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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관심의 시대 - 우리는 왜 냉정해지기를 강요받는가
알렉산더 버트야니 지음, 김현정 옮김 / 나무생각 / 2019년 11월
평점 :
인생은 미완(未完)의 사실을 찾아 나서는 미(美)완성 교향곡
《무관심의 시대: 우리는 왜 냉정해지기를 강요받는가》를 읽고
무관심은 나와 타자 사이의 차이에 주목하지 않는다
“interest, 이 단어는 사이를 뜻하는 라틴어 인테르inter와 존재함을 뜻하는 에쎄essce로 이루어진 말입니다. 그러니까 사이에 존재함으로써 interest는 나와 타자 사이에 존재하는 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강신주의 《철학적 시 읽기의 괴로움》에 나오는 말입니다. 무관심은 나와 타자 사이에 무엇이 존재하는지 아무 관심이 없다는 말입니다. 나의 바깥에서 무엇이 발생하는지, 발생해도 그것이 무슨 의미와 가치를 지니는지 알고 싶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안다고 해도 그것이 지니는 깊은 의미와 가치를 캐묻고 싶지 않다는 말입니다. 무관심의 싹이 자라기 시작하면 두 가지 노력을 포기합니다. “하나는 삶에 대한 열망을 가지고 기꺼이 거기에 참여하려는 마음이고, 다른 하나는 공동체적 목표를 자신의 사명으로 인지하고 실천하는 것이다”(12쪽). 무관심은 삶에 대한 열망을 절망으로 바꿔 놓고 관망하는 자세로 매사에 대한 관심의 끈을 끊어놓게 만든다. “무관심이란 모든 자발성과 이상, 책임감으로부터 만들어지는 더 나은 미래에 대한 모든 믿음을 파괴한다. 또 우리의 삶이 어떤 중요한 의미와 가치를 지니는지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우리가 한탄하며 외면하고 싶어 하는 암담한 일상으로 우리를 되돌려 놓는다”(25쪽). 무관심은 삶에 대한 의욕을 상실케 만들고 보다 적극적으로 살아가려는 의지를 꺾어버리고 삶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장본인이다. 결국 무관심은 살아가면서 느끼는 의미와 가치가 무슨 소용이 있는지 스스로에게 부정적으로 되물어보면서 본인은 물론 타인도 절망하게 만든다. “무관심에 사로잡힌 사람은 위로가 필요한 타인에게 다가가는 능력을 잃어버리고, 그 역시 절망과 개인적으로 경험한 상실감을 극복하지 못한다”(26쪽).
나아가 무관심은 나와 다른 사람은 물론 공동체와의 동맹 관계 속에서 의미와 가치를 창조하는 모든 노력으로부터 발을 빼게 만든다. 무관심이 고개를 들기 시작하면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 양태나 방식에도 무감각할 뿐만 아니라 그것이 왜 지금 여기서 발생했는지 맥락적 사고도 거부한다. “역사적 사건이나 낯선 문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현장에 있는 사람들 입장에서 이해하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14쪽). 사건이나 문화는 그것이 발생할 수밖에 없는 고유한 맥락성을 지닌다. 맥락을 이해하지 못하면 맥을 못 춘다. 무관심을 맥락을 이해하려는 열정을 싸늘하게 식게 만든다. 그저 겉으로 드러난 피상적 이해조차 귀찮아하게 만드는 장본인이다. 무관심은 빅터 프랭클이 말한 실존적 공허(Existential Vacuum), 삶의 의미를 상실한 상태를 불러온다. 물질적으로 풍부해졌지만 정신적으로는 풍요롭지 않고, 과거보다 더 많은 목표를 더 빨리 달성하는 효율은 높아졌지만 왜 그것을 하는지 효과는 점차 없어진 현상이다. 열심히 살지만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 이렇게 목숨 걸고 목표를 향해 매진하는지 이유를 모르는 허망함이 실존적 공허를 낳는다. “모든 것에 무관심해지고 아무것에도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삶의 비구속성’이라는 양상은 또 다른 불안과 방향 상실을 초래하는 기반이 된다”(22쪽). 살고 있어도 사는 것 같지 않고 바쁘게 살아도 왜 그렇게 사는지 모르는 실존적 공허는 삶의 비구속성을 불러온다. 모든 삶은 삶의 다른 양상과 구속되어 독립적인 상태로 존재하지 않고 의존한다. 즉 내가 매일 발을 딛고 살아가는 일상의 모든 측면도 다 어딘가에 구속되어 의존적 양태로 돌아간다. 내 삶이 어딘가에 구속되어 있어야 거기에 관심을 갖고 흥미를 느낀다. 어느 순간부터 그 연결고리가 끊어지면서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세상과 자신은 무관하다고 느끼는 사람이 있다”(23쪽). 더욱 심각한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삶의 요구에 귀가 멀어 있거나 들리지 않은 척한다”(23쪽)는 데 있다. 나는 다른 사람은 물론 내가 매일 만나는 삶의 모든 측면으로부터 외면당하고 있다는 소외감은 무관심을 더욱 부채질한다.
관심과 반응만이 사람 사이를 희망으로 꽃 피운다
무관심의 가장 심각한 폐해는 나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과 사회적 관계는 물론 가까이서 나와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이 추구하는 삶의 방향성에 귀를 기울이지 않게 만든다는 데 있다. 즉 “무관심은 모든 인간으로서의 책임감을 거부한다”(27쪽). 무관심은 인간이 추구하고 발견하며 향유하는 삶의 의미와 가치, 책임과 참여, 관심과 반응에서 멀어지게 만든다. 삶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내가 관심을 갖고 반응(response)하는 능력(ability), 즉 책임(responsibility)과 헌신적인 참여를 통해 모종의 의미를 찾아내고 가치를 창조하는 과정이다. 무관심은 이런 모든 노력에서 멀어지게 만들고 결국 희망보다 절망으로 우리를 이끌어 나락으로 빠지게 만든다. 사람은 사랑을 다른 사람에게 주고 또 나 역시 다른 사람의 사랑을 먹고 자란다. 누군가가 나 대신 힘든 노동을 통해 가꾼 성취를 나에게 나눠주는 호의 덕분에 나와 너, 우리와 공동체적 삶이 존속한다. 내가 경험하는 모든 단순함과 편리함은 누군가 나 대신 겪은 복잡함과 불편함 덕분에 누리는 미덕이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의존적이고 구속적인 삶을 사는 이유다. 한 순간도 인간은 다른 사람의 호의 도움 없이는 생존이 불가능한 가장 연약한 동물이다. 무관심은 이런 인간적 삶에 흐르는 상호작용이나 상호의존 관계를 볼 수 없게 만든다. 상대에 대한 “관심과 호의, 삶의 가치와 의미는 우리의 일생, 나아가 인류 역사의 발전과 질서를 지탱해주는 기둥이다”(40쪽). 이런 기둥을 포기하고 체념으로 일관하는 무관심은 이 세상이 살만한 가치가 있다는 점을 부정하게 만드는 원흉이다.
어떤 의미에 대한 인간의 의지와 의도가 세상을 바꿔나가는 원동력이다. 아직 발견하지 못했지만 삶의 어딘가에는 지금보다 나은 미래로 이끌어가는 희망이 존재한다는 믿음, 지금보다 더 의미와 가치가 있는 수많은 대상이나 미지의 세계로 향하는 열망이야말로 인간의 본질적 특성이다. 세상은 거창한 프로젝트나 원대한 비전만으로 바뀌지 않는다. 오히려 내가 몸담고 있는 일상의 작은 부분을 바꾸고 늘 만나는 사람에게 베푸는 작은 호의를 주고받으며 무언가를 도와주고 나누는 일을 반복함으로써 느끼는 행복감이 나와 우리는 물론 우리가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세상을 바꾸는 원동력이다. 작은 도움이지만 그 도움으로 희망을 찾은 사람은 세상을 향해 긍정적인 반향을 일으키고 그 반향은 보이지 않는 가운데 세상을 향해 진한 여운을 남긴다. 여기서 주목할만한 개념은 바로 미완의 사실이다. 미완의 사실은 살아가면서 만나는 무수한 사실에 아무리 응답을 해도 여전히 밝혀낼 수 없는 미지의 가능성이 숨어 있다는 의미다. “우리가 삶의 사실들에 응답하는 한 우리는 끊임없이 미완의 사실들 앞에 서게 된다”(50쪽). 미완의 사실이기에 ‘존재하는 것’에 대한 관심에서 ‘존재 가능한 것’으로 시선을 돌리게 만든다. ‘존재 가능한 것’이 품고 있는 미지의 사실에 주목함은 물론 나아가 ‘마땅히 존재해야 하는 것’으로 시선을 돌려 우리가 노력하면 그것이 품고 있는 의미 실현의 가능성을 구현하는 것이다. 미완의 사실이기에 그것을 완성하려는 몸부림이 더해질수록 세상은 얼마든지 지금보다 더 풍요로워질 가능성을 품고 있다. 나아가 미완의 사실을 알아내려는 개인적인 헌신과 노력이 지금보다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데 보탬이 된다는 믿음을 잃지 않을 때 우리의 미래는 희망적이다.
미완(未完)의 사실은 미완의 미스터리다
“삶의 의미 또한 사람마다 다르다. 따라서 모든 미완의 사실은 유일무이한 방식으로 미완일 뿐만 아니라, 어떤 사람을 만나느냐에 따라서 완성에 대한 개인적인 요구를 담고 있다”(52쪽). 미완의 사실이 유일무이하기 때문에 모든 사람은 그 누구도 지니지 않는 유일무이한 미완의 가능성을 품고 있다. 미완의 가능성을 품고 있는 사람이 어떤 노력을 통해서 그걸 실현하는지에 따라서 전혀 다른 가능성으로 현실로 구현될 것이다. 어떤 가능성으로 우리 눈앞에 나타날지 역시 예측 불가능하다. 다만 “나는 어떤 사람이 되려고 할까? 나의 진정한 모습은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나는 무엇을 발산해야 하며, 무엇을 행하고 남겨야 할까?(63쪽)”와 같은 질문에 진지하게 대답하려는 노력을 전개할수록 철학자 막스 셸러(Max Scheler)가 말하는 형이상학적 경솔에 빠지지 않는다. 형이상학적 경솔은 스스로 지닌 가능성을 과소평가하고 자괴감에 빠져 자신의 존재 가치를 왜곡하는 참을 수 없는 인식의 가벼움이다. 형이상학적 경솔에 빠지면 “자신의 기여가 가져올 결과와 가능성은 생각하지 않은 채 자신을 외부 환경의 희생자라 여기고, 변경할 수 없는 것에 매달리게 될 것이다”(84쪽). 사람이 바꿀 수 있는 것은 과거도 미래도 아니다. 사람이 바꿀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지금 현재다. 현재를 바꾸면 흘러간 과거도 새롭게 해석된 미완의 사실이고, 다가오지 않은 미래는 미완의 미스터리(mystery)다. 우리 모두는 미완의 미스터리를 품고 있는 미(美)완성 작품이다.
내가 품고 있는 미(美)완성 작품은 언제 어떤 방식으로 세상을 향해 가능성의 문을 열어젖힐지 모른다. 내가 개척하는 운명이 나에게 어떤 가능성의 관문을 준비할지 나 역시 미스터리다. “하지만 우리가 무엇을 발산할지를 결정할 수는 있다. 우리의 기여, 바로 이것이 중요하다”(86쪽). 미완의 사실에서 어떤 보석을 캐낼지는 전적으로 나의 선택에 달렸다. “인간은 인과 사슬의 맨 마지막에서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존재이기도 하면서, 시작 지점에 있기도 하다. 그리고 자신의 결정과 행동이 가져올 모든 예측을 제쳐두고 예기치 못한 것을 세상에 내놓을 수도 있다”(87쪽). 인간은 미완의 사실에서 새로운 가능성의 문을 열어젖히기 위해 새로운 출발은 언제든지 할 수 있다. 출발선상에서 품고 있는 희망은 전적으로 출발을 다짐하고 시작하는 당사자에 달려 있다. 모든 의사결정은 지금 여기 현재에서 이루어진다. “현재는 제한성의 장소일 뿐만 아니라 자유로운 결정의 장소다”(102쪽). 현재에서 과거를 해석하고 미완의 미래를 예측한다. 하지만 내가 현재에서 어떤 선택과 판단, 그리고 의사결정을 하는지에 따라서 흘러간 과거도 새롭게 해석되고 다가오는 미래의 미스터리도 미(美)완성의 아름다움으로 채색된다. 지금 현재 “자신의 삶에 빛을 들어오게 하기 위해서는 삶이라는 건물의 모든 창문과 문을 활짝 열어두어야 한다. 그리고 빛이 밖에서 들어오기를 기다릴 뿐만 아니라, 빛이 들어오도록 행동을 개시하고 직접 빛을 끌어당겨야 한다”(104쪽). 이런 노력도 나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해서 노력할 때 미완성 교향곡은 더욱 사람과 사람 사이로 울려 퍼질 것이다.
사랑은 직선적 인과관계나 물리적 법칙을 따르지 않는다
미완성 교향곡은 혼자 완성해낼 수 없다. “우리는 주는 행위를 통해서 자신을 더욱 풍요롭게 만들 수 있다. 한 사람의 부를 결정짓는 삶의 영역은 받는 것이 아니라 주는 행위를 통해 풍요로움을 무한대까지 증식시킬 수 있다”(114쪽). 앉아서 도움을 받는 것보다 발 벗고 나서서 다른 사람에게 내가 줄 수 있는 능력을 베풀 때 살아가는 의미와 가치는 배가되고 그 순간 미완성 교향곡은 더욱 큰 긍정적 반향을 일으킬 것이다. 미완성 교향곡은 과거의 겪었던 경험을 한 인간이 주체적인 입장에서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다르게 변주된다. “인간은 과거의 산물 그 이상이다”(79쪽). 과거에 내가 겪은 경험은 직선적으로 현재로 달려와 나의 슬픔과 괴로움을 만든다는 사고방식을 인과적 그물이라고 볼 수 있다. 내가 지금 이렇게 괴로움에 휩싸여 있는 이유는 과거의 어느 시점에서 누군가에게 아픈 상처를 받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선형적 인과관계는 어떤 특정 원인의 산술적 합이 오늘의 나를 만들었다고 생각하는 환원주의적 심리학의 한계와 폐해다. 환원주의적 세계관은 복잡한 세상을 낱낱의 구성요소로 분석하고 분해한 다음 그 걸 다시 합쳐서 전체를 이해하는 사고방식이다. 예를 들면 집은 벽돌, 나무, 시멘트, 모래, 유리 등 각종 건축 기자재의 산술적 합이라고 생각하는 사고 양식이다. 하지만 집은 이런 건축 자재의 물리적 합을 넘어 건축가의 철학과 의도, 장소나 환경과의 상호작용, 건축 기자재의 용처가 시너지 작용을 일으키면서 부분의 합을 능가하는 건축미의 산물이다. 환원주의적 심리학은 과거에 인간이 겪었던 몇 가지 감정적 변수를 물리적으로 합산한 다음 현재를 살아가는 한 사람의 심리 상태를 예측하려는 무모한 시도를 거듭한다.
“어떤 궁핍이나 고통스러운 경험, 매정함을 겪었더라도 이 요인들을 현재에 어떻게 적용시킬 것인지는 우리가 직접, 그리고 현재에 결정할 수 있는 것이다”(84쪽). 인간은 과거의 경험이 지금의 현재를 결정하도록 내버려 두는 수동적이고 피동적인 존재가 아니다. 내가 어떤 두려움 앞에 직면해도 그 두려움을 적극적으로 해석해내는 주체적인 존재이다. 인간은 또한 다른 사람의 사랑을 받지 않으면 성장할 수 없는 연약한 존재이기도 하지만 역으로 다른 사람의 아픔을 보면 그냥 넘어가지 않고 측은지심을 무한대로 발휘하는 숭고한 미덕을 지닌 존재이기도 하다. 그래서 미완성 교향곡은 사랑으로 이루어진다. 하지만 사람들은 내가 누군가를 사랑한 만큼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사랑의 물리적 총량이 정해져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한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 한 사람에 대한 사랑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더 이상 사랑하지 않거나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113쪽). 한 사람이 갖고 있는 사랑의 물리적 총량을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쏟은 사랑으로 인해 이미 그 사람은 사랑할 수 없는 양이 그만큼 감소된다고 잘 못 생각한다는 것이다. “사전에 받은 에너지 양에 상관없이 에너지를 발산하는 기제가 적용된다. 정신성을 소유한 인간은 언제나 객체를 능가한다”(114쪽). 사랑은 내가 과거에 받은 상처나 온정이 경험적으로 축적되어 생긴 단순한 물리적 산물이 아니다. 오히려 사랑은 다양한 감정이 내면에서 숙성되고 발효되어 탄생된 설명할 수 없는 관심과 배려, 헌신과 기여의 성취물이다. 인간을 인간으로 빛나게 만들어주는 실존적 지혜가 아닐 수 없다.
모든 성취는 사회적 합작품이다
미래는 전적으로 나 혼자의 힘으로 새로운 가능성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내가 갖고 있는 단점이나 약점은 다른 사람에게 새로운 가능성을 열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우리의 약점이 다른 사람의 최선을 끌어낼 수 있는 기회가 된다. 특정한 능력을 발휘하는 기회일 뿐만 아니라, 자신이 누군가를 위해 전력을 다하는 기회가 되는 것이다. 반대로 그의 약점 역시 우리에게는 삶의 영역에서 그를 도울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121쪽). 약점은 나의 입장에서 바라볼 때 치명적이지만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볼 때는 그 사람에게 내가 기여할 결정적인 기회다. 나의 약점으로 인해 다른 사람이 나에게 베풀 공간이 생기고 그로 인해 우리는 뜨거운 연대를 맺는 동맹이 된다. 상대의 강점으로 나의 약점은 상쇄되고 나의 강점으로 상대의 약점을 보완되어 우리는 협력을 통해 새로운 가능성을 창조할 수 있는 미완성 교향곡의 연속이다. "협조(coordintion)는 사실 '시키는 대로 해(Do what's expected)' 혹은 '효율적으로 해'라는 뜻이다. 협력(collaboration)은 '나는 동의할 수 없는데?'라고 자신의 감정을 말하는 것이다. 협력의 관계에선 서로 감정도 오가고 논쟁적인 대화도 하게 된다. '협력'을 통해 진화했고, '협조' 때문에 퇴화 중이다". ‘디자인 씽킹’의 전설적 원로학자, 래리 라이퍼 美 스탠퍼드 교수가 중앙일보와 인터뷰한 내용이다(참고: 혁신 가르치는 '디자인 씽킹의 전설'이 말했다 "AI 믿지 말라" 중앙일보, 2020.1.17.일자 기사). 협력을 통해 인간은 강약점을 상쇄시키고 새로운 가능성으로 뭉치는 믿음의 공동체가 된다. “협력 없는 세상은 존립하지 못한다”(187쪽).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타자 의존적임과 동시에 타자를 도와주고 힘을 나눠가면서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협력적 동물이기도 하다.
믿음의 공동체가 되면 공동체 구성원 사이에 강한 신뢰 네트워크가 형성된다. 여기서 주목한 개념은 성취적 현실이다. 능력대로 성취해서 그 결과가 현실로 구현될 때 비로소 성취감을 맛본다. 성취적 현실은 나의 약점으로 도무지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다른 사람의 장점으로 나의 단점이 순식간에 상쇄되면서 현실적으로 무엇인가가 이루어졌을 때 느끼는 성취감이다. 나의 단점은 더 이상 극복할 수 없는 치명적인 약점이 아니다. 오히려 나의 약점은 상대방이 나의 약점 세계로 진입해서 자신의 강점으로 나를 온전한 세계로 이끌어 색다른 성취감을 맛보게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의 텃밭이다. “인간은 세상의 산물이자 부분이며, 이 세상을 향해 영향력을 발산하고 자신의 독자적인 능력을 통해 다른 방식으로는 불가능한 것들을 이 세상에서 만들어낼 수 있다”(170쪽). 성취적인 현실은 성취감을 맛보는 한 사람의 쾌감은 한 사람의 독자적인 능력으로 끌어낸 산물이 아니다. 오히려 성취감을 맛보게 만드는 과정에 관여한 모든 사람의 사회적 합작품이다. 혼자의 힘으로 불가능한 영역을 다른 사람과의 협력을 통해 생각지도 못한 가능성의 관문을 열어젖힐 때 성취적 현실은 그야말로 현실이 된다. “말하자면 신체적 정신적 구조는 제한적이지만 자유를 성취함으로써 이런 구조에 갇히지 않고 자신만의 입장을 취할 수 있는 능력은 무제한적이다”(184쪽). 성취적 현실은 뭔가를 성취하지 않고 맛볼 수 있는 관념적인 슬로건이나 개념이 아니다. 실제로 성취적 현실이 꿈꾸는 세계를 현실로 구현해봤을 때 느끼는 체험적 느낌이 바로 성취적 현실이다.
대상에 대한 주체적 의미부여가 적극적인 참여를 불러온다
“협력 없는 세상은 존립하지 못한다. 그런 세상은 지속적으로 위험에 처한다. 사랑과 관심이 없으면 대자연속에서 단 며칠도 생존할 수 없는 인간은 아마도 오래전에 멸종했을 것이다”(187쪽). 인간은 사랑과 관심을 먹고 자라는 인간관계의 산물이다. 인간은 홀로 독립적인 상태로 어딘가에서 살아갈 수 없는 지극히 의존적인 존재다. 인간의 감정 또한 어떤 처지에 놓여있느냐에 따라 상황에 따라 가변적일 수도 있고 특정 대상에 주체적으로 감정을 가질 수도 있다. 즉 인간은 상황적 감정에 휘둘리고 대상적 감정에 올곧게 살아보려고 노력한다. “상황적 감정은 어떤 것 ‘때문에’ 생기며, 대상적 감정은 어떤 것에 ‘대해’ 생긴다(207쪽). 상황적 감정은 나의 의지와 관계없이 아무 때나 변덕스럽게 생기지만 대상적 감정은 주체의 판단과 의도적인 근거에 따라 선별적으로 생긴다. 상황적 감정은 자기중심적이지만 대상적 감정은 타자 중심적이다. ”대상적 감정을 염두에 둔다는 것은 무관심하게 자신의 행복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과 다른 사람들을 존중하고 그들에게 관심을 가지는 것을 의미한다“(210쪽). 상황적 감정은 상황에 따라 좌지우지 흔들리는 가변적인 감정이라면 대상적 감정은 대상에 대한 인간적 관심과 바라보는 시선에 따라 주도적으로 결정되는 관심과 애정의 표현이다. 상황적 감정의 치명적인 약점은 ”목적의식을 놓치게 한다. “나는 지금 나 자신과 나의 행복에 몰두하고 있기 때문에 너에게 신경 쓸 겨를이 없어”라는 말조차 더 이상 하지 않는다“(220쪽)는 데 있다. 우울하고 언짢아서 지금 몹시 슬프다고 느끼는 상황적인 감정에 비해 ”우리가 사랑했지만 이제는 상실한 어떤 것 혹은 어떤 사람을 그리워하는 추억의 다른 표현“(222쪽)인 애도는 대상적 감정이다. 그래서 애도는 심리적으로 느끼는 가변적인 현상이라기보다 주체의 결단과 의도에 따라 일어나는 심리적 개입이자 정신적 현상이다.
행복한 삶은 상황적 감정에 따라 휘둘리는 삶이 아니라 대상에 대한 애정과 관심으로 어떤 의미부여와 실존적 가치를 느끼는 대상적 감정이 주도한다. 대상적 감정은 저자가 일관되게 주장하는 “삶은 기본적으로 책임과 참여, 관심과 반응을 통해 결정”(33쪽)한다는 논지와 일맥상통한다. 대상적 감정은 인간의 실존적 공허를 극복하고 미완의 사실에 적극적으로 개입해서 삶의 의미와 가치를 창조하는 원동력이다. 대상적 감정은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운명에 따라 주어진 것을 기다리는”(75쪽) 임시적 삶의 자세에서 탈피하여 행복한 삶에 대한 적극적인 관여와 슬픔에 대해 성숙하게 대처하는 자세를 길러준다. 대상적 감정이 풍부해져야 “온전히 자기 자신이 되었다는 황홀한 감정이 느껴지고, 그 순간에 가장 큰 자유를 느낄 것이다”(230쪽). 상황적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온전히 나 자신과 마주하는 순간, 있는 그대로의 우리가 허용되는 순간, 온전히 자기 자신이 될 수 있음을 편안하고 기쁘게 누릴 수 있는 순간“(230쪽) 역시 대상적 감정이 가져다주는 선물이다. 상황적 감정과 대상적 감정은 각각 상황적 자존감과 대상적 자존감을 낳는다. 상황적 자존감은 일시적 기분에 따라 좌지우지되고 오락가락하는 변덕스러운 부정적 자존감이다. 이에 반해 대상적 자존감은 대상이 존재하는 의미를 내가 주체적으로 부여하고 애정과 관심으로 존재가치를 드높이는 의미 지향적 참여가 전제될 때 생기는 긍정적 자존감이다. 상황적 자존감에 매몰될수록 다른 사람이나 주변 정황 변화에 일희일비하고 주체의 자발적인 결단과 행동에 따라 움직이지 못하는 변덕스러운 존재로 전락한다.
영원히 완성되지 않는 미(美)완성 교향곡은 영원히 우리 삶을 드높여 줄 것이다
상황적 자존감은 실존적 공허는 물론 실존적 오류도 불러온다. 상황적 자존감은 자기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자기중심적인 행동을 일삼게 만든다. 잘 되면 내가 잘한 것이고 안 되면 다른 사람이나 환경의 잘못이라고 생각한다. 목적을 달성하면 “내가 참 잘했다”고 자화자찬한다. 반면에 대상적 자존감은 내가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좋은 일이라는 깨달음을 불러온다. 나보다 힘들고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에게는 서슴없이 측은지심이 발동되어 적극적인 도움을 주기 위해 발 벗고 나서며 그런 행동과 과정을 실존적 의미를 실현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대상적 자존감은 “행동이 자신만을 위하지 않고 가치를 지향할 때 그 파급효과가 행동의 가치에 확고하게 내재되어 있다는 사실도 보여준다”(239쪽). 대상적 자존감을 지닌 사람은 “다른 사람의 말이나 보상에 의존하지 않는다”(241쪽). 오히려 대상적 자존감을 지닌 사람은 대상에 의미를 부여하고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며 다른 사람과 공동체를 위한 선의 실현이 자신의 존재 의미와 가치라고 생각한다. “어떠한 사람도 외따로 떨어진 섬이 될 수 없다. 어떠한 삶도 만남 없이는 불가능하며, 어떠한 만남도 자유 없이는 불가능하며, 어떠한 자유도 책임 없이는 불가능하다”(245쪽). 우리는 모두 협력하는 의존적 존재다. 만남을 통해 존재 의미와 가치를 느끼고 자기가 살아가는 이유, 자유를 서로 간의 책임 속에서 만끽한다. 나를 발견하는 자유와 다른 사람과 함께 존재 의미를 실현하는 과정에서 반응하는 책임은 관심과 관여로 우리 삶을 더욱 빛나게 만드는 쌍두마차다. 타자의 아픔과 슬픔에 반응하는 책임은 우리가 살아가는 공동체를 지지하고 지원하는 숭고한 미덕이 아닐 수 없다. 더욱이 모든 존재는 그 나름의 살아가는 이유를 자유라는 이름으로 실현해나간다는 점에서 숭고한 가치를 지닌다.
“또한 개인에게 일어나는 사건들만이 주체를 규정하고 정체성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주체는 자신의 삶에 개인적으로 기여하고, 함께 결정하고, 함께 삶을 써나간다. 이러한 개인적인 기여가 가장 먼저 나타나는 공간은 더 이상 섬이 아니라 전체(도움이 필요한 미완성의 세계)의 필연적이고 필수적인 한 부분으로 인식될 때 생겨난다”(245쪽). 주체는 절대적인 독립적 주체가 아니다. 다른 사람과 함께 협력하며 결정하고 결정한 사안을 함께 이루어나갈 때 우리는 더 이상 외딴섬에서 고군분투하는 독립적 주체가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더불어서 함께 공동체의 미덕과 선을 실현해나가는 전체다. “다시 말해 우리 자신을 존재의 중심에 세우기보다 각각의 상황에서 무수한 의미 가능성에 대한 책임감을 느낄 때 진정한 치유와 각성이 나타난다”(245쪽). 거기 그냥 존재하는 대상이나 존재는 없다. 미완의 사실을 품고 있는 무한한 가능성이다. 그 가능성의 뒤안길을 함께 파고 들어가 아직 드러나지 않은 의미를 발굴하고 함께 공유하며 가치를 드높이는 합작품을 창조할 때, 영원히 완성되지 않는 미(美)완성 교향곡은 영원히 우리 삶을 비추고 드높여 줄 것이다.
"또한 개인에게 일어나는 사건들만이 주체를 규정하고 정체성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주체는 자신의 삶에 개인적으로 기여하고, 함께 결정하고, 함께 삶을 써나간다. 이러한 개인적인 기여가 가장 먼저 나타나는 공간은 더 이상 섬이 아니라 전체(도움이 필요한 미완성의 세계)의 필연적이고 필수적인 한 부분으로 인식될 때 생겨난다"(24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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