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에 볕이 잘 듭니다 - 도시에서 사일 시골에서 삼일
한순 지음, 김덕용 그림 / 나무생각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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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자연이 합주하는 사계절의 미()완성 교향곡을 듣다

지식생태학자의 생태학적 상상력으로 이곳에 볕이 잘 듭니다를 읽어보다

 

나무생각 한순 대표님과의 인연은 2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어느 날 홍대 근처에서 고두현 시인과 마시던 어둑어둑한 술집에서의 조우였을 것이다. 아마 그 집이 바로 임지훈 가수가 운영하는 카페였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이 책을 읽으면서 흐릿한 기억으로 떠올랐다. 그 카페에서 우연히 마주쳤지만 어둠이 서로의 수줍은 얼굴을 가려준 듯 정확한 기억은 나지 않는다. 사사(私私)로움을 넘어 세월을 품은 화목함의 얼굴빛이 희미하게 어둠 속에서나마 잠시 기억의 잔영으로 남아 있을 뿐이었다.

 

그러던 와중에 2016공부는 망치다, 2017나무는 나무라지 않는다, 2019이런 사람 만나지 마세요, 2020책 쓰기는 애쓰기다로 이어지는 저자와 출판사 대표님과의 만남의 인연은 이어지고 있다. 다양한 출판사와 여러 가지 책을 쓰거나 번역하고 있지만 출판사마다 책에 대한 고유한 철학과 사랑이 담겨 있다. 나무생각은 나무에게 미안하지 않은 책을 만들어야지”(42)라는 생각과 함께 오늘의 나무생각을 만드신 한순 대표님과의 인연은 각별했고 특별했다. 나무는 나무라지 않는다책을 나무생각에서 내는 만남도 제 인생에서는 각성 사건이었다. 인간은 나무만도 못하다는 통렬한 깨달음을 얻으면서 지식생태학자로서의 생태학적 상상력을 인문학적 감수성과 연결하는 소중한 배움을 책을 쓰면서 얻기도 했다. 한순 대표님은 존중과 배려, 성숙과 숙성의 시간을 통해 저자의 입장을 반영하면서도 특유의 고요한 사색의 깊이로 책의 색깔을 인문학적 사유의 숲으로 물들여주셨다. 책을 낼 때마다 세상을 향하는 온기와 사람에 대한 짙은 그리움을 남겨주셨다.

 

평범한 일상을 비범한 상상력의 텃밭으로 가꾸다

 

이곳에 볕이 잘 듭니다는 평범한 일상을 바라보지만 세상을 대하는 평범하지 않은 시인의 따뜻한 시선이 곳곳에서 고개를 들며 사람 사는 사이를 살갑게 만들어준다. 각양각색의 차이가 숨죽이고 있지만 그 차이 속에서도 좋은 사이를 만들어내는 시인의 상상력을 배울 수 있는 단편 모음집이지만 다 읽고 나면 자연과 사람 관계를 연결하는 한 편의 파노라마 같은 서정시 같기도 하다. “책과 음악을 이야기로 엮어 살짝 신화로 들어 올리는 꽃”(19)을 진달래로 바라보는 시인의 시선은 허무와 그리움 사이에 핀 진달래는 과거와 미래 사이에 찍힌 흔들리는 꽃도장”(19)으로 정의하면서 익숙한 일상에서 언제나 비상한 상상력으로 자연과 사람과 세상을 씨줄과 날줄로 엮어낸다. 고단한 일상에서도 남을 먼저 배려하는 시인의 마음은 문장 곳곳에 조용히 숨죽이고 있지만 언제나 따뜻한 울림으로 메아리친다. “차가운 시멘트 벽 못에 걸려 있는 인부의 겉옷이 겨울바람에 흔들리는 것을 보고는 아무 말 없이 돌아서 나오기도 했다. 이유를 알 수 없지만, 텅 빈 공사현장에 드나드는 바람 소리가 현장 소장의 한숨 소리처럼 들리기도 했다”(29). 세상이 다 내 맘 같지 않고 생각만큼 계획했던 일이 풀리지 않을 때 나보다는 다른 사람이나 환경을 탓하기 일쑤다. 그럴 때마다 시인은 흔히 접하는 평범하고 사소한 일에서도 깊은 사유를 불러일으키는 화두를 평범하지만 색다른 문제의식으로 우리들에게 말을 건다.

 

수많은 공정 안에서 사람들의 열정, 밥벌이의 현실, 이루고자 하는 꿈이 합쳐져야 한 채의 집이 완성되는 것을 지켜보았기 때문”(32)이라고 스스로에게 위로의 메시지를 던져준다. 우리는 언제부터 과정을 생각하지 않고 결과만 바라본다. 밥을 매일 먹고 있지만 누가 어떤 노력을 통해서 내가 배불리 먹을 수 있는 밥을 만드는 노동에 관여했는지 모르고 산다. 한 번 생각해보라. 농부라 이른 봄부터 볍씨를 뿌려 모종을 만들고 모내기를 하면서 천둥과 번개 맞은 벼를 보살펴가며 폭염을 견뎌내야 가을날의 따스한 햇살을 맞으며 벼가 익어간다는 사실을. 고개 숙인 벼이삭을 바라보는 농부의 마음도 마지막 벼 베기를 하고 탈곡해서 벼를 수확하기까지는 편안하지 않다. 언제 불어닥칠 가을날의 느닷없는 태풍 소식에 농부의 마음은 좌불안석이며 속은 언제나 새까맣게 타고 들어간다. 쌀 한 톨()이 생산되기 위해서 88번의 농부의 수고와 정성이 들어가야 얻을 수 있다는 깨달음을 얻는다. ()’자를 분석해보면 여덟 ’() 두 개가 합쳐져서 이루어진 글자(+ = )라고 한다. 즉 한 톨의 쌀이 생산되기까지는 88가지의 농부의 정성스러운 노력과 수고스러운 땀이 투여될 때 비로소 가능하다는 의미다. 밥먹다 배부르면 남은 밥을 아무렇게 버리는 우리들에게 쌀 한 톨이 나의 입으로 다가오기까지의 과정을 생각하면 쌀밥에 담긴 사계절 자연의 기운과 농부의 지극정성에 저절로 숙연해진다.

 

얼굴은 그 사람이 얼이 굴로 파여서 생긴 흔적이다

 

이곳에 볕이 잘 듭니다는 다른 곳에는 볕이 잘 들지 않는다는 암시다. 살다보면 늘 인생의 고비만 있는 건 아니다. 고비를 넘어서면 또 다른 고비가 기다리고 있겠지만 고비를 넘어선 후 잠깐이지만 즐길 수 있는 여유가 있다. 힘든 삶이 일상을 무겁게 만들지만 그 속에서도 소소한 즐거움이 행복한 삶을 꿈꾸게 만든다. 아버지 사업 실패 후 볕이 잘 들지 않는 곳에서 옹기종기 모여 앉아 힘겨운 삶을 함께 견디며 살아가는 가족만큼 따뜻한 지원군은 없다. 햇볕은 언제나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따사로운 햇살을 나눠주지만 좋지 못한 환경과 여건 때문에 그걸 받을 수 없는 아픔이 눈물로 화답할 때가 많다. 고달픈 삶을 살다가도 한 순간의 어떤 사연 품은 평범한 일로 인해 한 잔의 와인이 몸 안으로 퍼지면서 심신을 누그러뜨리듯이 그 간의 노고와 노곤함이 나도 모르게 눈 녹듯이 사라진다. 건빵을 품에 안고 낯선 서울의 어느 단칸방으로 달려오던 군인, 작은 오빠, 그 장면을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이 핑 돈다. 아버지, 엄마, 오빠, 언니가 준 사랑으로 나는 나의 삶의 어렵고 각박한 시절을 잘 넘을 수 있었다. 작아도 나누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배웠다. 내 인생에서 가장 촉촉한 건빵이다”(123). 비상훈련 때나 주는 건빵을 먹지 않고 휴가 나올 때 가져온 오빠의 애틋한 사연을 듣노라면 가족에 대한 사랑의 깊이를 가늠할 수가 없다. 나의 얼굴에는 가족의 얼굴이 나도 모르게 새겨진다. ‘얼굴은 그 사람이 자라면서 깨닫는 로 파여서 생긴 흔적이기 때문이다. 가족간에 주고받는 사랑이 고스란히 얼로 아로새겨지면서 한 사람의 인상을 넘어 인성을 만든다. 얼굴이라는 부분 속에 가족을 넘어 내가 맺는 인간관계의 전체가 고스란히 담긴다. 부분을 보면 전체를 알 수 있는 혼돈이론의 후랙탈(fractal) 원리를 생각해보는 이유다.

 

일제 강점기와 육이오 전쟁 속에서도 아이 다섯을 낳아 기르신 엄마를 한 인간으로 이해하는 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55). 파란만장이라는 단어에 담을 수 없는 굴곡진 삶을 온몸으로 살아내신 엄마의 인생을 따라가고 싶지 않은 마음은 대부분의 여성들이 공감하는 사실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오남매 끼니와 학비를 해결하기 위해 부딪혀야 했던 괴로움 앞에서도, 심심산골 세상과 사람에 대한 원망을 삭이고 있는 남편 앞에서도 엄마는 먼 산 침묵처럼 서 있었다”(90). 홀로 세상의 시름을 다 끌어안고 빈농에서 하루하루를 버티며 버거운 살림살이를 하시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세상을 떠나신 나의 어머니가 담고 있는 인자한 미소가 오버랩되는 장면이다. “몸에 경련이 일어나도 식구들을 위해 밥을 하고 오빠들 와이셔츠를 각을 세워 다렸다”(139). 힘든 삶을 살아내면서도 힘든 기색조차 보이지 않는 엄마의 삶이 눈에 계속 밟힘에도 불구하고 엄마에게 반항하는 일상을 일탈했다. 남자들도 힘에 버거워하는 록 클라이밍(Rock Climbing)을 즐기기 위해 고심 끝에 등산화를 산적이 있다. 하지만 막상 등산을 가려고 등산화를 찾았지만 그 어디에도 없었다. 수소문 끝에 화장실 한 쪽 끝에 커다란 고무통 위에 있는 등산화를 발견했다. “어머니의 직감이 나의 클라이밍을 말리고 있었다. 나는 고무통 앞에 한참을 가만히 서 있었다. 그리고 어머니에게 지기로 마음먹었다. 어머니는 위험을 무릅쓰고 심연의 세계로 뛰어들려는 나의 갈등을 몸으로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140-141). 결국 자식으로 향하는 엄마의 잴 수 없는 사랑의 깊이에 두손들고 무릅을 꿇은 적이 있다. 가족과의 마음 깊은 사연 속에 시인의 사람을 향하는 따뜻한 사유와 세상을 들여다보는 시심이 잉태되었을 것이다.

 

가슴에 안티푸라민을 발라주는 진정한 의사, 우리들의 영웅이 그곳에 계시니까”(95)로 대변되는 외삼촌에 대한 추억을 읽으면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눈가에 맺히기도 했다. “한 해가 며칠 남지 않았다. 외삼촌과 함께한 이 시간이 어떤 경전을 읽은 시간보다 진실하고 담백하고 쓸쓸했다”(101). “옛날은 가는 게 아니고 이렇게 자꾸 오는 것이었다.” - 이문재 시인의 소금창고라는 시의 한 구절이다. 과거의 기억이 풍부할수록 그것을 기반으로 발휘되는 상상력도 풍부해지는 법이다. 과거가 부실하면 상상력도 부실해진다. 상상력은 전혀 새로운 무엇인가를 상상하는 힘이라기보다 내 몸을 통과한 직간접적 조각 흔적들이 연결되어 현실에 구현되는 모습이다. 시인은 수시로 힘든 시절을 함께 겪어오면서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었던 가족에 대한 애틋한 추억을 지금 여기로 불러온다. 그때마다 과거는 흘러간 사건이나 사고가 아니라 지금 여기서의 힘든 삶을 극복하게 만들어주는 치유적 상상력의 원천으로 작용한다. 지리산 산방에 떠나 홀로 자연과 벗 삼아 자연스럽게 살아가시는 아버지의 심정에는 할 말은 많지만 안으로 삭이며 살아가시는 모습에서 서산에 해 넘어갈 때 드리우는 쓸쓸한 그림자가 연상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삼시사도(삼일은 시골에서 사일은 도시에서) 또는 도사시삼(도시에서 사일, 시골에서 삼일)을 지내기 위해 우여곡절과 절치부심 끝에 시골에 집을 지은 시인님은 가장 먼저 아버지를 생각한다. “아버지가 살아계신다면, 겉으로 마른 듯 보이나 속에 물을 잔뜩 빨아올린 봄 나무 같은 우리 아버지를 등에 업고 제일 먼저 이 집에 모시고 들어가고 싶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그저 엷은 미소로 아버지의 삶을 끄덕여주고 싶다. 비오는 창밖을 한 번 바라보고, 아버지의 얼굴을 바라보면서”(216-217). 창밖에서 환하게 미소 짓고 금방이라도 집안으로 들어오실 것 같은 아버지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깨달음은 평범한 일상 속에서도 다름이 존재함을 알아채는 일이다

 

베로니크 비엔느의 아무것도 하지 않을 자유에 나오는 깨달음이란 내가 평범한 사람이라는 사실이 편안하게 느껴지는 상태를 다르게 표현한 것이다라는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깨달음은 대단한 노력 끝에 다가오는 대오각성(大悟覺醒)이 아니다. 오히려 깨달음은 평범한 일상 속에서도 시선이나 관점이 바뀌어 늘 반복되는 익숙함에서도 나를 살아있게 만드는 작은 깨우침이다. 그런 깨우침이 나와 내가 만들어가는 삶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되돌아보게 만든다.

 

연꽃 피시었다

저 뿌리께 복잡한 사정을 모르는 바 아니나

꽃 피는 소리 고요하다

꽃 보는 마음도 고요하면 좋으련만

피고 지는 일,

뿌리 내리고 걸러내는 일,

외롭고 고단했을 일 생각하다

한순간 연꽃과 얼굴이 마주쳤다

연꽃이 시침 뗴고 말갛게 웃는다

나도 모르는 척 같이 웃었다

 

피고 지며 뿌리 내리고 걸러내는 일의 연꽃의 일이라면 그것이 얼마나 고단한 일인지를 연꽃이 되어 생각해보는 일은 사람의 일이다. 연꽃이 사람이 되고 사람이 연꽃이 되어 보는 가운데 역지사지(易地思之)나 물아일체(物我一體)가 생각만큼 쉽지 않음을 깨닫는 일도 쉽지 않다. ‘깨달음은 평범한 일상 속에서도 다름이 존재함을 알아채는 일이다. 그것을 깨닫는 순간 마음이 얼마나 편안해질지 짐작이 간다. 시인이 나누는 자연과의 교감은 지칠 대로 지친 우리들에게 따뜻한 위안을 주고 색다른 깨우침을 준다. 일상에서도 비상한 상상력을 예고 없이 발휘한다. 연꽃과 나누는 평범한 대화 속에서도 씩 웃게 만든다. “그들과 나는 서로 낯선 존재, 그들은 그들의 길이 있고 나는 나의 길이 있으니, 서로 부딪치지 않고 이 시골에서 사는 법을 터득해야 했다. 이곳은 내가 집을 짓기 잔까지 그들이 살던 곳이었다. 새끼 고라니를 데리고 먹을 것을 찾으러 지천으로 뛰어다니던 곳”(71). 혹시나 시인의 작은 간섭과 관여가 자연 속에서 살아가던 생명체에게 공격적으로 다가가지나 않을까 노심초사한다. 그들이 길을 가로막고 나도 모르게 서 있을 때 원래 이곳에서 살아가던 다른 생명체는 갑자기 낯선 곳에서 찾아온 방해꾼이 자신들의 삶의 터전을 위협하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내가 잠든 시간에도 굴참나무 도토리는 종자를 떨어뜨리고, 내가 번민에 싸인 시간에도 바람은 나무를 흔들어 깨운다”(72). 나의 의지와 힘이 하늘을 찔러도 그것으로 내가 바꿀 수 있는 자연의 순환적 흐름은 없다. 자연 속에서 원래 자연스럽게 살아가는 생명체의 저마다의 삶의 방식과 이유와 원리를 배워야 한다.

 

자연의 사물들은 방어할 틈을 주지 않고 경계를 획 넘어 내 안으로 쳐들어온다. 인간인 내가 도토리에게 받은 질문은, 바쁜 일상에 쫓겨 허둥대다가 길을 잃은 한 인간의 모습을 바라보게 하기에 충분했다”(127-128). 오로지 인간만 질문할 수 있다는 오만한 생각 앞에 무참히 무너지는 시인은 자연의 모든 생명체가 저마다의 방식으로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에 한 번도 귀 기울여 본적이 없음을 자주 깨닫는다. 잠시라도 쉴 여유와 빈틈없이 살아가는 인간들의 불쌍한 군상에 아랑곳 하지 않고 매순간을 처절할 정도로 치열하게 살아가는 생명현상 앞에 시인은 자주 멈춰 서서 질문을 넘어 탐문하며 자문한다. “도토리는 깊은 산 큰스님이나 건넬법한 질문을 나에게 던졌다. 그것도 머리에 모자를 삐뚜름하게 쓴 불량한 자세로”(132). 자연과 생태계를 일정한 상태로 유지하며 부단히 변화하는 생명체의 연쇄고리를 우리는 평상시에 감지하지 못한다. 가던 길을 멈추고 문득 관심을 기울여 주변을 관찰해보려는 마음속에 질문하려는 호기심도 자란다. 시인의 질문을 받은 자연의 무수한 생명체도 거꾸로 사람에게 반문한다. 나무를 배신하고 떨어진 도토리가 다시 자신을 낳아준 나무가 되기 위해 땅에서 절치부심하는 마음을 아느냐고. 도토리 역시 다람쥐에게 잡혀 먹을 위기에 늘 노심초사하면서 자신을 어느 곳에 묻어두었는지 제발 모르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간절한 마음을 과연 인간은 알 수 있을지 의문이라고.

자연의 생명체에게 적당히는 더 이상 타당하지 않다

 

모든 것이 영원하리라는 거짓말을 전제로 보면, 모든 생태계는 배신의 체계 속에 있다. 순환의 연속은 항상 변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사람은 이상을 가지고 변하지 않는 어떤 것을 늘 바라고 꿈꾸지만, 그렇기에 또 상처를 받는다”(131). 새순의 꿈을 이루었다고 신록으로 옮겨가는 배신, 녹음이 자신의 본분을 다했다고 단풍으로 보여주는 배신, 단풍도 이만하면 아름다움을 불태웠다고 나뭇가지에서 떨어져나가는 배신의 선순환이 곧 변함없이 변하는 생태계의 변신이다. 변하지 않는다는 믿음을 버리고 때가 되면 자신을 버리고 떠나는 배신을 믿을 때 생태계는 변함없이 변함을 거듭한다는 깨달음을 얻어야 한다. “숭고한 이상을 가진 인간은 아프다. 영원히 사랑하고 싶고, 순백의 성혈로 사랑하고 싶은 소망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살아 있기에 아플 수밖에 없다”(132). 고통 없는 인생은 죽은 인생이다. 고목을 흔들리지 않지만 거목이 흔들리는 이유는 살아 있기 때문이다. 살아있음은 아픔을 전제로 펼쳐지는 생명체의 몸부림이다. 가만히 그 자리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모든 생명체는 살아있음이 곧 전쟁이다. 한 순간도 가만히 있지 않는다. “잔디 속에 뿌리를 내리는 바랭이는 줄기마다 10센티미터 간격으로 또다시 뿌리를 내리는 치밀함이 있는가 하면, 넝쿨식물들은 나무의 발목을 지나, 허리를 지나, 목까지 감고 올라가, 누가 나무이고 누가 넝쿨인지 모르게 뒤엉킨 채 자신의 생명력을 발산했다. 그들에게는 애초에 적당히라는 개념은 없는 것 같았다. 생명 속의 어떤 에너지가 다할 때까지 뻗고 또 뻗어갈 뿐이었다”(144-145). 적당함이 타당함으로 인정되는 인간세계의 중용은 자연의 세계에서는 미덕이라기보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위험한 자세다. 더구나 움직이지 못하고 있는 그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식물에게 적당히는 곧 죽음의 전조등이다. 자리를 탓할 수 없는 식물들에게 매 순간은 늘 최선을 다하며 치열하게 살아가는 찰나의 연속일 뿐이다.

 

저 생명이 자비한 것인지, 무자비한 것인지 나는 모르겠다. 30년 가까이 책을 만들며 확립했던 개념들이 스스로 그러한 자연 앞에서 무너지고 있다. 단어의 정의로만 볼 때는 자비와 무자비는 서로 반대 개념으로 다른 쪽에 서 있어 야 하나, 요즘 나에게는 그들이 연결되어 있는 하나의 고리로 보인다. 고리에 고리를 연결하면 나도 그곳에 연결될 것이고, 인간도 자연의 극히 작은 일부라는 사실이 자명해질 것이다”(74). 자비로운 사람은 전혀 무자비하지 않고 무자비한 사람은 자비롭지 못하다는 말도 관념적이다. 자비로운 사람도 참으로 무자비하고 무자비한 사람 역시 얼마든지 자비로운 마음을 품을 수 있다. 사람의 하루 일과를 생각해보라. 한 사람이 먹는 세 끼의 식사에 얼마나 많은 무자비한 살해행위가 들어있는지를. 밥을 먹기 위해서는 벼를 죽여야 했고 나무를 먹기 위해서는 숱한 나물의 생명을 끊는 무자비한 폭력을 가한다. 육식을 생각하면 인간은 자비로움을 추구하면서도 너무도 무자비하다. “우리는 순수함과 폭력 중에서 어느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종류의 폭력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해야만 한다. 육체를 부여 받은 존재인 우리에게 폭력은 숙명이다메를로 퐁티의 휴머니즘과 권력에 나오는 말이 의미심장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모르고 지내왔던 인간의 잔인한 폭력과 무자비한 살해 행위를 근본적으로 멈추는 방법은 없다. 나라는 존재 자체가 얼마나 폭력적인지를 진지하게 생각해보면서 자발적 죄책감과 자기반성을 통해 무자비한 삶을 자비롭게 바꿔보려는 안간힘을 죽을 때까지 쓸 수밖에 없다.

 

인간 역시 저마의 위치에서 생명찬가를 부르는 또 다른 조연일 뿐이다

 

내가 자연을 지배하는 주인이 아니라 더불어 살아가는 생태계의 한 구성원일 뿐이라는 각성도 더욱 필요한 시점이다. 다른 생명체에 비해 인간이 지니는 우월성을 인정할 아무런 논리적 근거도 없다. 인간이야말로 자연과 다른 생명체에 철저히 의존적이다. 자기 힘으로 살아갈 수 없는 가장 나약한 존재가 바로 인간이다. 사람은 하루라도 다른 생명체의 노력에 의존하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다. “도대체 벗어날 길 없는 내 시야, 내 몸, 내 각도에서 볼 뿐. 내가 주인공은 아니다. 우리는 각자 주인공이면서 스스로 그러한 모두에게 조연으로 살아가고 있다. 누군가는 굴참나무로, 누군가는 고라니로, 누군가는 굴참나무 잎의 보호를 받고 피어난 남보랏빛 각시붓꽃으로 스스로 그러한 자연 앞에서 나는 자비와 무자비가 비빔밥이 된 여름을 맞게 될 것이다”(74). 자연 생태계는 먹이 사슬의 위계적 관계는 존재하지만 그렇다고 절대 강자가 언제나 주연을 맡지 않는 세계다. 모든 생명체가 저마다의 위치에서 자기 방식으로 살아가는 주연 배우다. 다양한 생명체의 고유한 개별성은 다른 생명체의 개별성으로 대체될 수 없기 때문이다. 도토리는 자기방식으로 자기 삶의 완성을 위해 치열하게 살아가고, 다람쥐 역시 자기만의 방식으로 생태계의 한 무대 위에서 자신의 고유함을 연기할 뿐이다. 모두가 주연으로 연기하는 생태계는 다른 생명체에게는 조연일 뿐이다. 자기만 주연이고 나머지는 조연이 아니라 모두가 조연으로 자기 맡은 분야에서 자신의 고유함을 연기하는 주연 배우다.

 

내가 알고 있던 사전적 정의가 무너지는 것이 한편으로 혼돈스러우면서, 한편으로는 그렇게 통쾌할 수가 없다. 무엇인가 그 동안 나를 누르고 있던 금형 프레스 같은 것이, 가벼이 날리는 아카시아 향기에 실려 사뿐히 사라진 기분이다”(74-75). 관념적으로 알고 있던 교과서적 정의가 자연을 관찰하면서 죽비같은 통찰을 얻을 때 느끼는 깨우침은 그 어떤 각성보다도 통렬한 대오각성이었다. 내가 자연과 우주의 중심이라는 오만한 고정관념이 통렬하게 깨지는 상처가 내 몸에 새겨질수록 나는 덜 폭력적이고 무자비해질 수 있다. 무자비하다는 사실이 무참히 깨질수록 자비로운 인간으로 거듭날 확률은 높아진다. 자연은 언제나 늘 우리들에게 그런 목소리를 우렁차게 들려주는 저마다의 연기를 하고 있지만 오만한 인간이 그걸 듣지 못하고나 들어주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나의 존재를 전경으로 나답게 더욱 드러내주는 수많은 배경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보자. 나의 힘으로 이룬 것은 하나도 없다. 모든 성취는 나를 둘러싸는 수많은 타자와 다른 생명체를 포함해 자연의 선순환을 도와주는 모든 물질적 존재들의 보이지 않는 합작품이다. 소중한 존재는 인간만이 아니라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어주는 다양한 배경에서 묵묵히 자신의 본분을 다하는 숨은 일꾼들이다. 세상이 시끄럽게 돌아갈수록 침묵과 대화를 나누고 내가 어디를 왜 지향하고 있는지를 물어봐야 오만과 자만에서 벗어날 수 있다.

 

절대 고독은 절대로 고독한 상태로 끝나지 않는다

 

나이와 세월이 주는 속도감, 후려 팰수록 빨리 도는 팽이, 그 속도에서 빠져 나왔다”(163-164). 빨리 돌지 않으면 스스로 죽음을 맞이하는 팽이처럼 우리는 목표를 향해 매진하다 목숨까지 위태로운 순간으로 내몰리고 있음을 깨닫지 못한다. 빨리 변해가는 세상의 수레바퀴 안에서 우리는 무엇을 향해 달리는지 조차도 모른 채 어딘가를 향한 광속열차 안에서도 달리고 있는 자신을 더 빨리 달아나지 않으면 목표를 달성할 수 없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린다. 삶의 속도보다 밀도를 중시해야 행복해진다는 깨달음은 멈춰 서서 성찰하지 않으면 깨달을 수 없는 각성이다. 밀도는 삶의 매순간 느끼는 충만감이다. “갈색 커피 가루에 뜨거운 물이 닿는 순간, 아린 것들의 향기를 맡고 그것이 풀어주는 삶의 노곤함을 알 수 있을 때, 비로소 삶은 밀도감 높은 행복감을 만끽하는 것이다. 숨과 쉼은 같은 가족이다. 몰아쉬는 숨은 몸도 그만큼 힘들다는 징조다. 깊은 호흡 내 쉬고 들이마시며 잠깐만이라도 쉬어 가는 여유가 사람을 더욱 살아 숨 쉬게 만든다. 저 사이로 무엇인가 다가오는 것이 느껴진다. 숲속 저 멀리서 다가오는 저 것. 그것은 바로 절대 고독그분이다. 깨달아도, 깨닫지 못하여도 비껴갈 수 없는 그분. 사랑해도 소용없고, 사랑하지 않아도 소용없는 절대자 그분. 나는 그분과 아주 천천히 친해지려 한다. 나는 그분 앞에서 백전백패이므로 가급적 아주 천천히 다가가려 한다”(142). 절대 고독은 속도와 함께 절대 오지 않는다. 절대 고독은 충만한 삶의 밀도에서 어제와 다른 각도로 삶을 진지하게 성찰할 때 생긴다. 타자와의 대화가 아니라 나 자신으로 파고들어가는 대화, 자연 생명체 입장에서 생각해보는 역지사지일 때 찾아오는 절대 고독은 절대로 고독에 그치지 않고 충만한 성찰과 통찰로 연결된다.

 

순간적인 착시로 나는 유리창 밖에 살고 있다고 여겼으나, 나는 유리창 안에 있었다는 사실을 시골집은 알게 해주었다. 포슬포슬한 햇감자는 좋아하나 딱딱한 땅을 뒤집고 씨감자를 심는 일은 힘들어하고, 부모님을 사랑하나 전화하는 것은 쑥스럽고, 남편을 사랑하나 요리는 하지 않고, 수재민을 불쌍히 여기긴 하나 헌 곳을 정리하여 보내는 일은 하지 않는 것과 같았다”(107). 바깥세상의 낭만을 추구하지만 정작 낭만을 얻기까지의 과정에서 겪어야하는 고달픔 삶은 원치 않는다. 유리창 너머의 삶은 유리창 안에서 구현할 수 없다. 유리창 안에서 밖을 지향할수록 밖으로 향하는 삶은 유리(遊離)될 수밖에 없다. 이럴 때일수록 유리창 안에 갇혀 있는 사람에게 질문을 던져야 한다. 질문은 무턱대고 만들어지는 감정을 넘어 그 사람의 속사연을 듣게 한다. 질문은 유리창을 열고 밖으로 나가 실물과 만나게 한다”(110). 유리창 안에서 밖을 내다보는 풍경이 마냥 아름다워 보일 수 있지만 유리창 밖으로 나가 직접 당사자에게 질문을 던져보면 안에서의 사유가 밖으로 나오면 얼마나 취약한 관념의 파편으로 전락하는지 몸서리쳐지는 경험을 한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저마다의 유리창을 통해 나의 바깥과 만난다. 질문을 던져야 내가 가졌던 선입견과 편견의 덫에서 벗어나 유리된 채 만들어지는 타성의 늪에서 벗어날 수 있다. 고독한 상태에서 스스로에게 던지는 자문과 밖으로 향하는 질문이 이전과 다른 세계로 연결되는 관문이 된다. 고독은 질문을 부르고 질문은 이전과 다른 관문을 열어주는 셈이다.

 

생태계를 살려내야 살림살이도 살아난다

 

식물들이 떨어뜨린 씨앗 하나가 생명의 움을 틔우기까지, 두더지는 포슬포슬하게 땅을 일궈놓고, 빗방울은 대지의 목마름을 적셔놓고, 또 낙엽은 이불을 덮어 온기를 지켜준다. 무심한 듯 자신의 일을 하지만, 이런 무심들이 모여 하나의 생명을 빚어낸다”(204). 소로의 월든을 능가하는 자연찬가다. 무심하게 자연을 바라봐야 비로소 포착되는 자연의 자연스러움이 인간의 관심과 의도와 관계없이 늘 그 자리에서 위대한 자연의 교향곡을 들려준다. 자연에서 멀어지는 인간은 곧 세상에서도 멀어지기 전에 처절한 각성과 반성이 필요하다. 통렬한 성찰을 통해 생태계를 살려내지 않으면 생계도 영원히 무너질 수밖에 없다. 인간의 무자비한 자만심으로 파괴되어 가는 생태계를 살려내야 살림살이도 살아난다.

 

사는 일이

바람 몇 줌 햇빛 몇 스푼, 라벤더 향 한 꼬집

8월이 물고기처럼 숲속을 헤엄쳐“(91) 지나가는 일이라고 해도 오늘도 시인은 자연과 사람이 어울려 살아가는 진실한 삶의 의미를 찾는 질문을 잊지 않을 것이다. 평범한 진실이지만 그것을 찾는 여정이 고달프고 허무해도 그 노력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꽃을 보아도 시간은 흐르고, 꽃을 보지 않아도 시간은 흐른다. 봄이면 꽃이 피고, 가을이면 꽃이 진다. 진실만큼 허무한 것이 없고, 허무한 것만큼 진실한 것이 없다”(203). 사실에서 왜곡된 거짓을 걷어낼 때 드러나는 진실을 만나는 순간 너무도 당연하다는 생각이 허무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 허무한 만큼 진실도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단면을 여실히 보여준다. 그리고 언제나 시인은 불가지의 세계라고 할지라도 진리가 살아 숨 쉬는 일상에서 상상력의 텃밭을 가꾸기 위해 기꺼이 자연이 주는 위대한 가르침에 귀를 기울일 것이다. 비록 숱하게 절망하는 한이 있더라도. 과거를 수놓았던 얼룩과 무늬를 현재로 데리고 와 씨줄과 날줄로 엮어보고, 도시와 시골을 오고가며 느끼는 생활의 단상이 상상력을 만나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장편의 서정적인 내러티브를 만들어냈다. 눈앞에 펼쳐지는 콘텍스트에서 시인의 감수성과 상상력으로 엮어낸 텍스트를 편집하면서 오늘도 내일도 진리를 향하고 있다.

 

그곳은 진리가 있는 곳

나는 진리의 방향으로 서 있는

절망하는 편집자였다“(178).

 

. 평범한 진실이지만 그것을 찾는 여정이 고달프고 허무해도 그 노력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꽃을 보아도 시간은 흐르고, 꽃을 보지 않아도 시간은 흐른다. 봄이면 꽃이 피고, 가을이면 꽃이 진다. 진실만큼 허무한 것이 없고, 허무한 것만큼 진실한 것이 없다"(20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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