로운 입장을 취하는 이성적인 사람이 되어있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 사람인가?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는 무언가 답을 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마도 나는 이성과 논리의 소유자인 나르치스쪽일 거라고 짐작했음을 시인한다)
그러나 책을 다 덮은 나는 어느쪽에도 확실하지 않은 나를 발견했고,
그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헤세의 소설들은 너무나도 감성적이다.
(감각적이라는 말과 혼동해선 안된다)
시인이 되고자 수도원에서 도망치고,
(겨우!) 열다섯 살 때 자살을 기도해 정신병원에
입원하기도 했던 전력으로 보아,
그는 매우 감수성이 예민한 사람이었음이 틀림없다.
세상의 부조리에 더 크게 아파하고,
사람들의 면면에 더 크게 느끼는 그에게
나르치스라는 인물과 골드문트라는 인물의 의미는 무엇인가.


조금 뜬금없이 들리겠지만,
카페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세상사람들을 ‘카페에 가는 사람과 가지 않는 사람’으로 분류하고,
책읽기에 빠져있는 사람은 ‘책 좀 읽는 사람이냐, 아니냐’로 분류한다.
정치에 관심 많은 사람은 누군가를 볼때 ‘진보냐, 보수냐’를 중요시한다.

자신이 서 있는 자리, 자신의 성향에 따라 인류는 얼마든지 두 그룹으로 분류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헤르만 헤세에게 사람은 어떻게 나뉘어져 보였을까?
감수성 예민한 그에게 사람의 분류는
지성으로 대표되는 나르치스와 감성적인 골드문트로 나뉘어진다.

물론 이런식의 분류들은 매우 과장된 부분이 없지 않지만
사람들은 자신이 서 있는 그 위치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이렇게, 저렇게 나눠보기도 하면서
나는 그렇다면 과연 어떤 사람인가를 확인하기도 한다.
이른바 자아를 찾는 과정인 것이다.
(어차피 끝이 없는 일이지만 어쩌면 이것은 본능인 듯.)

바로 여기에 이 책의 가치가 있다.
헤세는 ‘그렇담 넌 ’나르치스냐, 골드문트냐‘ 묻는 것이 아니다.
그는 나에게 직접 묻지 않는다.
이 책은 그저 문제제기일뿐 그 이상도,이하도 아니다.
그러므로 마치 인터넷에 떠도는 심리테스트를 하듯
나는 어떤 타입일까, 볼 필요는 없으며
단지 나르치스라는 인간형과 골드문트라는 인간형을 보면서
또한 자신을 느끼면 되는 것이다.

세상에 완전한 이분법이란 없다.
어떠한 문제에 있어서는 보수적인 입장을 취하는
진보주의자도 있듯이
나르치스의 모습을 가진 사람이
골드문트의 성격도 많이 포함할 수 있다.
마리아브론 수도원에서 지와 사랑의 두가지 면을 가지고
서로에게 끌리고 우정을 나누었던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두 사람 모두 각자의 모습에서 아름다움이 있다.
어차피 감성이 우세하냐, 지성이 우세하냐 만을 가지고
인생을 논할 수는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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