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해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70
쥘리앵 그린 지음, 김종우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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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빌헬름 게나치노의 <이날을 위한 우산>

쥘리엥 그린의 <잔해>

그리고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

헤겔의 <정신현상학1> <정신현상학2>

지젝의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물기>,<죽은 신을 위하여>,<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 내친 김에 슈미트의 <정치신학>까지 읽었다.

그리고 또 이곳 고원에서 김남시님의 ‘크라카우의 권태’에 관한 제출문도 참고로 읽었다.

개인적인 취향으로 소설의 중요성을 절감은 하지만 비교적 큰 흥미를 가지고 읽지는 못한다. 이것 역시 편식할 수밖에 없는 입 짧은 소시민의 어떤 학습장애 이리라. 하지만 이어 두 편의 그것들을 읽었는데 괜찮았다.



 

게나치노의 <이날을 위한 우산>이나 그린의 <잔해>는 역시 일상의 권태에 관한 작품이다. 똑 같이 권태를 다루고 있긴 한데 <잔해>는 책의 소개 홍보문 문장처럼 그 ‘일상’이 사람에게 폭력으로 경험되도록 틈새가 나있다.(나는 개인적으로 그 일상이 폭력이라는 홍보문구에 필이 꽂혀 책을 샀다) 그 격리와 괴리는 일말의 잔혹감 마저 느끼게 한다. 도시를 부유하는, 인간이라는 이름의 밖으로 밀려난 찌꺼기, 자신에게마저 이방인인 초라한 내면의 엷은 인간! 최초의 우연한 외상적 경험에서 망연자실, 의식의 흐름에 유실되는---. 그럼으로서 그 내면을 타인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가면과 위장으로 은폐하는 긴장을 유지하는데 또한 심대한 에너지가 소모되는 신경증 수준의 우울증자다. 그 스스로의 폭력의 미로에서 힘겹게 회색지대를 배회하고 표류하는---이 소설은 1932년도에 출간된 것으로 하여 카뮈, 샤르트르의 실존을 한편, 선취하는 것으로 평가되는 모양이다.

이에 비하면 게나치노의 <이 날을 위한 우산>은 우선 따뜻하다. 역시 유실되는 소심쟁이 인간이 등장하지만 게나치노의 우울증자는 그런대로 현실을 긍정하는 재치가 구원된 현존재자다. 교육을 받은 지식인이긴 한데 변변챦은 직업을 전전하다가 새로 나온 구두를 신어보고 그 상품에 대한 평가서를 내는 일, 즉 구두테스터를 업으로 하는 주인공. 하루 종일 소비자가 사용할, 결국 타인의 신발을 신어보는 역할의 유머의 위트의 제한 가상스러운 존재---하지만 누구에게나 있음직한 우연과 침범, 소소한 시간들로 그에게서는 유실되는 현실과 화해되고 미함량일지라도 일정량 구원되는 존재로 그려진다. 하여 오히려 게나치노 쪽이 읽기에도 편하고 유쾌하다. 일상에 대한 무력감을 산뜻하게 직면시키고도 그 무력감을 긍정하는 건강함(?)이 느껴진다. 문체도 그에 잘 어울리게 안정적이고 맛깔스럽다.

하지만 역시 게나치노의 편안함은 무력한 일상 자체를 분열된 채로 떠안아야만 하는 부담을 느끼지 않아도 될 것이라는, 정직하게 말하자면 ‘지연된 안도’다.  그렇다면 그 안도가 실재와의 대면을 피해갈 수 있는 유사 대체물로서의 긍정이라면 하나의 소설로서는 산뜻한 미감이지만 역시 문제의 적실한 해법이라고 하는 정치의 문제로서는 글쎄다. 
 

 

물론 이러한 게나치노의 소극성은 물러설 내적 공간이 부재할 때 필연적으로 제기될 수 있는 화해의 제스처일 것이다. 분열이 안개꽃처럼 산포되지만 결국 분열이 봉합되거나 틈새가 그리 크지 않는 게나치노의 내면은 그렇다면 비교하자면 우리 동양인의 내면과 더 유사성이 있다고나 할까? 어쨌든 정치가 발생하고 정치적 힘이 걸릴만한 찢겨짐과 차이, 배열에서가 아니라 그 소소한 일상의 내면 안에서 극복되어야만 하는 그야말로 일상적인 우연이나 그 사건의 위트에 걸려 해결되는 소박성으로 게나치노는 비껴 선다. 그의 문체에서 전체적으로 어떤 질박 착실한 친근미가 쉽게 경험되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일말의 신비적 친밀 때문일 것이다.

이에 비한다면 그린의 끝까지 폭력으로서의 일상은 훨씬 실재적이고 외설적이다. 일탈과 무력---물론 그린에게는 우선 물러설 자리가 있다. 그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 신으로의 신비와 구원이라는 또 다른 층위의 공간을 충분히 전유하고 있다. 그럼으로써 끝까지 차안에 대한 궁극적인 폭력을 소묘할 수 있었을까? 그렇다면 종교적인 초월적인 층위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 정열적으로 묘사하는 실재는? 그들의 물러설 자리는? 그들의 내적 방식, 장치는?   

 

 
마음의 권태에 연이어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를 다시 읽었다. 책의 끝 페이지 메모를 보니 이로써 2008년 12월에 처음 읽은 후로 세 번째 읽는 것이다. 물론 다름 아닌 마음이야말로 중요한 정치가 발생하는 성좌임을 이해한 이번의 욕망이 나로 하여금 이 책을 세 번째 찾도록 했을 것이다. 하도 유명한 책이라 다시 내용을 재론할 필요를 느끼지는 못한다. 다만 내가 사적으로 이해하고 전유한 일상적인 부분만을 스스로에게 정리하고 남길 뿐이다. 

 

결국 아감벤에게서 원래 정치는 차이와 영역을 식별해 주는 위상학적 관계 속으로 진입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경계를 이해하는 것이 우선 중요하다. 정의나 자유 보편으로서의 어떤 공공의 메타적 이상, 이념보다는 실제적으로는 내적 활력을 추동시키는 경계가 중요하고 그 경계의 심리적 분계를 중심으로 정치가 역학적으로 작동된다고 하는 것이다. 정상과 대비되는 ‘예외’에 역광, 반사되어 정상이 정상으로 유지되고 심화된다고 하는, 정상과 예외의 배타적 공모 관계로서의 정치, 내적 물리역학으로서의 힘의 발생과 통치를 그래서 그는 예리하게 규명해 낸다. 하여 정상은 정상으로 작동되기 위해 비정상, 즉 어떤 예외를 생래적으로 포함하고 필요로 하며 끊임없이 그 예외를 소비해야만 하는 배반의 역설을 지닌다. 하여 홀로코스트나 미국의 관타나모 수용소나 이러한 국면에서는 사실 배타적 예외에 의해 유지, 작동되는 정치의 결과물로서는 동일한 그림일 뿐이라는 것이다. 먼저 이러한 작동체계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 아감벤의 전체적인 요지로 읽힌다.        

이러한 그의 빛나는 인식과 재능의 문체를 뒤로하고도 먼저 나는 특별히 그의 문장에서 사적인 어떤 감정을 고백할 수 있다.

“혼돈에 적용할 어떤 규칙도 없기 때문에 혼돈은 무엇보다 먼저 외부와 내부, 혼돈과 정상 사이의 비 식별역의 창출을 통해, 다시 말해 예외 상태를 통해 질서 속에 편입된다. 실상 어떤 것과 관계를 맺기 위해선 규칙은 그러한 관계 바깥에 있는 것(관계없는 것)을 전제하고, 관계를 여전히 그러한 방식으로 산출해야만 한다.”(<호모 사케르>.62쪽)  

정확히 나는 저 문장을 읽으며 20대 때 앓던 우울증, 내적 정치가 실종되었던 홍역기, 나의 상태를 떠올릴 수 있다. 심각한 자기 정체성의 문제로 내적 혼돈에 빠졌으며 그 폐쇄의 밀폐 안에서 필사적으로 허우적대던 경험을 이름이다. 그 혼돈에 적용할 어떤 규칙도 갖지 못했으며 그 혼란에 전제되는 힘의 구축점이 부재하던 그 혼돈과 불안의 바다를 말이다. 어떻게 이 망연자실의 절대 유실의 늪지에서 빠져 나올 수 있을까?

이러한 사적인 체험에서도 나는 아감벤의 통찰이 지시하는 정치란 것이 지적체계의 공공성, 객관의 원리를 건조하게 규명하는 로고스적 권위와 더불어 그것이 곧 인간의 내면의 투사로서의 정치 곧 정신분석적 기획으로서의 정치임을 인정하고 환호할 수 있다.


외부와 내부, 정상과 예외상태, 비 식별역의 창출, 저러한 분절과 심리적 경계선을 경유하지 않고는 개인이든 집단이든 우울증자의 상태로 침몰하게 되며 따라서 정치가 바로 저 무중력의  무미건조함에서 탈출, 생존하기 위해서라도 비 식별역 공간을 생래적으로(?) 필요로 하게 된다는 것을---.

이 지점에서 생각나는 문장은 역시 지젝이 즐겨 인용하는 체스터턴이다.(어찌 지젝이 그에게 매료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모든 것을 자유롭게 느끼려는 탐미적인 무정부주의자는 결국에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모순에 사로잡히게 된다. 그는 시정(詩情)에 따르기 위해 집의 경계선으로부터 벗어나지만 더 이상 집의 경계선을 느끼지 못함으로써 더 이상 ‘오디세이’를 느끼지 못하게 된다.”(<오소독시>.180쪽) 

역시 저 문장이 핵심적으로 지시하는 것은 심리적 ‘경계선’이다. 무엇을 그 어떤, 무엇에 대해 느끼고 흥미, 자각을 감흥적으로 느끼게 해 주는 것은 헤겔식으로 하면, 부정적인 것, 그것에 걸려 역광, 결과적인 효과로 발화되게 하는 심리적인 경계선이 아닌가?

그렇다면 외부가 없다는 것, 그 어떤 (특히 부정적인 투사물로서) 전제가 없다는 것이야말로, 마음의 정치에서든 외부의 실정 정치에서든 정치에서 가장 위험한 재앙이 아닌가? 그것들의 부재와 상실이야말로 그 어떤 것에도 감흥을 느끼지 못하는 지각 제로의 매우 위험한 상태가 아닌가? 말이다. 그렇다면 다음의 아감벤의 문장은 바로 또 다른 방식으로 악용해(?) 읽어도 흥미로울 것이다.

“실제로 추방령을 받은 자는 단순히 법의 바깥으로 내쳐지거나 법과는 무관해지는 것이 아니다. 그는 법으로부터 버림받은 것이며, 생명과 법, 외부와 내부의 구분이 불가능한 비식별역에 노출되어 위험에 처해진 것이다.”(<호모 사케르> 79쪽) 물론 이 문장은 식별, 비식별역의 연관성의 형식에 의하지 않고는 정치를 사고할 수 없다는 점을 규명하기 위해 “추방”의 국면을 설명하는 문장이지만 어쩐지 나는 신학적 착각을 투사해 저 추방이라는 단어를 실낙원의 그것에 연관지어 바꾸어 이해하고 싶은 욕망을 느낀다. 곧 저 법의 외부, 무정형지대로의 ‘추방’을  낙원에서의 추방으로---. 곧 실낙원은 바로 외부, 힘이 내면의 역학정치가 걸리지 않는 비식별역, 부정적인 것을 갖지 못한 무전제, 무정형의 의식 상태에 위치해 지는 것이라고 말이다. 곧 오늘날 낙원의 상실을 정신분석적으로 다시 기술하면 외부가 없는 동일성 상태, 외부에 대한 근거와 경험이 박탈되는 평수면 상태에 있는 것으로---.


물론 여기서 또한 생각나는 사람은 주판치치다. 곧 그녀는 <실재의 윤리>에서 오이디푸스의 딜레마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하며 죄인이 될 경험(외부를 투사할 기회)마저 박탈당한 절대 유실자(존재를 근거 지을 수 있는 그 어떤 전제도 박탈된 자)를 또한 실감나게 묘사하고 있지 않는가?

“제발 내게 죄가 있었으면-하지만 당신은 내게서 그 명예마저도,(당연한 권리상 내게 열려 있는) 상징계 안의 그 자리마저도 앗아 갔다! 내가 그 모든 고통을 겪었음에도 나는 죄가 있지조차 않다(이는 그의 운명의 의미가 아닌 무의미를 강조하고 있다). 당신은 내게 (욕망의) 주체로서 참여할 수 있는 가능성마저도 남겨 놓지 않았다."(<실재의 윤리>.298쪽)

"그것들의 결여를 박탈하라! 그러면 그것들은 붕괴할 것이다” (위의 책.367쪽) 
 



그렇다면 성서가 말하는 온갖 심급의 외부, 배타적 영역의 창출, 그것도 모자라 그것들을 신학언어로 금형, 밀봉한 것은 정확히 무엇을 노리는 기획이었던가? 오늘날 탈-근대를 지나 탈-해체론의 철학자들이 바울에 대해 호의적으로 관심을 가지며 새로이 해석해내는 저의들이 알만해 진다. 이렇게 다시 성서를 정신분석의 렌즈로 경유하여 읽는다면 기독교는 다시 새롭게 해명될 수 있으며 기독교의 수명은 또다시 연장될 수 있을까?

한편, <호모 사케르>는 곧 바로 나를 헤겔로 인도했다. 직장 내 도서관에서 우연히 <정신현상학1>을 펼쳤는데 문장들이 쑤욱 빨려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아감벤이 정리해 준 내,외부의 차이, 식별을 가능하게 하는 ‘예외’, 배반적 역설로 정치가 유지된다는 설명은 쉽게 헤겔의 문장들을 이해하게 했다. <호모 사케르>를 경유하지 않았더라면 헤겔은 여전히 나에게는 철벽, 그 자체였을 것이다. 어쨌든 나와 같은 일반 소시민이 그 악명 높은 정신현상학을 완독해 보다니?--- 그를 통해서는 또 이번에는 비로소 지젝이 훨씬 쉽게 읽히는 선물을 경험하게 되니 이래저래 횡재가 아닐 수 없다.



부끄럽지만 이로써 나는 ‘독일 관념론’ 할 때의 그 관념론에 대한 이해를 비로소 나름대로 하게 되었다. 인간의 정신, 행동을 규정짓는 절대적인 표상과 이념으로써의 불변하는 그 무엇이 있다는 믿음과 생각이 그것이며 그것이 칸트로부터 시작되고 그 탐색과 궁구가 헤겔에 와서 절정에 이르렀다는 것도---. (중년의 나이에 이 무슨 철지난 도둑질인가?)

헤겔에게서 관념론이 무엇이 절정인가? 문자 그대로 절정은 긍정의 화려한 꽃이면서도 꽃인 한에 그 정점으로 동시에 부정의 국면으로 침범하는 과잉과 잉여, 잔재를 남긴다는 점에서 정오의 꼭지점과 같다. 헤겔에서는 무엇이 그것인가? 그냥 내가 내 기분으로 이해한 국면으로 하면, 먼저, 헤겔은 스피노자의 신학을 역사내적 문제로 더욱 적극적으로 치환, 신학화 시켰고 그 신학화의 내부 장치를 통해 절대를 지나치게 사적으로 전유하도록 친절하게 원리화했다. 그런데 그 원리화는 너무나 아름답고 치밀하고 성능이 좋아 신성(활력)의 과잉을 항시 내면에 발생시킨다는 약점을 내재적으로 가진다. 이렇게 생산되는 내부 상태의 과잉이 또한 정신, 이성이라고 하는 우주론적 초월자의 위계가 이를테면 순수 신학의 경우처럼 세계와의 충분한 간격이 확보된 안전거리(?)에서가 아니라 상대적으로 역사내적 지근거리에 배열되어 있는 만큼 그 낮은 초월에 조응하여, 또한 그것이 지나치게 역사내적 세계 안에서 발화, 폭발시켜 그 과잉을 압착, 강화시킬 수 있다. 곧 신학적 의식의 범람이다. 


곧 신학적 장치는 신학적 장치인데 그것이 충분히 신학적이지 않다는, 그의 초월이 충분히 초월적이지 않다는 점에서 과잉의 초월, 절대를 팽창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절대를 환상하고 그것을 전유하고자 하는 사적 절대의 정열의 아름답고 정교한 내부 정치의 원리화로 정교하게 꽃피우게 된 것이 독일 관념론의 절정이며 곧 그 절정이 생산하는 과잉이 더 이상의 관념론적 이상에 대한 탐색의 동기를 또한 그만큼 줄여 준다는 면에서 그 꽃의 만개는 또한  그 절정의 끝이다. 곧 헤겔의 신학은 내가 보기에 일반 이성에서도, 이 역사내적 세계에, 그 내면에 범람하는 휘브리스를 남길 여지가 충분하도록 실제와 이상이 혼재되고 밀착되어 있는 것으로 읽힌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에게 또한 충분한 경이의 찬탄과 함께 또 다른 방식의, 그의 신학, 신관, 정신에 대하여 일종의 <우신예찬>도 함께 쓰여져야 할 것이 아닌가?(물론 모든 정치신학적 기획자들을 포함해서---)  

한편, 관념론의 흐름을 복권하는데 지대한 관심을 가진 지젝이 이 지점에서 더 쉽게 읽히는 것은 자연스럽다.

역시 전에 읽었던 적이 있었던 헤겔과 관련된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물기>, 그리고 본격적으로 신학의 문제를 직시하고자 하는 <죽은 신을 위하여>를 다시 펴 읽었다. 물론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도---.

 


지젝에게서야말로 주체를 다시 재건하는 문제, 즉 마음의 생기와 활력을 발생시키는 문제는 전적으로 정치적인 문제, 즉 신학적 문제가 아닌가? 하여 그는 바로 헤겔을 그리고 라캉, 맑스를 경유, 정치의 문제로 환원하여 신학적 직격탄을 날린다. ‘너 신 믿냐?’
주체에 대하여 이러한 도발적 질문이외에 그 어떤 방식이 또 적실성을 띨 수 있을까?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의 신은 여기에서 동일성이나 완전무오하다는 전통적 신관으로서의 신이 아니라 역시 헤겔적 사유로 팽창된 정신분석적 이해, 역학관계의 준거로서의 신이다.

“첫째, 인간의 유한성은 정확히 무한성과 등가이다. ‘삶과 죽음을 넘어’ 지속되는 충동의 외설적 ‘불멸성/무한성’말이다. 둘째, 존재의 질서를 ‘전도시키는’ 악마적인 의지의 과잉에 붙여진 이름은 바로 주체이다.”(<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 226쪽)    


변증법적으로 작동되는 존재가 실재라면 그렇다면 신 자체가 이미 분열되어 있고 찢어져 있다. 인간이 바로 그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인간이 찢어진 분열과 결여에 의해 주체가 지탱된다면 신 자신이 바로 결여와 분열의 존재가 아닌가?  

“신성의 궁극적 정의 또한 이것이 아닌가? 신이란 신 자신의 가면을 써야 하는 존재가 아닌가? 어쩌면 ‘신’이란 본체적 사물(noumenal Thing)로서의 절대와 그것의 현상으로서의 절대 사이의 이 궁극적 분열을 일컫는 이름, 이 둘은 같으며 둘 사이의 차이는 순전히 형식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일컫는 이름이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신’은 궁극적 모순을 일컫는 이름이다. 즉 신(재현할 수 없는 절대 건너편)은 바로 그런 존재로서 현상해야 한다.”(<죽은 신을 위하여>.232쪽)

 

 

 

물론 이러한 결여의 신은 전통적인 신관에 오류가 있다는 신성 모독적 독해와는 거의 관계가 없는 별개의 다른 차원의 문제다. 정신분석적으로 그러한 결여와 말로 진정한 의미의 전능하다는 신의 좌표를 해명하는 전통 신학에 대한 배반적 우회로가 아닌가? 지젝이 맹렬하게 파헤치는 저 궁극적 분열과 결여, 공백은 바로 내재적 외부의 다른 이름이다. 이성과 초월, 이성 안에서의 균열, 이월의 층위를 내재적으로 포함함으로 내부의 존재 근거, 경계, 전제가 되는 부정을 궁극의 근원 신관 안에 근거지움으로 활력의 정치가 아예 궁극 근원의 뼈에서부터 발화되고 폭발되도록 작동된다고 하는 것이 지젝의 인식이다.


그러므로 곧 그에게서의 신은 사실상 이미, 아니 처음부터 죽은 철저한 유물론의 신이다. 신이란 살아있는 객관적 인격이라기보다는 저러하게 잉여와 균열, 공백의 배반적 역설의 배열과 차이로 인해 의지와 내면을 충분히 활성화시키는 일종의 호황기의 기계장치와 다른 이름이 아니다. 아니 절대적으로 전능하다는 신은 바로 저러하게 작동되는 신이므로 전능하다는 초월, 비인간으로서의 역능적 권위를 항구적으로 점하는 것이 아닌가? 어쨌든 지젝의 신은 익살맞고 재미있다. 그럼으로써 그는 그 신의 역학으로 다시 인간의 내면이 재활성장치로 역동화 되기를 희망한다.

이 모든 국면의 인식과 기획, 고대신학에서 슈미트, 아감벤, 지젝등의 통찰들에 이르기 까지 그러면 결국 내외면의 정치, 국면들을 흔들고 주물하여 새로운 욕망들을 가능하게 하려면, 다시 진리적인 삶의 로맨스를 욕망하려면 결국 신학으로 복귀해야만 할까? 적극적이든 소극적이든 어떤 방식으로서든 신학적 기획의 범주가 발생시키는 연관관계에 걸려서만 이러하게 정치가 발생할 수 있을까? 만일 그렇다고 한다면 아예 노골적으로 전통 신학으로의 복귀는 어떠한가? 역시 그것은 궁색하고 머쓱한가?

오늘날 또 다른 면에서 신학적 사고에 가장 닮은 것으로는 바디우가 있고(사건이나 (진리의)압류 같은 개념은 이미 키에르케고르에게서 발견된다) 알렌카 주판치치 또한 이미 그 편의 분석을(이를테면 칸트적 기획과 같은)넘어 주체의 욕망이 걸리는 새로운 지점을 모색하고 있고, 가장 적극적으로 지젝은 기독교와 그 기독교의 신을 처참하게 살해함으로 다시 되살려 바울의 신학을 자신의 방식대로 맹렬하게 반복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지점에서 <정치신학>의  번역자 김항 교수가 책의 해설에서 친절하게 언급한 것처럼 아감벤의 보고나 슈미트의 이해가 오늘날 탈-주체에 대한 반성이나 정치학에서 섣불리 어떤 대안으로 읽혀서는 안 될 것이다. 정치적 내면을 소유했던 슈미트의 행적이 증명해 주는 것처럼 그것은 또 하나의 우신신학이 되고 휘브리스로 휘어질 우려가 항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이러한 우려를 염두에 두지 않는 독자가 한편, 또 존재할 수 있을까?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사실상 그 어떤 것이든 그 무엇이 적실하게 가능해지려면 아감벤의 의도처럼 그에 걸리는 힘의 연관관계가 없다면 설정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이해한다는 것이 먼저 중요다고 본다. 이 지점에서 이 정치로 통해 발생한 힘을 올바로 사용할 수 있는 지혜나 감각을 성숙시키는 국면으로 다시 신학적 기획을 반복하는 쪽을 택하든지 아니면 그것이 가능하다면 어떻게 가능한지 새로운 정치, 주체의 지점을 발명하는 국면을 모색하든지는 각각 성향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인류는 '삼라만상을 알기는 하지만 아무것도 믿지 않는' 애처로운 악마가 되었다. 그들은 모든 일에 관심을 가지지만 어떤 것에도 감동하지 않는다."(<정치신학>.1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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