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욕망에대한 향기로운 보고서랄까. 다이 시지에의 [발자크와 바느질하는 중국 소녀]는 욕망이란 무엇인가?를 다시 한 번 더 생각해보게 한다. 욕망이 가장 외곡된 상황, 원초적 욕망을 분출하는 것이 철저하게 통제된 환경. 그 속에서도 깨닫게 되는 인간 본연의 것. 욕망이라는 이름. 그리고 그 이름 앞에서는 언제나 나약할 수 밖에 없는 우리.
마오 쩌퉁이 문화혁명을 일으킨 이유는 자본주의적 사유와 습관을 말살하겠다는 의도였다. 정확하게는 자본주의적 탐욕을 없애겠다는 의도였다. 마오는 새로운 사회로 나아가는 데에 단순히 체제나 제도를 바꾸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새로운 사고, 새로운 욕망을 가진 새로운 인간형을 구축하는 것이 지금까지 지구상에 없었던 새로운 체계를 오랫동안 지켜나가는 방법이라고 여긴다. 의복을 통일하고 노동을 신성하게 바들며 지식과 지식인을 탄압한다. 기존의 - 자본주의적인 - 문화, 예술 및 종교를 모두 버리라 한다. 그리고 그 선봉장에 아직 어린 십대가 대부분인 홍의병을 내세운다. 훗날 홍의병은 마오와 결별하고 독자노선을 걷는다. 마오는 이를 두고 죽는 날까지 후회한다. 이상과 현실의 괴리랄까? 홍의병은 홍의병 나름의 욕망을 만들고 만다.
주인공 나와 뤄는 홍의병에 들어가지 못하고 반동분자의 아들과 낙인 찍혀 재교육에 들어간 두 십대 소년이다. 이들을 그냥 우리 주변에 잘 교육되고 부모의 통제가 가능한(?) 십대라고 보면 안된다. 이들은 담배도 피우고 - 뭐 이건 똑같지만 - 섹스도 한다. (이것도 똑같은가?) 농사일을 하고 청년들로부터 공격을 받지만 보호되지 않는다. 즉 어른처럼 대접 받는다. 하지만 이들은 아직 어른이 아니다. 이 두 사실의 간격 만큼이나 어처구니 없는 사건들이 소소하게 이어진다. 이들의 욕망은 어서 빨리 이놈의 촌구석에서 벗어나는 것. 하지만 이들의 욕망은 그들이 잘 교육시킨 바느질하는 소녀에게 전이되고 발현된다. 이들은 순진한 소녀에게 발자크의 소설을 통해 욕망이란 무엇인가?를 철저하게 교육시킨다. 소녀는 시대와 상관없는 가장 원초적 욕망이 무엇인지를 깨닫는다. 또한 여자란 남자에게 언제나 무조건 - 그게 자본주의든 사회주의든 할 것 없이 - 욕망의 대상이 된다는 사실을 알게 만든다. 이들을 버리고 소녀는 떠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발자크 때문에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는 거야. 여자의 아름다움은 비할 데 없을 만큼 값진 보물이라는걸.˝
소설에서는 소녀 뿐만아니라 다른 등장인물들의 욕망 또한 잘 그려내고 있다. 언제까지나 마을을 지배하고 싶은 촌장님. 아직까지 부모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마마보이 `안경잡이`와 그의 어머니. 어린 소년 소녀의 성행위를 훔쳐보는 방앗간 할아버지. 바느질하는 소녀를 나와 뤄에게 뺏긴 마을 청년들의 질투. 예쁘던 못생겼던 상관 없이 예쁜 옷만 보면 환장하는 마을 부녀자들까지. 이들의 욕망은 초라하지만 원초적이다. 작가는 마치 발자크의 소설처럼 욕망에대한 보고서를 문화혁명이라는 시대속에서 쓰고 있는 것이다.
소설 속의 바느질하는 소녀는 처음엔 정말 순수한 소녀였다. 그녀는 나와 뤄를 보고도 부끄러워 말 한마디 못하는 그런 여자였다. 그녀에겐 단지 하루하루를 평화롭게 보내고 싶은 생각밖에 없었을 것이다. 여느때처럼. 그렇게. 이 소녀의 마음을 뤄가 바꿔 놓으려 한다. 발자크의 소설로. 좀더 교양있고 세련된 신부감을 만들기위해. 발자크의 소설은 실제로 그녀를 바꿔 놓는다. 그녀는 소설을 듣는 날이면 차거운 물에 몸을 담그지 않으면 못 견디는 시간이 계속 된다. 소설에서 그리고 있는 환상적인 욕망들에 허덕이며 뜨겁게 끓어넘친다. 이는 뤄와의 섹스로도 풀리지 않는다. 발자크의 소설은 - 실은 매우 차갑고 비판적인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 그녀에게 현실에서 주어진 것 이상의 것이 있다는 걸 알려준 것이다. 또한 그녀의 욕망을 실현시키기 위해 그녀의 육체가 얼마나 쓸모있는지도 알려준다. 결국 소녀는 떠나고 소년들은 남는다.
이토록 소박하고 꾸임없는 마을에서, 이토록 철저하게 교육되고 폐쇄된 체제속에서 피어난 욕망은 자본주의 날 것처럼 아니 그보다 오히려 더 적나라하다. 발자크를 읽어준 뤄의 잘못일까? 욕망을 적나라하게 그려낸 발자크의 잘못일까? 혹은 낙태수술을 도와준 나의 잘못일까? 혹은 그녀의 아버지? 혹은 원시적인 욕망을 은밀하게 품고 있는 마을 사람 모두? 혹은 인간이기에 당연한 것일까? 그렇다면 그 어떤 사회보다 탐욕을 장려하는 자본주의가 더 인간적인 것은 아닐까?
욕망과 욕구, 탐욕은 분명 다른 개념이지만 인간이 바라는 무언가를 대변하는 단어이다. 인간에게 욕망을 없앨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을 향한 욕망인가는 꼭 따져보아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