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에 볕이 잘 듭니다 - 도시에서 사일 시골에서 삼일
한순 지음, 김덕용 그림 / 나무생각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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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자연이 합주하는 사계절의 미()완성 교향곡을 듣다

지식생태학자의 생태학적 상상력으로 이곳에 볕이 잘 듭니다를 읽어보다

 

나무생각 한순 대표님과의 인연은 2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어느 날 홍대 근처에서 고두현 시인과 마시던 어둑어둑한 술집에서의 조우였을 것이다. 아마 그 집이 바로 임지훈 가수가 운영하는 카페였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이 책을 읽으면서 흐릿한 기억으로 떠올랐다. 그 카페에서 우연히 마주쳤지만 어둠이 서로의 수줍은 얼굴을 가려준 듯 정확한 기억은 나지 않는다. 사사(私私)로움을 넘어 세월을 품은 화목함의 얼굴빛이 희미하게 어둠 속에서나마 잠시 기억의 잔영으로 남아 있을 뿐이었다.

 

그러던 와중에 2016공부는 망치다, 2017나무는 나무라지 않는다, 2019이런 사람 만나지 마세요, 2020책 쓰기는 애쓰기다로 이어지는 저자와 출판사 대표님과의 만남의 인연은 이어지고 있다. 다양한 출판사와 여러 가지 책을 쓰거나 번역하고 있지만 출판사마다 책에 대한 고유한 철학과 사랑이 담겨 있다. 나무생각은 나무에게 미안하지 않은 책을 만들어야지”(42)라는 생각과 함께 오늘의 나무생각을 만드신 한순 대표님과의 인연은 각별했고 특별했다. 나무는 나무라지 않는다책을 나무생각에서 내는 만남도 제 인생에서는 각성 사건이었다. 인간은 나무만도 못하다는 통렬한 깨달음을 얻으면서 지식생태학자로서의 생태학적 상상력을 인문학적 감수성과 연결하는 소중한 배움을 책을 쓰면서 얻기도 했다. 한순 대표님은 존중과 배려, 성숙과 숙성의 시간을 통해 저자의 입장을 반영하면서도 특유의 고요한 사색의 깊이로 책의 색깔을 인문학적 사유의 숲으로 물들여주셨다. 책을 낼 때마다 세상을 향하는 온기와 사람에 대한 짙은 그리움을 남겨주셨다.

 

평범한 일상을 비범한 상상력의 텃밭으로 가꾸다

 

이곳에 볕이 잘 듭니다는 평범한 일상을 바라보지만 세상을 대하는 평범하지 않은 시인의 따뜻한 시선이 곳곳에서 고개를 들며 사람 사는 사이를 살갑게 만들어준다. 각양각색의 차이가 숨죽이고 있지만 그 차이 속에서도 좋은 사이를 만들어내는 시인의 상상력을 배울 수 있는 단편 모음집이지만 다 읽고 나면 자연과 사람 관계를 연결하는 한 편의 파노라마 같은 서정시 같기도 하다. “책과 음악을 이야기로 엮어 살짝 신화로 들어 올리는 꽃”(19)을 진달래로 바라보는 시인의 시선은 허무와 그리움 사이에 핀 진달래는 과거와 미래 사이에 찍힌 흔들리는 꽃도장”(19)으로 정의하면서 익숙한 일상에서 언제나 비상한 상상력으로 자연과 사람과 세상을 씨줄과 날줄로 엮어낸다. 고단한 일상에서도 남을 먼저 배려하는 시인의 마음은 문장 곳곳에 조용히 숨죽이고 있지만 언제나 따뜻한 울림으로 메아리친다. “차가운 시멘트 벽 못에 걸려 있는 인부의 겉옷이 겨울바람에 흔들리는 것을 보고는 아무 말 없이 돌아서 나오기도 했다. 이유를 알 수 없지만, 텅 빈 공사현장에 드나드는 바람 소리가 현장 소장의 한숨 소리처럼 들리기도 했다”(29). 세상이 다 내 맘 같지 않고 생각만큼 계획했던 일이 풀리지 않을 때 나보다는 다른 사람이나 환경을 탓하기 일쑤다. 그럴 때마다 시인은 흔히 접하는 평범하고 사소한 일에서도 깊은 사유를 불러일으키는 화두를 평범하지만 색다른 문제의식으로 우리들에게 말을 건다.

 

수많은 공정 안에서 사람들의 열정, 밥벌이의 현실, 이루고자 하는 꿈이 합쳐져야 한 채의 집이 완성되는 것을 지켜보았기 때문”(32)이라고 스스로에게 위로의 메시지를 던져준다. 우리는 언제부터 과정을 생각하지 않고 결과만 바라본다. 밥을 매일 먹고 있지만 누가 어떤 노력을 통해서 내가 배불리 먹을 수 있는 밥을 만드는 노동에 관여했는지 모르고 산다. 한 번 생각해보라. 농부라 이른 봄부터 볍씨를 뿌려 모종을 만들고 모내기를 하면서 천둥과 번개 맞은 벼를 보살펴가며 폭염을 견뎌내야 가을날의 따스한 햇살을 맞으며 벼가 익어간다는 사실을. 고개 숙인 벼이삭을 바라보는 농부의 마음도 마지막 벼 베기를 하고 탈곡해서 벼를 수확하기까지는 편안하지 않다. 언제 불어닥칠 가을날의 느닷없는 태풍 소식에 농부의 마음은 좌불안석이며 속은 언제나 새까맣게 타고 들어간다. 쌀 한 톨()이 생산되기 위해서 88번의 농부의 수고와 정성이 들어가야 얻을 수 있다는 깨달음을 얻는다. ()’자를 분석해보면 여덟 ’() 두 개가 합쳐져서 이루어진 글자(+ = )라고 한다. 즉 한 톨의 쌀이 생산되기까지는 88가지의 농부의 정성스러운 노력과 수고스러운 땀이 투여될 때 비로소 가능하다는 의미다. 밥먹다 배부르면 남은 밥을 아무렇게 버리는 우리들에게 쌀 한 톨이 나의 입으로 다가오기까지의 과정을 생각하면 쌀밥에 담긴 사계절 자연의 기운과 농부의 지극정성에 저절로 숙연해진다.

 

얼굴은 그 사람이 얼이 굴로 파여서 생긴 흔적이다

 

이곳에 볕이 잘 듭니다는 다른 곳에는 볕이 잘 들지 않는다는 암시다. 살다보면 늘 인생의 고비만 있는 건 아니다. 고비를 넘어서면 또 다른 고비가 기다리고 있겠지만 고비를 넘어선 후 잠깐이지만 즐길 수 있는 여유가 있다. 힘든 삶이 일상을 무겁게 만들지만 그 속에서도 소소한 즐거움이 행복한 삶을 꿈꾸게 만든다. 아버지 사업 실패 후 볕이 잘 들지 않는 곳에서 옹기종기 모여 앉아 힘겨운 삶을 함께 견디며 살아가는 가족만큼 따뜻한 지원군은 없다. 햇볕은 언제나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따사로운 햇살을 나눠주지만 좋지 못한 환경과 여건 때문에 그걸 받을 수 없는 아픔이 눈물로 화답할 때가 많다. 고달픈 삶을 살다가도 한 순간의 어떤 사연 품은 평범한 일로 인해 한 잔의 와인이 몸 안으로 퍼지면서 심신을 누그러뜨리듯이 그 간의 노고와 노곤함이 나도 모르게 눈 녹듯이 사라진다. 건빵을 품에 안고 낯선 서울의 어느 단칸방으로 달려오던 군인, 작은 오빠, 그 장면을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이 핑 돈다. 아버지, 엄마, 오빠, 언니가 준 사랑으로 나는 나의 삶의 어렵고 각박한 시절을 잘 넘을 수 있었다. 작아도 나누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배웠다. 내 인생에서 가장 촉촉한 건빵이다”(123). 비상훈련 때나 주는 건빵을 먹지 않고 휴가 나올 때 가져온 오빠의 애틋한 사연을 듣노라면 가족에 대한 사랑의 깊이를 가늠할 수가 없다. 나의 얼굴에는 가족의 얼굴이 나도 모르게 새겨진다. ‘얼굴은 그 사람이 자라면서 깨닫는 로 파여서 생긴 흔적이기 때문이다. 가족간에 주고받는 사랑이 고스란히 얼로 아로새겨지면서 한 사람의 인상을 넘어 인성을 만든다. 얼굴이라는 부분 속에 가족을 넘어 내가 맺는 인간관계의 전체가 고스란히 담긴다. 부분을 보면 전체를 알 수 있는 혼돈이론의 후랙탈(fractal) 원리를 생각해보는 이유다.

 

일제 강점기와 육이오 전쟁 속에서도 아이 다섯을 낳아 기르신 엄마를 한 인간으로 이해하는 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55). 파란만장이라는 단어에 담을 수 없는 굴곡진 삶을 온몸으로 살아내신 엄마의 인생을 따라가고 싶지 않은 마음은 대부분의 여성들이 공감하는 사실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오남매 끼니와 학비를 해결하기 위해 부딪혀야 했던 괴로움 앞에서도, 심심산골 세상과 사람에 대한 원망을 삭이고 있는 남편 앞에서도 엄마는 먼 산 침묵처럼 서 있었다”(90). 홀로 세상의 시름을 다 끌어안고 빈농에서 하루하루를 버티며 버거운 살림살이를 하시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세상을 떠나신 나의 어머니가 담고 있는 인자한 미소가 오버랩되는 장면이다. “몸에 경련이 일어나도 식구들을 위해 밥을 하고 오빠들 와이셔츠를 각을 세워 다렸다”(139). 힘든 삶을 살아내면서도 힘든 기색조차 보이지 않는 엄마의 삶이 눈에 계속 밟힘에도 불구하고 엄마에게 반항하는 일상을 일탈했다. 남자들도 힘에 버거워하는 록 클라이밍(Rock Climbing)을 즐기기 위해 고심 끝에 등산화를 산적이 있다. 하지만 막상 등산을 가려고 등산화를 찾았지만 그 어디에도 없었다. 수소문 끝에 화장실 한 쪽 끝에 커다란 고무통 위에 있는 등산화를 발견했다. “어머니의 직감이 나의 클라이밍을 말리고 있었다. 나는 고무통 앞에 한참을 가만히 서 있었다. 그리고 어머니에게 지기로 마음먹었다. 어머니는 위험을 무릅쓰고 심연의 세계로 뛰어들려는 나의 갈등을 몸으로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140-141). 결국 자식으로 향하는 엄마의 잴 수 없는 사랑의 깊이에 두손들고 무릅을 꿇은 적이 있다. 가족과의 마음 깊은 사연 속에 시인의 사람을 향하는 따뜻한 사유와 세상을 들여다보는 시심이 잉태되었을 것이다.

 

가슴에 안티푸라민을 발라주는 진정한 의사, 우리들의 영웅이 그곳에 계시니까”(95)로 대변되는 외삼촌에 대한 추억을 읽으면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눈가에 맺히기도 했다. “한 해가 며칠 남지 않았다. 외삼촌과 함께한 이 시간이 어떤 경전을 읽은 시간보다 진실하고 담백하고 쓸쓸했다”(101). “옛날은 가는 게 아니고 이렇게 자꾸 오는 것이었다.” - 이문재 시인의 소금창고라는 시의 한 구절이다. 과거의 기억이 풍부할수록 그것을 기반으로 발휘되는 상상력도 풍부해지는 법이다. 과거가 부실하면 상상력도 부실해진다. 상상력은 전혀 새로운 무엇인가를 상상하는 힘이라기보다 내 몸을 통과한 직간접적 조각 흔적들이 연결되어 현실에 구현되는 모습이다. 시인은 수시로 힘든 시절을 함께 겪어오면서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었던 가족에 대한 애틋한 추억을 지금 여기로 불러온다. 그때마다 과거는 흘러간 사건이나 사고가 아니라 지금 여기서의 힘든 삶을 극복하게 만들어주는 치유적 상상력의 원천으로 작용한다. 지리산 산방에 떠나 홀로 자연과 벗 삼아 자연스럽게 살아가시는 아버지의 심정에는 할 말은 많지만 안으로 삭이며 살아가시는 모습에서 서산에 해 넘어갈 때 드리우는 쓸쓸한 그림자가 연상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삼시사도(삼일은 시골에서 사일은 도시에서) 또는 도사시삼(도시에서 사일, 시골에서 삼일)을 지내기 위해 우여곡절과 절치부심 끝에 시골에 집을 지은 시인님은 가장 먼저 아버지를 생각한다. “아버지가 살아계신다면, 겉으로 마른 듯 보이나 속에 물을 잔뜩 빨아올린 봄 나무 같은 우리 아버지를 등에 업고 제일 먼저 이 집에 모시고 들어가고 싶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그저 엷은 미소로 아버지의 삶을 끄덕여주고 싶다. 비오는 창밖을 한 번 바라보고, 아버지의 얼굴을 바라보면서”(216-217). 창밖에서 환하게 미소 짓고 금방이라도 집안으로 들어오실 것 같은 아버지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깨달음은 평범한 일상 속에서도 다름이 존재함을 알아채는 일이다

 

베로니크 비엔느의 아무것도 하지 않을 자유에 나오는 깨달음이란 내가 평범한 사람이라는 사실이 편안하게 느껴지는 상태를 다르게 표현한 것이다라는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깨달음은 대단한 노력 끝에 다가오는 대오각성(大悟覺醒)이 아니다. 오히려 깨달음은 평범한 일상 속에서도 시선이나 관점이 바뀌어 늘 반복되는 익숙함에서도 나를 살아있게 만드는 작은 깨우침이다. 그런 깨우침이 나와 내가 만들어가는 삶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되돌아보게 만든다.

 

연꽃 피시었다

저 뿌리께 복잡한 사정을 모르는 바 아니나

꽃 피는 소리 고요하다

꽃 보는 마음도 고요하면 좋으련만

피고 지는 일,

뿌리 내리고 걸러내는 일,

외롭고 고단했을 일 생각하다

한순간 연꽃과 얼굴이 마주쳤다

연꽃이 시침 뗴고 말갛게 웃는다

나도 모르는 척 같이 웃었다

 

피고 지며 뿌리 내리고 걸러내는 일의 연꽃의 일이라면 그것이 얼마나 고단한 일인지를 연꽃이 되어 생각해보는 일은 사람의 일이다. 연꽃이 사람이 되고 사람이 연꽃이 되어 보는 가운데 역지사지(易地思之)나 물아일체(物我一體)가 생각만큼 쉽지 않음을 깨닫는 일도 쉽지 않다. ‘깨달음은 평범한 일상 속에서도 다름이 존재함을 알아채는 일이다. 그것을 깨닫는 순간 마음이 얼마나 편안해질지 짐작이 간다. 시인이 나누는 자연과의 교감은 지칠 대로 지친 우리들에게 따뜻한 위안을 주고 색다른 깨우침을 준다. 일상에서도 비상한 상상력을 예고 없이 발휘한다. 연꽃과 나누는 평범한 대화 속에서도 씩 웃게 만든다. “그들과 나는 서로 낯선 존재, 그들은 그들의 길이 있고 나는 나의 길이 있으니, 서로 부딪치지 않고 이 시골에서 사는 법을 터득해야 했다. 이곳은 내가 집을 짓기 잔까지 그들이 살던 곳이었다. 새끼 고라니를 데리고 먹을 것을 찾으러 지천으로 뛰어다니던 곳”(71). 혹시나 시인의 작은 간섭과 관여가 자연 속에서 살아가던 생명체에게 공격적으로 다가가지나 않을까 노심초사한다. 그들이 길을 가로막고 나도 모르게 서 있을 때 원래 이곳에서 살아가던 다른 생명체는 갑자기 낯선 곳에서 찾아온 방해꾼이 자신들의 삶의 터전을 위협하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내가 잠든 시간에도 굴참나무 도토리는 종자를 떨어뜨리고, 내가 번민에 싸인 시간에도 바람은 나무를 흔들어 깨운다”(72). 나의 의지와 힘이 하늘을 찔러도 그것으로 내가 바꿀 수 있는 자연의 순환적 흐름은 없다. 자연 속에서 원래 자연스럽게 살아가는 생명체의 저마다의 삶의 방식과 이유와 원리를 배워야 한다.

 

자연의 사물들은 방어할 틈을 주지 않고 경계를 획 넘어 내 안으로 쳐들어온다. 인간인 내가 도토리에게 받은 질문은, 바쁜 일상에 쫓겨 허둥대다가 길을 잃은 한 인간의 모습을 바라보게 하기에 충분했다”(127-128). 오로지 인간만 질문할 수 있다는 오만한 생각 앞에 무참히 무너지는 시인은 자연의 모든 생명체가 저마다의 방식으로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에 한 번도 귀 기울여 본적이 없음을 자주 깨닫는다. 잠시라도 쉴 여유와 빈틈없이 살아가는 인간들의 불쌍한 군상에 아랑곳 하지 않고 매순간을 처절할 정도로 치열하게 살아가는 생명현상 앞에 시인은 자주 멈춰 서서 질문을 넘어 탐문하며 자문한다. “도토리는 깊은 산 큰스님이나 건넬법한 질문을 나에게 던졌다. 그것도 머리에 모자를 삐뚜름하게 쓴 불량한 자세로”(132). 자연과 생태계를 일정한 상태로 유지하며 부단히 변화하는 생명체의 연쇄고리를 우리는 평상시에 감지하지 못한다. 가던 길을 멈추고 문득 관심을 기울여 주변을 관찰해보려는 마음속에 질문하려는 호기심도 자란다. 시인의 질문을 받은 자연의 무수한 생명체도 거꾸로 사람에게 반문한다. 나무를 배신하고 떨어진 도토리가 다시 자신을 낳아준 나무가 되기 위해 땅에서 절치부심하는 마음을 아느냐고. 도토리 역시 다람쥐에게 잡혀 먹을 위기에 늘 노심초사하면서 자신을 어느 곳에 묻어두었는지 제발 모르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간절한 마음을 과연 인간은 알 수 있을지 의문이라고.

자연의 생명체에게 적당히는 더 이상 타당하지 않다

 

모든 것이 영원하리라는 거짓말을 전제로 보면, 모든 생태계는 배신의 체계 속에 있다. 순환의 연속은 항상 변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사람은 이상을 가지고 변하지 않는 어떤 것을 늘 바라고 꿈꾸지만, 그렇기에 또 상처를 받는다”(131). 새순의 꿈을 이루었다고 신록으로 옮겨가는 배신, 녹음이 자신의 본분을 다했다고 단풍으로 보여주는 배신, 단풍도 이만하면 아름다움을 불태웠다고 나뭇가지에서 떨어져나가는 배신의 선순환이 곧 변함없이 변하는 생태계의 변신이다. 변하지 않는다는 믿음을 버리고 때가 되면 자신을 버리고 떠나는 배신을 믿을 때 생태계는 변함없이 변함을 거듭한다는 깨달음을 얻어야 한다. “숭고한 이상을 가진 인간은 아프다. 영원히 사랑하고 싶고, 순백의 성혈로 사랑하고 싶은 소망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살아 있기에 아플 수밖에 없다”(132). 고통 없는 인생은 죽은 인생이다. 고목을 흔들리지 않지만 거목이 흔들리는 이유는 살아 있기 때문이다. 살아있음은 아픔을 전제로 펼쳐지는 생명체의 몸부림이다. 가만히 그 자리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모든 생명체는 살아있음이 곧 전쟁이다. 한 순간도 가만히 있지 않는다. “잔디 속에 뿌리를 내리는 바랭이는 줄기마다 10센티미터 간격으로 또다시 뿌리를 내리는 치밀함이 있는가 하면, 넝쿨식물들은 나무의 발목을 지나, 허리를 지나, 목까지 감고 올라가, 누가 나무이고 누가 넝쿨인지 모르게 뒤엉킨 채 자신의 생명력을 발산했다. 그들에게는 애초에 적당히라는 개념은 없는 것 같았다. 생명 속의 어떤 에너지가 다할 때까지 뻗고 또 뻗어갈 뿐이었다”(144-145). 적당함이 타당함으로 인정되는 인간세계의 중용은 자연의 세계에서는 미덕이라기보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위험한 자세다. 더구나 움직이지 못하고 있는 그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식물에게 적당히는 곧 죽음의 전조등이다. 자리를 탓할 수 없는 식물들에게 매 순간은 늘 최선을 다하며 치열하게 살아가는 찰나의 연속일 뿐이다.

 

저 생명이 자비한 것인지, 무자비한 것인지 나는 모르겠다. 30년 가까이 책을 만들며 확립했던 개념들이 스스로 그러한 자연 앞에서 무너지고 있다. 단어의 정의로만 볼 때는 자비와 무자비는 서로 반대 개념으로 다른 쪽에 서 있어 야 하나, 요즘 나에게는 그들이 연결되어 있는 하나의 고리로 보인다. 고리에 고리를 연결하면 나도 그곳에 연결될 것이고, 인간도 자연의 극히 작은 일부라는 사실이 자명해질 것이다”(74). 자비로운 사람은 전혀 무자비하지 않고 무자비한 사람은 자비롭지 못하다는 말도 관념적이다. 자비로운 사람도 참으로 무자비하고 무자비한 사람 역시 얼마든지 자비로운 마음을 품을 수 있다. 사람의 하루 일과를 생각해보라. 한 사람이 먹는 세 끼의 식사에 얼마나 많은 무자비한 살해행위가 들어있는지를. 밥을 먹기 위해서는 벼를 죽여야 했고 나무를 먹기 위해서는 숱한 나물의 생명을 끊는 무자비한 폭력을 가한다. 육식을 생각하면 인간은 자비로움을 추구하면서도 너무도 무자비하다. “우리는 순수함과 폭력 중에서 어느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종류의 폭력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해야만 한다. 육체를 부여 받은 존재인 우리에게 폭력은 숙명이다메를로 퐁티의 휴머니즘과 권력에 나오는 말이 의미심장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모르고 지내왔던 인간의 잔인한 폭력과 무자비한 살해 행위를 근본적으로 멈추는 방법은 없다. 나라는 존재 자체가 얼마나 폭력적인지를 진지하게 생각해보면서 자발적 죄책감과 자기반성을 통해 무자비한 삶을 자비롭게 바꿔보려는 안간힘을 죽을 때까지 쓸 수밖에 없다.

 

인간 역시 저마의 위치에서 생명찬가를 부르는 또 다른 조연일 뿐이다

 

내가 자연을 지배하는 주인이 아니라 더불어 살아가는 생태계의 한 구성원일 뿐이라는 각성도 더욱 필요한 시점이다. 다른 생명체에 비해 인간이 지니는 우월성을 인정할 아무런 논리적 근거도 없다. 인간이야말로 자연과 다른 생명체에 철저히 의존적이다. 자기 힘으로 살아갈 수 없는 가장 나약한 존재가 바로 인간이다. 사람은 하루라도 다른 생명체의 노력에 의존하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다. “도대체 벗어날 길 없는 내 시야, 내 몸, 내 각도에서 볼 뿐. 내가 주인공은 아니다. 우리는 각자 주인공이면서 스스로 그러한 모두에게 조연으로 살아가고 있다. 누군가는 굴참나무로, 누군가는 고라니로, 누군가는 굴참나무 잎의 보호를 받고 피어난 남보랏빛 각시붓꽃으로 스스로 그러한 자연 앞에서 나는 자비와 무자비가 비빔밥이 된 여름을 맞게 될 것이다”(74). 자연 생태계는 먹이 사슬의 위계적 관계는 존재하지만 그렇다고 절대 강자가 언제나 주연을 맡지 않는 세계다. 모든 생명체가 저마다의 위치에서 자기 방식으로 살아가는 주연 배우다. 다양한 생명체의 고유한 개별성은 다른 생명체의 개별성으로 대체될 수 없기 때문이다. 도토리는 자기방식으로 자기 삶의 완성을 위해 치열하게 살아가고, 다람쥐 역시 자기만의 방식으로 생태계의 한 무대 위에서 자신의 고유함을 연기할 뿐이다. 모두가 주연으로 연기하는 생태계는 다른 생명체에게는 조연일 뿐이다. 자기만 주연이고 나머지는 조연이 아니라 모두가 조연으로 자기 맡은 분야에서 자신의 고유함을 연기하는 주연 배우다.

 

내가 알고 있던 사전적 정의가 무너지는 것이 한편으로 혼돈스러우면서, 한편으로는 그렇게 통쾌할 수가 없다. 무엇인가 그 동안 나를 누르고 있던 금형 프레스 같은 것이, 가벼이 날리는 아카시아 향기에 실려 사뿐히 사라진 기분이다”(74-75). 관념적으로 알고 있던 교과서적 정의가 자연을 관찰하면서 죽비같은 통찰을 얻을 때 느끼는 깨우침은 그 어떤 각성보다도 통렬한 대오각성이었다. 내가 자연과 우주의 중심이라는 오만한 고정관념이 통렬하게 깨지는 상처가 내 몸에 새겨질수록 나는 덜 폭력적이고 무자비해질 수 있다. 무자비하다는 사실이 무참히 깨질수록 자비로운 인간으로 거듭날 확률은 높아진다. 자연은 언제나 늘 우리들에게 그런 목소리를 우렁차게 들려주는 저마다의 연기를 하고 있지만 오만한 인간이 그걸 듣지 못하고나 들어주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나의 존재를 전경으로 나답게 더욱 드러내주는 수많은 배경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보자. 나의 힘으로 이룬 것은 하나도 없다. 모든 성취는 나를 둘러싸는 수많은 타자와 다른 생명체를 포함해 자연의 선순환을 도와주는 모든 물질적 존재들의 보이지 않는 합작품이다. 소중한 존재는 인간만이 아니라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어주는 다양한 배경에서 묵묵히 자신의 본분을 다하는 숨은 일꾼들이다. 세상이 시끄럽게 돌아갈수록 침묵과 대화를 나누고 내가 어디를 왜 지향하고 있는지를 물어봐야 오만과 자만에서 벗어날 수 있다.

 

절대 고독은 절대로 고독한 상태로 끝나지 않는다

 

나이와 세월이 주는 속도감, 후려 팰수록 빨리 도는 팽이, 그 속도에서 빠져 나왔다”(163-164). 빨리 돌지 않으면 스스로 죽음을 맞이하는 팽이처럼 우리는 목표를 향해 매진하다 목숨까지 위태로운 순간으로 내몰리고 있음을 깨닫지 못한다. 빨리 변해가는 세상의 수레바퀴 안에서 우리는 무엇을 향해 달리는지 조차도 모른 채 어딘가를 향한 광속열차 안에서도 달리고 있는 자신을 더 빨리 달아나지 않으면 목표를 달성할 수 없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린다. 삶의 속도보다 밀도를 중시해야 행복해진다는 깨달음은 멈춰 서서 성찰하지 않으면 깨달을 수 없는 각성이다. 밀도는 삶의 매순간 느끼는 충만감이다. “갈색 커피 가루에 뜨거운 물이 닿는 순간, 아린 것들의 향기를 맡고 그것이 풀어주는 삶의 노곤함을 알 수 있을 때, 비로소 삶은 밀도감 높은 행복감을 만끽하는 것이다. 숨과 쉼은 같은 가족이다. 몰아쉬는 숨은 몸도 그만큼 힘들다는 징조다. 깊은 호흡 내 쉬고 들이마시며 잠깐만이라도 쉬어 가는 여유가 사람을 더욱 살아 숨 쉬게 만든다. 저 사이로 무엇인가 다가오는 것이 느껴진다. 숲속 저 멀리서 다가오는 저 것. 그것은 바로 절대 고독그분이다. 깨달아도, 깨닫지 못하여도 비껴갈 수 없는 그분. 사랑해도 소용없고, 사랑하지 않아도 소용없는 절대자 그분. 나는 그분과 아주 천천히 친해지려 한다. 나는 그분 앞에서 백전백패이므로 가급적 아주 천천히 다가가려 한다”(142). 절대 고독은 속도와 함께 절대 오지 않는다. 절대 고독은 충만한 삶의 밀도에서 어제와 다른 각도로 삶을 진지하게 성찰할 때 생긴다. 타자와의 대화가 아니라 나 자신으로 파고들어가는 대화, 자연 생명체 입장에서 생각해보는 역지사지일 때 찾아오는 절대 고독은 절대로 고독에 그치지 않고 충만한 성찰과 통찰로 연결된다.

 

순간적인 착시로 나는 유리창 밖에 살고 있다고 여겼으나, 나는 유리창 안에 있었다는 사실을 시골집은 알게 해주었다. 포슬포슬한 햇감자는 좋아하나 딱딱한 땅을 뒤집고 씨감자를 심는 일은 힘들어하고, 부모님을 사랑하나 전화하는 것은 쑥스럽고, 남편을 사랑하나 요리는 하지 않고, 수재민을 불쌍히 여기긴 하나 헌 곳을 정리하여 보내는 일은 하지 않는 것과 같았다”(107). 바깥세상의 낭만을 추구하지만 정작 낭만을 얻기까지의 과정에서 겪어야하는 고달픔 삶은 원치 않는다. 유리창 너머의 삶은 유리창 안에서 구현할 수 없다. 유리창 안에서 밖을 지향할수록 밖으로 향하는 삶은 유리(遊離)될 수밖에 없다. 이럴 때일수록 유리창 안에 갇혀 있는 사람에게 질문을 던져야 한다. 질문은 무턱대고 만들어지는 감정을 넘어 그 사람의 속사연을 듣게 한다. 질문은 유리창을 열고 밖으로 나가 실물과 만나게 한다”(110). 유리창 안에서 밖을 내다보는 풍경이 마냥 아름다워 보일 수 있지만 유리창 밖으로 나가 직접 당사자에게 질문을 던져보면 안에서의 사유가 밖으로 나오면 얼마나 취약한 관념의 파편으로 전락하는지 몸서리쳐지는 경험을 한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저마다의 유리창을 통해 나의 바깥과 만난다. 질문을 던져야 내가 가졌던 선입견과 편견의 덫에서 벗어나 유리된 채 만들어지는 타성의 늪에서 벗어날 수 있다. 고독한 상태에서 스스로에게 던지는 자문과 밖으로 향하는 질문이 이전과 다른 세계로 연결되는 관문이 된다. 고독은 질문을 부르고 질문은 이전과 다른 관문을 열어주는 셈이다.

 

생태계를 살려내야 살림살이도 살아난다

 

식물들이 떨어뜨린 씨앗 하나가 생명의 움을 틔우기까지, 두더지는 포슬포슬하게 땅을 일궈놓고, 빗방울은 대지의 목마름을 적셔놓고, 또 낙엽은 이불을 덮어 온기를 지켜준다. 무심한 듯 자신의 일을 하지만, 이런 무심들이 모여 하나의 생명을 빚어낸다”(204). 소로의 월든을 능가하는 자연찬가다. 무심하게 자연을 바라봐야 비로소 포착되는 자연의 자연스러움이 인간의 관심과 의도와 관계없이 늘 그 자리에서 위대한 자연의 교향곡을 들려준다. 자연에서 멀어지는 인간은 곧 세상에서도 멀어지기 전에 처절한 각성과 반성이 필요하다. 통렬한 성찰을 통해 생태계를 살려내지 않으면 생계도 영원히 무너질 수밖에 없다. 인간의 무자비한 자만심으로 파괴되어 가는 생태계를 살려내야 살림살이도 살아난다.

 

사는 일이

바람 몇 줌 햇빛 몇 스푼, 라벤더 향 한 꼬집

8월이 물고기처럼 숲속을 헤엄쳐“(91) 지나가는 일이라고 해도 오늘도 시인은 자연과 사람이 어울려 살아가는 진실한 삶의 의미를 찾는 질문을 잊지 않을 것이다. 평범한 진실이지만 그것을 찾는 여정이 고달프고 허무해도 그 노력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꽃을 보아도 시간은 흐르고, 꽃을 보지 않아도 시간은 흐른다. 봄이면 꽃이 피고, 가을이면 꽃이 진다. 진실만큼 허무한 것이 없고, 허무한 것만큼 진실한 것이 없다”(203). 사실에서 왜곡된 거짓을 걷어낼 때 드러나는 진실을 만나는 순간 너무도 당연하다는 생각이 허무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 허무한 만큼 진실도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단면을 여실히 보여준다. 그리고 언제나 시인은 불가지의 세계라고 할지라도 진리가 살아 숨 쉬는 일상에서 상상력의 텃밭을 가꾸기 위해 기꺼이 자연이 주는 위대한 가르침에 귀를 기울일 것이다. 비록 숱하게 절망하는 한이 있더라도. 과거를 수놓았던 얼룩과 무늬를 현재로 데리고 와 씨줄과 날줄로 엮어보고, 도시와 시골을 오고가며 느끼는 생활의 단상이 상상력을 만나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장편의 서정적인 내러티브를 만들어냈다. 눈앞에 펼쳐지는 콘텍스트에서 시인의 감수성과 상상력으로 엮어낸 텍스트를 편집하면서 오늘도 내일도 진리를 향하고 있다.

 

그곳은 진리가 있는 곳

나는 진리의 방향으로 서 있는

절망하는 편집자였다“(178).

 

. 평범한 진실이지만 그것을 찾는 여정이 고달프고 허무해도 그 노력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꽃을 보아도 시간은 흐르고, 꽃을 보지 않아도 시간은 흐른다. 봄이면 꽃이 피고, 가을이면 꽃이 진다. 진실만큼 허무한 것이 없고, 허무한 것만큼 진실한 것이 없다"(20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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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의 혼란 - 지성 세계를 향한 열망, 제어되지 않는 사랑의 감정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서정일 옮김 / 녹색광선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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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의 혼란이 던져준 찬란한 감동의 시한폭탄을 만나다

심미적 체험의 황홀한 쾌락을 추구했던

슈테판 츠바이크의 감정의 혼란을 읽고

 

 

선물로 받은 책이 그동안 내면의 격정과 욕구를 참아내며 침묵 속에서 버티다 주인의 손길을 유혹했습니다. 무심코 집어 든 책의 첫 페이지를 여는 순간 심상치 않은 감정의 소용돌이가 고요한 적막을 깨며 허공을 맴돕니다. 책을 읽어버렸습니다. 책을 읽고 말았습니다의 수준을 넘어 책이 나를 먹어버렸습니다는 표현도 부족한, 그야말로 언어의 한계와 부족을 느낍니다. 책이 내 몸을 통과하다 아예 방향을 바꿔 관통하면서 남긴 상혼이 진저리를 연주합니다. 처절한 깨달음의 서곡과 함께 몸서리치며 울려 퍼집니다. 진저리와 몸서리가 남긴 한 줄의 흔적은 생각보다 상처의 깊이가 깊었습니다. 앎의 생채기가 난 것이 아니라 감정의 파도가 격랑의 바다를 넘어 온몸을 휘감은 전율이었고 감동이었으며 경이로웠습니다. 주인공 롤란트와 스승과 주고받는 극심한 감정의 혼란을 겪다가 책장을 덮는 순간 온몸으로 체감되는 심원한 것에 대한 형언할 수 없는 느낌”(207)이었습니다.

 

감정의 혼란은 말 그대로 곳곳에서 어떻게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이 좋은지 감정적 파란이 물밀 듯이 밀려오고 밀려나가기를 반복합니다. 주인공 롤란트가 방황을 거듭하다 학문적 열정에 사로잡히면서 활화산처럼 분출하는 언어의 광휘로 낯선 나를 처음부터 사로잡았고, 더 깊은 그의 침묵, 이마 위에 떠도는 비애의 구름이 이젠 그와 친숙해진 (86)”를 사정없이 뒤흔드는 격정의 바다를 수없이 건너갑니다. “그의 말에 완전히 귀를 기울인 상태로 우리 모두는 하나가 되어 그 사람의 일부분이 되었으며, 넘쳐흐르는 감정의 흐름 속으로 빨려들어 갔습니다(61). 이 말처럼 스승이 펼쳐내는 열강과 주장에 격렬한 감정적 동요가 일어나면서 책 속으로 흠뻑 빠져들어가 읽다가 갑자기 망치로 뇌리를 때리는 구절을 만납니다. 그 순간 이 책의 제목대로 더 극심한 감정적 혼란을 경험합니다. “나도나도 자네를 사랑하고 있네”(175). 물론 교수가 여행을 떠나버린 어느 날 롤란트는 교수의 아내로부터 교수가 동성애자라는 비밀을 듣고 그녀와 관계를 가지면서 알게 된 사실입니다. 결국 이 책은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숨기고 마치 온몸에 가면을 쓰고 파우스트의 의복을 입고 앉아있는 바그너처럼”(88) 이중 세계를 살아가며 겪는 한 대학교수의 극심한 감정흐름을 만나는 순간 심한 혼란의 도가니로 빠지곤 합니다.

 

방탕과 방황을 경험하다 비로소 방향을 잡을 수 있습니다

 

낮에는 문학과 예술의 경지에 오른 사람들을 본받아 그들의 삶을 열정적으로 가르치는 정신세계에 살며, 뜨거운 청춘들에게 미래에 우리가 살아갈 지적 양식이나 튼실한 교양을 계발하는 열정적인 대학교수의 감정의 혼란을 고스란히 만나볼 수 있다. 논리적이고 치밀하면서도 뜨거운 열정으로 무장한 대학교수도 한 꺼풀 벗기면 견디기 어려운 관능적 육욕이 꿈틀거리는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준다. 그럼에도 그걸 숨기며 강단에 서는 대학교수의 치밀한 이중적 자기관리의 가면에 학생들은 한없이 존경하고 따르는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그는 들끓는 욕정을 억누르고 아무런 일이 없다는 듯 감정의 혼란을 다스리기 위해 이를 악물고 강단이라는 무대 위해서 힘겨운 연기를 이어나간다. 잠시만 한 눈을 팔아도 거침없이 다가오는 유혹의 사슬에 얷매일까봐 한 눈팔지 않고 처절한 사투를 벌이며 육신이 원하는 욕망이라는 열차에 타지 않으려는 고통스러운 투쟁을 반복합니다. “우리는 무수히 많은 순간을 경험하지만, 우리의 완전한 세계가 고양되는 순간, (스탕달Stendhal이 기술한 바와 같이) 모든 진액을 빨아들인 꽃들이 순식간에 한데 모여 결정(結晶)을 이루는 바로 그 순간은, 언제나 단 한 순간, 오직 한 번뿐입니다. 그것은 생명이 탄생하는 시간처럼 마술적이며, 체험된 비밀로 삶의 따뜻한 내면에 꼭꼭 숨어 있기에 볼 수도, 만질 수도, 느낄 수도 없습니다”(17). 불현 듯 다가오는 격정적 깨달음이 다가오는 순간적 마주침, 그 순간에 온몸을 관통하며 전율하는 감동으로 다가오는 직관적 경외감, 일생에 한 번 꽃을 피우는 어떤 식물처럼 기적같은 한 순간의 체험이 우리를 살아있게 만드는 원동력이다.

 

이 책은 60세의 노교수 롤란트가 30년간의 교수생활을 기념하여 어문학자들이 헌정한 기념 문집을 받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하지만 정작 자신의 영적인 삶의 경험에서 가장 소중한 본질이 빠져 있고, 자신을 창조적 충동으로 몰아간 운명적인 그 사람의 이름도 없다고 서운해합니다. 롤란트는 그래서 자신의 운명을 바꾼 그 사람과의 아름다운을 추억을 소환하기로 결심하고 자신의 고백을 시작합니다. 롤란트는 독일 지방 소도시 대학의 학장으로 재직하며 엄격한 교육적 가르침과 교훈으로 무장한 아버지의 훈계를 받고 자랐다. 교육자 집안이라서 사방이 책을 둘러 싸인 집에서 자랐지만 사실 그런 환경 자체가 롤란트에게는 상당한 정신적 압박으로 다가왔다. 그는 졸음을 부르는 지루하고 단조로운 설교조 강의에 지독한 권태로움을 느꼈고 참기 힘든 수업시간을 벗어나 베를린 도시가 주는 자유로운 요동에 이끌립니다. 선원이 되고 싶었던 롤란트는 아버지와 타협 끝에 선원생활을 하는데 유용할 것으로 판단되는 영어를 공부하기 위해 베를린의 대학을 갔지만 도시가 주는 무한 자유와 해방감에 빠져 방랑을 넘어 방탕 생활에 빠져듭니다. 공부는 당연히 뒷전으로 밀려나고 하숙방에서 애인과 함께 놀다 느닷없이 찾아 온 아버지와 맞닥뜨리면서 일생일대의 최대의 위기를 맞이합니다. “, 대체 이 모든 것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니? 넌 이제 뭘 하려고 하지?”(32)라는 예상외의 냉정한 아버지의 질문에 그는 아버지에 대해 처음으로 존경심을 진지하게 갖게 됩니다. 아버지가 보여준 진지함과 신뢰에 감동받은 롤란트는 그 동안의 방탕생활을 청산하고 학업에 전념하기로 결심합니다.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한 사람이 한 사람의 운명을 바꿉니다

 

19 살의 청년 롤란트는 자신의 인생을 뒤바꾸는 운명적인 한 사람의 스승을 만나게 됩니다. 그것도 의도했던 장소가 아니라 잘못 들어간 강의실에서 20여명의 학생을 모아놓고 셰익스피어를 열강하는 한 사람의 영문학 교수에게 그는 순간적으로 매혹 당합니다. “목소리가 당당하게 터져나올 때마다 그는 마치 날개를 활짝 펴듯 떨리는 두 손을 들어 올렸다가, 지휘자로 선율에 따르듯 안정된 제스처로 천천히 손을 아래로 내려놓았습니다. 목소리는 점점 더 격렬하게 휘몰아쳤고, 마치 날개라도 달린 듯 그는 질주하는 말의 엉덩이에서처럼 딱딱한 책상에서 음악적으로 솟구쳤습니다. 그리고 섬광과도 같은 번쩍이는 비유들로 가득한 원대한 사상들을 폭풍처럼 쏟아냈습니다”(37). 노 교수의 영문학 강의에 얼마나 감동받았는지를 더 이상 표현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그는 일생일대의 가장 감동적인 순간, “꽃들이 순식간에 한데 모여 결정(結晶)을 이루는 바로 그 순간”(17)을 경험합니다. 그 순간은 라틴어로 ‘’랍투스(Raptus, 순간적으로 밀려오는 심리적 상황을 의미하는 단어-옮긴이)라고 부르는 것, 즉 한 인간이 자신의 경계를 초월해 이끌려가는 상태를 체험했던 것입니다. 휘몰아치는 그의 입술은 자신을 위해서 말한 것도, 또 다른 사람을 위해서 말한 것도 아닙니다. 그건 몸속에서 불이 일어난 사람 내부의 화염이 입술을 통해 쏟아져 나오는 것이었습니다”(38). 어디서도 경험해보지 못한 지적 황홀감은 감동을 넘어 감탄사를 연발하며 감격적인 장면으로 다가왔습니다. 얼마나 뜨거운 열정이었으면 몸속에서 불이난 화염이 입술을 통해서 전해진다는 표현을 썼을까요? 그 자리에서 강의를 듣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글만으로도 화염에 휩싸여 심각한 화상을 입을 것만 같은 느낌으로 다가오는 열정적인 강의였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이런 강의를 듣고 빠지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요? 한 번 빠지면 빠질 수 없습니다. 빠져야 완전히 빠져버릴 수 있습니다.

 

체험 없는 어문학적 이해나 가치에 대한 인식이 결여된 단순한 문법적인 단어란 존재하지 않아요. 젊은 여러분들은 하나의 국가 그리고 그대들이 정복하고자 하는 언어를 우선 최고로 아름다운 형식 속에서, 청춘의 가장 강력한 형태 속에서, 뜨거운 정열을 통해 만나지 않으면 안됩니다. 우선 여러분들은 시인들의 언어를 들어야 합니다. 언어를 창조하고 완성하는 시인들 말입니다! 우리는 문학을 해부하듯 분석하기 전에 일단 호흡해야 하며 가슴으로 따뜻하게 느껴야 하지요”(44). 모든 언어에는 그 사람의 열정과 철학이 담겨 있습니다. 한 사람이 사용하는 단어는 국어 사전에 나오는 단어가 아닙니다. 그 단어에는 그 사람의 언어 사용방식은 물론 말하는 사람의 단호한 입장이 뜨겁게 녹아 있습니다. 그래서 문학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작품 속에 담긴 작가의 뜨거운 정열을 온몸으로 맞이해야 합니다. 문법적 분석과 문학적 해석은 그 다음입니다. 분석과 해석이 앞서면 작품은 분해됩니다. 수전 손택이 해석에 반대한다에서 했던 주장처럼 해석은 지식인이 예술을 넘어 세계에 가하는 복수입니다. 문학이나 예술작품을 창작의도와 무관하게 관념적으로 해석함으로써 작품성을 자의적으로 해독하는 행위의 역기능과 폐해를 지적하는 말입니다. 작가가 작품을 쓰면서 녹여냈던 열정이 언어에 담겨 있습니다. 그것은 분석이전에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우리는 언제나 모든 현상, 모든 인간을 그 불꽃의 형태로만, 정열을 통해서만 인식할 뿐입니다. 모든 정신은 피 속에서 끓어오르고, 모든 사상은 정열에서, 모든 정열은 영적인 감동에서 솟아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셰익스피어와 그 시대 사람들에게 먼저 눈길을 돌려야합니다. 여러분들을 진실로 젊게 만들어 줄 셰익스피어를 말입니다! 먼저 감동하고, 그 다음에 공부하시오! 언어를 공부하기 전에 먼저, 가장 찬란한 세계의 교과서인 그 사람, 가장 고귀한 그 사람, 최고의 인물인 셰익스피어에 대해 연구하시기를!”(44-45). 먼저 감동하고 공부하라는 말이 죽비처럼 다가옵니다. 가슴으로 느끼는 감정이 먼저 밑바탕을 이루고 머리가 생각하는 논리는 다음에 옵니다. 느낌이 먼저오고 그것이 머리로 올라가 생각이 만들어집니다. 머리로 분석하고 따지는 공부이전에 어떤 감정의 소용돌이가 온몸을 감싸 안는지를 뜨거운 가슴으로 느껴야 합니다.

 

강의는 한 사람의 운명을 바꾸는 사건입니다

 

나는 옴짝달싹할 수 없었습니다. 마치 심장이 찔린 것 같은 느낌이었지요. 내 자신이 스스로의 열정을 동원해 감각을 고양시킬 수는 있었지만, 내가 한 인간에게, 선생님에게 사로잡힌 것은 난생 처음이었습니다. 압도적인 힘 앞에서 고개를 숙이는 것은 나의 의무인 동시에 기쁨이었습니다. 나의 피는 뜨거워졌고, 숨소리는 점점 빨라져 들끓는 리듬이 내온 몸을 때리고, 내 모든 관절을 팽팽하게 잡아 당겼습니다. 마침내 나는 어쩔 도리 없이, 그의 얼굴을 보려고 앞쪽 줄로 천천히 나갔습니다”(46). 어떤 강의를 들었길 래 저 정도로 온몸이 뜨겁게 반응을 할까요? 심장을 찌르는 강의는 책상지식으로 전달해서는 불가능한 강의입니다. 노 교수는 자신의 삶으로 겪은 체험적 깨달음을 셰익스피어라는 문학가의 작품에 녹여서 셰익스피어를 바라보는 관조적(觀照的) 지식이 아니라 셰익스피어로 빙의해서 살아간 참여적(參與的) 지혜를 몸으로 전수했을겁니다. 자신의 직접 체험으로 걸러진 지식이 아니고서야 살갗을 파고드는 감동을 줄 수 없습니다. 특히 의미가 머리로 가지 않고 심장에 와 닿는 강의는 강사의 체험적 느낌을 싣지 않고는 불가능합니다. 강사의 삶이 담긴 아우라가 저절로 느껴지면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는 카리스마는 형식미에서 오지 않고 내용을 녹여내는 강사의 체험적 각성에서 옵니다. 처음에는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먼발치에서 관망하는 자세로 고개를 뒤로 젖힌 채 들어보다가 점차 내 몸이 책상 앞으로 바짝 당겨지면서 머리가 어느 사이 강사를 향하고 있음을 발견합니다. 강의가 몸을 통과하고 있다는 느낌이 올 때 보여주는 자세입니다. 그 사이 심장박동은 더욱 빠르게 뛰면서 동맥 속을 통과하는 피는 더욱 빠르게 온 몸 구석구석으로 흘러갑니다. 뜨거운 피가 흐르면서 뼈와 뼈를 더욱 가깝게 관절이 당겨줍니다. 다음 말에 한 껏 기대가 부풀어오르면서 창조적 긴장감이 온몸을 휘감았습니다.

 

이런 강의를 듣는 순간 그 동안 눈앞에만 아른거리며 도무지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작품이 비로소 반짝이면서 나의 몸속으로 빨려들기 시작합니다. 몸 속의 위기의식이 생기면 밖의 성긴 정보가 빨려들어 지식을 만드는 용광로로 돌변합니다. “그날의 강의가 나의 호기심에 정열이 불을 붙여 놓았으며, 한 번도 읽어보지 못한 시적 언어를 읽게 만든 것입니다. 그러한 변화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돌연 셰익스피어의 문장 속에서 또 다른 세계가 내게 달려왔고, 그의 언어가 마치 수백 년 동안 나를 찾고 있었던 것처럼 오로지 내게만 다가오는 것 같았습니다. 그의 시들은 거대한 불꽃으로 나를 매혹하며 혈관 속까지 스며들었고, 잠든 상태에서 날아가는 꿈을 꾸는 것처럼 야릇하게 풀어지는 느낌을 선사했습니다. 몸이 움찔거렸고 부들부들 떨렸으며, 열병이 온 몸을 습격하듯 내 피는 점점 더 뜨겁게 일렁였습니다“(52). 난해한 언어적 그물에 가려져 도무지 그 정체를 알 수 없었던 작품이 비로소 작가의 성품을 담은 채 혈관 속으로 파고들어 혈액순환을 빠르게 재촉합니다. 오랫동안 자신이 꿈꿔왔던 환상적인 세계가 눈앞에 펼쳐집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꿈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몸이 강의가 전해주는 메시지의 감동과 그 깊이에 따라 계속해서 움찔거리는 걸 보면 강의는 지금 눈앞에서 펼쳐지며 전율하는 감동을 주는 게 틀림없습니다. 더구나 조용히 흐르던 혈관 속의 피가 가끔은 터질것처럼 폭발적으로 팽창하는 듯 강의가 전하는 메시지에 공감하는 순간이 자주 찾아듭니다. 이제 강의는 듣고 감동하는 순간을 넘어 한 사람의 운명을 바꾸는 혁명적인 사건으로 거듭납니다.

 

스승은 제자에게 거대한 우주이자 세상의 중심입니다

 

하지만 스승은 늘 열정적인 강의를 언제까지나 일관되게 반복하는 철인은 아니었습니다. 때로는 의기소침해진 상태에서 한없이 무기력한 상태로 강의실에 나타나곤 합니다. 그렇다고 세상을 감동시킬 뚜렷한 작품을 글로 남긴 경우도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다시 원기를 회복한 노교수는 학생들의 뜨거운 토론장을 다시 한 번 뒤흔들며 열정의 불꽃을 피웁니다. “정신적인 불꽃놀이의 한복판에 서서 다양한 의견의 닭싸움을 자극하고 잡아당기기도 하면서 스스로 유쾌하게 홍분하기도 했습니다. 거장(巨匠)은 이렇게 밀려오는 청춘의 열광에 스스로 휩쓸렸던 겁니다. 그는 책상에 기대어 두 팔을 가슴에 낀 채 한 학생에게는 미소를 짓고 다른 학생에게는 반대의견을 제시해 볼 것을 격려하듯 남몰래 눈짓을 보내며,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시선을 건넸습니다. 그의 눈은 어제처럼 고무되어 반짝반짝 빛이 났습니다”(59). 하고싶은 말이 생각날 때마다 직격탄을 날리지 않고 언제 파고들어가야 학생들의 토론을 방해하지 않고 격론을 벌이는 학생들의 향연을 더욱 뜨겁게 달굴지를 압니다. 논증을 생각지도 못한 직관과 통찰로 요약해내는가 하면 토론의 방향을 전혀 다른 방향으로 끌고가서 생각지도 못한 결론의 목적지에 이르게 하기도 한다. “열중하는 자신의 손으로 더욱 격렬해진 리듬에 스스로 도취된 타악기 연주자처럼, 그의 연설은 뜨거운 말 가운데서 점점 더 훌륭하게, 점점 더 열띠게, 점점 더 다채롭게 비상했습니다. 우리가 더 깊은 침묵에 잠길수록, (우리의 숨소리는 자신도 의식하지 못한 사이 멎어 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의 표현은 한층 고조되고 긴장되어 찬양의 소리처럼 드높게 울려 퍼졌습니다. 그 순간, 그의 말에 완전히 귀를 기울인 상태로 우리 모두는 하나가 되어 그 사람의 일부분이 되었으며, 넘쳐흐르는 감정의 흐름 속으로 빨려들어 갔습니다”(61). 노교수의 영문학 강의에 빠져든 롤란트는 한 순간도 허비하지 않고 공부하는 과정에 광적으로 빠져듭니다, 멈추려야 도저히 멈출 수 없는 욕파불능(欲罷不能)의 상태이며 존경하지 않을 수 없는 스승의 학문적 경지와 열정에 헌신적으로 충성하며 복종하지 않을 수 없는 심열성복(心悅誠服)의 상태가 되었습니다.

 

복음서의 말씀처럼 그의 말이 나에게는 은총이자 율법이었습니다. 쉬지 않고 감시하듯 극도로 긴장된 나의 집중력은 선생님이 대수롭지 않게 던진 말을 탐욕스럽게 들이마셨습니다. 그의 말 한 마디, 동작 하나하나를 게걸스럽게 주워 담았고, 그렇게 주워 담은 것들을 집에 돌아와서 모든 감각을 동원하여 정열적으로 어루만지며 간직했습니다. 그 분만이 유일한 나의 지도자인 듯, 질투심으로 꽉 찬 나의 의지는 매일매일 새로운 다짐을 통해 학교 친구들을 그저 능가하고 뛰어 넘어야 하는 적()으로 간주하곤 했습니다”(68). 롤란트는 그의 교수가 사는 집 이층에 방을 구하고 아예 스승과 가까이서 배우기로 결심하고 이사를 합니다. 그는 매일 밤 일정한 시간에 만나 토론하고 스승과 그의 부인과 함께 식사를 합니다. 공부하는 시간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걸 깨닫고 롤란트는 아예 방 밖으로 나가지도 않고 선 채로 식사를 하기도합니다. 일체의 휴식시간을 줄이고 거의 잠도 자지 않고 스승에게 실망을 안겨드리지 않기 위해 오로지 공부에만 매달립니다. 롤란트에게 영문학을 가르치는 노교수는 하나의 거대한 우주이자 세상을 움직이는 중심입니다. “활화산처럼 분출하는 언어의 광휘로 낯선 나를 처음부터 사로잡았고, 더 깊은 그의 침묵, 이마 위에 떠도는 비애의 구름이 이젠 그와 친숙해진 나를 흔들어놓았습니다”(86). 삶으로 녹여낸 언어는 잠자는 전두엽에 번개를 내리치듯 충격적인 자극으로 다가왔을 뿐만 아니라 고뇌하는 삶의 흔적이 침묵과 비애의 모습으로 묻어날 때면 강연할 때보다 더 깊은 울림으로 다가옵니다. 스승은 강의장에서 뿐만 아니라 삶의 현장에서 살아가는 모습 그 자체만으로도 감동으로 다가옵니다. “자신의 심연 아래를 응시하는 미켈란젤로의 사상과 처절하게 내면을 향해 꾹 다문 베토벤의 입, 이렇듯 세계 고뇌를 가린 비극적인 가면들은 모차르트의 은빛 멜로디나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인물 주위에 밝게 퍼지는 빛보다 더 강력하게 청년을 감동시킵니다”(86-87). 한 사람의 스승의 모습에서 삶의 심연을 파고드는 미켈란젤로의 모습은 물론 할 말을 참고 침묵으로 항변하는 듯한 베토벤의 선율을 발견합니다. 롤란트는 스승의 이마 위에 떠도는 비애의 구름에서 고뇌에 찬 어둔 그림자를 애써 감추며 비극적 멜로디를 보여주는 모차르트와 다재다능으로 세상의 빛이 되었던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모습까지도 발견합니다.

 

이성은 이글거리는 열정을 통제할 힘이 없습니다

 

하지만 롤란트는 스승과 그분의 부인과 함께 식사를 하거나 잠깐 잠깐 부딪칠 때마다 묘한 감정의 기류가 저변에 흐르고 있음을 감지합니다. 스승은 개방적이고 열정적인 성격에도 불구하고 만나는 친구가 없고 오로지 학생들만 교제 상대였습니다. “집에서 그는 거의 말이 없었고, 심지어 부인과도 그러했습니다. 세상 경험이 없는 나같은 어린 사람도 걱정스러워 보일 만큼 두 사람 사이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항상 드리워져 있었습니다. 그 그림자는 느낄 수 없는 어떤 물질들에 이끌려 이리저리 흩날리면서 서로를 완전히 차단하고 있었지요. 처음으로 나는 결혼이란 것은 너무나 많은 비밀을 외부에 숨기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81). 어둡고 내성적이고 오로지 정신적인 것에만 활기를 띠는 스승과는 다르게 민첩하고 밝은 부인의 성격은 극과 극의 불편하면서도 긴장감이 감도는 조화를 유지해갑니다. 부인과 잠깐 이라도 나누는 대화를 들어보면 열정의 화신이었던 스승이 어떻게 서릿발처럼 차가운 냉정의 기운으로 대하는지 알길이 없었습니다. 부인에게 어떤 말을 전해주는 대신에 보기 민망할 정도의 쌀쌀맞은 표정으로 돌변하거나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극도의 긴장감 속에서 차갑게 냉정하게 대합니다. 공부에 대한 열정을 뜨겁게 달군 다음 느닷없이 사라지는 스승의 황당함은 심각한 질문으로 제자들을 곤궁에 빠뜨리고 갑자기 종적을 감추는 소크라테스의 아이러니와 비슷했습니다. ”무의식중에 나를 뜨겁게 만들어놓고 느닷없이 얼음을 쏟아붓는 사람, 자신의 격정으로 스스로를 자극하더니 갑자기 반어적인 언어의 채찍을 움켜쥐는 사람, 이렇게 번갯불처럼 번쩍이고, 뜨거움에서 차가움으로 돌변하는 그 사람에게서 나는 얼마나 많은 아픔을 겪었는지 모릅니다“(90). 내가 스승에게서 받은 이런 느낌은 부인을 대하는 그의 자세와 태도에도 고스란히 나타나는 것을 알았습니다.

 

스승의 이중적 행동은 예기치 못한 상황에서 생각지도 못한 일을 겪을 때 자주 경험합니다. 어느 날 강의장에 걸린 이틀 동안 휴강한다는 메모는 사전에 아무런 예고 없이 펼쳐지는 예측불허의 드라마입니다. “마치 병마개 위에 달린 병뚜껑처럼 그는 느닷없이 잽싸게 튕겨나간 후 다시 돌아오곤 했습니다“(92). 이럴 때마다 내가 느끼는 것은 이성은 이글거리는 열정을 통제할 아무런 힘“(93)을 쓰지 못하고 무력하게 무너진다는 사실입니다. 그가 중간에 자주 사라졌던 이유도 청춘의 꽃들이 내뱉는 숨소리와 에로의 열정에 자신의 욕망이 심하게 꿈틀거리는 순간을 참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가장 고귀한 수준에서 형식의 아름다움을 구가하고 내용에 담긴 미적 감각의 숭고함을 온몸으로 호흡하는 숭고한 정신적 인간의 거장이 남몰래 어둠의 밑바닥으로 들어가 스스로 자신을 망가뜨리고 추잡한 속세의 사람들과 어울리며 방탕생활을 주기적으로 반복했던 이유가 있습니다. 자신을 믿고 따르는 학생들에게 한 순간도 딴눈 팔지 않고 정신적 각성의 위대함을 몸으로 증명하기 위해서는 자신도 모르게 몸 안에서 꿈틀거리는 육욕(肉慾), 극도의 혐오스러움과 불쾌함, 환멸과 질색으로 가득 찬 맹독성(猛毒性)을 부식시키는 일이 절대적으로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낮에 만나는 대학의 젊은 친구들과의 숭고하고 다정한 정신적 관계와 환락과 방탕의 세계에서 밤에 만나는 환멸과 경멸의 관계를 구분하며 이중적인 생황을 반복했던 고통을 우리는 어찌 이해할 수 있을까요?

 

감정의 혼란은 스승의 부인과 마주치면서 롤러코스트처럼 심한 기복을 타면서 오르락 내리락을 반복하는 이중주를 연주합니다. 스승의 부인과 첫 대면은 다이빙 수영장, 기를 쓰고 그녀의 멋진 자태에 빠져 좇아가다가 결국 따돌림을 당하고 따라잡기에 실패한 롤란트는 다시 수영장 밖으로 집에 가는 동안만이라도 잠시 대화를 나누자는 데이트 제안을 합니다. 그렇게 집에 도착할 즈음, 그녀가 바로 자신의 스승 부인임을 감지하는 순간 사지가 후들거리면서 천지가 한꺼번에 뒤흔들리고 지축이 심하게 자신의 온몸을 휘몰아치듯 뒤흔들어놓았습니다. 스승에게 결국 밝혀질 수밖에 없는 오늘의 자신의 행태가 얼마나 황당하고 당혹스러울 것인지 다가올 미래의 시간을 생각하기 조차 싫었습니다. 다행스럽게 부인은 자신의 돌발행동을 비밀리에 붙여줍니다. 감정의 혼란은 스승의 돌출행동이 일어날 때마다 느끼는 순간에도 찾아오지만 부인의 일거수 일투족에서도 끝을 모르고 이어집니다. 감정의 혼란이 어디쯤에서는 파란을 일으킬 정도로 후폭풍이 심하게 밀려오기도 하지만 그 때마다 혼란은 스스로 수습하고 다시 감정은 얼마 동안 질서를 찾아 흘러갑니다.

 

인생은 희비(喜悲) 쌍곡선이 연주하는 이중주입니다

 

필생의 과업으로 작품개발에 몰두했지만 미완성 교향곡으로 여전히 스승의 뇌리를 떠나지 않는 세계 연극을 완성하지 않는 이유가 궁금해서 어느 날 롤란트는 스승에게 그 이유를 물어봅니다. 하지만 비밀스럽고 고통스러운 상처를 공연히 건드려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다는 죄책감이 순간적으로 들었습니다. 새벽 여명과 침묵이 흐르면서 스승이 드디어 입을 엽니다. 더 이상 그 작품을 완성할 끈기가 없고 집중력을 발휘할 수 없어서 집필할 수 없다고. 체념에 빠진 스승을 보고 받아쓰게 해달라고 간청합니다. 고심 끝에 제자의 제안을 받아들인 스승은 그러면, 우리 같이 해 보세. 젊은이들이 항상 옮은 법이지. 젊은이의 말을 듣는 게 현명한 거야!”(97)라고 화답해준다. 빠져 나가도 끝없이 이어지는 빽빽한 가시덤불 속에서 한평생을 절치부심하며 살아왔던 노스승은 체념 속에 빠져 살다가 한 젊은이의 뜨거운 헌신과 사랑과 마주치면서 죽었던 정열이 타오르기 시작한 것입니다. 부지불식간에 불현 듯 찾아온 청춘의 선물 속에는 위험한 심지가 숨어서 스스로 빛을 태우며 죽어가던 작품 개발 열정에 불을 지르기 시작합니다. “어떤 문장은 운율에 맞춘 한 편의 시 같았고 또 다른 문장은 호메로스의 배들의 카탈로그와 월트 휘트먼(Walt Whitman)의 야성적인 찬가처럼 기가 막힐 만큼 훌륭하게 응축되어 폭포수처럼 흘러 나왔습니다”(98). 스승이 말하는 모든 언급을 받아쓰면서 전율하는 감동이 솟구침을 온몸으로 느끼기 시작합니다. 스승의 한 마디는 곧 한 편의 시였으며, 문장과 문장의 연결은 야성으로 조율된 지성의 찬가 같았습니다. “아무 색채도 없이 그저 순수하게 흘러내릴 뿐인 뜨거운 열()과 같은 사상이, 충동적인 격정의 주조에서 쇳물과 같이 흘러나와 서서히 그 형태를 갖추고 그 형태가 둥근 형상으로 변하면서 마침내 명료하게 하나의 언어로 완결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종의 추가 처음 울려 퍼지듯, 창작의 충만한 감각이 인간의 언어로 표현되는 것을 나는 처음으로 목격한 것입니다. 모든 단락이 운율로 이루어졌고, 모든 표현이 그림의 한 장면으로 이루어진 것 같았습니다(99). 일정한 형태를 갖추지 않고 쏟아져 나오다가 격정의 주조를 통과하는 순간 분명한 의미체계를 갖추면서 감각적 언어로 재탄생합니다. 신기하고 묘한 문장의 마력을 목전에 볼 수 있는 감동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경지입니다.

 

창작여정에 함께 빠진 스승과 제자는 때로는 번뜩이는 즉흥적 창작의 빛으로 다가오기도 하지만 때로는 깊은 사색과 고뇌의 바다에서 고심 끝에 건져올린 사유의 산물을 다양한 방식으로 조합해보고 연결시켜 색다른 가능성의 관문을 열어갑니다. 그것은 완전한 비언어적인 송가(頌歌)였습니다. 장엄하게 설계되었으나 현세에서 무한함을 볼 수도 있고, 느낄 수도 있는 바다에 대한 송가 말입니다! 먼 곳에서 먼 곳으로 파도가 출렁이는 바다. 높은 곳을 향하다가 깊은 곳으로 숨어드는 바다. 그 사이에는 뜻이 없는 동시에 뜻이 충만하며, 흔들리는 인간의 나룻배를 희롱하곤 하는 바다. 그 바다와 같이 장엄한 형상의 비교를 통해 우리를 피 흘리게 하고 해체시키는 원초적인 힘이 비극의 서술을 완성시켰습니다”(99). 중차대한 꿈을 싣고 먼 항해를 떠나지만 갑작스런 파도에 부딪쳐 난파당하는 비극을 경험합니다. 깊은 사연이 심연으로 가라앉습니다. 심금을 울리는 사연을 품고요. 그 사이에 느닷없이 몰아치는 파도와 바람으로 쓰고 있던 모자가 날아가듯 삶은 예기치 못한 사고로 희비 쌍곡선이 오르락() 내리락() 이중주를 연주하며 어제를 배경으로 오늘을 전경에 드러내는 과정입니다. 지금 겪고 있는 곤경의 바다가 지나고 나면 풍경의 바다로 다가오면서 과거에 겪은 아픔과 슬픔을 바다가 다 받아줍니다. “선생님이 야성적이고 원시적인 서술을 열광적으로 묘사할 때는, 창작자의 단어가 웅장한 울림으로 날아올랐습니다. 처음에는 속삭이듯 빠르게 읊조리던 그의 음성은 근육과 성대를 울려 카랑카랑해졌고, 금속의 빛을 발하며 한층 더 자유로이 높게 비상하는 비행기가 되었습니다”(101). 야성과 원시, 그리고 열정은 창작자의 작품개발과정에 관여하는 삼총사입니다. 길들여진 지성만으로는 예술적 감동과 문학적 충격을 줄 수 없습니다. 길들여지지 않는 원시적 야성이 창작을 향한 열정에 불을 지핍니다.

한 사람에게 한 순간은 한 세상을 열어가는 혁명입니다

 

스승이 토해내는 창작의 언어와 그것으로 직조된 문장을 받아 적고 있으면 마치 자연의 위대한 서사시를 독주로 듣고 있는 기분이 듭니다. 고심 끝에 선택한 특유의 언어로 상황에 따라 시시각각 바뀌는 감정변화를 포착하는 문장은 그 자체가 시이며 에세이이고 소설이자 연극이며 영화입니다. 그 속에는 한 사람의 희로애락(喜怒哀樂)의 사중주가 고스란히 음악적 선율로 담겨 있습니다. 책상 앞에 쪼그리고 앉아 있던 나는 마치 고향의 모래 언덕에서 수많은 파도와 흩날리는 황홀한 바람을 다시 호흡하고 있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한 인간의 태어남과 마찬가지로 한 언어가 탄생하는 고통의 떨림에 놀랍고 겁먹었지만, 그와 동시에 행복한 기분 속으로 깊이 잠겨드는 것을 느꼈습니다“(101-102). 문제의식을 품고 탄생한 언어에는 당사자의 치열한 고뇌가 담겨 있습니다. 하지만 언어적 표현으로 모습을 갖추는 순간 내가 느꼈던 감정적 기복은 모습을 감추고 언어에 장송곡을 남길 뿐입니다. 감정의 혼란은 언어적 진술을 거부하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슈테판 츠바이크는 놀랍도록 감정의 혼란 상태를 적확한 언어를 동원해 표현하는 경이로움을 보여줍니다. 감정을 미적분해서 상황적 특수성이 요구하는 미세한 감정변화를 미세하게 기술함으로써 해상도 높은 감정표현을 보여줍니다. 감정 상태에 따라 적확한 언어가 준비된 사람에게는 자신의 감정 상태를 다양한 언어를 동원해 다채롭게 표현할 문장 구성능력을 지니고 있다. 스승이 언어로 표현하는 창작의 세계에 완전히 빠져버린 롤란트는 여인에게 향하는 열정과 남자가 남자에게 바치는 열정의 차이를 구분합니다. 한 순간에 부여된 자연선택의 엄청난 기회는 한 사람에게 무한한 가능성의 관문을 열어주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순수한 존경을 담은 남자의 열정이 한 여인에게 향하게 되면, 그 열정은 무의식중에 육체적인 결합을 충족시키는 방향으로 이끌리게 됩니다. 자연은 서로의 육체를 소유함으로써 최고의 결합을 이루도록 정열을 아로새겨 놓았으니까요”(109). 문제는 남자 제자가 남자 스승에게 바치는 정열과 뜨거운 사랑의 끝은 어떤 목적을 향해 불타오를 수 있을까요? 남녀간의 사랑이 뜨겁게 불타오른 후로 심각한 후유증이든 희열의 결말이든 한 줌의 재로 남아 하염없이 흩날릴 수 있지만 남자 제자가 남자 스승에게 바치는 뜨거운 사랑의 궁극적 목적지는 어떤 모습으로 형상화시킬 수 있을까요? 불타오르다 재로 남아 없어지는 남녀간의 사랑과는 다르게 남자 제자가 남자 스승 사이에 싹트는 사랑은 사랑이 물들어갈수록 불타오르는 화염은 사그라들지 않고 둘 사이를 꺼지지 않고 밝혀주는 등불 같은 이미지로 남습니다. “남자가 남자에게 바치는 정신의 열정, 충족되지 않은 그 정열은 어찌해야 완전함에 도달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 정열은 존경하는 인물 주위를 쉼 없이 맴돌면서 항상 새로운 황홀함을 위해 타오르지만, 자신을 바치는 최후의 순간에도 결코 가라앉지 않습니다. 정신이 항상 그러하듯 열정은 계속해서 흐르지만 영원히 충족되지 못하고 완전히 흘러가지도 못하고 맙니다”(109-110). 스승과 제자가 남자 사이라면 심열성복으로 불타오르는 뜨거운 배움의 열기가 폭발하지만 그걸 멈출 수 있는 제동장치는 없습니다. 배움에 대한 갈구는 끝없이 이어지지만 영원히 끝나지 않는 미()완성입니다. 어제와 다른 깨달음의 향연이 새로운 정신세계로의 여행을 자극하지만 어디를 가든 늘 어제와 다른 깨달음의 황홀함이 멈추지 않습니다.

감정의 혼란은 생각의 파란을 일으킵니다

 

그 선물이 아무것도 알지 못한 채 에로스의 횃불을 독으로 오염된 상처 위로 가까이 대며 몸을 굽혔던 것”(192)임을 누가 알았을까요. 스승에게 다가가는 뜨거운 열정에도 불구하고 좀처럼 종잡을 수 없는 스승의 감정변화와 혼란은 나의 감정을 끝도 없는 나락으로 추락시키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발생합니다. 이미 언급했던 병마개 위에 달린 병뚜껑”(92)처럼 느닷없이 돌출행동을 일삼는 스승의 변덕과 기행은 그야말로 예측불허였습니다. 밤을 새워 글을 정리해서 갖다 드리면 성의 없이 대충 뒤적거리다 잘 보지도 않고 냉담한 표정을 짓기도 했습니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서 롤란트는 극도로 과민해진 신경과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감정 상태로 인해 이제 정신과적 치료를 받을 정도로 심각한 위기의 터널로 접어들고 있었습니다. “그가 가까이 있으면 뜨거운 아픔을 느꼈고, 그가 소원하게 나를 대하면 차갑게 얼어붙었습니다”(111). 선생님을 향한 배움에의 갈구와 열정에 제동이 걸릴 때마다 롤란트는 그의 부인에게 도피하며 위로를 구했습니다. 하지만 그녀 역시 남편에 대한 분노와 적개심으로 가득찬 감정의 혼란과 그 동안 쌓인 응어리를 말하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모습을 간파할 수 있습니다. 스승이 왜 제자를 미워하고 배움의 길로 향하는 갈망을 절망으로 내리치는지 알 길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다시 학기말이 다가오고 방학을 맞이합니다. 스승과의 구술 대화는 계속되었고 나는 더욱 박차를 가해 필기합니다.

 

느닷없이 언어의 폭풍이 밀려왔습니다. 그 바다, 무한한 정열의 바다는 그 마룻바닥의 내부에서부터 모든 시대와 모든 곳의 인간에게 붉은 열정의 물결을 불러 일으키셨습니다. 결코 마르지 않고 끝을 가늠할 수조차 없으며, 명랑하면서도 비극적인 다양한 형태로 바뀌며 충만하게 인간의 근원적인 모습을 드러내는 것, 그것이 곧 잉글랜드의 극장이고 셰익스피어의 희곡입니다”(120). 시공을 초월하여 문학적 향기를 온 세상으로 퍼져나갑니다. 인간적 삶의 다양한 측면을 저마다의 방식으로 품고 언어를 매개로 독자에게 전달됩니다. 그 언어에는 저자의 문제의식이 꽈리를 틀고 뇌리를 파고드는 진리를 향한 숨결이 담겨 있고 저자의 열정이 폭풍을 싣고 거센 파도의 포효하는 기운이 담겨 있습니다. 접속만 해도 광기가 느껴지고 살아가는 인간군상의 다양한 이미지가 우리들을 미지의 세계로 인도합니다. 스승과 제자는 혼연일체가 되어 스승의 언어적 폭풍을 활자의 바다에 녹여냅니다. “1부가 완성되었네”(121). 무려 170쪽에 달하는 위대한 작품의 일부를 끝냈다는 기쁨과 뜨거운 감동은 갑자기 소리를 지를 뻔할 정도로 경이로운 전율로 다가왔습니다. 히스테리적 발적 증세와 느닷없는 냉소적 반응을 보일 때와는 다르게 따사로운 눈길로 부드럽게 나를 감싸 안으며 그 동안의 회한을 감동의 기쁨으로 표현하려는 스승의 모습에서 다시 한 번 롤란트는 깊은 감동의 희열 속으로 빠져듭니다. “자네가 아니었다면 나는 결코 이 작업을 시작할 수 없었을 거야. 결코 자네를 잊을 수 없겠지. 자네는 내가 무기력함을 떨치고 일어나 구원의 도약을 해주었어. 산만함에 빠져 생기를 잃어가지 않도록 자네가 나를 구원해 준거야”(123-124). 이윽고 스승은 자네라는 말 대신에 라는 말을 쓰면서 이제 우리가 한 시간 동안은 형제처럼 지내자는 파격적인 제안을 합니다. 스승의 제자에 대한 사랑을 넘어 또 다른 차원의 사랑이 시작되는 전조임을 롤란트는 알길이 없었습니다. 스승의 감정의 혼란은 제자의 생각의 파란을 일으킵니다. 파격적인 감정적 혼란이 제자에게는 소란한 가운데 갈피를 잡지 못하는 생각의 파란을 낳습니다.

감정의 혼란은 견딜 수 없는 긴장상태를 유발합니다

 

1부를 완성하고 오랜만에 스승과 와인을 마시면서 그 동안 하지 못했던 사제간의 진한 정을 나누면서 흥겹지만 진한 긴장감이 감도는 이유는 지금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를 모두 엿듣고 있을 스승의 부인을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느슨해진 기분으로 한껏 기분이 고조된 스승은 처음으로 제자에게 자신의 젊은 시절에 관한 이야기를 하겠다고 말하자 마자 피곤함을 이유로 오늘은 안 된다고 하면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주인공은 자신의 침대로 올라가 몸을 던지듯 누워버립니다. 밖에서 스승의 부인이 계속 둘 사이의 대화를 엿들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스승의 기분은 다시 돌변합니다. 잡았던 손을 마치 돌멩이 던지듯 매정하게 내쳐버립니다. 잠 못 이루는 밤을 보내며 주인공은 어둠과 음산함과 더불어 무거운 침묵에 휩싸인 집 안 전체에 갑자기 악몽이 드리워진 것 같았습니다”(130)는 예감을 합니다. 주인공을 더욱 불안과 긴장감에 떨게 만드는 것은 오싹한 털을 살짝 스치게 해서 놀라는 소리, 소리 없이 앞발을 들고 이리저리 흔들리는 유령 고양이 같은 그 그림자가 집안에 위험스럽게 도사리고 있다(131)”는 느낌이 들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하루 동안의 격렬했던 노고를 잠재우고 긴 밤의 고유를 벗 삼아 휴식을 취해야 하는 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밤의 적막은 있는 그대로의 편안한 휴식을 가져다주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붕위에, 은빛 안개를 머금은 달과 같은 부드러운 안식과 고요함이 맴돌고(132)” 있음과 동시에 기이한 상념들이 불쾌하게 포개져……열병에 시달리는 나의 감각은 마음속에서 혼란스럽게 소용돌이치는 어떤 속삭임“(132)이 교차하고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갑자기 자신이 누워있는 방의 계단으로 누군가 올라오는 발걸음 소리를 듣고 오싹할 정도의 소름이 돋습니다. 스승께서 초를 들고 문 앞에 서 있는 것이 아닌가. 낮에 둘 사이 나눴던 자네가 아니라 너라고 이야기 했던 말이 결국은 학생과 선생 사이에 어울리지 않는 잘 못된 발언이었다고. ”증오와 모욕, 적대적인 악의로 가득 찬 표정”(136)차가운 분노와 이글거리는 절망이 어쩔 줄 모르고 격렬하게 교차(137)하면서 여러 상념이 폭죽처럼 현란하게 뒤엉키는 극심한 감정의 혼란 상태를 하룻밤사이에 경험합니다. 잠깐 눈을 붙인 후 아침에 간신히 눈을 떴지만 어젯밤에 일어난 믿지 못할 사건이 꿈이었기를 기대했지만 엄연한 사실로 롤란트를 괴롭혔습니다. 배가 고팠음에도 불구하고 스승과 부인을 마주칠 용기가 나지 않아 뒤척이고 있는 사이, 계단으로 올라와 부인이 아침식사 하러 왜 오지 않느냐는 뜻밖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사지가 떨려서 계단을 간신히 내려온 롤란트는 스승의 자리가 비어 있음을 알아채고 부인에게 물어봅니다. 오늘 아침에 다시 여행을 떠났다고. 한바탕 울음을 터뜨린 후 잠시 부인과 소파에서 롤란트는 처음으로 어머니처럼 부드러운 연민이 손길이 자신을 어루만져주고 있음을 느낍니다. 뻔뻔하고 거들먹거리면서 때로는 분노와 적개심 어린 표정으로 자신에게 비난과 적개심의 화살을 날리던 그녀가 한없이 온화하고 연민에 가득한 얼굴과 손길로 다가오고 있는지 자신도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감정의 혼란은 표리(表裏)가 전혀 다른 두 가지 다른 페르소나입니다

 

과거를 회상하다 스승의 덫에 걸려 고심하던 나에게 부인은 계속해서 그 사람을 믿지 말라고 충고하고 강권한다. 예상했던 불행한 일이 벌어진 것이니 더 이상 자신의 남편에 종속되어 불행한 인생을 살지 말고 한다. “오늘 오후에는 집에만 처박혀 있지 말아요. 산책을 해요. 마음껏 뛰고 즐겁게 보내요!”(145) 오랜만에 즐겨보는 여유로운 야외에서의 신나는 놀이였습니다. 그는 도시 외곽으로 나가 여성악단의 음악에 맞춰 광란의 춤을 추며 몇 몇 여인들과 맥주와 와인, 그리고 독주를 뒤섞어 마시면서 흥청망청 유흥을 즐기며 하루를 보냅니다. 잠에서 깨어난 롤란트는 어젯밤 자신이 저지른 만행에 대해 심각한 후회와 함께 억지를 써서라도 자신의 행동에 대해 정당화시켜보려고 애를 씁니다. “이제 그 사람을 상대하지 않겠어! 악마가 데리고 가라고 하지! 나이 들고 어리석은 그 사람 때문에 내가 마음 고생할 필요가 뭐가 있어!”(148). 스승의 부인이 제안한 대로 대학강사 W.씨와 그의 약혼녀와 함께 보트도 타고 수영도 함께 합니다. 스승이 여행을 떠난 빈 자리는 롤란트에게 엄청난 감정의 혼란이 다시 한 번 파란을 일으키는 사건의 현장으로 작용합니다. 부인을 통해 스승이 동성애자임을 간접적으로 확인합니다. 그 사이에 자신도 모르게 뜨거워진 부인과 급기야 서로의 육체를 격렬하게 탐닉하고 맙니다. 다음날 롤란트는 부끄러움과 함께 스승에 대한 죄책감을 이기지 못하고 지금 여기를 떠나기로 결심합니다. 짐과 책을 묶고 방값을 계산한 다음 떠날 채비를 하는 순간 다시 롤란트는 놀랍게도 스승이 다시 찾아왔음을 알아챕니다. 스승의 전형적인 신출귀몰 상태를 반증하는 사례가 마지막 떠나는 여정에서도 구현됩니다. 쉽게 끊을 수 없는 인연입니다.

 

기필코 떠나겠다는 롤란트의 결심을 들어본 스승은 편지나 다른 방법 말고 직접 만나서 마지막으로 이야기를 나누자고 부탁한다. 스승의 간곡한 부탁을 받고 롤란트는 늘 하던 대로 스승의 서재로 7시에 찾아갑니다. 스승은 그 동안의 자신의 무례함을 반성하면서 상처주었던 그 간의 언행도 반성합니다. 왜 떠나는지 스승은 그 이유를 집요하게 캐묻지만 롤란트는 뚜렷한 이유를 말하지 않습니다. 마침내 스승이 묻습니다. 스승이 이런저런 생각 끝에 여자 때문이지? 내 아내인가?”라고 물었을 때 롤란트는 온몸에 전율이 번져 옴을 느낍니다. 스승은 롤란트의 성품과 외모에 비추어 보면 충분히 그럴 수도 있다고 수긍합니다. 하지만 더욱 놀라운 사실은 나도나도 자네를 사랑하고 있네”(175)라는 스승의 고백을 듣는 순간 마치 암호 하나가 별안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던 보고서의 말을 한 번에 풀어준 것 같은 느낌”(176)을 받습니다. “수염 아래 있는 그의 입술에서 관능적이고 애정 어린 음성으로 사랑이라는 말이 새어 나오자 달콤하면서도 무시무시한 전율이 나의 관자돌이에 파고들었습니다. 그리고 그에 대한 겸허함과 동정이 극렬하게 타올랐지만, 불시에 습격을 당한 젊은 나로서는 전혀 예상치 못하게 내게 털어놓았던 그의 정열에 대해 아무 응답도 할 줄 몰랐습니다”(177). 스승의 갑작스러운 고백에 충격 받은 롤란트는 사랑으로 흘러내렸다가 다시 사랑으로 가로막혔던 지난날의 추억을 더듬어 봅니다.

 

나는 내가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내가 생각하지 않는 곳에서 존재한다.정신분석학자 라캉이 주장한 내용입니다. 나는 내가 생각하는 나의 모습과 실제로 내가 살아가는 모습이 다릅니다. 실제로 내가 살아가는 모습과 다르게 내가 생각하는 나의 모습을 페르소나라고 합니다. 일종의 정신적 가면을 쓰고 저마다의 무대 위에서 연기를 하며 살아가는 모습니다. “낮 동안에는 흠잡히지 않도록 대학 강사로서 근엄하고 품위 있는 행동을 유지하지만, 매일 매일의 이중적인 면모를 조심스럽게 숨기려면, 메두사의 비밀을 낯선 사람들의 시선에서 은폐하려면, 밤이 되어 어둠 속에서 깜박이는 가로등 아래 지하 세계에 갇힌 수치스러운 모험을 남모르게 감행하려면, 강철같이 단단하고 굳은 의지를 단련해야 했습니다“(184-185). 젊은 학생들을 가르치며 느끼는 고상한 지식인으로서의 대학교수의 생각과 자신도 모르게 꿈틀거리는 육욕을 통제하고 자제하기 남모르게 안간힘을 썼던 두 얼굴의 삶이 얼마나 힘들고 괴로웠을까요? 제자에 대한 사랑이 무르익고 안아주고 싶은 충동을 느낄 때마다 느닷없이 여행을 떠났고 밑바닥 인생을 살면서 동성애적 충동을 해소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한 인간이 완전히 벌거벗은 채 내게 자신을 드러냈습니다. 자신의 가슴 속 깊은 곳 완전히 부서지고 망가지고 연소되고 곪아터진 심장을 기꺼이 노출시킬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181-182). 자신이 평생 간직한 비밀의 정원은 그리 오래지 않아 제자에게 억눌렸던 격렬한 욕망의 강물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합니다. “고백 속에서 스스로를 채찍질하듯 부끄러움을 온몸으로 감추면서 살아온 한 사람이 비로소 내면속에 숨겨 왔던 사랑의 화신을 적나라하게 드러냅니다. 여기, 한 인간이 그이 삶을 자신의 가슴에서 한 조각 한 조각 뗴어 냈습니다. 그 순간 소년이었던 나는 이 세상의 감정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깊다는 것을 처음으로 똑똑히 응시할 수 있었습니다“(182

 

감정의 혼란은 과거의 나를 죽이고 새로운 나로 거듭나는 출발입니다

 

정신적 혼란기를 겪고 있었던 롤란트는 마치 구세주처럼 나타났던 스승을 거의 광신도처럼 따라다니며 열렬히 사랑했습니다. 자신의 내면에서 꿈틀거리는 창조적인 씨앗을 발아시키기 위해서는 스승과 같이 열정적으로 뭔가를 탐구하면서 먹구름 속에 가려진 태양의 정체를 드러내주는 삶의 스승이 필요했습니다. 가시밭길을 걸으며 학문적 열정을 온몸을 다해 불사르던 스승의 기력이 쇠퇴하고 자신감마저 쇠잔해갈 즈음 에로스의 등불을 꺼져가는 영혼 속에 들이밀어 불을 붙임으로써 스승은 죽어가는 자신을 흔들어 깨우며 멈출 수 없는 광기를 발휘한 것입니다. 롤란트의 발견적 열정과 스승의 설득적 열정이 만나 불꽃을 틔우는 사이 스승이 의도적으로 비웃고 거절하며 굴욕감을 느끼게 한 것도 운명의 마지막 은총에 욕정의 장난이 끼어들도록 하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194). 스승이 제자의 헌신적 열정과 사랑에 얼음같은 말을 쏟아내며 냉담한 반응을 보여주고 느닷없이 달려드는 헌신적 충성도 격렬하게 저항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압도적 관능에 못 이겨 몽유병 환자처럼 삐걱거리는 계단 위로 올라왔으면서도, 오히려 모욕적인 말을 내뱉음으로써 우리의 우정을 유지할 수 있었던 그날 저녁의 혼란스러움은 이제 소름끼칠 정도로 명백해졌습니다”(195). 갈고 닦아왔던 지고의 가치와 의미가 한 순간에 무너지기는 쉽습니다. 견딜 수 없는 관능적 욕망을 억누르며 올라왔던 계단을 다시 내려갔기 때문에 두 사람 사이의 위대한 세제지간을 넘어 인간적 유대관계의 끈이 이어질 수 있었습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에로스의 등불로 불붙인 나 때문에 얼마나 무섭게 고민하고, 나 때문에 얼마나 지독하게 자신의 감정을 억제해왔는지, 나는 열병에 걸린 것처럼 몸을 떨며 감동하고, 흥분하며 이해하고, 그를 향한 애틋함에 녹아들었습니다”(195). 타오르는 관능적 정염의 불꽃 뒤에는 그걸 타오르지 못하도록 보이지 않는 가운데에서 억누르며 참고 견디며 감당했던 이중적 생활은 그 자체가 처절한 고역이자 처참한 사투였습니다.

 

고통의 극복은 곤경을 풍경으로 바꿔줍니다. 하지만 가까이서 보기엔 언제나 자기와 싸우는 처절한 사투입니다. 나중에 멀리서 보면 그것이 앓음다운 풍경으로 다가와도 당시에는 당사자이게 엄청난 비극적 충동이었습니다. “고통을 당하는 자는 계속 긴장하면서, 자기 억제의 회초리를 들고 일상의 길에서 벗어나려는 열정을 울타리로 몰아넣어야 했습니다. 충동이 자꾸만 그를 어둡고 위험한 곳으로 끌고 갔기 때문입니다. 치유할 수 없는 욕정의 힘, 보이지 않는 자석 같은 그 힘에 맞선 신경을 갉아먹는 혈투가 10, 12, 15년 동안 계속되었고, 그건 하나의 경련과도 같은 팽팽한 긴장의 연속이었습니다. 즐거움 없는 향락, 숨 막힐 것 같은 부끄러움, 자신의 정열에 대한 수치심은 서서히 어두워지며 그 눈빛을 감추기에 이르렀습니다”(185). 어둠 속에 가둬둬야만 했던 또 하나의 나를 겉으로 꺼내놓고 세상과 정면으로 맞선 나를 바라봅니다. 가면으로 위장했던 지난날의 삶에서 벗어나 지금 여기서의 삶과 마주친 자신의 본모습을 들여다봅니다. 장자의 제물론(齊物論)’에 보면 오상아(吾喪我)라는 말이 나옵니다. 오염된 ()’를 죽여야 원래의 ()’로 살아갈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누가 오염된 나이고 죽여야 할 나는 누구인지는 각자의 판단에 맡기겠습니다. 원래의 내가 누구인지도 죽여야 할 내가 누구인지와 구분될 수 없는 같은 나입니다. ()와 오()는 한 사람이 보여주는 두 가지 다른 모습, 페르소나이기 때문입니다. “한 인간이 인생에 단 한차례에, 한 인간만을 위해 말하고는 영원히 침묵한 것입니다”(195). 한 인간이 나라는 가면을 벗고 또 다른 나의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는 날이었습니다.

 

스승과 제자는 일생에 단 한번 진한 사랑을 나눕니다. 한 인간이 인생에서 단 한번, 한 사람을 위한 사랑입니다. 노벨문학상 수상자 쉼보르스카의 두 번은 없다와 정확히 일맥상통하는 황홀한 쾌감의 연주였습니다. “반복되는 하루는 단 한 번도 없다/두 번의 똑같은 밤도 없고/두 번의 한결같은 입맞춤도 없고/두 번의 동일한 눈빛도 없다.” 오로지 지금 이 순간의 사랑으로 불타는 장면만 존재할 뿐, 과거도 미래도 없다. “그것은 내가 그 전에 어느 여자에게도 받아본 적이 없는 키스, 죽음의 울부짖음 같은 거칠고 절망적인 키스였습니다. 그의 몸의 떨림과 경련이 내게 고스란히 옮겨졌습니다. 낯설고 두려운 감정, 그 이중적인 느낌 때문에 온 몸이 오싹해졌습니다.……나를 짓누르는 그 순간이 점점 더 나를 완전히 마비시킬 것 같은 스산한 감정의 혼란이 느껴졌습니다”(197). 스승과 헤어진 이후 편지도 소식도 받아본 적이 없는 롤란트는 함께 작업했던 저술 작업이 끝내 빛을 보지 못했고 그의 이름조차 잊혀 감을 느꼈습니다. 오노레 드 발자크가 말하는 미지의 걸작에도 미치지 못하고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채 영원한 미완성 교향곡으로 남을 수도 있겠습니다. 파란만장(波瀾萬丈)한 인생의 파노라마가 우여곡절(迂餘曲折)의 선율과 함께 연주되다 절치부심(切齒腐心)의 쉼표 앞에서 잠시 호흡을 가다듬습니다. 들숨과 날숨 사이에서 때로는 끝을 모르는 한 숨도 쉬면서 숨 가쁘게 달려온 스승과 부인, 그리고 제자의 애틋한 사랑의 변주곡이 낭만적인 사랑을 구가하는 세레나데(serenade)나 로맨스로 들릴지 아니면 육욕의 광풍에 휩싸인 욕망을 느리게 연주하는 안단테풍의 랩소디(rhapsody)나 장송곡으로 들릴지는 각자의 판단에 맡깁니다.

 

 

사람은 이성의 동물이기에 앞서 이성으로 통제할 수 없는 감정의 동물입니다. 호숫가에 던진 돌멩이의 크기에 따라 호숫가 표면에 생기는 파장의 넓이와 깊이가 다르듯, 내 몸에 각인된 감정적 흔적의 깊이와 넓이에 따라 그걸 추억할 수 있는 강도가 달라집니다. 때로는 억누를 수 없었던 분노와 적개심에 불타 이성이 통제할 시간적 여유조차 잃어버리고 분출되거나 폭발하기도 합니다. 때로는 불현 듯 찾아온 깨달음의 각성이 너무도 깊게 다가온 나머지 시간이 지나도 당시에 느꼈던 감정적 파고가 희석되지 않고 강렬하게 회상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뚜렷한 메시지는 생각나지 않아도 강렬한 이미지가 여전히 부각되는 이유는 거기에 담긴 감정의 격렬함 때문입니다. 이 책을 잡아든 순간부터 멈추지 않고 순식간에 롤란트의 감정의 혼란한 흐름이 엮어가는 스토리에 빠져 읽어버렸습니다. 다양한 감정의 기복을 겪으면서 희로애락(喜怒哀樂)의 사중주가 스승과 부인, 그 사이의 제자가 엮어가는 사랑의 삼중주와 뒤섞입니다. 세 사람의 역학적 인간관계가 만들어가는 감정은 혼란기를 겪으면서 앎의 세계로 향하는 로고스와 여기서 겪는 파토스가 춤을 추면서 인간적 에토스에 따라 다른 음악으로 들립니다. “대립의 큰 구도에서 보면 영웅적인 죽음이 있어야 삶은 고양되고, 몰락이 있어야 무한한 상승 의지가 솟아 나오는 법이다. 우연한 성공과 손쉬운 성취를 보고 고무되는 것은 명예욕에 불과하다. 한 인간이 막강한 운명을 상대로 이길 수 없는 싸움을 벌이다가 몰락하는 것을 보는 것만큼 우리의 마음을 드높이는 일은 다시 없을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어느 시대에나 가장 위대한 비극이다. 시인은 몇 차례 그런 비극을 만들어 내지만 삶은 수도 없이 만들어낸다”(324). 슈테판 츠바이크의 다른 책, 광기와 우연의 역사에 나오는 말입니다. 영웅적인 죽음과 몰락하는 삶으로 오늘도 저마다의 시인은 자신의 삶을 시로 엮어냅니다. 내일은 오늘과 다른 시를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체험 없는 어문학적 이해나 가치에 대한 인식이 결여된 단순한 문법적인 단어란 존재하지 않아요. 젊은 여러분들은 하나의 국가 그리고 그대들이 정복하고자 하는 언어를 우선 최고로 아름다운 형식 속에서, 청춘의 가장 강력한 형태 속에서, 뜨거운 정열을 통해 만나지 않으면 안됩니다. 우선 여러분들은 시인들의 언어를 들어야 합니다. 언어를 창조하고 완성하는 시인들 말입니다! 우리는 문학을 해부하듯 분석하기 전에 일단 호흡해야 하며 가슴으로 따뜻하게 느껴야 하지요"(4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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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그래도 사람은 달라질 수 있다 - 아직 다 자라지 못한 어른들을 위한 심리수업
다카하시 가즈미 지음, 이정환 옮김 / 나무생각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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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석을 바꾸면 해법이 보이고 해답도 달라진다

그래도 사람은 달라질 수 있다를 읽고 다른 관점에서 해석하면서



해석을 해석한다해석에 반대한다를 해석한다


“사실은 없다. 해석이 있을 뿐이다.” 니체의 말이다. 객관적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다. 객관적 사실을 누가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사실은 별 다른 의미를 지니지 않는 중립적 현실이 될 수도 있고 진심이 담긴 진실이 될 수도 있다. 세계는 해석자의 관점적 차이에 따라 사실을 넘어 사기가 담길 수도 있고 진실이 담긴 진리가 될 수도 있다. 모든 진리는 그래서 진실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의 뜨거운 열정과 철학, 신념과 가치로 이미 오염된 편견의 산물이다. 그래서 니체는 모든 진리는 곡선으로 휘어져 있다고 했다. 진리는 직선으로 목표에 도달하는 객관적 지식의 과학적 표현이 아니라 주관적 신념의 산물이다. 동일한 사실이라고 할지라도 누가 어떤 관점으로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올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니체는 사실은 없고 해석만이 존재할 뿐이라고 이야기한 것이다. 그런데 니체의 이런 주장에 정면으로 반론을 제기한 학자가 있다, 바로 수전 손택이다. 그녀는 《해석에 반대한다》는 책에서 해석에 대한 그녀의 독특한 주장을 엿볼 수 있다. “해석은 지식인이 예술에 가하는 복수다. 아니, 그 이상이다. 해석은 지식인이 세계에 가하는 복수다. 해석한다는 것은 ‘의미’라는 그림자 세계를 세우기 위해 세계를 무력화시키고 고갈시키는 짓이다”(25쪽). 해석이라는 이름으로 작품을 평가하지만 그런 해석은 예술작품을 창작한 예술가의 창작 의도를 자신의 입맛에 맞게 편집하려는 불온한 음모에 불과하다. 작품을 창작한 예술가의 의도와는 관계없이 예술작품을 자신의 이론적 신념으로 해석하는 행위는 창작자의 의도를 왜곡하는 폭력이 될 수도 있다.


“해석은 예술작품을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겠다는 잔인한 호전 행위”(26쪽)이거나 “해석자는 예술작품을 그 내용으로 환원시키고, 그다음에 그것을 해석함으로써 길들인다. 해석은 예술을 다루기 쉽고 안락한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26쪽). 예술작품을 창작한 예술가의 의도와 무관하게 해석자는 작품성을 자신의 입장으로 재단하고 평가하는 해석 행위를 거듭할수록 예술적 의미와 가치와는 무관하게 창작자의 의도를 왜곡하거나 희석시켜 오히려 예술작품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호전 행위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해석은 그래서 “작품에 대한 불만사항, 그래서 그것을 무언가 다른 것으로 바꿔놓고픈 희망 사항”(28쪽)이다. 예술작품을 창작한 사람은 본래 그런 의도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해석자가 자기 주관대로 작품성을 평가하고 판단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희망하는 사항을 편파적으로 주장함으로써 해석은 작품에 대해 해석자가 지니고 있는 불만사항을 전달하는 방편으로 작용한다. “우리의 임무는 예술작품에서 내용을 최대한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작품 속에 있는 것 이상의 내용을 더 이상 짜내지 않는 것이다”(34쪽). 해석을 거듭할수록 작품을 창작한 오리지널 예술가의 의도와 무관하게 해석자의 다양한 의지가 반영됨으로써 순수한 예술작품은 본래의 색깔과 의도를 잃어버리고 해석자의 해석적 판단에 따라 좌지우지되는 정치적 입김에 수전 손택은 강력하게 반대하는 것이다.



해석을 바꾸면 능력도 바뀐다


해석의 부정적 역기능에도 불구하고 해석은 여전히 순기능을 갖고 있다. 똑같은 사실도 그걸 누가 어떤 관점으로 해석해내는지에 따라서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올 수 있기 때문이다. 니체가 사실은 존재하지 않고 사실에 대한 해석만 존재할 뿐이라고 말한 것도 바로 이런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 “해석을 바꾸는 방식을 통해 이끌어낼 수 있는 것은 새로운 능력이다……새로운 해석도 그 사람의 새로운 능력을 이끌어내고 결과적으로 사람을 바꿀 수 있다”(97쪽). 누가 어떻게 해석해내는지에 따라서 그 사람의 보잘것없었던 능력도 새로운 능력으로 다시 태어난다. 능력은 해석자가 어떤 의미와 가치를 부여해서 어떻게 해석해내느냐에 따라서 다른 능력으로 인정된다, 부정적인 기운에 휘둘려 늘 골방에 처박혀 역기능과 폐해로만 보였던 능력이 우연한 기회에 다른 가능성을 발견하는 순간 자신의 능력을 고루하게 해석했던 틀에 박힌 한계를 깨달을 수 있었다. “새로운 해석을 발견해내고 자신과 주변을 바꾸기 시작할 때까지 사람은 고루한 해석 안에서 고민하고 발버둥 치며 고통스러운 시기를 보내야 한다. 고루한 해석으로 도저히 자신이 직면해있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일종의 절망감 속에서 마음은 새로운 해석을 낳는다. 새로운 해석은 고루한 해석 안에서 숙성되고 절망이라는 현실적 검증을 견뎌내며 탄생하는 것이다”(98쪽). 해석이 고루해질수록 해답은 지루해진다. 해석을 바꿔야 해법을 찾는 접근 논리도 달라지고, 접근 논리가 달라져야 거기서 얻을 수 있는 해답도 바뀐다.


해석은 언제나 또 다른 해석과 싸운다. 새로운 해석은 고루한 해석으로 더 이상 새로운 관점을 제공해주지 못하는 한계에 직면할 때 탄생된다. 고루한 해석이 새로운 해석을 낳는 법이다. 평온했던 해석의 세계에 타자의 새로운 해석이 불법침입할 때 낯선 해석의 씨앗이 잉태된다. “사유는 비자발적인 한에서만 사유일 수 있고 사유 안에서 강제적으로 야기되는 한에서만 사유일 수 있다. 사유는 이 세계 속에서 불법침입에 의해 우연히 태어날수록 절대적으로 필연적인 것이 된다. 사유 속에서 일차적인 것은 불법침입, 폭력, 적이다” (310-311쪽). 질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에 나오는 말이다. 기존 해석으로는 새로운 가능성의 관문을 열 수 없다는 판단이 들 때 전대미문의 질문이 시작된다. 고루한 해석은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 만들어낸 성인이 되기 위한 해석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사회에 적응하기 위한 해석이며 하루하루를 보다 효율적으로 보내기 위한 해석이었다”(103-104쪽). 고루한 해석에 머무는 사람은 사고가 고리타분하다. 변화보다 안정, 도전보다 안주를 택한다. 기존의 해석을 능가하는 색다른 현상의 출몰에 관심이 없거나 두려움을 느낀다. 지금 이대로가 좋다는 안빈낙도의 삶에 물들어 있고 타성과 관성에 빠져 식상함과 통념을 주로 먹고 산다. 하지만 성인의 해석에 변화가 불가피한 이유는 이제까지 오르막길을 힘겹게 뛰어오르는 목표 달성과 성과를 놓고 투쟁하는 삶을 살았다면 이제부터는 내리막길에서 추락하지 않고 인생 후반부를 맞이하는 삶을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오르막을 해석하는 방식과 내리막을 해석하는 방식에 차이가 없다면 내리막길에서 추락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세가 고루하면 살아가는 자리도 지루하다


성인 이후 걸리는 마음의 질병은 주로 고루한 해석이 낳은 질병이다. “마음의 질병은 고루한 해석 안에 갇혀 있었다는 데 원인이 있다. 마음의 질병을 해결하려면 자신이 직면해있는 새로운 사태에 대처할 수 있는 새로운 해석이 필요하다(111쪽)”. 해석이 고루하니 마음도 고루하다. 해석이 지루하면 사고도 지루하다. 내 생각으로 해석할 때 등장하는 고정관념과 타성, 통념과 관례가 고루할수록 생각도 낯선 사유를 받아들이기 어렵다. 해석이 틀에 박혀 있으니 생각도 마음도 다른 대안을 찾아 탈출할 방법이 없다. “’ 자신의 사고방식’으로 생각하기를 멈추고 ‘타인의 사고방식’에 상상으로 동조할 수 있는 능력, 이를 ‘논리성’이라 부른다”(113쪽). 우치다 타쯔루의 《말하기 힘든 것에 대해 말하기》 에 나오는 말이다. 내 생각으로 주어진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판단이 들 때 한시라도 빨리 다른 사람의 생각을 내 생각에 접목해서 새로운 생각의 씨앗을 잉태해야 한다. 새로운 생각이 잉태되어야 새로운 해석이 나온다. 고루한 해석에서 벗어나 새로운 해석으로 낯선 사유체계가 구축되기 위해서는 세상을 바라보는 자세가 바뀌어야 한다. 대형사고로 한쪽 다리를 절단할 수 없었던 사람은 내 인생은 이제 끝이라고 단정하고 시종일관 부정적인 자세와 태도로 삶을 일관해왔다. 하지만 어느 날 창문으로 들어온 한 줄기 빛에서 희망을 보았고 그 빛이 그토록 아름다울 수 있을까라는 순간적인 충동이 충격적으로 다가온 사건을 경험한다. 불치의 질병이라고 해석하고 더 이상 떨어질 수도 없는 나락의 끝자락에서 다시 태어나는 과정을 이 책에서는 ‘질병 수용’이라고 한다. 질병을 수용하고 살아갈 자세와 의지를 고쳐먹을 때, 불행한 사건은 과거로 흘러가고 이제 앞으로 살아갈 새로운 자세와 의지가 생긴 것이다. 그 순간 세상을 바라보고 이해하며 해석하는 프레임에도 혁명적인 변화가 동반된다. 


“고루한 자세는 풍요롭고 자유로운 마음의 움직임을 수용할 수 없기 때문에 새로운 것으로 치환해야 한다. 고루한 자세는 새로운 상황 아래에서도 마음의 자유로운 움직임을 억제하고 있기 때문이다”(124쪽). 자세가 고루하니 살아가는 자리도 지루할 뿐이다. 새로운 해석을 낳을 터전이 생기지 않는 법이다. 남루한 환자복을 입고 지루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의 자세가 고루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어떤 사건을 계기로 자세를 바꾸는 계기를 맞이하는 순간 나와 내가 살아가는 삶을 새롭게 바라볼 해석이 인생의 새로운 해법을 제시하며 나타나는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사람이 기존의 고루한 해석을 넘어 새로운 해석 능력을 가질 수 있는 원동력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능력을 선천적으로 지니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사람은 슬프지만 슬픔을 반추해보고 성찰하면서 지금의 나 자신에게서 벗어나 나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능력, 진퇴양난의 위기 상황에서 주어진 상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미래는 전망하되 현재는 절망하는 능력, 과거의 상식에 얽매이지 않고 언제나 새로운 마음으로 세상을 느낄 수 있는 능력이다. 첫째, 슬픔의 뒤안길을 오솔길로 만들어 걸어가면서 지금 당장의 아픔을 초극하려는 능력이 바로 자신에게서 벗어날 수 있는 능력이다. 벗어나려면 내가 입고 있는 고정관념이나 관성의 옷을 벗어던져야 한다. 두 번째 절망할 수 있는 능력은 인간의 힘으로 도저히 어쩔 수 없는 붙잡고 아등바등 대지 않고 깨끗하게 야망을 내려놓고 미래를 전망하며 새로운 욕망을 키우는 능력이다. 절망은 주로 고루한 성인의 해석이 진퇴양난의 위기에 빠졌을 때 탄생된다. 마지막으로 순수성을 느끼는 능력은 부정적인 상황에서도 긍정적인 방향으로 마음을 쓰면서 즐겁고 기쁜 방향으로 마음이 흐르려는 성향을 따라가려는 능력이다. 마음은 밝고 따뜻하며 기운이 넘치는 방향으로 흘러가려는 성향이 있는데 이걸 따라가면서 긍정적인 방향으로 사물이나 현상을 바라보는 능력이다. 



주관성(主觀性)은 나를 세상의 중심에 세우려는 주체성이다

      

저자가 말하는 새로운 해석이란 “우리가 잃어버린 주관성을 되찾을 수 있는 해석”(146쪽)이다. 갓 태어난 유아는 자기가 원하는 대로 세상이 움직이는 주관적인 세계였다. 배고프면 울고 욕구가 극에 달하면 또 울고 그럼 바로 엄마가 나타나 자신의 불편함이나 불안함을 해소해주었다. 점차 세상은 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사람은 성인으로 성숙해간다. 30세의 성인이 되기까지 나의 주관대로 움직이지 않는 수많은 다른 객관적 존재나 실체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는 과정을 거친다. 저자는 객관적 현실을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고 유아기처럼 모든 걸 내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지만 성인의 해석은 다시 주관성을 회복할 때 새로운 해석 능력으로 무장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주관성은 말 그대로 내가 세상의 주인이 되어 주체적인 판단에 근거해서 나의 정체성을 확립해나가는 주도적인 삶을 살 때 생기는 긍정적인 의미의 관성이다. 관성(慣性)에 매몰되면 타성에 젖어 틀에 박힌 고루한 삶을 살지만 주인의 마음으로 세상을 관통(貫通)하는 마음으로 올곧게 세상을 바라볼 때 주관성(主觀性)은 나를 세상의 중심에 세우는 주체성이자 주춧돌이다. 주관성이 고집으로 전락하면 순식간에 쉽게 바꿀 수 없는 관성으로 타락한다. 관성은 생각하지 않아도 반자 동적으로 몸이 움직이는 습관의 산물이다. 반면에 주관성은 의도적으로 노력하지 않으면 수많은 다른 주장에 중심을 잡지 못하고 휘둘릴 수 있다.


저자의 인간의 마음은 5가지 위계로 계층화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얕은 층이 없으면 깊은 층은 발휘될 수 없고, 깊은 층은 얕은 층을 자유롭게 조종하고 통제할 수 있다는 의미다. 가장 밑바닥의 원초적 감정은 감각이다. 어린 시절 주로 발달하는 1차원적 신체적 움직임, 예를 들면 배고프면 엄마 젖을 먹고 자고 싶으면 자고 울면 뭔가 새로운 가능성의 문이 열린다는 점을 몸으로 알게 된 것이다. 감각보다 한 단계 더 높은 층위에 존재하는 감정이 욕구다. 감각적 깨달음을 몸으로 터득한 사람은 이제 자신이 원하는 대상을 갈망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욕망하는 대상을 지향하는 본능이 생긴다. 사람은 모든 욕구를 충족해서 살아갈 수 없다. 그걸 인식하고 통제하며 조정하는 높은 마음의 계층이 지성이다. 욕구는 나를 끌고 가지만 지성은 나를 거기서 떨어져 나와 냉정한 자세를 유지하려고 한다. 식욕이 강하게 발동하지만 지성은 그만 먹으라고 끊임없이 명령한다. 성욕이 치솟지만 자제하지 않으면 치명적인 손상이 올 수 있음을 지성은 끊임없이 이성적으로 경고장을 날린다. 지성과 욕구가 충돌하는 사이, 머리로는 이해가 가지만 마음으로 이해되지 않는 감정이 존재한다. 시어머니가 아프면 머리가 아프지만 친정 엄마가 아프면 가슴이 아프다. 시어머니는 논리적으로 차가운 지성이 작동하고 친정 엄마는 지성으로 설명되지 않는 뜨거운 감정이나 타자의 아픔을 나의 아픔처럼 가슴으로 생각하는 감성이 작동한다. 머리로 이해는 가지만 가슴으로 와 닿지 않을 때 사람은 행동하지 않는다. 논리적 설명으로 이해시키지만 가슴에 와 닿지 않으면 사람은 행동하지 않는다. 사람은 감성적으로 설득당할 때 감동받고 감동받으면 행동한다. 세상은 머리를 움직이는 사람보다 심장을 움직이는 사람이 의미심장한 변화를 일으키고 리더십을 발휘한다. 



지성은 밖의 기준에 따라 흔들리지만 감성은 안의 기준으로 중심을 잡는다


저자의 주장 중에서 흥미로운 점은 감정과 감성의 구분, 감성과 지성의 구분이다. 저자는 감성은 감정보다 성숙한 단계의 마음이라고 이해한다. 감정이 상황적 분위기나 사람의 기분에 흔들리기도 하지만 감성은 타자의 아픔에 깊이 공감할 때 생기는 측은지심이라고 생각한다. “지성은 자신의 외부에 존재하는 가치 판단의 기준을 참조해야 한다. 법률에 합치되거나 윤리에 근거하거나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지를 참조해야 한다. 그러나 감성은 그것이 발생했을 때부터 자신의 가치 판단을 가지고 있다. 외부에서는 감성의 가치를 매길 수 없다. 그리고 감성은 누구나 부정할 수 없는 주관성의 성질을 가지고 있다”(189쪽). 가치 판단을 내부와 외부의 기준 중에서 무엇을 판단기준으로 삼는지에 따라 지성과 감성이 구분된다. 외부의 기준으로 판단하는 지성은 논리적이지만 판단 기준이 외부에 있어서 언제나 다른 사람을 주시한다. 반면에 감성은 직감적이지만 판단의 기준이 내부에 있어서 언제나 다른 사람을 주시하지 않는다. 오로지 자신의 감정적 흐름에 주목한다. “지성은 자신에 대한 절대적인 판단을 가지고 있지 않다. 자신의 판단이 올바른 것인지 아닌지를 확인하려면 외부의 다양한 기준에 비춰보아야 한다”(213쪽). 지성은 판단기준을 늘 안이 아니라 밖에 찾기 때문에 지성적인 사람은 환경 의존적이며 자신감이 없다. 판단을 내렸어도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할지를 이성적으로 판단하는 절차를 거치지 않으면 여전히 불안하다. 반면에 세련된 감정과 직감적으로 다가오는 감성에 비추어 사물이나 현상 또는 관계를 판단하는 주관성이 높은 사람은 주변의 판단과 주장에 흔들리지 않는다. 가치 판단 기준이 흔들리지 않는 심연의 마음속에 깊이 뿌리박고 있기 때문에 환경 독립적 사유를 즐긴다. 이들이 내리는 “판단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지성과 감성의 모든 경험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자신의 온 힘을 다 쏟아부은 것이기 때문에 후회는 없다”(214-215쪽). 


“감성은 언어를 넘어 언어와 기존의 개념으로는 표현하기 어려운 것들을 느낄 수 있다. 반면, 지성은 언어라는 도구를 사용하므로 언어로 표현될 수 있는 것만 다룰 수 있다”(189쪽). 감성으로 다가온 느낌은 언어화를 거부한다. 내가 누군가를 사랑할 때 그 느낌은 말로 다할 수 없다. 그냥 육감적으로 다가온 느낌이 나의 믿음과 신념을 부추긴다. 객관적 자료도 없고 논리적 검증도 없다. 그냥 저 사람 정도면 되겠다는 판단이 든다, 그 논리적 근거는 없다. 느낌이 나를 확신에 찬 신념으로 무장시킬 뿐이다. 지성은 논리적 언어로 설명력을 지닌다. 설명이 강해질수록 이해도는 높아지지만 확신에 찬 신념으로 가슴에 꽂히지 않는 경우도 있다. 설명자 본인이 체험적으로 느낀 점을 설명문으로 담아내지 못하거나 아예 설명할 느낌조차 없기 때문이다. 설명이 관계를 이해시키지만 설득은 관계를 뜨겁게 달군다. 설명이 (인과) 관계 안에서 꼬리를 물고 어떤 관계인지를 논리적으로 증명하려고 애쓰지만 설득은 관계 밖에서 뜨거운 연대를 맺을 수밖에 없었던 사연을 온몸으로 보여준다. 설명하는 두뇌는 허공을 맴돌 때 설득하는 심장은 동공을 파고든다. “지성이 자신의 틀 안에서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한계에 이르렀을 때, 그 경계를 넘어 새로운 지성이 활동할 수 있는 장소를 제공해주는 것이 감성과 직감이다”(190쪽). 지성은 한계에 직면했을 때 한탄하지만 감성은 한계를 넘어 경지에 이르렀을 때 감탄과 경탄을 금지 못한다. 한계를 책상에서 논리적으로 넘으려는 지성은 일상에서 한계를 몸으로 넘으며 온몸으로 겪으려는 감성에 언제나 뒤흔들릴 수밖에 없다.



주관성(主觀性)을 넘어 간주관성(間主觀性)으로:

주관이 객관을 지배하지 않고 주관이 다른 주관을 만나 합의를 이룬다

      

감정이나 감성보다 더 깊은 심연에 바로 주관성이 존재한다. 주관성은 지금까지 설명한 감각, 욕구, 지성, 감정 등 네 가지 수준을 자유자재로 통제하고 조율해낼 수 있다. 주관성에 도달한 사람은 주변의 감정 변화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주장의 무게중심을 잡고 나와 맺고 있는 관계를 객관적으로 관찰한다. 객관적인 관찰능력은 사실 주관을 배제한 독립적인 능력이 아니라 내 입장만 고수하지 않고 타자의 입장에서도 생각하며 편파적 의견을 넘어서려는 안간힘이다. 복잡한 관계에서 빠져나와 멀리서 우리를 바라보며 세상을 관조하는 능력이다. 객관적인 관찰 능력을 지닌 사람은 유머감각이 풍부하다고 한다. “유머란 보통 무언가를 믿고 그 세계 안에 몰입하고 있는 자신을 외부에서 바라보았을 때 만들어진다. 무엇인가를 믿고 그런 마음을 가지게 된 자신의 모습과 그런 모습으로부터 동떨어져 있는 천진난만하고 순수한 자신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212쪽). 주관성의 깊이에 이른 사람은 몰입과 이완, 지성과 감성, 내부와 외부, 음지와 양지, 오르막과 내리막을 오고 가면서 체험적으로 깨달은 각성과 촌철살인의 지혜를 몸으로 간직하고 있다. 그는 적재적소에서 다른 사람을 관찰하면서 언제 어떤 표현을 하면 사람들로 하여금 잠시 여유를 갖고 자신을 돌보게 할 수 있을지를 꿰뚫고 있는 사람이다. 그 순간의 포착과 적확한 언어구사는 사람들에게 혀를 내두르는 촌철살인의 지혜로 죽음에 이를 정도로 큰 깨달음의 미소를 전해준다. “성숙한 사람은 자신을 현실로부터 일단 분리시킬 줄 안다. 유머는 행동의 필연성을 분리시켜 관찰하는 여유와 포기의 입장에서 탄생한다. 즉, 주관성과 객관성 사이에 존재하는 작은 틈새를 이해하게 되었을 때 탄생하는 것이 바로 유머다”(213쪽). 유머가 있는 사람은 세상이 아무리 바쁘게 돌아가도 여유만만하고 긴장 속에서도 한 템포 늦춰 살아가며 사람들에게 틈새를 제공해주는 사람이다. 틈새를 통해 추임새를 넣어 줌으로써 힘든 삶 속에서도 미소를 잊지 않게 만들어준다. 


“자신의 주관성을 확립한 사람은 다른 사람과의 마음의 교류를 추구하게 되고 그것은 인생의 중요한 가치가 된다. 그들은 자신이 태어난 시대의 상대성을 이해한다”(224쪽). 주관성이 상대성을 이해한다는 말은 중요한 단서를 제공해준다. 주관성을 확립한 사람은 자기 주관에 빠져 나와 다른 주관을 인정해주지 않을 때 주관은 독단이나 고집이다. 나의 주관이 고유한 특성을 지니고 장단점을 보유한 것처럼 나와 다른 주관의 고유한 특성과 다른 측면에서의 장단점이 있음을 인정할 때 주관은 독립된 주관이 아니라 상호주관성(intersubjectivity) 또는 간주관성에 비추어 주관의 공동체가 될 가능성의 문이 열린다. 이런 점에서 주관성의 깊이는 혼자 파고들어간 자기주장의 깊이나 넘볼 수 없는 내공의 높이라기보다 다른 주관과 만나 사회적으로 상호작용한 합작품의 깊이다. 함께 깊이 파고든 이력이 솟아오른 경력의 높이인 셈이다. 주관의 깊이는 주인 혼자만의 외로운 투쟁의 산물이 아니다. 오히려 모든 전문성은 주관과 주관이 만나서 이루어진 사회적 관계의 합작품이다. 진공관 속에서 혼자 외롭게 전문성을 연마한 결과 생긴 산물이 아니다. 이런 점에서 주관적인 전문성은 또 다른 주관적인 전문성과 갈등과 충돌, 대화와 합의를 통해 형성된 간주관적(間主觀的) 합의의 산물이다. 주관은 주인의 관점이지만 주인이라는 인간이 혼자 외롭게 쌓아 올린 독립적 성과가 아니라 다른 주관과 만나서 합작한 사회적 산물이다. 하지만 그런 주관도 주관이 만나 만들어가는 간주관성도 환경과 무관하게 주관적으로 생길 수 없다. 주관을 둘러싼 다른 주관뿐만 아니라 주관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영향력을 주고받는 모든 사물이나 환경과 같은 비인간과의 부단한 네트워크의 산물이 바로 간객관성(interobjectivity)이다. 


이 책은 해석을 어떻게 하는지에 따라서 한 개인의 능력이 혁명적으로 변화될 수 있는 가능성의 문을 열어 놀았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할 만하다. 똑같은 능력의 소유자라고 할지라도 해석 능력과 방식에 따라 전혀 다른 능력으로 부각될 수 있는 가능성의 문을 열어놓았다. 나아가 지성과 감성을 구분하고 언어화시킬 수 없는 감성이 오로지 언어를 통해서만 작동하는 지성 간의 새로운 관계를 정립하고 있다. 나아가 감성이 이성을 움직이는 논리적 근거를 제시하면서 이 양자를 포섭하는 주관성이 사람의 마음을 심층적으로 움직이는지를 보여준 혁명적인 책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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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관심의 시대 - 우리는 왜 냉정해지기를 강요받는가
알렉산더 버트야니 지음, 김현정 옮김 / 나무생각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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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미완(未完)의 사실을 찾아 나서는 미()완성 교향곡

무관심의 시대우리는 왜 냉정해지기를 강요받는가를 읽고   



무관심은 나와 타자 사이의 차이에 주목하지 않는다     


“interest, 이 단어는 사이를 뜻하는 라틴어 인테르inter와 존재함을 뜻하는 에쎄essce로 이루어진 말입니다. 그러니까 사이에 존재함으로써 interest는 나와 타자 사이에 존재하는 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강신주의 《철학적 시 읽기의 괴로움》에 나오는 말입니다. 무관심은 나와 타자 사이에 무엇이 존재하는지 아무 관심이 없다는 말입니다. 나의 바깥에서 무엇이 발생하는지, 발생해도 그것이 무슨 의미와 가치를 지니는지 알고 싶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안다고 해도 그것이 지니는 깊은 의미와 가치를 캐묻고 싶지 않다는 말입니다. 무관심의 싹이 자라기 시작하면 두 가지 노력을 포기합니다. “하나는 삶에 대한 열망을 가지고 기꺼이 거기에 참여하려는 마음이고, 다른 하나는 공동체적 목표를 자신의 사명으로 인지하고 실천하는 것이다”(12쪽). 무관심은 삶에 대한 열망을 절망으로 바꿔 놓고 관망하는 자세로 매사에 대한 관심의 끈을 끊어놓게 만든다. “무관심이란 모든 자발성과 이상, 책임감으로부터 만들어지는 더 나은 미래에 대한 모든 믿음을 파괴한다. 또 우리의 삶이 어떤 중요한 의미와 가치를 지니는지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우리가 한탄하며 외면하고 싶어 하는 암담한 일상으로 우리를 되돌려 놓는다”(25쪽). 무관심은 삶에 대한 의욕을 상실케 만들고 보다 적극적으로 살아가려는 의지를 꺾어버리고 삶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장본인이다. 결국 무관심은 살아가면서 느끼는 의미와 가치가 무슨 소용이 있는지 스스로에게 부정적으로 되물어보면서 본인은 물론 타인도 절망하게 만든다. “무관심에 사로잡힌 사람은 위로가 필요한 타인에게 다가가는 능력을 잃어버리고, 그 역시 절망과 개인적으로 경험한 상실감을 극복하지 못한다”(26쪽).  



나아가 무관심은 나와 다른 사람은 물론 공동체와의 동맹 관계 속에서 의미와 가치를 창조하는 모든 노력으로부터 발을 빼게 만든다. 무관심이 고개를 들기 시작하면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 양태나 방식에도 무감각할 뿐만 아니라 그것이 왜 지금 여기서 발생했는지 맥락적 사고도 거부한다. “역사적 사건이나 낯선 문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현장에 있는 사람들 입장에서 이해하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14쪽). 사건이나 문화는 그것이 발생할 수밖에 없는 고유한 맥락성을 지닌다. 맥락을 이해하지 못하면 맥을 못 춘다. 무관심을 맥락을 이해하려는 열정을 싸늘하게 식게 만든다. 그저 겉으로 드러난 피상적 이해조차 귀찮아하게 만드는 장본인이다. 무관심은 빅터 프랭클이 말한 실존적 공허(Existential Vacuum), 삶의 의미를 상실한 상태를 불러온다. 물질적으로 풍부해졌지만 정신적으로는 풍요롭지 않고, 과거보다 더 많은 목표를 더 빨리 달성하는 효율은 높아졌지만 왜 그것을 하는지 효과는 점차 없어진 현상이다. 열심히 살지만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 이렇게 목숨 걸고 목표를 향해 매진하는지 이유를 모르는 허망함이 실존적 공허를 낳는다. “모든 것에 무관심해지고 아무것에도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삶의 비구속성이라는 양상은 또 다른 불안과 방향 상실을 초래하는 기반이 된다”(22쪽). 살고 있어도 사는 것 같지 않고 바쁘게 살아도 왜 그렇게 사는지 모르는 실존적 공허는 삶의 비구속성을 불러온다. 모든 삶은 삶의 다른 양상과 구속되어 독립적인 상태로 존재하지 않고 의존한다. 즉 내가 매일 발을 딛고 살아가는 일상의 모든 측면도 다 어딘가에 구속되어 의존적 양태로 돌아간다. 내 삶이 어딘가에 구속되어 있어야 거기에 관심을 갖고 흥미를 느낀다. 어느 순간부터 그 연결고리가 끊어지면서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세상과 자신은 무관하다고 느끼는 사람이 있다”(23쪽). 더욱 심각한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삶의 요구에 귀가 멀어 있거나 들리지 않은 척한다”(23쪽)는 데 있다. 나는 다른 사람은 물론 내가 매일 만나는 삶의 모든 측면으로부터 외면당하고 있다는 소외감은 무관심을 더욱 부채질한다.     



관심과 반응만이 사람 사이를 희망으로 꽃 피운다     


무관심의 가장 심각한 폐해는 나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과 사회적 관계는 물론 가까이서 나와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이 추구하는 삶의 방향성에 귀를 기울이지 않게 만든다는 데 있다. 즉 “무관심은 모든 인간으로서의 책임감을 거부한다”(27쪽). 무관심은 인간이 추구하고 발견하며 향유하는 삶의 의미와 가치, 책임과 참여, 관심과 반응에서 멀어지게 만든다. 삶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내가 관심을 갖고 반응(response)하는 능력(ability), 즉 책임(responsibility)과 헌신적인 참여를 통해 모종의 의미를 찾아내고 가치를 창조하는 과정이다. 무관심은 이런 모든 노력에서 멀어지게 만들고 결국 희망보다 절망으로 우리를 이끌어 나락으로 빠지게 만든다. 사람은 사랑을 다른 사람에게 주고 또 나 역시 다른 사람의 사랑을 먹고 자란다. 누군가가 나 대신 힘든 노동을 통해 가꾼 성취를 나에게 나눠주는 호의 덕분에 나와 너, 우리와 공동체적 삶이 존속한다. 내가 경험하는 모든 단순함과 편리함은 누군가 나 대신 겪은 복잡함과 불편함 덕분에 누리는 미덕이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의존적이고 구속적인 삶을 사는 이유다. 한 순간도 인간은 다른 사람의 호의 도움 없이는 생존이 불가능한 가장 연약한 동물이다. 무관심은 이런 인간적 삶에 흐르는 상호작용이나 상호의존 관계를 볼 수 없게 만든다. 상대에 대한 “관심과 호의, 삶의 가치와 의미는 우리의 일생, 나아가 인류 역사의 발전과 질서를 지탱해주는 기둥이다”(40쪽). 이런 기둥을 포기하고 체념으로 일관하는 무관심은 이 세상이 살만한 가치가 있다는 점을 부정하게 만드는 원흉이다.     


어떤 의미에 대한 인간의 의지와 의도가 세상을 바꿔나가는 원동력이다. 아직 발견하지 못했지만 삶의 어딘가에는 지금보다 나은 미래로 이끌어가는 희망이 존재한다는 믿음, 지금보다 더 의미와 가치가 있는 수많은 대상이나 미지의 세계로 향하는 열망이야말로 인간의 본질적 특성이다. 세상은 거창한 프로젝트나 원대한 비전만으로 바뀌지 않는다. 오히려 내가 몸담고 있는 일상의 작은 부분을 바꾸고 늘 만나는 사람에게 베푸는 작은 호의를 주고받으며 무언가를 도와주고 나누는 일을 반복함으로써 느끼는 행복감이 나와 우리는 물론 우리가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세상을 바꾸는 원동력이다. 작은 도움이지만 그 도움으로 희망을 찾은 사람은 세상을 향해 긍정적인 반향을 일으키고 그 반향은 보이지 않는 가운데 세상을 향해 진한 여운을 남긴다. 여기서 주목할만한 개념은 바로 미완의 사실이다. 미완의 사실은 살아가면서 만나는 무수한 사실에 아무리 응답을 해도 여전히 밝혀낼 수 없는 미지의 가능성이 숨어 있다는 의미다. “우리가 삶의 사실들에 응답하는 한 우리는 끊임없이 미완의 사실들 앞에 서게 된다”(50쪽). 미완의 사실이기에 ‘존재하는 것’에 대한 관심에서 ‘존재 가능한 것’으로 시선을 돌리게 만든다. ‘존재 가능한 것’이 품고 있는 미지의 사실에 주목함은 물론 나아가 ‘마땅히 존재해야 하는 것’으로 시선을 돌려 우리가 노력하면 그것이 품고 있는 의미 실현의 가능성을 구현하는 것이다. 미완의 사실이기에 그것을 완성하려는 몸부림이 더해질수록 세상은 얼마든지 지금보다 더 풍요로워질 가능성을 품고 있다. 나아가 미완의 사실을 알아내려는 개인적인 헌신과 노력이 지금보다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데 보탬이 된다는 믿음을 잃지 않을 때 우리의 미래는 희망적이다.  



미완(未完)의 사실은 미완의 미스터리다     


“삶의 의미 또한 사람마다 다르다. 따라서 모든 미완의 사실은 유일무이한 방식으로 미완일 뿐만 아니라, 어떤 사람을 만나느냐에 따라서 완성에 대한 개인적인 요구를 담고 있다”(52쪽). 미완의 사실이 유일무이하기 때문에 모든 사람은 그 누구도 지니지 않는 유일무이한 미완의 가능성을 품고 있다. 미완의 가능성을 품고 있는 사람이 어떤 노력을 통해서 그걸 실현하는지에 따라서 전혀 다른 가능성으로 현실로 구현될 것이다. 어떤 가능성으로 우리 눈앞에 나타날지 역시 예측 불가능하다. 다만 “나는 어떤 사람이 되려고 할까? 나의 진정한 모습은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나는 무엇을 발산해야 하며, 무엇을 행하고 남겨야 할까?(63쪽)”와 같은 질문에 진지하게 대답하려는 노력을 전개할수록 철학자 막스 셸러(Max Scheler)가 말하는 형이상학적 경솔에 빠지지 않는다. 형이상학적 경솔은 스스로 지닌 가능성을 과소평가하고 자괴감에 빠져 자신의 존재 가치를 왜곡하는 참을 수 없는 인식의 가벼움이다. 형이상학적 경솔에 빠지면 “자신의 기여가 가져올 결과와 가능성은 생각하지 않은 채 자신을 외부 환경의 희생자라 여기고, 변경할 수 없는 것에 매달리게 될 것이다”(84쪽). 사람이 바꿀 수 있는 것은 과거도 미래도 아니다. 사람이 바꿀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지금 현재다. 현재를 바꾸면 흘러간 과거도 새롭게 해석된 미완의 사실이고, 다가오지 않은 미래는 미완의 미스터리(mystery)다. 우리 모두는 미완의 미스터리를 품고 있는 미(美)완성 작품이다.   

  

내가 품고 있는 미(美)완성 작품은 언제 어떤 방식으로 세상을 향해 가능성의 문을 열어젖힐지 모른다. 내가 개척하는 운명이 나에게 어떤 가능성의 관문을 준비할지 나 역시 미스터리다. “하지만 우리가 무엇을 발산할지를 결정할 수는 있다. 우리의 기여, 바로 이것이 중요하다”(86쪽). 미완의 사실에서 어떤 보석을 캐낼지는 전적으로 나의 선택에 달렸다. “인간은 인과 사슬의 맨 마지막에서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존재이기도 하면서, 시작 지점에 있기도 하다. 그리고 자신의 결정과 행동이 가져올 모든 예측을 제쳐두고 예기치 못한 것을 세상에 내놓을 수도 있다”(87쪽). 인간은 미완의 사실에서 새로운 가능성의 문을 열어젖히기 위해 새로운 출발은 언제든지 할 수 있다. 출발선상에서 품고 있는 희망은 전적으로 출발을 다짐하고 시작하는 당사자에 달려 있다. 모든 의사결정은 지금 여기 현재에서 이루어진다. “현재는 제한성의 장소일 뿐만 아니라 자유로운 결정의 장소다”(102쪽). 현재에서 과거를 해석하고 미완의 미래를 예측한다. 하지만 내가 현재에서 어떤 선택과 판단, 그리고 의사결정을 하는지에 따라서 흘러간 과거도 새롭게 해석되고 다가오는 미래의 미스터리도 미(美)완성의 아름다움으로 채색된다. 지금 현재 “자신의 삶에 빛을 들어오게 하기 위해서는 삶이라는 건물의 모든 창문과 문을 활짝 열어두어야 한다. 그리고 빛이 밖에서 들어오기를 기다릴 뿐만 아니라, 빛이 들어오도록 행동을 개시하고 직접 빛을 끌어당겨야 한다”(104쪽). 이런 노력도 나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해서 노력할 때 미완성 교향곡은 더욱 사람과 사람 사이로 울려 퍼질 것이다.



사랑은 직선적 인과관계나 물리적 법칙을 따르지 않는다     


미완성 교향곡은 혼자 완성해낼 수 없다. “우리는 주는 행위를 통해서 자신을 더욱 풍요롭게 만들 수 있다. 한 사람의 부를 결정짓는 삶의 영역은 받는 것이 아니라 주는 행위를 통해 풍요로움을 무한대까지 증식시킬 수 있다”(114쪽). 앉아서 도움을 받는 것보다 발 벗고 나서서 다른 사람에게 내가 줄 수 있는 능력을 베풀 때 살아가는 의미와 가치는 배가되고 그 순간 미완성 교향곡은 더욱 큰 긍정적 반향을 일으킬 것이다. 미완성 교향곡은 과거의 겪었던 경험을 한 인간이 주체적인 입장에서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다르게 변주된다. “인간은 과거의 산물 그 이상이다”(79쪽). 과거에 내가 겪은 경험은 직선적으로 현재로 달려와 나의 슬픔과 괴로움을 만든다는 사고방식을 인과적 그물이라고 볼 수 있다. 내가 지금 이렇게 괴로움에 휩싸여 있는 이유는 과거의 어느 시점에서 누군가에게 아픈 상처를 받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선형적 인과관계는 어떤 특정 원인의 산술적 합이 오늘의 나를 만들었다고 생각하는 환원주의적 심리학의 한계와 폐해다. 환원주의적 세계관은 복잡한 세상을 낱낱의 구성요소로 분석하고 분해한 다음 그 걸 다시 합쳐서 전체를 이해하는 사고방식이다. 예를 들면 집은 벽돌, 나무, 시멘트, 모래, 유리 등 각종 건축 기자재의 산술적 합이라고 생각하는 사고 양식이다. 하지만 집은 이런 건축 자재의 물리적 합을 넘어 건축가의 철학과 의도, 장소나 환경과의 상호작용, 건축 기자재의 용처가 시너지 작용을 일으키면서 부분의 합을 능가하는 건축미의 산물이다. 환원주의적 심리학은 과거에 인간이 겪었던 몇 가지 감정적 변수를 물리적으로 합산한 다음 현재를 살아가는 한 사람의 심리 상태를 예측하려는 무모한 시도를 거듭한다. 



“어떤 궁핍이나 고통스러운 경험, 매정함을 겪었더라도 이 요인들을 현재에 어떻게 적용시킬 것인지는 우리가 직접, 그리고 현재에 결정할 수 있는 것이다”(84쪽). 인간은 과거의 경험이 지금의 현재를 결정하도록 내버려 두는 수동적이고 피동적인 존재가 아니다. 내가 어떤 두려움 앞에 직면해도 그 두려움을 적극적으로 해석해내는 주체적인 존재이다. 인간은 또한 다른 사람의 사랑을 받지 않으면 성장할 수 없는 연약한 존재이기도 하지만 역으로 다른 사람의 아픔을 보면 그냥 넘어가지 않고 측은지심을 무한대로 발휘하는 숭고한 미덕을 지닌 존재이기도 하다. 그래서 미완성 교향곡은 사랑으로 이루어진다. 하지만 사람들은 내가 누군가를 사랑한 만큼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사랑의 물리적 총량이 정해져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한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 한 사람에 대한 사랑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더 이상 사랑하지 않거나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113쪽). 한 사람이 갖고 있는 사랑의 물리적 총량을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쏟은 사랑으로 인해 이미 그 사람은 사랑할 수 없는 양이 그만큼 감소된다고 잘 못 생각한다는 것이다. “사전에 받은 에너지 양에 상관없이 에너지를 발산하는 기제가 적용된다. 정신성을 소유한 인간은 언제나 객체를 능가한다”(114쪽). 사랑은 내가 과거에 받은 상처나 온정이 경험적으로 축적되어 생긴 단순한 물리적 산물이 아니다. 오히려 사랑은 다양한 감정이 내면에서 숙성되고 발효되어 탄생된 설명할 수 없는 관심과 배려, 헌신과 기여의 성취물이다. 인간을 인간으로 빛나게 만들어주는 실존적 지혜가 아닐 수 없다.      



모든 성취는 사회적 합작품이다     


미래는 전적으로 나 혼자의 힘으로 새로운 가능성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내가 갖고 있는 단점이나 약점은 다른 사람에게 새로운 가능성을 열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우리의 약점이 다른 사람의 최선을 끌어낼 수 있는 기회가 된다. 특정한 능력을 발휘하는 기회일 뿐만 아니라, 자신이 누군가를 위해 전력을 다하는 기회가 되는 것이다. 반대로 그의 약점 역시 우리에게는 삶의 영역에서 그를 도울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121쪽). 약점은 나의 입장에서 바라볼 때 치명적이지만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볼 때는 그 사람에게 내가 기여할 결정적인 기회다. 나의 약점으로 인해 다른 사람이 나에게 베풀 공간이 생기고 그로 인해 우리는 뜨거운 연대를 맺는 동맹이 된다. 상대의 강점으로 나의 약점은 상쇄되고 나의 강점으로 상대의 약점을 보완되어 우리는 협력을 통해 새로운 가능성을 창조할 수 있는 미완성 교향곡의 연속이다. "협조(coordintion)는 사실 '시키는 대로 해(Do what's expected)' 혹은 '효율적으로 해'라는 뜻이다. 협력(collaboration)은 '나는 동의할 수 없는데?'라고 자신의 감정을 말하는 것이다. 협력의 관계에선 서로 감정도 오가고 논쟁적인 대화도 하게 된다. '협력'을 통해 진화했고, '협조' 때문에 퇴화 중이다". ‘디자인 씽킹’의 전설적 원로학자, 래리 라이퍼 美 스탠퍼드 교수가 중앙일보와 인터뷰한 내용이다(참고: 혁신 가르치는 '디자인 씽킹의 전설'이 말했다 "AI 믿지 말라" 중앙일보, 2020.1.17.일자 기사). 협력을 통해 인간은 강약점을 상쇄시키고 새로운 가능성으로 뭉치는 믿음의 공동체가 된다. “협력 없는 세상은 존립하지 못한다”(187쪽).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타자 의존적임과 동시에 타자를 도와주고 힘을 나눠가면서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협력적 동물이기도 하다. 



믿음의 공동체가 되면 공동체 구성원 사이에 강한 신뢰 네트워크가 형성된다. 여기서 주목한 개념은 성취적 현실이다. 능력대로 성취해서 그 결과가 현실로 구현될 때 비로소 성취감을 맛본다. 성취적 현실은 나의 약점으로 도무지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다른 사람의 장점으로 나의 단점이 순식간에 상쇄되면서 현실적으로 무엇인가가 이루어졌을 때 느끼는 성취감이다. 나의 단점은 더 이상 극복할 수 없는 치명적인 약점이 아니다. 오히려 나의 약점은 상대방이 나의 약점 세계로 진입해서 자신의 강점으로 나를 온전한 세계로 이끌어 색다른 성취감을 맛보게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의 텃밭이다. “인간은 세상의 산물이자 부분이며, 이 세상을 향해 영향력을 발산하고 자신의 독자적인 능력을 통해 다른 방식으로는 불가능한 것들을 이 세상에서 만들어낼 수 있다”(170쪽). 성취적인 현실은 성취감을 맛보는 한 사람의 쾌감은 한 사람의 독자적인 능력으로 끌어낸 산물이 아니다. 오히려 성취감을 맛보게 만드는 과정에 관여한 모든 사람의 사회적 합작품이다. 혼자의 힘으로 불가능한 영역을 다른 사람과의 협력을 통해 생각지도 못한 가능성의 관문을 열어젖힐 때 성취적 현실은 그야말로 현실이 된다. “말하자면 신체적 정신적 구조는 제한적이지만 자유를 성취함으로써 이런 구조에 갇히지 않고 자신만의 입장을 취할 수 있는 능력은 무제한적이다”(184쪽). 성취적 현실은 뭔가를 성취하지 않고 맛볼 수 있는 관념적인 슬로건이나 개념이 아니다. 실제로 성취적 현실이 꿈꾸는 세계를 현실로 구현해봤을 때 느끼는 체험적 느낌이 바로 성취적 현실이다.     



대상에 대한 주체적 의미부여가 적극적인 참여를 불러온다     


“협력 없는 세상은 존립하지 못한다. 그런 세상은 지속적으로 위험에 처한다. 사랑과 관심이 없으면 대자연속에서 단 며칠도 생존할 수 없는 인간은 아마도 오래전에 멸종했을 것이다”(187쪽). 인간은 사랑과 관심을 먹고 자라는 인간관계의 산물이다. 인간은 홀로 독립적인 상태로 어딘가에서 살아갈 수 없는 지극히 의존적인 존재다. 인간의 감정 또한 어떤 처지에 놓여있느냐에 따라 상황에 따라 가변적일 수도 있고 특정 대상에 주체적으로 감정을 가질 수도 있다. 즉 인간은 상황적 감정에 휘둘리고 대상적 감정에 올곧게 살아보려고 노력한다. “상황적 감정은 어떤 것 ‘때문에’ 생기며, 대상적 감정은 어떤 것에 ‘대해’ 생긴다(207쪽). 상황적 감정은 나의 의지와 관계없이 아무 때나 변덕스럽게 생기지만 대상적 감정은 주체의 판단과 의도적인 근거에 따라 선별적으로 생긴다. 상황적 감정은 자기중심적이지만 대상적 감정은 타자 중심적이다. ”대상적 감정을 염두에 둔다는 것은 무관심하게 자신의 행복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과 다른 사람들을 존중하고 그들에게 관심을 가지는 것을 의미한다“(210쪽). 상황적 감정은 상황에 따라 좌지우지 흔들리는 가변적인 감정이라면 대상적 감정은 대상에 대한 인간적 관심과 바라보는 시선에 따라 주도적으로 결정되는 관심과 애정의 표현이다. 상황적 감정의 치명적인 약점은 ”목적의식을 놓치게 한다. “나는 지금 나 자신과 나의 행복에 몰두하고 있기 때문에 너에게 신경 쓸 겨를이 없어”라는 말조차 더 이상 하지 않는다“(220쪽)는 데 있다. 우울하고 언짢아서 지금 몹시 슬프다고 느끼는 상황적인 감정에 비해 ”우리가 사랑했지만 이제는 상실한 어떤 것 혹은 어떤 사람을 그리워하는 추억의 다른 표현“(222쪽)인 애도는 대상적 감정이다. 그래서 애도는 심리적으로 느끼는 가변적인 현상이라기보다 주체의 결단과 의도에 따라 일어나는 심리적 개입이자 정신적 현상이다.   



행복한 삶은 상황적 감정에 따라 휘둘리는 삶이 아니라 대상에 대한 애정과 관심으로 어떤 의미부여와 실존적 가치를 느끼는 대상적 감정이 주도한다. 대상적 감정은 저자가 일관되게 주장하는 “삶은 기본적으로 책임과 참여, 관심과 반응을 통해 결정”(33쪽)한다는 논지와 일맥상통한다. 대상적 감정은 인간의 실존적 공허를 극복하고 미완의 사실에 적극적으로 개입해서 삶의 의미와 가치를 창조하는 원동력이다. 대상적 감정은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운명에 따라 주어진 것을 기다리는”(75쪽) 임시적 삶의 자세에서 탈피하여 행복한 삶에 대한 적극적인 관여와 슬픔에 대해 성숙하게 대처하는 자세를 길러준다. 대상적 감정이 풍부해져야 “온전히 자기 자신이 되었다는 황홀한 감정이 느껴지고, 그 순간에 가장 큰 자유를 느낄 것이다”(230쪽). 상황적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온전히 나 자신과 마주하는 순간, 있는 그대로의 우리가 허용되는 순간, 온전히 자기 자신이 될 수 있음을 편안하고 기쁘게 누릴 수 있는 순간“(230쪽) 역시 대상적 감정이 가져다주는 선물이다. 상황적 감정과 대상적 감정은 각각 상황적 자존감과 대상적 자존감을 낳는다. 상황적 자존감은 일시적 기분에 따라 좌지우지되고 오락가락하는 변덕스러운 부정적 자존감이다. 이에 반해 대상적 자존감은 대상이 존재하는 의미를 내가 주체적으로 부여하고 애정과 관심으로 존재가치를 드높이는 의미 지향적 참여가 전제될 때 생기는 긍정적 자존감이다. 상황적 자존감에 매몰될수록 다른 사람이나 주변 정황 변화에 일희일비하고 주체의 자발적인 결단과 행동에 따라 움직이지 못하는 변덕스러운 존재로 전락한다.     

 

영원히 완성되지 않는 미()완성 교향곡은 영원히 우리 삶을 드높여 줄 것이다     


상황적 자존감은 실존적 공허는 물론 실존적 오류도 불러온다. 상황적 자존감은 자기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자기중심적인 행동을 일삼게 만든다. 잘 되면 내가 잘한 것이고 안 되면 다른 사람이나 환경의 잘못이라고 생각한다. 목적을 달성하면 “내가 참 잘했다”고 자화자찬한다. 반면에 대상적 자존감은 내가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좋은 일이라는 깨달음을 불러온다. 나보다 힘들고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에게는 서슴없이 측은지심이 발동되어 적극적인 도움을 주기 위해 발 벗고 나서며 그런 행동과 과정을 실존적 의미를 실현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대상적 자존감은 “행동이 자신만을 위하지 않고 가치를 지향할 때 그 파급효과가 행동의 가치에 확고하게 내재되어 있다는 사실도 보여준다”(239쪽). 대상적 자존감을 지닌 사람은 “다른 사람의 말이나 보상에 의존하지 않는다”(241쪽). 오히려 대상적 자존감을 지닌 사람은 대상에 의미를 부여하고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며 다른 사람과 공동체를 위한 선의 실현이 자신의 존재 의미와 가치라고 생각한다. “어떠한 사람도 외따로 떨어진 섬이 될 수 없다. 어떠한 삶도 만남 없이는 불가능하며, 어떠한 만남도 자유 없이는 불가능하며, 어떠한 자유도 책임 없이는 불가능하다”(245쪽). 우리는 모두 협력하는 의존적 존재다. 만남을 통해 존재 의미와 가치를 느끼고 자기가 살아가는 이유, 자유를 서로 간의 책임 속에서 만끽한다. 나를 발견하는 자유와 다른 사람과 함께 존재 의미를 실현하는 과정에서 반응하는 책임은 관심과 관여로 우리 삶을 더욱 빛나게 만드는 쌍두마차다. 타자의 아픔과 슬픔에 반응하는 책임은 우리가 살아가는 공동체를 지지하고 지원하는 숭고한 미덕이 아닐 수 없다. 더욱이 모든 존재는 그 나름의 살아가는 이유를 자유라는 이름으로 실현해나간다는 점에서 숭고한 가치를 지닌다.  



“또한 개인에게 일어나는 사건들만이 주체를 규정하고 정체성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주체는 자신의 삶에 개인적으로 기여하고, 함께 결정하고, 함께 삶을 써나간다. 이러한 개인적인 기여가 가장 먼저 나타나는 공간은 더 이상 섬이 아니라 전체(도움이 필요한 미완성의 세계)의 필연적이고 필수적인 한 부분으로 인식될 때 생겨난다”(245쪽). 주체는 절대적인 독립적 주체가 아니다. 다른 사람과 함께 협력하며 결정하고 결정한 사안을 함께 이루어나갈 때 우리는 더 이상 외딴섬에서 고군분투하는 독립적 주체가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더불어서 함께 공동체의 미덕과 선을 실현해나가는 전체다. “다시 말해 우리 자신을 존재의 중심에 세우기보다 각각의 상황에서 무수한 의미 가능성에 대한 책임감을 느낄 때 진정한 치유와 각성이 나타난다”(245쪽). 거기 그냥 존재하는 대상이나 존재는 없다. 미완의 사실을 품고 있는 무한한 가능성이다. 그 가능성의 뒤안길을 함께 파고 들어가 아직 드러나지 않은 의미를 발굴하고 함께 공유하며 가치를 드높이는 합작품을 창조할 때, 영원히 완성되지 않는 미(美)완성 교향곡은 영원히 우리 삶을 비추고 드높여 줄 것이다. 



"또한 개인에게 일어나는 사건들만이 주체를 규정하고 정체성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주체는 자신의 삶에 개인적으로 기여하고, 함께 결정하고, 함께 삶을 써나간다. 이러한 개인적인 기여가 가장 먼저 나타나는 공간은 더 이상 섬이 아니라 전체(도움이 필요한 미완성의 세계)의 필연적이고 필수적인 한 부분으로 인식될 때 생겨난다"(24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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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누구인지 책으로 증명하라 - 인생을 바꾸는 글쓰기와 책쓰기로의 초대
한근태 지음 / 클라우드나인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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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지 않으면 영원히 쓸 수 없고 쓰기 시작하면 써진다

한근태 교수의 당신이 누구인지 책으로 증명하라를 읽고     



세상에는 자기 일을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 많다. 자기 일을 사랑하는 사람은 리처드 세넷이 《뉴캐피털리즘》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일 자체를 위해 어떤 일을 잘 해는” 장인에 가깝다. 자기 일을 사랑하는 사람은 질문이 많은 사람이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을 더 잘하는 방법이 무엇인지를 밤잠을 설쳐가면서 질문을 던진다. 그 질문에 답하기 위해 부단히 궁리에 궁리를 거급하며 자기 일을 하며 행복감을 느낀다. 제가 아는 한근태 교수님도 바로 그런 부류에 속하는 한 작가이자 기업을 대상으로 강연을 즐기시는 명사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30권 정도의 책을 쓰면서 정말 자기 일에 대한 남다른 관심과 애정이 넘치는 분이시다. 자신이 하는 세 가지 일을 아예 운동, 책 읽기, 그리고 책 쓰기고 규정하고 하루 일과를 지극히 단순화시켜 운동하고 책 읽고 책 쓰고 그리고 그 결과로 강연을 한다. 이번에 나온 《당신이 누구인지 책으로 증명하라》도 바로 이런 평상시의 책 읽기와 책 쓰기로 다져진 누적된 생각의 산물이다. 한 교수님은 몇 번 사석에서도 뵌 적이 있다. 언제나 대화 도중에 메모를 하고 궁금하면 질문하고 아이디어를 얻어 끊임없이 메모한다. 그런 기록의 축적이 책 쓰기의 기적을 일궈내는 원동력이다. 일 년에 여기저기서 추천받은 책과 구입한 책을 합쳐 약 500여 권을 훑어보고 그중에 200여 권의 책을 읽고 정리하며 책을 쓰는 다독 가이자 다작 가다.     


저자는 이 책에서 글쓰기의 이로움을 넘어 엄청난 혜택을 이런 문장으로 주장한다. “글을 쓰면 팔자가 바뀐다.” “글을 쓰면 인생이 다듬어진다.” “글을 쓰면 전문가가 된다.” “글을 쓰면 늙지 않고 예뻐진다.” “글을 쓰면 남들과 차별화된다.” “글을 쓰면 성장하고 생존한다.” 이런 주장은 공허한 관념적 슬로건이 아니라 저자 자신이 직접 체험하면서 깨달은 교훈이자 각성이며 글 쓰는 작가의 좌우명이기도 하다. 글을 쓰면 팔자가가 바뀌고 인생이 다듬어지고 전문가 된다는데 안 쓸 사람이 있을까. 글을 쓰면 늙지도 않고 예뻐지고, 남과 차별화되며 성장을 멈추지 않는다는 유혹 앞에 글을 안 쓰고 배길 사람이 있을까? 이만큼 이 책은 저자 자신이 책을 읽고 글이나 책을 쓰면서 전공을 바꿔 지금까지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근원적인 힘과 에너지에 대해 책 쓰고 싶은 사람을 유혹하는 책이다. 구체적으로 글을 쓰면 모호했던 생각이 명료해지고 새로운 차원으로 생각이 정리되며 새로워진다고 한다. 글을 쓰면 핵심을 요약하는 능력이 생기고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오르며, 무엇보다도 자기 수련과 공부가 된다고 한다. 글을 쓰고 책으로 엮어내는 책 쓰기는 몸과 마음과 생각을 건강하고 참신하게 만들 뿐만 아니라 전문가로 거듭나게 만드는 최상의 공부방법이라는 것이다. 이래도 책을 쓰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글쓰기를 시작하는 유일한 방법은 “일단 시작하라”(189쪽)와 “지금 당장 써라”(194쪽)다. 쓰기 시작하는데 별 다른 준비가 필요하지 않다. 물론 마음을 가다듬을 시간도 필요하고 글 쓰는 도구도 필요하다. 글감도 준비해야 되고 무슨 메시지를 전달할 것인지도 사전에 생각해야 한다. 일단 쓰기 시작하면 남에게 창피당하지 않을 정도는 돼야 한다. 혹시나 미천한 내 생각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내 글을 누군가가 볼까 봐 두렵기도 하다. 글을 쓰려는 나를 붙잡고 계속 발목을 잡는다. 글쓰기를 목전에 두고 시작하려는 내 마음에 찬물을 끼 얻는 수많은 방해꾼들이 즐비하다. 이런 방해꾼들을 염두에 두고 있는 한 나는 글쓰기를 쉽게 시작할 수 없다. 복잡한 생각도 여기에 한몫을 한다. 쉽게 언어로 번역되지 않는 생각의 복잡함이 한 글자도 못쓰게 만드는 장본인이다. 하지만 이런 생각을 단순하게 만드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일단 내가 생각하는 생각이 무슨 생각인지를 생각나는 대로 글로 옮겨보는 것이다. 생각이 밖으로 나와 표현되는 순간 내 생각의 실체나 본질이 밝혀진다. “더 훌륭하게 글을 쓰는 것은 동시에 더 훌륭하게 사색한다는 것을 의미한다”(286쪽). 니체의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II》에 나오는 말이다. 글을 쓰는 일은 부표처럼 떠돌아다니던 생각을 붙잡아 일정한 논리적 구조와 체계로 정리하는 일이다. “글쓰기는 생각하기이다, 생각하기는 곧 글쓰기다”(100쪽). 남다른 생각을 갖고 남다르게 다른 사람에게 설득하는 힘은 내 생각을 시간이 날 때마다 글로 적어보고 구조화시켜 단순화시켜 보는 연습에서 나온다.      

나는 한근태 교수님의 책을 읽고 「글쓰기를 가로막는 7가지 방해공작꾼」의 정체를 생각해보았다. 글쓰기를 가로막는 방해꾼을 먼저 살펴보고 이들을 물리치고 글쓰기를 시작하는 방법을 알아본다. 여기서 제시하는 글쓰기의 걸림돌이나 장애요인은 글쓰기에 대한 통념이나 고정관념이다. 통념을 통렬하게 깨부수고 고착화된 고정관념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어떻게 글을 쓰기 시작하는지를 살펴보자. 


영감이 오면 쓰는 게 아니라 쓰다 보면 영감이 달려온다     


생각이 있어야 쓰는 게 아니라 쓰다 보면 생각이 난다. “글을 쓰면 생각이 정리되고 새로워진다”(90쪽). 생각이 없어서 글이 써지지 않는 게 아니라 생각이 너무 많거나 생각이 너무 정리되지 않아서 글이 안 써지는 경우가 더 많다. 생각을 정리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생각을 겉으로 끄집어내서 글이나 그림, 또는 어떤 관계도로 표현해보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너무 오랫동안 생각만 거듭하면 생각이 꼬리를 물고 끊임없이 생각을 거듭한다. 그 사이 글은 하나도 못 쓰고 백지만 들여다본다. 이제 머릿속도 백지처럼 바뀐다. 그러니 영감이 올 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일단 생각나는 대로 누가 보든 안 보든 내 생각을 쓴다. 우선 한 줄을 쓰면 그 한 줄이 다음 문장에 대한 아이디어를 데리고 온다. 쓰기 시작하면 쓴 글이 다음 글에 대한 생각을 연속해서 불러온다. “생각하니까 글을 쓰는 게 아니고 글을 쓰니까 생각하게 된다는 전도가 일어났다”(236쪽). 강민혁의 《자기 배려의 인문학》에 나오는 말이다. 쓰지 않고 생각하는 시간이 많을수록 글을 쓸 확률도 그만큼 낮아진다. 완벽한 글을 기다리는 동안 완벽하게 글을 쓰지 못한다. 복잡한 생각은 글로 옮겨야 단순해지고 불분명한 생각도 글로 번역해야 명료해진다. 단순하고 명료해진 생각은 다음 생각을 불러다 글로 옮겨진다. 그렇게 꾸역꾸역 글은 문장을 갖추고 한 패러그래프에서 한 페이지를 넘기며 글의 행렬은 계속 이어진다. 뭔가를 확실히 기억해야 쓰는 게 아니라 쓰다 보면 과거의 경험이 연상된다. 꽉 막혔던 생각창고에 한 줄기 빛이 들어가면서 관련된 추억이 씨줄과 날줄로 엮여 누에고치가 실을 뿜듯 글발이 이어지는 놀라운 체험은 해보지 않고서는 느낄 수 없다. 우선 펜을 들고 낙서를 시작하거나 키보드로 두드리기 시작하라. 두드림이 닫힌 글감의 문을 활짝 열어젖힐 것이다.   


책을 읽은 후에 쓰는 게 아니라 읽으면서 쓰고 쓰면서 읽는다     


남들보다 책을 빨리 쓰는 비결 중의 하나는 지금 쓰고 있는 책의 주제 분야 관련 책을 읽다가 영감이 떠오르면 서슴지 않고 바로 글을 쓰는 것이다. 독후감(讀後感)이 아니라 독중감(讀中感)이라고  할까. 글감은 영감과 함께 다가오지만 영감은 순식간에 도망가버린다. 영감은 어떤 경우 영원히 깜깜무소식일 경우가 많다. 영감은 아무 때나 다가오기 때문에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잡아두어야 한다. 책을 읽는 도중에도 연상되는 아이디어나 다른 글감은 그 순간 바로 메모해두었다가 지금 쓰고 있는 글이나 책에 우선 기록해둔다. 그 글이 어디에 들어갈 수 있을지, 어떤 내용으로 편집해서 다른 글과 합칠지는 나중에 고민해도 된다. 그렇게 읽다가 쓰고 쓰다가 별다른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으면 또 읽는다. 읽기가 끝난 다음 쓰는 게 아니고 읽으면서 갑자기 다가오는 아이디어는 행간에 메모를 해두거나 별도의 메모 노트에 기록해둔다. 단편적인 메모가 모이면 메모를 어떤 방식으로 구조화시켜 한 편의 글을 완성할지는 그때 가면 떠오른다. 모든 아이디어는 기반이나 텃밭이 있어야 자라기 시작한다. 아이디어는 익숙한 두 가지 이상을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엮는 과정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읽으면서 쓰고 쓰면서 읽는, 즉 읽기와 쓰기의 동시 병행이 읽기와 쓰기를 서로 도와주는 쌍두마차다. 읽어야 쓸 수 있고 써야 읽을 게 생긴다. “책 읽기와 글쓰기는 서로 물고 물리는 관계다”(135쪽). 읽기만 하고 쓰지 않으면 안 읽은 만 못하고, 쓰기만 하고 읽지 않으면 편협한 사고의 배설물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글의 뼈대를 잡고 쓰는 게 아니라 쓰면서 구조를 잡아간다     


책은 책 제목과 목차, 그리고 본문으로 구성된다. 순서대로 따지면 책의 제목이 가장 먼저 눈에 띄고, 그다음 책장을 넘기면 목차가 나오며, 목차 순서대로 본문 내용일 펼쳐진다. 그럼 책을 쓰는 순서도 제목을 결정한 다음 목차를 정하고 목차 순서대로 책 내용을 기술하면 되는가? 대답은 그럴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이다. 왜냐하면 책을 쓰기 전에 어렴풋하게나마 어떤 주제로 글을 써야 될지는 느낌이 오지만 아직 무엇에 관해 쓸 것인지를 한 마디로 정확히 표현하기는 시기상조인 경우도 많다. 책 제목은 어떻게 결정해야 될지 모르지만 책을 통해 무슨 메시지를 담고 싶은지는 대강의 구상이 서 있을 것이다. 책 제목이 분명하지 않다고 해서 목차도 분명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은 아니다. ‘목차’ 역시 ‘목’이 차오를 정도로 쓰고 싶은 하위 주제가 책을 쓰면서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경우가 더 많다. 초기에 생각이 떠오르는 대로 목차에 해당하는 하위 주제를 정한 다음 정해준 목차별로 우선 글을 쓰다 보면 나중에 더 좋은 생각도 떠오르른다. 목차의 하위 주제 간 순서나 전체 윤곽에 대한 구조도 글을 써 내려가면서 부각된다. “머릿속으로 생각을 정리한 후 쓰는 것 같지만 사실 쓰는 것이 먼저이고 생각정리는 그다음이다”(213쪽). 맨땅에 헤딩하면 아프다. 뭔가 조금이라도 써 놓고 뼈대나 얼개를 만든 다음 거기에 살을 붙여 나가다 보면 더 멋진 책의 구조가 드러날 것이다. 구조는 구조화시킬 재료가 있어야 시작된다. 직관력이 뛰어난 작가는 처음부터 무슨 글을 어떻게 쓸지 논리 전개 구조나 프레임을 갖고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초보 작가는 글을 쓰기 전에 그런 구도를 갖고 있지 않다. 이럴 때는 생각나는 것부터 우선 쓰기 시작하고 쓴 것을 중간중간에 구조나 관계로 만들어보는 연습을 해보는 게 도움이 된다. 구조(構造)가 분명하지 않다고 쓰기를 미룰수록 글쓰기는 구조(救助) 대상이 되어 영원히 쓰지 못할 수도 있다. 


알아서 쓰는 게 아니라 쓰면서 알게 되는 것이다     


선공후기(先工後期)가 아니라 선기후공(先期後工)이다. 아무리 공부를 많이 하고 책을 많이 읽어도 내 생각을 글로 쓰지 않으면 내 것이 되지 못한다. 비록 불완전한 앎이라고 할지라도 써봐야 어디가 부실한 지를 깨달을 수 있다. 책을 쓰려면 해당 분야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아야 쓸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맞는 말이다. 모르고는 쓸 수 없다. 알아야 쓸 수 있지만 얼마나 알아야 쓸 수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한 가지 현명한 답은 어느 정도(?) 해당 분야에 대한 감이 잡히면 쓰기 시작하는 것이다. 쓰면 모르는 개 뭔지 알게 된다. 모르는 게 뭔지 알면 어떤 분야를 공부해야 할지 더 정확하게 알 수 있다. 무지를 깨닫는 순간, 무지를 극복하기 위한 공부가 시작된다. 그 공부는 바로 글쓰기로 연결된다. 한 마디로 알아야 쓰는 게 아니라 쓰면서 알게 된다. 알던 것도 쓰기 시작하면 더 정확하게 정리된다. 복잡했던 생각도 단순해지고 명했던 논리도 명쾌해진다. 한근태 교수님에 따르면 글을 쓰면 인생이 다듬어지고 글을 쓰면 남들과 차별화되는 최고의 공부가 된다고 한다. 책을 쓰고 나면 해당 분야의 전문가가 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엄청난 공부가 된다. 저자는 아예 책 쓰기는 전문가가 되는 비결이고 해당 분야를 체계적으로 공부하는 강력한 전략이라고 말한다. 공부하는 가장 소중한 방법이 바로 책 쓰기라는 것이다. 몰라서 책을 못 쓰는 게 아니라 안 써서 모르는 것이다. 알아서 쓰는 게 아니라 쓰다 보면 알게 된다. 실제로 책 한 권을 탈고하고 나면 알았던 것도 더 정확하게 알게 되고 몰랐던 것도 새롭게 깨닫게 된다.   



공감한 것만을 쓰는 게 아니라 쓰다 보면 다른 것도 공감하게 된다     


글감은 주로 작가가 공감한 것을 쓰는 경우가 많다. 공감할 수 없는 것은 내가 경험해보지 못한 것이기 때문에 내 신념을 담아낼 수 없다. “자신이 경험한 상처에만 과몰입하는 형태를 공감”(183쪽)이라고 하거나 동병상련은 동병에만 상련하는 아닙니다(184쪽)라는 《나를 견디는 시간》을 쓴 이윤주 작가의 주장에 귀를 기울이면 우리가 공감에 대해 잘 못 생각하고 있는 부분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이어서 그녀는 공감에 대한 새로운 통찰을 제시한다. “‘어머 저건 딱 내 얘기야!’라는 인지하는 데는 어떤 품도 들지 않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어떤 품도 들지 않는 일은 자신을 조금도 ‘낫게’ 하지 않습니다”(184쪽). 내가 공감하는 이야기만 쓰거나 내가 공감할 수 있는 책만 읽으면 우리는 이전보다 나아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와 다른 분야를 경험하거나 나와 다른 아픔을 경험하는 사람들의 세계로 파고들어가기 위해 나는 그런 사람의 세계로 뛰어들거나 가까운 곳에서나마 관찰하며 상상하는 작업을 의도적으로 반복해야 한다. 그것이 글쓰기를 통해 공감력을 기르는 소중한 과정이다. “다른 사람의 경험을 이해하려면, 어떤 세계 안에 들어 있는 사람의 입장에서 바라본 그 세계의 모습을 해체하여 자기 시각으로 재조립해볼 필요가 있다. 예를 들면 다른 사람이 행한 일정한 선택을 이해하려면, 그가 부닥쳤거나 거절당했던 다른 선택들의 결핍 상태를 상상 속에서 직시해보아야 한다. 잘 먹는 사람들은 못 먹는 사람들의 선택을 이해할 수 없다. 서툴게나마 남의 경험을 파악할 수 있으려면 그 세계를 분해해서 재조립해봐야만 하는 것이다”(97쪽). 《제7의 인간》에 나오는 말이다. 내가 경험한 안목과 시야로 타자의 경험을 재단하지 말고 그 사람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 그가 경험했을법한 결핍 상태를 상상 속에서 재현하려는 노력을 글로 쓰는 과정이 공감력을 높이는 또 다른 노력이다.   

쓰지 않으면 영원히 못 쓰고 쓰면 쓸 수 있다     


글을 쓰지 못하는 이유는 글을 쓰지 않기 때문이다. 글을 쓰지 않는 이유는 저마다 그 이유가 제각각이다. 글을 왜 쓰는지 그 이유나 필요성을 알 수 없다는 사람도 있다. 글을 쓸 자격이 없어서 못쓰겠다는 사람도 있다. 또 어떤 사람은 누가 자신의 글을 볼까 봐 창피해서 못 쓰겠다고 한다. 글을 처음 쓰는 사람이 느끼는 글쓰기의 두려움이나 글쓰기를 시작하지 못하게 막는 가장 큰 장애물 중의 하나는 처음부터 잘 쓰려는 완벽주의가 아닐까. 엘렌코트라는 시인이 ‘초보자에게 주는 조언’이라는 시는 “시작하라. 다시 또다시 시작하라”로 시작해서 “완벽주의자가 되지 말고 경험주의자가 되어라”는 구절로 종반부로 달려간다. 마찬가지로 글도 일단 완벽하게 준비는 되어 있지 않지만 시작하면 된다. 생각나는 아무 주제를 잡아서 그 주제에 대한 나의 생각이나 연상되는 다른 생각을 곁들여 첫 문장을 시작하면 글쓰기는 어렵지만 쉽게 시작할 수는 있다. 글은 많이 써본 경험에서 글 쓰는 노하우가 나온다. 써보지 않고 글쓰기 책을 보거나 글쓰기 강좌를 듣기만 하면 글쓰기는 영원히 어려운 주제가 아닐 수 없다. 우선 내 생각을 내 방식대로 겉으로 표현하면서 연습 삼아 반복해서 글을 쓰다 보면 쓰임이 달라지고 있음을 느낄 것이다. 미성숙된 생각을 언어로 번역하는 과정은 아직은 미숙하다. 적확한 개념과 문장력이 없어서 생각만큼 잘 안 써진다. 힘들여서 글을 썼지만 누가 보면 정말 내 생각의 미천함을 들킬 거 같아서 두렵기도 하다. 처음에는 쓰고 나서 다시 생각하며 더 나은 표현으로 다듬어가면서 고친다. 어느 정도 쓰는 양이 늘기 시작하면 쓰고 나서 고치는 것보다 쓰면서 고치면 더 잘 써진다. 무조건 쓰면 쓰임이 달라지고 쓰지 않으면 쓰러진다. 저자는 한 마디로 일갈한다. “쓰면 남는다”(242쪽). 저자는 그래서 손자를 위해 육아일기도 쓴다. 나중에 손자에게 물려줄 가장 큰 유산을 물려주기 위해 부모다 아닌 할아버지가 육아일기를 쓴다고 한다.  



살아온 삶으로 글을 쓰지만 쓴 대로 삶을 살아가며 또 쓴다     


글감이 있어야 글을 쓰기 시작할 수 있다. 글감은 내가 살아가는 삶이다. 삶에는 내가 만난 사람이 담겨 있고 내가 읽은 책이 들어 있으며 내가 경험한 사건과 사고가 스며들어 있다. 글감은 내가 겪은 경험, 만난 사람, 읽은 책이다. 이걸 내가 쓴 책 제목으로 표현하면 체인지(體仁智)다. 글감은 지금까지 내가 마주친 색다른 경험과 내가 만나서 자극이나 영감을 받는 사람, 그리고 내가 읽으면서 깨달음과 교훈을 얻은 책에서 나온다. 이런 글감이 풍부한 사람은 자기 생각을 추가해서 글을 남보다 쉽게 쓸 수 있다. 글쓰기는 주지하는 바와 같이 철저하게 발상이 아니라 연상이기 때문이다. 글쓰기는 새로운 것을 생각해내는 발상이 아니라 이미 알고 있거나 경험한 추억의 파편을 일정한 논리체계로 엮어내는 연상이다. 이렇게 삶을 통해서 깨달은 바를 연상을 통해 글을 쓰면 글 쓴 대로 살아간다. 이제는 삶이 글을 만들지 않고 글 쓴 대로 삶을 살아간다. “글은 삶에 앞선다...글은 삶을 모방하여 서술하지 않는다. 거꾸로 글이 삶을 만든다. 계약에 의해 행위가 만들어지듯 글이 삶을 구성한다. 글은 삶에 앞서 이루어진 운명의 계약이다. 삶이 글로 모방되는 것이 아니라 글이 삶으로 상연된다”(263쪽). 강민혁의 《자기 배려의 인문학》에 나오는 말이다. 쓴 대로 살아가지 않으면 글과 삶과 앎은 어긋나기 시작하고 결국 글은 자기 위장의 도구로 전락하고 만다. 글감을 갖고 글을 썼지만 이제 쓴 글대로 실천하면서 살다 보면 그 삶이 다시 글감으로 선순환된다. 작가는 살아가는 대로 글을 쓰고 쓴 대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다. “글은 그 사람이다. 글을 보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다”(149쪽). 작가에 글과 삶은 하나다. 그래서 내가 쓴 글이 나다.   


니체의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II》에 보면 여행자를 다섯 등급으로 나누는 글이 나온다. “가장 낮은 등급의 여행자는 여행하면서 오히려 관찰당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여행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이며 동시에 눈먼 자들이다. 다음 등급의 여행자는 실제로 스스로 세상을 관찰하는 사람들이다; 세 번째 등급의 여행자는 관찰한 결과에서 그 무엇을 체험하는 사람들이다; 그다음 등급의 여행자는 체험한 것을 자신 속에 가지고 살며 그것을 지속적으로 지니고 있다; 끝으로 최고의 능력을 가진 몇몇 사람도 있다. 그들은 자신이 관찰한 모든 것을 체험하고 동화하고 난 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곧 그것을 여러 가지 행위와 작업 속에서 기필코 다시 되살려나가야만 하는 사람들이다”(150쪽).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가장 낮은 등급의 글 쓰는 사람은 글을 쓰면서 오히려 다른 사람들에게 관찰당하는 사람이다. 주인으로서 자기 삶을 쓰지 않고 방관자 입장에서 남의 이야기를 옮겨 적는다. 두 번째 등급의 글 쓰는 사람은 이제 자기가 주인이 되어 자신의 삶을 관찰하는 사람이다. 남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다 이제 비로소 자기 삶을 스토리로 만들어보려는 사람이다. 세 번째 등급의 글 쓰는 사람은 자신이 세상을 관찰하는 사람에 머무르지 않고 직접 본인이 체험한 것을 자신의 이야기로 써보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다. 네 번째 등급의 글 쓰는 사람은 자신의 체험을 자신의 언어로 쓰면서 그것을 자신의 삶으로 체화시키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다. 마지막 다섯 번째 등급의 글 쓰는 사람은 관찰한 것을 모두 체험하면서 자기 것으로 정리하고 그대로 내 삶을 만들어가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다. 마지막에 와서야 비로소 삶을 무대로 글을 쓰고 쓴 대로 자기 삶을 다시 살아내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된다. 비로소 글과 삶과 앎은 삼위일체로 맞물려 돌아가는 작가가 된다.   


저자는 오늘도 내일도 “1년 365일 하루도 빠짐없이 새벽을 글을 쓴다”(214쪽). 글 쓰는 것에 한없이 순수한 기쁨을 느끼고 지금도 젊었을 때처럼 굶주린 마음으로 고집스럽게 매일 책을 읽고 책을 쓴다. 하루키처럼 장편소설을 쓰기 위해 매일 운동을 밥먹듯이 하는 것처럼 저자 역시 《몸이 먼저다》라는 책도 내면서 운동을 지속적으로 한다. 글쓰기나 책 쓰기는 모두 건강한 몸이 따라주지 않으면 끝까지 버티면서 할 수 없는 육체노동이다. 몸이 받쳐주지 않으면  세상에서 나를 가장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읽기와 쓰기를 할 수 없다. 자기 생각을 녹여내는 육체노동이 따라주지 않으면 쓰고 싶은 생각도 관념의 파편으로 전락한다. 저자에 따르면 “글쓰기는 창조적 배설이다. 남에게 쏟아내면 기피인물이 되지만 글에다 털어놓으면 저자가 될 확률이 높다”(106쪽). 글에 자기 생각을 털어놓고 그것을 다시 엮어서 한 권의 책으로 독자들이 머무를 집을 짓는다. 책 쓰기는 일종의 집 짓기다. 내가 어떤 책으로 이루어진 집 속에서 살아가는지에 따라 내 인생이 전혀 다르게 바뀐다. 그래서 오늘도 책으로 집을 짓기 위해 “쓰면 생존할 수 있고, 쓰지 않으면 잊힐 것이다”(84쪽)는 좌우명을 믿고 새벽에 글을 쓴다. 글을 쓰는 순간 “난 글쓰기 전의 내가 아니다”(71쪽). 그래서 저자는 단호하게 말한다. “내 인생은 글쓰기 전과 글 쓴 후로 나눌 수 있다”(70-71쪽)고. 나도 저자를 본받아 이 책을 읽고 영감이 사라지기 전에 이 글을 쓴다. 쓰고 났더니 쓰기 전의 내가 아니다. 또 다른 나로 변신을 거듭하고 있다. 이 책을 읽고 나면 글을 쓰기 시작하고 내 분야의 전문가가 되기 위해 책을 쓰지 않으면 안 되는 강한 유혹의 미늘에 걸려버린다. 이제 남은 것을 한 가지밖에 없다. 내 삶을 책으로 엮어내는 것이다.



"쓰면 생존할 수 있고, 쓰지 않으면 잊힐 것이다"(8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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