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르치스와 골드문트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66
헤르만 헤세 지음, 임홍배 옮김 / 민음사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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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서점아저씨의 지나가는 말 한마디로도
깊은 생각을 하는 소심한 나.
하지만 어느순간 나는 ,
어떠한 현안들에 대해서도 날카로운 입장을 취하는 이성적인 사람이 되어있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 사람인가?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는 무언가 답을 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마도 나는 이성과 논리의 소유자인 나르치스쪽일 거라고 짐작했음을 시인한다)
그러나 책을 다 덮은 나는 어느쪽에도 확실하지 않은 나를 발견했고,
그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헤세의 소설들은 너무나도 감성적이다.
(감각적이라는 말과 혼동해선 안된다)
시인이 되고자 수도원에서 도망치고,
(겨우!) 열다섯 살 때 자살을 기도해 정신병원에
입원하기도 했던 전력으로 보아,
그는 매우 감수성이 예민한 사람이었음이 틀림없다.
세상의 부조리에 더 크게 아파하고,
사람들의 면면에 더 크게 느끼는 그에게
나르치스라는 인물과 골드문트라는 인물의 의미는 무엇인가.


조금 뜬금없이 들리겠지만,
카페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세상사람들을 ‘카페에 가는 사람과 가지 않는 사람’으로 분류하고,
책읽기에 빠져있는 사람은 ‘책 좀 읽는 사람이냐, 아니냐’로 분류한다.
정치에 관심 많은 사람은 누군가를 볼때 ‘진보냐, 보수냐’를 중요시한다.

자신이 서 있는 자리, 자신의 성향에 따라 인류는 얼마든지 두 그룹으로 분류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헤르만 헤세에게 사람은 어떻게 나뉘어져 보였을까?
감수성 예민한 그에게 사람의 분류는
지성으로 대표되는 나르치스와 감성적인 골드문트로 나뉘어진다.

물론 이런식의 분류들은 매우 과장된 부분이 없지 않지만
사람들은 자신이 서 있는 그 위치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이렇게, 저렇게 나눠보기도 하면서
나는 그렇다면 과연 어떤 사람인가를 확인하기도 한다.
이른바 자아를 찾는 과정인 것이다.
(어차피 끝이 없는 일이지만 어쩌면 이것은 본능인 듯.)

바로 여기에 이 책의 가치가 있다.
헤세는 ‘그렇담 넌 ’나르치스냐, 골드문트냐‘ 묻는 것이 아니다.
그는 나에게 직접 묻지 않는다.
이 책은 그저 문제제기일뿐 그 이상도,이하도 아니다.
그러므로 마치 인터넷에 떠도는 심리테스트를 하듯
나는 어떤 타입일까, 볼 필요는 없으며
단지 나르치스라는 인간형과 골드문트라는 인간형을 보면서
또한 자신을 느끼면 되는 것이다.

세상에 완전한 이분법이란 없다.
어떠한 문제에 있어서는 보수적인 입장을 취하는
진보주의자도 있듯이
나르치스의 모습을 가진 사람이
골드문트의 성격도 많이 포함할 수 있다.
마리아브론 수도원에서 지와 사랑의 두가지 면을 가지고
서로에게 끌리고 우정을 나누었던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두 사람 모두 각자의 모습에서 아름다움이 있다.
어차피 감성이 우세하냐, 지성이 우세하냐 만을 가지고
인생을 논할 수는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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