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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공지영 지음 / 푸른숲 / 2005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을 읽고 나서 버릇처럼 입에 붙은 말이 있다.
“진부해..”
요즘처럼 감성이 예민해진 때에는 접하는 작품마다 엄청나게 영향을 받아서, 나도 어느 정도 ‘문유정화’되었나 보다. 그래서 요즘은 ‘그런 전근대적인 사고방식’ 또는 ‘비상식적인 정치인들’ 대신에 ‘진부해’라는 한마디로 표현을 끝내는 일이 잦다.
소설에서 문유정은 맞선자리에서 만난 남자의 ‘진부한’ 과거를 듣고 가족의 원성을 들으며 파혼하고, ‘진부하게도’ 정윤수가 끝까지 증오를 품지 않고 생각보다 빠르게 변화한 것에 냉소를 보낸다.
그녀에겐 세상이 진부한 것 투성이다. 그래서 하루하루가 지루하고, 매일 아침이 두렵다. 그러나 문유정이 느끼던 세상의 다양한 진부함 중 정윤수는 달랐다. 그녀는 갓 태어난 어린 새처럼 진부함의 틀을 깨고 나온 정윤수를 주목하기 시작한다. 정윤수 역시 ‘회개하면 구원받는다. 눈물로써 회개하라’는 암묵적 메시지조차 달지 않은 채 오히려 ‘손해보는 거 싫거든요. 이젠 제 얘기도 들어주세요’라고 이야기하는 문유정의 당돌함에 뒤통수를 맞은 듯 그녀를 다시 보게 된다. 그리고 목요일 10시부터 1시까지의 시간을 일주일동안 기다린다.
진부함의 반대말이라면 참신함을 이야기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현실을 직면하고, 기꺼이 자신을 변화시키고, 용서를 실천하고, 이어 참사람과 인생의 아름다움을 어린아이처럼 배워나갔던 두 사람의 화학작용은 ‘기적’이라 불러야 옳다.
교도소의 천주교 만남의 방에는 탕자가 아버지에게로 돌아와 무릎을 꿇고 눈물로 용서를 비는 그림이 걸려있다. 마치 죄인은 세상 끝날까지 눈물로 용서만 빌어야 한다고 이야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 이후 아버지가 돌아온 아들을 위해 성대한 잔치를 벌었다는 사실을 그 그림을 본 수감자 중 몇 명이나 알고 있었을까. 아버지에게 무릎을 꿇고 비는 그 모습은 마치 비수감자들(일반인이라고는 말하지 않겠다.)에게 수감자들이 무조건 싹싹 빌어야 한다는 메시지처럼 얼마나 오해하기가 쉬운가.
사람이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 아름다워야 할 젊은 생을 외로움과 고독 속에서만 살아왔던 두 사람이 그걸 깨닫는 것은 유대인을 탄압하는 데 앞장섰던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눈꺼풀이 벗겨지고 새사람 된 것에 비견될 만하다 하겠다. 바울이 그 이후 자기의 생명을 내어놓고 예수의 도를 전했던 것과 같이 그들은 ‘자살’과 ‘사형’ 이라는 기이한 죽음의 형식 앞에서 뒤늦게 아름다운 생을 꿈꾸었다.
나 역시 건강이 무너졌을 때 손 하나 까딱하기 힘들어 겨우 걸음을 떼던 시절이 있었다. 그 때 내가 가장 미워했던 사람은 ‘요즘은 우울해’‘살 빼야 되는데’라고 말하는 여대생들이었다. 그때 내가 좀더 공격적이고 혈기왕성했다면 나 역시 그들에게 욕설이라도 퍼부었을 것이다. 나는 지금 죽을 지경인데, 평범하게 거리를 활보할 수만 있어도 평생 감사하며 살 것 같은데 우울하다니. 살을 뺀다니. (이런 걸 생각하면 내가 정윤수의 내면보다 크게 잘난 것도 없다)
그들의 고민도 그들 삶에서는 우주처럼 크고 무거울 수 있다는 사실을 나는 시간이 지난 후에야 알게 되었다. 정윤수가 문유정을 이해하는 방식 또한 그랬을 것이다. 병원과 대학을 거느린 이사장 집안에서 부족한 것 없이 자라 대학시절엔 가수로서 유명인사가 되는 행운을 누리고 현재는 대학교수로 살고 있는 그녀에게 부족한 게 뭐가 있을까. 그러나 문유정의 상처와 고독도 자신의 고통보다 결코 가벼운 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음을 정윤수는 얻게 된다. 그저 온 마음을 다해 문유정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상처는 치유될 수 있다는 사실까지도.
‘몰랐다’는 이유만으로 타인의 고통에 대한 양심의 가책을 피하기는 얼마나 쉬운가. 정윤수 처럼 고생하면서 살아온 아이는 내 주위엔 없으니까 어쩔 수 없고, 삼촌의 짓궂은 장난 때문에 울었다는 말을 믿고 관심을 닫아버리면 타인의 아픔은 결코 알 수가 없다.
혹시 이거 ‘엄마 없는 하늘아래’류의 신파극 아냐, 하고 이 책을 피하려는 사람도 많이 있을 것 같다. 그러나 네티즌들이여, ‘안심해~’ (사모님버전)
눈물을 짜기 위한 장치는 이 소설 안에는 없다. 오히려 소설은 감정을 하나하나 짚어내기보다 상황을 설명하고 변화되어가는 모습을 서술하는데 초점을 맞춘다. 그저 상황을 서술하였을 뿐인데 우리는 감동을 받고 울게 되는 것이다. 이제는 알게 되었으니까.
이상한 사람, 사회에서 낙오된 사람들의 ‘진짜’ 이야기를 들어버리고 말았으니.
l이들을 알게 된 이상, 우리는 그저 ‘사형제폐지론’으로 옮기는 수준으로 끝내선 안 된다. 아파트촌과 키 높은 빌딩들이 즐비한 도시의 어두운 곳에서 눈물도 잃은 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과 어딘지 모르게 사회를 겉돌고 있는 사람들을 다시 한 번 바라보자. 지금 바로 어떤 행동을 하라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파렴치하고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일지라도 그에 대한 애정을 잃지 않는 것, 사람을 포기해버리지 않는 것. 그것이 이 소설을 읽고 소위 ‘은혜’를 받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첫 번째 실천이다. 그리고 이것은 또한 정윤수와 문유정이 내내 고민하고 끝내는 이뤄냈던 ‘용서’로 가는 지름길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