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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의도는 없었습니다
손원평 지음 / 창비 / 2026년 3월
평점 :
손원평 작가의 신작 소설집 나쁜 의도는 없었습니다 는 자본주의의 차가운 톱니바퀴 속에서 마모되어 가는 우리들의 서늘한 민낯을 예리하게 포착해 낸 작품입니다. 첫 소설집 『타인의 집』 이후 한층 더 깊어진 작가의 시선은 문화센터, 명품 매장, 재난 직후의 도시 등 동시대의 일상적 공간을 배경으로 열 편의 다채로운 이야기를 펼쳐놓습니다.
표제작이자 이 책 전체를 관통하는 문장인 “나쁜 의도는 없었습니다”는 현대인들이 얼마나 교묘하게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하며 타인의 상처에 가담하는지를 꼬집는 뼈아픈 역설입니다. 소설 속 인물들은 돈이 관계와 꿈의 크기마저 결정짓는 세계에서 생존과 존엄 사이를 위태롭게 오갑니다. 「당신의 손끝」에서 우정이라 믿었던 온기가 실은 납입금으로 유지되는 허약한 계약관계였음이 드러나는 순간이나, 「태양 아래 반짝이는」과 「모자이크」에서 남루한 현실을 지우기 위해 거짓된 껍데기로 스스로를 포장하는 인물들의 위태로운 모습은 서글프면서도 지극히 현실적입니다.
누구도 악당은 아니지만 온전히 결백할 수도 없는 이 비정한 세계 속에서, 작가는 단순히 거대한 시스템을 탓하거나 독자에게 섣부른 위로를 건네지 않습니다. 그저 상처를 주고받으면서도 어떻게든 삶을 지탱하려 애쓰는 인물들의 미세한 떨림을 가만히 응시할 뿐입니다. 어쩔 수 없었다는 핑계로 누군가의 하루를 망가뜨리며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리 스스로가 타인을 향해 내뱉은 말들을 뼈아프게 돌아보게 만듭니다.
책을 덮고 나면 내가 무심코 던진 합리화가 누군가에게 어떤 파문을 일으켰을지 묵직한 반성이 밀려옵니다. 그럼에도 삶은 계속되기에, 엉키고 후퇴하더라도 실과 바늘처럼 끝내 어딘가로 묵묵히 나아갈 것이라는 작가의 작지만 단단한 믿음이 긴 여운을 남깁니다. 팍팍한 일상 속에서 타인과 맺는 관계의 결을 되짚어보고, 잃어버린 인간다움의 흔적을 고민해 보고 싶은 분들에게 깊이 추천하고 싶은 소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