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시가 필요한 시간
장석주 지음 / 나무생각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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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외로움의 촉수를 한 편의 시로 번역하는 시인이 되고 싶은 사람들에게

장석주(2023). 지금은 시가 필요한 시간. 서울: 나무생각.

 

저돌과 파격으로 낡은 세계를 새롭게 건축하다

 

글을 쓰기 위해 새로운 영감이 필요할 때, 타성에 젖은 언어에서 벗어나 사물이나 현상을 다른 눈으로 바라보며 발상을 뒤흔드는 언어가 필요할 때 시집을 꺼내든다. 시인들의 언어 사용 방식을 배우기 위해서다. “시인들은 항상 다르게 보고, 다른 것들을 들으라는 정언적 명령의 세계에 속한다. 그리하여 같은 것을 보면서도 다른 시각으로 보고, 같은 것을 들으면서 다른 귀로 들으며, 같은 목소리에서 호기심을 자극하는 새로운 목소리를 듣는다”(146). 장석주 시인의 지금은 시가 필요한 시간29명의 시인이 세상을 다르게 보고 듣고 느끼며 관성의 늪에서 벗어나 상상력의 촉수”(257)를 뻗어 건져올린 풋것들의 향연을 보여주고 있다. “풋것들은 에두르는 법 없이 사물의 핵심으로 직진한다. 풋것은 무지와 무감각으로, 저돌과 파격으로 낡은 세계를 새롭게 만들고 눌리고 찌든 우리 마음을 기쁘게 한다”(163). 절제와 압축미로 담아낸 시어는 몸을 관통한 흔적을 얼룩에서 무늬로 바꾸어 언어로 번역해내는 시심의 산물이다.

 

시인은 절망이 오면 절망의 적나라한 모습 그대로 또는 희망의 언어로 얼룩진 행간에서 의미를 채굴하고, 낙엽에 쌓인 그리움이 추위에 떨어도 추억으로 한 동안을 버티며 살아가는 주어진 현상의 이면을 파고든다. 폭설에 새겨진 아쉬운 발자국이 휘몰아치는 바람에 지워져도 새벽 찬이슬 맞으며 땅바닥에 엎드려 그 자리를 지키는 족적도 시인에게는 시심을 자극하는 위대한 족적이다. 누가 입을 지도 모르는 생각의 옷을 입은 언어들이 동맥을 타고 흐를 때 시인의 촉수는 피로써 울분을 토하며 얼룩을 무늬로 만드는 언어적 기적을 선물한다. 빨랫줄에 걸린 옷가지에 바람을 타고 지나가던 서글픈 소식들이 가지가지 사연으로 매달려 있는 순간을 놓치지 않는 시심은 언제나 심심하지 않다. 얼마나 외로운 사연 많이 품었으면 무거움을 참지 못하고 구름은 땅으로 곤두박질 치는 비의 비애를 온몸으로 느끼는 사람이 시인이다.

 

시는 찢어진 노트에 담긴 서글픔 한 페이지다

 

우리가 기다리는 시는 불행과 격투를 마다하지 않는 시, 낡은 사물이나 생각을 바꾸는 상상력으로 가득한 시, 청춘의 착란 속에서 빛나는 미래 비전을 담은 시다”(5). 누구나 시인이 되면 강물이 훑고 지나간 모래알의 그리움을 긁어내 어루만져줄 비법을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착각했다. 나이가 들어 시심이 무르익으면 새벽이 찬이슬 앞에 머뭇거리다 먼동이 터옴을 시로 번역해내는 경이로운 작법을 구름에 달가듯 자연스럽게 포착해낼 수 있을 것이라고 또 한 번 착각했다. 쟁반에 맴돌던 달밤의 낭만이 소나무 가지가 속삭이는 연서와 만나 세상에서 가장 감동적인 사랑의 싹을 틔우는 순간에도 싯구가 폭발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가도 하늘이 품고 있는 변덕스러운 생각에 조응하는 명령을 따를 수 있을 정도의 혜안과 안목은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오늘도 시인은 쓰다 남은 메모장에 적힌 그리움 한 조각과 찢어진 노트에 담긴 서글픔 한 페이지를 붙잡고 새벽으로 향하는 밤의 적막속에서 끝을 모르는 유영중이다.

 

시는 개별자에게 발화하는 슬픔의 결, 실패의 광휘, 패자의 심오한 승리 등을 포함한 경험에 주목한다. 그것은 시가 고백의 건축술이기 때문이다. 시는 과거의 멜랑콜리를 소환하고, 한심한 영혼의 낡은 미래를 노래한다. 고백의 언어를 펼치는 가운데 잔혹한 존재의 내출혈, 독백의 만다라, 팬터마임을 시연(試演)하기도 한다”(5). 시인에게는 비극도 어제와 다른 삶을 작곡하는 음악적 선율의 다른 이름이다. 시인에게는 정답도 없고 다양한 가능성을 잉태한 채 상황과 맥락에 따라 다르게 해석되는 해답만 존재할 뿐이다. 해석이 바뀌면 지금껏 골머리를 앓던 문제도 해결되는 삶의 지혜가 든든한 위로로 엄습하기 때문이다. 시인이 걸어가는 길은 아직 가보지 않은 위험한 미지의 길이며, 읽히지 않은 소설속에 잠복근무하고 있는 갈등과 절정의 어느 순간이다. 시인은 어떤 풍경으로 그려내도 화폭에 담을 수 없는 그림이며, 여전히 어제와 다른 영감을 기다리며 그리움에 젖어 사람이 지금 이 순간도 시어를 기다리며 거리를 방황하는 사람이다.

 

시인은 가난이라는 바다를 탐색하는 심해 잠수부다

 

모든 참다운 시는 그 불행의 참상을 낱낱이 고지하여 기소하고 동시에 사면한다. 그게 시의 숭공한 소명이라는 걸 되새기며, 여기 숭고한 소명을 향해 나아간 시인들과 시들을 불러 한 권의 책으로 묶는다(12-13). 지금까지의 생이 아픔과 슬픔이 씨줄로 날줄로 직조된 얼룩과 무늬라면 그런 생에게 따듯한 입맞춤해주며 헐벗은 옷 갈아입혀 따듯한 온돌방에 잠재우고 싶은 마음을 견디다 못해 몇 줄 쓴 시가 이 책 곳곳에서 긴 한 숨을 쉬며 독자들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모든 소리 없는 아우성이 저마다 시인이 겪어내는 삶의 절규였음을 증명해주고 싶은 것이다. 비바람을 등지고 안간힘을 써가며 간신히 켜진 성냥불에 주변이 잠시 밝아진 틈을 타서 돌아온 지난 생의 어둠을 잠시 잊고 싶은 게 이책에 등장하는 시인들의 작은 소망이다. 그럼에도 시인의 주변에는 희망보다 절망의 늪으로 점철되어 있다.

 

김승희 시인의 희망이 외롭다에 나오는 절망엔 그런 비애의 따스함이 있네...희망과 나/희망은 종신형이다는 구절은 절망과 희망을 다르게 해석하는 시인의 역발상이 숨어 있다. 왜냐하면 절망은 우리를 속이지 않는다. 희망이 우리를 자주 속인다. 희망이 절망보다 더 가혹한 것은 그 때문이다. 우리는 희망의 종신형을 선도받은 채 그 가느다란 끝을 붙잡고 있는 죄수들이다”(24-25). 절망의 종신형이 아니라 희망의 종신형이라는 시어 앞에 절망과 희망의 의미를 타성에 젖은 의미로 해석했던 나의 언어사용 방식에 크게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희망의 종신형 앞에서 나의 관념적 언어는 바닷가에 객사(客死)한 모래알이고, 땡 빛에 힘없이 죽어가는 들국화의 쪼그라듦이다. 내가 사용하는 언어는 여전히 구체적 맥락성을 품지 못하고 현실에 뿌리 내리지 못한 채 허공을 넘다는 관념의 파편임을 알아차렸을 때, 장석주 시인의 언어는 현실 속에서 진실과 진심을 건져올리는 서광이나 다름없었다. 시인은 그래서 알은 어둠 속에서 절망에 복무하며 기다려야”(32)하고, “머뭇거림과 숙고, 무작정과 막무가내의 기다림”(33) 속에서 더 적확한 언어를 벼리고 별러서 적확한 한 문장을 완성한다.

 

시인은 가난이라는 바다를 탐색하는 심해 잠수부다”(39). 시은은 오르락 내리락 우여곡절의 전반전을 뛰고 나서 한눈팔고 딴 짓 하다 바라본 구름 한 점도 섣불리 흘려보내지 않는다. 거기에는 기꺼이 기록을 거부하는 비애 한 권의 서글픔이 주변을 서성거리고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흐르는 모든 시간과 그 시간이 머물렀다 떠나는 공간은 서성거림의 방황과 배회가 남긴 시 한편이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살아내는 모든 순간은 한 두 문장으로 압축되거나 요약되지 않고 양극단의 스펙트럼에서 언제나 중심을 잡으려 안간힘을 쓰다 어느 한 쪽으로 쏠린 상식과 신념의 종합선물 세트다. 처절함과 처연함 사이에서 처참함을 느끼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다가 어딘지 모르는 중간 간이역에서 시인의 발걸음은 잠시 쉬고 있다. 그 순간에도 우리에게 던져주는 삶의 교훈이 무엇인지를 탐색하고 파고들어 의미의 지층을 깨부수는 언어광부가 시인인지도 모른다.

 

바라봄과 보지 않음 사이에서 시가 타오른다

 

연애는 상대를 낳는 산파술이다”(64). 비단 연애 뿐만 아니라 시인이 바라보는 모든 대상은 대상이 품고 있는 의미의 뒤안길을 추적해서 잠복중인 새로운 깨달음을 출산하는 산파술의 터전이다. “우리는 바라봄과 보지 않음 사이에서 타오른다. 이 타오름의 중심에 욕망이 있다. 이 타오름에서만 우리는 살아있음을 실감한다”(67). 시인은 바라보되 그냥 바라보지 않고 골머리를 앓고 있는 뭔지도 모르는 숙제를 끌어안고 해결을 위한 단초나 단서를 잡아보려고 몸부림을 친다. 그러다 만난 사소하고 하찮은 일상에서도 비상하는 상상력의 날개를 펼친다. ‘목소리들을 쓴 이원 시인의 상상력 촉수는 한 글자로 된 단어의 숨겨진 아픔과 몰래 꿈꾸는 이상 세계의 한 단면을 포착한다.

 

, 거기까지 나와 굳어진 것들

, 새어 나오는 것들, 제 살을 벌리며

, 거기까지 밀어본 것들

, 거기까지 던져진 것들

, 닿지 않을 때까지

, 치밀어 오를 때까지

, 떨어질 곳이 없을 때까지

, 뒤엉킨 것

, 기어 나온 것

, 세계가 놓친 것

, 파헤쳐진 것, 헤집어놓은 것

, 거울에서 막 빠져나오는 중,

늪에는 의외로 묻을 게 많더군

, 거울에서 이미 빠져나온,

허공에도 의외로 묻힌 게 많군

, 깨진 것, 산산조각 난 것

, 찢어진 것

, 피로 적신 것

, 가장 어두운 것

, 거기에서도 꼭 다문 것 격렬한 것

, 거기에서도 혼자 남은 것

, 거기에서도 갈라지는

, 거기에서도 붙잡힌

, 성급한, 뒤늦은, 때늦은

, 그림자가 실토한 몰골

, 손가락 끝에 딸려 오는 것

, 토사물

, 끓어오르는

, 목구멍까지 차오른

, 퍼드덕거리는

 

한 많은 세월의 얼룩이 서글픈 사연을 머금다 목구멍 사이로 터져 나온다. 차갑게 식은 냉가슴을 달구는 한 잔 술이 온몸을 휘감을 때 시인은 텅 빈 종이를 바라보다 어둠을 밝히는 밤하늘의 등불로 번역한다. 하루 종일 수영 하다 지쳐가는 몸을 가누며 물고기가 하품을 하는 순간 숱한 바람에도 쓰러지지 않았던 물가의 갈대가 온몸을 떨고 있을 때 시인은 어둠에 가려 보이지 않지만 그럼에도 빛나는 배경의 안간힘을 포착한다. 긴 밤을 뒤척이다 깨어도 여전히 적확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다가도 문득 스쳐지나는 영감을 포착했을 시인은 그것이 내가 찾는 정답이 아니라고 애써 외면을 반복하다 새벽을 맞이한다. 뒷짐을 지고 어슬렁거리다 만난 담장 너머의 무거운 침묵을 만나는 순간 고속으로 질주하던 자동차의 경적이 세월의 흐름을 추월할 때에도 시인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유 없이 어슬렁거리며 유유자적하는 산책자다. 지금은 시가 필요한 시간에는 장석주 시인이 다른 시인의 삶의 내면과 이면을 파고드는 의미의 산책자임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시는 일부러 뜯어본 주소 불명의 아름다운 편지다

 

이원 시인의 목소리들와 비슷한 맥락에서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을 쓴 진은영 시인도 타성에 젖은 교과서적 정의에서 탈피, 언어적 의미를 재정의하는 짧은 사전을 보여준다.

 

, 놀라서 뒷걸음질치다

맨발로 푸른 뱀의 머리를 밟다

 

슬픔

물에 불은 나무토막, 그 위로 또 비가 내린다

 

자본주의

형형색색의 어둠 혹은

바다 밑으로 뚫린 백만 킬로의 컴컴한 터널

여길 어떻게 혼자 걸어서 지나가?

 

문학

길을 잃고 흉가에서 잠들 때

멀리서 백열전구처럼 반짝이는 개구리 울음

 

시인의 독백

어둠 속에 이 소리마저 없다면

부러진 피리로 벽을 탕탕 치면서

 

혁명

눈 감을 때만 보이는 별들의 회오리

가로등 밑에서는 투명하게 보이는 잎맥의 길

 

, 일부러 뜯어본 주소 불명의 아름다운 편지

너는 그곳에 살지 않는다

 

, 일부러 뜯어본 주소 불명의 아름다운 편지/너는 그곳에 살지 않는다.” 시는 언제나 주소 불명의 곳곳에서 날아든다. 정처도 없고 장기간 머물로 살아가는 터전도 없다. 순식간에 날아들다 기분이 내키면 잠시 머무를 뿐이다. “시인은 만물이 내는 목소리를 경청하며 동시에 이것을 세계에 중계한다”(147). 시인은 언제나 삼라만상을 경험하면서도 다른 감촉으로 상상력을 잉태한 다음 아무도 모르는 시기에 어제와 다른 문장을 아무때나 출산한다. 시인의 삶은 하루도 마음 편안하지 않다. 오히려 시인은 불편함과 불안감이 창작의 꽃을 피우는 앙스트불뷔테의 전형이다. “시인은 모든 도약에 실패한 호랑이들로, 날마다 포효를 하며 제 존재의 벽을 할퀴어댄다”(162). 자기 몸에 새겨진 상처 위에 또 다른 앎의 상처로 덧씌우며 탄생하는 쓰라림으로 애쓰며 쓰는 사람이 시인이다. 나는 이런 고통의 무한 반복이 자신이 없어 시인(詩人)이 될 수 없음을 시인(是認)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시를 읽어야 되는 이유는 시 한 편에는 우리가 살아가는 소우주가 들어 있고 자연의 위대한 법칙과 원리가 숨어 있으며,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막막한 순간에 무릎을 치는 통렬한 깨담음의 선물을 주기 때문이다. ‘새해 첫 기적을 쓴 반칠환 시인은 한 해를 정리하면서 새해를 맞이하는 우리들에게 서늘한 뜨거움을 전해준다.

 

황새는 날아서

말은 뛰어서

거북이는 걸어서

달팽이는 기어서

굼벵이는 굴렀는데

한날 한시 새해 첫날에 도착했다

 

바위는 앉은 채로 도착해 있었다

 

좋은 시는 지층을 뚫고 나온다

 

저 너머에 가장 아름다운 시와 가장 아름다운 노래와 항해해야 할 가장 넓은 바다와 추지 않은 불멸의 춤이 있다. 가장 아름답고 소중한 날들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263). 시인에게는 비극도 어제와 다른 삶을 작곡하는 음악적 선율의 다른 이름이다. 저마다의 사유로 작별을 고하고 이별을 경험한 씁쓸한 시인은 새벽이 다가와도 잠이 오지 않는다. 창문을 두드리는 빗방울에 시름을 희석시켜 새벽별을 위한 아침을 준비하는 시인은 그럼에도 숱한 작별과 이별에 애도의 뜻을 표하지 않는다. 작별이나 이별보다 더 슬픈 결별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럴 때마다 마음 속에 간직한 사전을 펼쳐놓고 단어들이 품은 의미를 선별하며 문장을 건축해보지만 여전히 언어는 하늘을 날며 허공에 펀치를 날릴 뿐이다. 어두워야 읽히는 시인의 문장들, 여전히 난해한 상형문자로 건축되어 있는 해독의 대상이라 스스로 좌절을 밥먹듯이 한다. 하지만 세월의 흐름이 축조한 지혜의 보고에서 며칠 밤 지새우면 세상의 언어로 옷을 갈아입을 것이라는 어설픈 희망을 가져본다. 그때는 어둠의 이불을 박차고 나와 하늘의 명령에도 불복하지 않고 구름이 안내하는 길로 총총 걸음 내딛으며 또 하루를 보낼 수 있는 용기로 두려운 불확실성 앞에 도전하는 한 줄기 싯구절을 상상해본다. 장석주 시인의 시와 시를 해설하는 언어에는 저마다 흐르는 시간을 붙잡아 머물렀던 공간의 기억을 되살려 번역해낸 체중이 실려 있다. 살갗을 파고들고 전두엽을 자극하는 전광석화의 깨달음이 스며드는 이유다.

 

좋은 시는 지층을 뚫고 나온다. 사유의 속도와 운동이 그 지층을 뚫는데, 이 속도와 운동 속에 찰나를 증언하는 번개의 빛에, 시는 있다”(11). 지층을 뚫고 나오는 글을 쓰기 위해 어제와 다른 삶의 차이를 반복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2분의 1: 인생반전을 일으키는 절반의 철학책을 내면서 저자 소개에 나의 인생이력을 짧게 써 봤다. 내가 살아온 삶만큼 읽을 수 있고 쓸 수 있다는 신념에서다. 20대는 뒷굽이 다 닳은 서글픈 신발을 신고 갈 길이 먼 다급한 마음 억누르며 그래도 분발하려는 대책없는 방랑자였다. 30대는 바람타고 쓸려간 상처 속의 신음도 찬란한 슬픔의 화음으로 재생하는 어설픈 작곡가였다. 나에게 사십은 상처입은 짐승이 내면의 아픈 기억을 어루만지다 몸부림치며 행간의 의미를 밝혀보려는 섣부른 저자였다. 나에게 오십은 새봄에 피어나는 아지랑이 타고 밀려오는 파도에게 술 한 잔 사주고 싶은 철부지 예술가다. 60에는 몸에 외로움의 촉수로 박혀 있어도 건드리면 아무데서나 한 편의 시로 승화되는 시인의 삶을 살고 싶다. 걸어가는 족적마다 다 음악이며, 달빛에 그을려진 서글픔도 그림이 되는 아슬아슬한 기적을 쓰고 싶다. 나에게 육십은 어슬렁거리다 만난 담장 너머의 무거운 침묵을 만나도 유유자적하며 삶의 순간을 만끽하는 산책자이고 싶다. 언제나 신인의 자세로 애쓰며 상상력의 텃밭에서 비상하는 글을 써야 작가로서의 본분과 작은 사명을 다할 수 있음을 장석주 시인의 지금은 시가 필요한 시간을 읽으며 깊은 깨달음의 선물을 받았다. 깊어가는 가을, 겨울 추위가 다가오기 전에 서늘한 따듯함으로 삶의 고단함을 위로받고 싶은 분들에 일독을 권하고 싶다.

 

풍파는 언제나 전진하는 자의 벗이다.

차라리 고난 속에 절반의 기쁨을 발견하라.

좋은 시는 지층을 뚫고 나온다. 사유의 속도와 운동이 그 지층을 뚫는데, 이 속도와 운동 속에 찰나를 증언하는 번개의 빛에, 시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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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이 당신에게 말을 걸다 (DRESS TO ADDRESS)
김윤우 지음 / 페이퍼스토리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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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이 당신에게 말을 거는 이유를 아십니까?

 

특이한 제목이 주목하게 만든다. 역시 제목은 제 목을 걸고 정해야 제 몫을 한다는 걸 이 책은 여실히 보여준다. 사람이 무슨 옷을 입을 것을 정하는 게 아니라 옷이 걸어오는 말을 잘 들어보면 내가 무슨 옷을 입어야 나다움이 드러나는지 알 수 있다는 말이다. 영어 제목도 Dress가 말을 거는(adDress)로 잡은 이유 같다.

 

숱하게 걸려 있는 옷걸이 옷들은 오늘도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 살 때는 대책 없이 사놓고 계절이 바뀌어도 거들떠보지도 않으니까 말이다. 내가 입으면 가장 자기다운 아름다움이 드러나는 옷을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고 유행 따라서 또는 다른 사람의 추천이나 연예인들이 입고 다니는 옷을 따라서 사고 입어온 옷 입기 습관에 대한 혁명적 주장이 담긴 책이다.

 

흔히 옷입는 테크닉을 가르쳐주는 패션관련 책인지 알고 책을 거들떠보다 우선 목차에도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제목제 목을 거는 과정에서 생기는 책의 카피라면 목차는 목을 차도 나오지 않는 책의 핵심 줄거리 흐름이다. 1장 소제목부터 도발적이다. “내가 입은 옷, 그것이 바로 ’”라는 메시지다. 옷을 입기 전에 옷이 전하는 말을 잘 들어보고 옷은 제2의 자아이기 때문에 나를 바로 알고 나에게 어울리는 옷을 입어줘야 옷이 나를 대신해서 나를 세상에 알려준다는 메시지다

 

2장에는 자기다움을 찾은 사람은 옷 입기부터 다르다는 주장을 이어간다. 나를 치장하고 위장하는 꾸미기보다 자기다움을 더 아름답게 드러내는 가꾸기에 전력하라는 메시지와 함께 옷입기는 힘주기라기보다 힘입기라는 놀라운 주장을 연이어 펼친다. 결국 옷만 잘 입어도 없었던 힘도 생긴다는 말이다. 옷 입기가 사치가 아니라 나다움의 가치를 드높이는 노력이 되는 이유다.

 

 

3장에는 옷에 대한 까다로움이 필요한 이유를 구체적인 사례를 통해서 설명해준다. 까다로움은 고유함을 드러내는 자유로움이자 타협할 수 없는 마지노선이기에 자기다움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고수해야 되는 옷입기의 철칙이기도 하다. 까다로움은 쓸데없이 자기 주장을 펼치는 깐깐함이나 타협하기 어려운 까탈스러운 심리적 반응이 아니다. 적어도 나만의 고유한 스타일을 고수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양보할 수 없는 배수지진의 경계선이다.

 

이런 까다로운 아름다움을 찾아내고 자기 특유의 스타일을 알아보기 위해서는 스타일 검진이 필수다. 건강검진을 통해 건상상태를 알 수 있듯이 대체 불가능한 스타일링을 위해서는 스타일 검진으로 깨어나는 자기다움을 발견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스타일은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나만의 고유한 컬러이자 자기 정체성을 드러내는 이미지다. 나만의 스타일을 통해 내가 누구인지, 어떤 옷을 입으면 옷입기 센스를 살려내는, 오감을 넘어 육감적인 옷입기 스타일을 완성할 수 있는지를 22가지 감성스타일에 비추어 구체적으로 알려준다

 

 

 

7장에 가면 가장 아름다운 울림이자 이유 있는 끌림인 어울림으로 드러나는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자기만의 스타일을 살려서 옷을 입기위해 스타일 검진을 받고 나면 나에게 어울리는 옷, 자기다움을 가장 아름답게 드러내는 감각적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어울리는 옷을 입으면 자연스럽게 자기다움이 드러나고 묘하게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카리스마나 아우라가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우리 모두는 저마다의 스타일로 아름답다. 타인의 아름다움은 나에게 어울리지 않는 추함으로 변질될 수도 있다. 나에게 맞는 아름다움은 오로지 경험적 미학으로 감각하는 체험적 깨달음을 통해서만이 알 수 있다는 게 9장의 주장이다.

 

10장은 이 책의 화룡점정 일보 직전에서 보여주는 아름다움의 궁극적 종착역이다. 그 종착역이 바로 사람의 품격을 드높이는 우아함이다. 아름다움의 아우라가 저절로 드러나는 미적 감각이자 자신도 모르게 공감되는 영감이며,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관능미가 바로 우아함이다. 우아한 사람은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자신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옷으로 힘입기를 한 사람이다.

 

마지막으로 이 책은 옷입기 매뉴얼은 없다는 주장을 펼친다. 천차만별의 다른 옷도 문제지만 사람이 어떤 공간에서 무슨 목적으로 옷을 입을 것이며, 그날 분위기와 다른 사람과 만남양식에 따라서 같은 옷을 입어도 전혀 다른 감각적 경험으로 내 몸이 놀라는 경우가 많다그래서 저자는 감각적 각성 없는 충동구매는 마치 '히어로의 전투복'을 잘 못 입은것과 다름 없다고 힘주어 말하는 이유다.옷입기는 육감각을 동원하여 마치 동일한 악보도 연주자에 따라 다르게 연주하는 템포 루바토처럼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변주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단순한 옷입기 책인 줄 알았지만 다 읽고나니 진정한 자기다움으로 가장 아름다운 우아함에 이르는 긴 자기발견의 여정에 관한 책임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사치스럽게 꾸미는 옷 입기에서 가치 있게 가꾸는 옷 입기로 에필로그를 맺으려는 저자의 의도를 알게되었다. 아무 옷이나 마구잡이로 사서 누군가의 대책 없는 조언을 따라 옷을 입었던 사람들에게 이 책은 진정한 자기발견의 출발점이자 촉발점을 알려주는 인문학적 옷입기 필독서가 아닐 수 없다.

자기다움을 찾은 사람, 옷 입기부터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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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리다와의 데이트 - 나는 애도한다, 고로 존재한다
강남순 지음 / 행성B(행성비)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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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데리다를 데리고 다닐 때마다 언제나 처음이다

데리다와의 데이트: 나는 애도한다, 고로 존재한다와 데이트 하면서

 

 

 

철학자의 주특기는 일반인이 이해하기 어렵게 쓰는 천부적인 재주다. 특히 들뢰즈를 비롯해 데리다와 같은 프랑스 철학자는 낯선 개념을 끊임없이 창조할 뿐만 아니라 문장도 난해하기 이를데 없는 경우가 많다. 들뢰즈는 아예 철학의 임무는 새로운 개념을 창조하는 일이라고 했다. 흔히 해체의 철학자라고 불리는 자크 데리다도 몇 권의 책을 사놓고 몇 번에 걸쳐 통독에 도전해도 여전히 난공불락의 문을 열어주지 않는다. 좌절감을 맛볼수록 더 알고 싶고 알아야만 된다는 강박적 의무감마저 갖고 있다. 데리다의 해체 철학을 제대로 배워보고 싶은 욕망의 물결이 강남순 교수의 데리다와의 데이트라는 책과 조우하면서 나와 무관하면서 난해한 지성으로만 생각했던 데리다가 갑자기 눈물과 기도, 연민과 환대를 품은 시인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이렇게 된 사연과 배경에는 데이트라는 메타포가 자리잡고 있다. 역시 메타포는 배움의 대포임에 틀림없다. 철학교수가 철학자를 만나 데이트한 경험을 진솔한 깨달음의 언어로 독자를 안내하고 있다. 삶에서 건져 올린 앎으로 데리다와 데이트하면서 새롭게 바라본 철학자 데리다는 우리가 흔히 관념적으로 생각하는 난해한 철학자만은 아니었다. 철학의 궁극적 임무도 우리가 살아가는 삶을 어제와 다르게 조명해보고 새로운 질문을 품고 성찰하는 삶으로 이끄는데 있음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주기도 했다.

 

나는 애도한다. 고로 존재한다.

 

데리다와 데이트에 빠져들려는 순간 눈앞에 아른 거리는 문장이 바로 나는 애도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문장이다. 이 책의 부제목이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데카트르는 존재론적, 개체론적 인식론의 한계를 정면으로 드러내는 선언이라면 데리다의 나는 애도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선언은 인간으로 기본적으로 누군가와의 관계 속에서 애도하는 인간일 때 비로소 인간관계 속의 인간의 살아감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데카르트의 존재론적 선언을 데리다 입장에 비추어 볼 때, 함께 살아가는 공존과 관계로서의 인간적 미덕과 이상은 발견할 수 없다. 인간은 단순히 사유하는 존재를 넘어선다. 인간은 사유 주체를 넘어 공존의 주체(the subject of coexistence), 즉 타자의 아픔에 애도하는 주체(mourning subject). 애도한다는 의미는 항상 타자와의 관계를 전제하는, 단순히 사유하는 독립적 주체로서의 인간을 넘어서는 새로운 시선이다. 타인의 아픔에 무관심하지 않고 나와 너의 관계 속에서 함께--살아가려는관심과 애정의 연대가 구축되는 과정이 바로 애도하는 순간이다. 따듯한 눈길과 손길로 보살피며 깊은 애정과 관심으로 인간관계를 맺어갈 때 연민의 연대가 자연스럽게 구축되면 애도하는 인간으로 거듭난다.

 

저자는 데리다 철학을 만나는 하나의 방법으로 데리다와의 데이트라는 컨셉을 제시했다. 데이트 메타포는 난해한 데리다 철학자의 사상적 깊이를 애정과 관심을 갖고 이해하는 여정으로 부드러우면서도 한번 읽기 시작하면 빠져나오기 힘들 정도의 깊은 유혹임에 틀림없을 정도로 강력했다. 400 페이지가 넘는 책을 틈틈이 읽었지만 하루 종일 통독하는 기쁨을 선물로 받았다. 우리가 철학자를 만나는 이유는 저마다 다르다. 마찬가지로 데리다를 왜 읽어야 하는가는 질문에도 대답은 저마다 다를 것이다. 저자는 왜 데리다인가?”라는 보편적 질문보다 데리다는 나에게 왜 중요한가?”로 되물어볼 때 데리다와 만나는 색다른 가능성의 문이 열린다고 한다. 왜냐하면 모든 읽기는 읽는 사람의 문재의식이나 경험과 가치관의 차이로 똑 같은 책을 읽어도 저마다 다르게 읽히는 자서적 읽기이기 때문이다. 데리다를 왜 읽어야 되는지에 대해서는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단 한 가지 일반적인 답은 존재하지 않는다. 저마다의 이유로 데리다와 데이트를 시작하면 저마다 다른 데리다를 만날 수 있다.

 

철학자의 사유체계와 만나 나를 업데이트하는 방법은 데이트.

 

데리다는 우리가 사용하는 개념을 두 가지로 나눈다. 하나는 인용 부호가 없는 개념이고 다른 하나는 인용부호가 있는 개념이다. 인용부호가 없는 개념은 아무런 의문을 던지지 않고 평상시 사용하는 무수한 개념이고, 인용부호가 있는 개념은 평범한 개념에 대해 의문을 품고 문제의식을 더해 이전과 전혀 다른 개념으로 재탄생시킨 개념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개념을 인용부호 속에 넣는 순간, 그 개념은 우리의 비판적 조명의 대상이 된다”(81). 인용부호가 있는 개념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강남순 교수가 말하는 의도적 망각(active forgetting)’을 실천할 필요가 있다. 의도적 망각이란 개념에 대한 기존 인식이나 통념을 괄호 속에 가둬놓고 기존 개념이 품고 있는 고정적 의미를 전혀 다른 각도에서 재음미해보고 재정의하려는 노력이다. 평범했던 개념이 데리다의 손길을 거치면 전혀 다른 의미를 잉태하고 있는 낯선 개념으로 탄생된다. 개념에 대한 통념이 무너지면서 색다른 신념이 싹트는 순간이다. 데리다는 물론 신념이 무조건적 신앙으로 돌변하면서 불변하는 고정적 진리로 자리잡는 것에 대해서는 비판의 칼을 여지없이 들이대고 해체를 시작한다. 개념의 재개념화가 이루어지면서 기존 개념으로 바라보던 세상과는 전혀 다른 세상으로 다가오기 시작한다.

 

낡은 생각을 품고 있는 개념을 익은 생각을 품고 있는 날 선 개념으로 재창조하려는 노력이 데리다의 모든 저작에 숨어 있다. 인용부호가 없는 개념을 끊임없이 만들어내려는 노력은 범주화(categorization)’ 또는 범주화 열병(categorization fever)’에 대한 데리다의 또 다른 문제의식과 연결되어 있다. 예를 들면 동물이라는 범주가 생기면 소, , 돼지, 참새, 고슴도치, 원숭이, 사자, 호랑이와 같은 모든 동물은 하나의 범주 속에 들어가면서 동물들이 지니고 있는 저마다의 고유한 개성은 상실되기 시작한다. 동물이라는 하나의 범주에 포함되면서 동물마다 고유한 다름과 차이는 동질화(homogenization)되고, 고정화(staticization)되며, 과대 단순화(oversimplification)되어, 동물마다 지니고 있는 사회역사적 탄생배경이나 진화과정이 비역사화(unhistoricization)된다. 동물이라는 개념을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사용하다가 데리다가 창안한 인용부호가 있는 개념에 집어넣는 순간,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오기 시작하며, 동일한 범주 속에 갇혀 신음하던 동물에 대한 기존 개념들의 아픔이 가슴으로 느껴진다. 동물이라는 범주에 갇혀 저마다 다른 자기 정체성이 동물이라는 범주화에 가로막혀 자기상실의 아픔을 겪고 있는지 범주를 만든 사람은 모르고 살아간다.

 

존재한다는 것은 상속받는 다는 것이다.

 

데리다는 무의식적으로 사용하는 개념, 인용부호가 없는 개념인용부호가 있는 개념으로 위치지우고 그 의미를 반추하며 물어보기 시작한다. “무엇보다 데리다는 특정한 개념에 대한 우리의 인지 세계를 흔들고 뒤집는다. 그러나 그 불편함을 통하지 않고서 새로운 통찰이나 인식을 불가능하다”(60). 예를 들면 상속하면 떠오르는 단어는 유산 상속이다. 인용부호가 없었던 상속이라는 개념을 인용부호가 있는 상속개념으로 위치지우는 순간, 상속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상속 수혜자가 적극적으로 묻고 딜레마를 해결할 대안을 모색하는 과제를 수행하지 않을 수 없는 개념으로 바뀌어 다가온다. 상속은 수동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해석해내야 될 과제다. 니체도 사실은 없고 해석만이 존재한다고 주장했던 것처럼 내가 몸담고 있는 전통적 규범과 가치관, 문화와 제도 역시 나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해석하고 나의 삶에 비추어 그 의미를 매일 실천해야 되는 필생의 과업인 셈이다. 유산 상속자로 살아가는 우리는 상속받는 제도나 시스템, 문화나 사유체계에 담긴 의미를 지속적으로 되새기면서 그것이 지향하는 의미나 가치를 지금 여기서 지속적으로 성찰하는 과정을 반복할 필요가 있다.

 

데리다의 책을 통해 데리다가 건축한 사유체계로 잠입해서 들어가는 순간 데리다가 남긴 수많은 사상적 기반은 나의 삶에 비추어 재해석해서 적용하고 실천해야 할 상속으로 다가온다. 우선 데리다와의 데이트라는 책에 빠져 이 책의 저자가 경험했던 데이트를 물흐르듯 따라가면서 중요한 개념과 주장을 메모하고 나의 생각을 틈틈이 기록해두었다. 데리다 유산을 상속하는 첫 번째 과제는 데리다가 남긴 사상적 전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수많은 개념이 어떤 문제의식을 갖고 태어났으며, 그 때 데리다가 품었던 철학적 지향성은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를 스스로에게 물어보는 것이다. 데리다 유산 상속의 첫 번째 과제가 긍정과 수용이었다면 번째 과제는 비판적 문제제기를 통해 데리다가 남긴 개념과 주장을 나의 삶에 비추어 재해석해보고 나의 언어로 내 삶을 재진술해보는 노력이다. 모든 읽기는 자신의 체험적 배경과 인식적 기반에 비추어 읽어내는 자서전적 읽기다. “내가 칸트를 읽을 때마다, 그것은 언제나 처음이다라고 고백한 데리다처럼, “내가 데리다를 읽을 때마다, 그것은 언제나 처음이다라고 고백한 강남순 교수처럼 나 역시 데리다와의 데이트를 읽을 때마다. 그것은 언제나 처음이다. 데리다와의 데이트가 매번 다른 감각적 깨달음을 다르게 주듯이, 데리다의 사유체계를 상속하는 경험도 매번 다른 생각과 느낌으로 다가오는 영원한 현재진행형 프로젝트가 될 것이다.

 

나는 태어났다가 아니라 나는 태어난다.

 

나는 태어났으면 태어난 상태로 정체성을 띠는 게 아니다.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나와 다르고 내일의 나는 오늘의 나와 다를 것이다. 온전한 나를 총체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영원한 미완성이다. 앞으로도 계속 태어남을 거듭하면서 미결정성으로서의 정체성을 다르게 형성할 것이다. 고정된 나는 없다. 데리다는 고정된 의미를 품고 시공을 초월해서 진리로 통용되는 것은 없다고 한다. 데리다의 독특한 철학적 사유체계를 관통하면서 나름의 통찰력을 얻기 위해서는 몇 가지 사전에 이해할 개념이 있다. 난해한 데리다 저서를 읽어내는데 자주 등장하는 개념들이다. 그 중에 한 가지 개념이 더블 제스처(double gesture)라는 표현이다. ‘한편으로는(on the one hand)’ 시작하는 문장과 또 다른 한편으로는(on the one hand)’이라는 문장을 연결시키는 방법이다. 한편으로는 이미 태어난 나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면서도 또 다른 한편으로는 앞으로 도래할 나의 새로운 가능성에 주목하면서 나를 이해하는 노력이 필요한 이유다.

 

한편으로는 기존 교육 개념에 대한 긍정적 측면을 부각시키면서도 또 다른 한편으로는 기존 교육개념이 태생적 한계나 문제점을 드러냄으로써 제3의 교육 개념을 모색하는 물꼬를 트는 전략에 적용해도 데리다의 개념은 의미심장한 깨달음을 준다. 비슷한 맥락에서 데리다는 더블 바인드(double bind)라는 개념도 제시한다. 나를 끊임없이 이해하려는 노력도 필요하지만 한 편으로는 나를 완벽하게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필요성(necessity)과 불가능성(impossibility)의 두 축으로 사물의 본질적 속성을 이해하려는 노력이다. 교육을 통해 인간적 변화를 추구할 분명한 필요성을 탐구하는 노력과 더불어 교육을 통해 인간을 변화시키는 노력의 불가능성을 함께 생각해보자는 개념이다. 흑백논리에 익숙한 이분법적 사유의 한계를 지적하면서도 그것을 뛰어넘을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는 개념이다. 데리다는 또한 만약 그러한 것이 있다면(if such a thing exist 또는 if there is such a thing)”이라는 표현을 차용함으로써 기존의 정의방식을 따를 경우, 특정한 개념 자체가 당연히 가능한 것으로 전제하면서 정작 그 개념 자체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을 생략하는 오류를 막을 수 있다고 한다.

 

텍스트 바깥에는 아무것도 없다.

 

저자는 데리다와 본격적으로 데이트를 시작하기 전에 데리다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한 일곱 가지 읽기 방식을 제안한다. 우선 알고 있다는 생각을 잠정적으로 괄호 속에 넣고 생전 처음 만나는 것처럼 새롭게 경험하는 게 중요하다고 한다. 둘째로, 데리다에 관한 해설이나 해석을 읽는 노력보다 데리다 쓴 원전의 몇 문장만이라도 반복해서 읽어야 남이 해석한 데리다의 사유에 종속되지 않는다. 셋째, 데리다 책은 페이지마다 숨겨져 있는 의미의 껍질을 깨고 들어가 천천히 음미하면서 읽는 질적 읽기를 하지 않으면 아무리 많이 읽었다고 해도 무용지물이 될 수 있다. 넷째, 부가적 읽기는 데리다 저서에서 만나는 개념과 연관된 다른 사상가의 개념을 읽으면서 해당 개념이 탄생한 문제의식이나 배경을 함께 읽어내려는 노력이다. 다섯째, 책에 나오는 구체적인 개념의 의미나 다른 개념과의 연관성을 비교하고 분석하면서 읽는 미시적 읽기와 이 책의 문제의식이 태동한 사회역사적 배경이나 전체적인 구조적 연관성을 따져서 읽어보는 거시적 읽기를 융합해야 비로소 포괄적 읽기가 가능해진다. 여섯째, 개념목록을 만들면서 책을 읽는 것이다. 다른 철학자와 마찬가지로 데리자 역시 자신이 품고 있는 문제의식을 풀어내는 고유한 개념을 새롭게 창조하는 경우가 많다. 모든 개념은 그 개념이 품고 있는 문제의식과 새로운 세계를 품고 있다. 개념을 안다는 것은 그 개념이 품고 있는 새로운 세계와 만나는 일이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아무리 책을 빠져서 읽어도 책을 다 읽은 다음 빠져나와서 그 책이 던져주는 의미와 시사점은 내 삶에 비추어 볼 때 어떤 의미가 있고, 어떻게 내 삶에 적용할지를 따져보면서 책이 말하는 대로 직접 실천하는 과정이 다를 때 비로소 읽기는 의미심장하게 다가오는 것이다.

 

이러한 읽기는 단순히 문자로만 된 텍스트를 읽는 걸 의미하지 않는다. 현실 세계에서 벌어지는 모든 사건과 사고, 사물이나 현상의 복잡한 상호작용으로 드러나는 모든 일상에서 만나는 마주침도 다 텍스트다. 읽기는 책 읽기를 넘어서 사람 읽기이고 세상 읽기다. 데리다가 텍스트 바깥에는 아무것도 없다(There is nothing outside text)”고 말한 이유다. 내가 만나는 세상이 모두 텍스트이고 텍스트를 발생시키는 세상은 또한 콘텍스트이기에 데리다는 나중에 콘텍스트 바깥에는 아무것도 없다(There is nothing outside context)”라는 말을 덧붙인다. 이런 텍스트를 해석하는 읽기는 자서전적 읽기다. 동일한 텍스트를 읽어도 그 텍스트를 읽고 이해하는 사람의 경험과 가치관과 문제의식에 따라 철저하게 개별적으로 읽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텍스트 읽기는 개별적 사건으로서의 읽기로 연결된다. 동일한 책을 지금 읽을 때와 나중에 읽을 때 그 읽기는 동일하게 다가오지 않고 매번 다르게 읽히는 개별적 사건이다. 사건은 대체불가능하고 반복할 수 없는 고유한 개별적 경험이기 때문이다. 텍스트는 인내심을 갖고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지 정밀하게 읽지 않으면 텍스트가 함의하고 있는 의미의 껍질을 깨고 속내를 보여주지 않는다. 이런 모든 읽기는 해체적 읽기로 귀결된다. 읽기를 통해서 발견한 의미는 언제나 다르게 다가오고 지금 여기서 그 의미를 고정된 형태로 결정하지 않고 시간적으로 끊임없이 연기시켜 놓아야 한다. 해체적 읽기는 책으로 만나는 모든 의미는 고정된 명사가 아니라 부단히 의미변화가 일어나는 동사로서의 비결정성을 띤다는 전제로 이루어지는 읽기다.

 

해체는 방법이 아니라 사건이다. 해체는 키스다.

 

이 책을 읽으면서 크게 깨달은 것 중의 하나가 바로 데리다의 해체(deconstruction) 개념이다. 내가 그동안 이해했던 창조적 파괴나 탈구성적 해체와 같은 개념과는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는 개념이었다. 해체 개념에 대한 데리다의 근본적인 문제의식은 의미구조가 고정되는 것, 보편적인 것으로 되는 것, 또한 그 의미구조가 탈역사적(ahistorical)이라는 전제를 근원적으로 비판”(197)하는 데 있다. 해체에 대한 또 다른 오해는 해체를 방법이나 어떤 이론 또는 주의(ism)’, 예를 들면 해체주의로 해석하는 것이다. 해체를 이렇게 해석하는 순간 고정된 도식이나 결정된 논리체계를 따라야 한다는 암묵적 전제를 갖게 된다. 해체는 사건이다. 사건은 두 가지 독특한 특성을 담고 있다. 첫째는 대체 불가능성(irreplaceability)이고 둘째는 반복 불가능성(unrepeatability)이다. 해체를 하나의 방법이나 이론으로 간주하면 해체 작업을 할 때마다 방법과 이론이 처방해주는 절차나 순서를 따라가면 된다는 전제나 가정을 담보하고 있다. 하지만 사건으로서의 해체는 매번 새롭게 전개되기 때문에 지금 이 순간의 해체를 다른 그 무엇으로도 대체가 불가능하며, 다른 어디에서도 반복해서 추진할 수 없다.

 

사건으로서의 해체는 연인과의 키스에 비유할 수 있다. 연인과 마주하는 키스는 오늘과 내일이 같을 수 없다. 오늘 한 키스의 감각적 느낌은 절대로 반복될 수 없고 대체할 수 없다. 오늘 한 키스는 영원히 반복될 수 없는 개별적 사건이다. “진정한 키스란 서로의 존재를 함께 나누고자하는 사랑, 갈망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언제나 (more)’가 있음을 생각하고, 언제나 더 있음(ever more-ness)’을 갈구하고 추구하는 것, 결코 끝나지 않는 사건이 바로 해체인 것이다”(202). 오늘 연인과 나눴던 달콤한 키스를 돌이켜 생각하면서도 내일은 오늘보다 더 멋진 키스를 상상하는 경험, 진정한 키스 경험은 아직 도래하지 않은 꿈이라고 미뤄두는 기다림과 그리움에 키스는 늘 어제와 다르게 태어나는 사건이다.

 

데리다의 해체는 아직 오지 않은 그 무엇, ‘도래하는 것을 기다리고 긍정하는 사건이다”(222). 해체는 완벽하게 끝나는 결과나 성과로 판단할 수 있는 일기가 아니다. 해체는 영원히 마무리 할 수 없는 미완성이다. “사건으로서의 해체는 언제나 다가올 세계, 또한 보다 더(more)를 추구하고 갈망하는 불가능성에의 열정의 촛불을 켜는 소중한 생명 긍정의 초대장이다”(222). 의미의 고정성이나 결정성을 인정하지 않고 끊임없이 시공간을 열어놓고 탐구하는 열정의 근간에는 사랑이 매개되어 있다. 데리다에게 모든 개념은 고정된 의미를 품고 잠자는 명사가 아니다. 시공간을 바꿔가면서 끊임없이 재생산되는 동사다. “해체란 언제나 이미 일어나고 있는 사건이며...이제 충분하다가 아니라, 언제나 (more)’에 대한 갈망을 품고 있다. 해체는 허무주의적 파괴가 아니라, 고도의 긍정의 제스처”(382). 여기서 긍정의 의미도 기존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거나 인정(positive)하는 노력 또는 긍정과 부정의 이분법적 분리를 통한 긍정의 의미를 넘어선다. 데리다 말하는 긍정은 다름과 차이를 차별하지 않고 끌어안고 보듬으면서 제3의 대안을 모색한다는 어퍼메이션(affirmation)이라고 할 수 있다.

 

해체라는 개념은 삭제 아래(under erasure)’라는 개념과 만나면서 더욱 구체적인 실천성을 띤다. 삭제 아래는 우리에게 익숙한 개념에 붙박혀 있는 고정관념이나 틀에 박힌 관습적 사유를 뒤흔들어 고정성을 띠고 오랫동안 우리들의 사고를 지배해온 통념을 깨부수고 이전과 다르게 의미를 부여하는 활동이다. 예를 들어 종교를 삭제 아래 두면(삭제 아래 종교) 기존 종교에 대한 통념에서 벗어나 새로운 개념으로 탈고정화과정을 거친다. 삭제 아래 종교가 자리잡는 순간 데리다가 말하는 인용부호 없는기존 종교 개념에서 인용부호가 있는종교 개념으로 새롭게 부각된다. 삭제 아래 자리에 익숙한 개념이 들어가는 순간, 고정된 의미로 사용되던 개념은 끊임없이 다른 의미로 거듭나면서 언제나 이미미결정성의 개념, 도래할 개념으로 부각될 뿐이다. 삭제 아래라는 개념은 데리다의 또 다른 개념, X 없는 X라는 개념과 연결시켜 생각해보면 훨씬 이해가 빠를 것이다. 예를 들어 교육 없는 교육이라고 한다면 첫 번째 나오는 교육은 인용부호가 없는 전통적인 의미의 교육이고, 두 번째 나오는 교육은 삭제 아래라는 개념에 들어가 새로운 교육적 개념으로 재개념화되면서 인용부호가 있는교육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교육 없는 교육에 익숙하게 자리잡은 모든 개념을 집어넣고 해체하면서 고정된 명사로서의 의미를 끊임없이 다르게 탐구하고 시간적으로 연기해놓는 차연의 활동을 반복할 때, 교육에 대한 해체는 어제와 다른 차이를 반복하면서 부단히 일어나는 사건이 되는 셈이다.

 

차연(differAnce)은 사전에 대한 저항이다.

 

사전에 정의된 의미는 고정된 형태로 사전 속에 죽어있다. 아무 때나 다시 들여다봐도 개념에 대한 정의는 늘 불변하는 상태로 잠자고 있다. 차연(differAnce)은 공간적으로 다르고(differ) 시간으로 연기(defer)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개념이든 현상이든 그 의미를 지금 여기서 알아보는 것과 다른 곳에서 그 의미를 재고해보는 것은 언제나 같을 수 없다. 늘 다른 의미로 다시 태어난다. 시간적으로 오늘 특정 단어의 의미를 규정한다고 내일도 그 의미 상태로 고정될 수 없다. 시간이 지나면서 모든 개념은 어제와 다르게 오늘 새로운 모습으로 내 앞에 나타난다. 차연으로 그래서 개념적 차이점을 오늘 여기서 규정하지 말고 연기해놓자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온전한 의미를 지금 여기서 완벽하게 규정할 수 없다. 데리다가 의미는 언제나 도래한다고 주장하는 이유다. 데리다 이름처럼 사전 속에서 잠자고 있는 고정된 개념적 의미를 여기저기로 데리고 다니면서 의미상의 차이를 끊임없이 탐구하는 지극한 사랑과 열정이야말로 차연이 내포하는 가장 소중한 함의다. 내가 사람이나 대상을 사랑하지 않으면 호기심과 질문이 없어지고 어제와 다른 의미탐구 여행을 시작하지 않는다. 비록 어떤 개념이나 현상의 의미를 영원히 알 수 없는 불가능한 영역이라고 할지라도 미지의 세계에 대한 탐구를 멈추지 않고 계속하는 이유는 알고 싶다는 호기심을 넘어 탐구 자체를 사랑하고 식지 않는 열정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데리다는 자서전적 읽기를 강조하면서 누군가 자서전을 써도 온전히 자신을 다 담아낼 수 없다고 한다. 나에 대한 온전한 이해도 끊임없이 달라지기 때문이고, 시간적으로 연기되기 때문이다. 차연은 의미의 비결정성을 내포한다. 나에 대한 의미는 영원히 결정될 수 없다. 공간적으로 다른 의미의 결정체로 끊임없이 변신을 거듭하면서 다가오고, 시간적으로 그 의미의 열린 가능성을 열어놓고 무한정 지연시켜 놔야 하기 때문이다. 데리다의 비결정성은 결정할 수 없기 때문에 여기까지의 노력을 끝으로 개념적 의미를 더 이상 탐구하지 않겠다는 무관심이나 게으른 포기 선언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비결정성은 불가능한 것에의 열정’, 그리고 정의를 향한 갈망이다”(356). 데리다에게 비결정성은 엄밀히 말하면 결정할 수 없는 것에 대한 겸허한 인정과 수용이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가능한 앎의 세계에 도달하려는 치열한 열정이다 데리다가 신앙을 무엇인지 내가 알지 못하는 그 어떤 것에 대한 열정(371)”이라고 해석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미지의 세계를 알고 싶은 열정으로서의 신앙은 새로운 세계, 불가능성의 세계, 도래할 세계(the world to-come)의 희망과 약속을 동시에 담고 있다”(375

 

데리다의 차연 개념에 비추어 전문가를 새로운 의미로 탄생시킨 개념을 브리꼴레르라는 책에 소개한 적이 있다. 전문가와 전문사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를 존중해주고 내가 갖고 있지 않은 다른 사람의 전문성을 나의 전문성과 융합, 새로운 지식을 끊임없이 창조하는 사이 전문가(homo differAnce). 생각하는 인간(homo sapiens)처럼 전문가 사에 존재하는 차이를 끊임없이 탐구하는 사이 전문가는 데리다의 차연(differAnce) 개념을 호모와 융합, 새롭게 창조한 신조어다. 한 분야만 깊이 파다가 기피 대상이 되거나, 자기가 판 우물에 매몰되는 좌정관천의 어리석음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나의 전문분야와 다른 분야에서 깊이 파는 전문가와 자주 만나서 소통하면서 내가 모르는 세계를 배우려는 겸손한 자세가 필요하다. 전문가에 대한 정의도 한 분야를 깊이 파는 사람이라고 정의하는 순간, 새로운 전문가, 아직 만나보지 못한 전문가, 미래에 도래할 전문가의 의미를 포착할 수 없다. 과거에 내가 만난 전문가, 오늘 만나는 전문가의 이미지로 전문가의 의미를 온전히 파악할 수 없다. “온전한 의미란, 만약 그것이 존재한다면, 언제나 도래하는 것이다”(213). 가능성의 문을 활짝 열어놓고 지금까지의 전문가와는 전혀 다른 전문가를 만나는 미래가 있다는 사실에 심장이 뛰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는 환대가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나는 환대한다. 고로 존재한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환대는 데리다 사상체계를 구축하는 가장 핵심적인 개념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데리다는 갑자기 왜 언어는 환대라고 했을까.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언어는 영어다. 한국에서 한국말로 다른 사람을 초대하면 나는 주인으로서 행세하지만 영어가 모국어인 미국에 가면 나는 손님을 넘어 주변인으로 전락한다. 모국어가 통용되는 곳에서 나는 주인으로 손님을 환대할 수 있지만 모국어가 통용되지 않는 다른 나라고 가면 나는 완전히 주변인으로 전락하면서 환대 밖에서 방황할 수밖에 없다. 내가 잘 할 수 있는 모국어로 손님을 초대하는 사람 입장에서 환대를 베푼다고 해도 그 환대에 담긴 개인적 차원의 배려는 물론 국가적 차원에서 베푸는 정치적 의미상의 미묘한 차이를 다 알 수 없다. 데리다가 우리는 환대가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234)”고 한 이유다. 환대는 환대가 이루어지는 컨텍스트에서 생각지도 못한 경험이 부각되는 텍스트이기 때문이다. 환대를 알지 못하는 이유는 환대가 언제나 사건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진정한 환대란 언제나 아직 아닌, 우리의 이해력 너머에 있는 도래할 환대(hospitality to-come)’의 사건이다”(240).

 

이 말은 환대에만 적용되지 않는다. 사랑, 열정, 행복, 도전, 신뢰를 비롯 우리가 사용하는 거의 모든 추상명사에 해당된다. “사랑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도 마찬가지다. 사랑은 인지 세계 내부에서 일어난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인식행위가 아니다. 저마다의 애정과 관심의 연대망에서 천차만별의 다른 상황에서 어제와 다른 사랑을 구체적으로 경험하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사건은 반복 불가능성과 대체 불가능성을 함의하고 있다. 사랑은 언제나 우리의 이해력 너머에 있는 도래할 사건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의 사랑과 차원이 다른 또 다른 사건이 언제 어디서 일어날지 예측할 수도 없고 어제의 사랑과 똑같은 사랑의 경험을 감각적으로 지각할 수 없다. “환대란 언제나 특정한 정황 속에서 논의되어야 한다”(244).

 

데리다의 문제의식과 마찬가지로 나에게 교육은 아직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교육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도 교육은 이미 결정된 이상적인 상태의 정의가 있다는 가정을 내포한 질문이다. 이 질문을 데리다는 교육은 나에게 어떤 의미인가?”라는 방식으로 되물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교육도 인지구조의 변화나 사고방식의 변화처럼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개념체계의 변화과정을 지칭하는 말이 아니다. 교육은 언제나 특정한 정황 속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교육장면에 참여하는 가르치고 배우는 사람은 모두 저마다의 고유한 1인칭 시점에서 경험하는 자서전적 깨달음을 얻는다. 교육적 경험은 일반화시킬 수 없는 개별적이고 단독적인 경험이다. 그 경험은 심지어 언어로 온전히 번역해서 표현할 수 없는 독특한 깨달음이자 심리적이고 신체적인 각성체험이다.

 

엘리베이터가 없는 3층 건물은 비장애인에게는 걸어서 올라갈 수 있기 때문에 적대적이지 않지만 장애인에게는 걸어서 올라갈 수 없는 적대적인 건물이다. 이런 점에 주목한 데리다는 적대와 환대를 이분법적으로 구분 할 수 없는 현실적인 문제의식을 품고 적환대(hospitality+hostility=hostipitality)라는 개념을 창안한다. “존재하기 전에 주차료를 지불하십시오(Please pay your parking fee before existing).” 이 말은 나가다(exit)라는 말의 ‘s’가 들어가서 존재하다(exist)’로 잘 못 표기된 것이다. 그리고 사진 위에는 나는 지불한다. 고로 존재한다(I pay. Therefore I am)”이라고 누군가 덧붙여 쓴 글귀가 붙어 있었다는 재미난 사례가 이 책에 나온다. 주차료를 지불하면 주차기계에게 환대를 받지만 지불 능력이 없으면 영원히 적으로 취급, 차를 밖으로 끌고 나갈 수 없게 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환대는 손님이 지불능력이 있을 때 주인에게 대접받을 수 있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주인이 원하는 만큼의 금전적 지불능력이 있으면 손님은 환대를 받지만 주인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할 때 손님은 환대에서 바로 적대적인 관계로 전락한다. 환대와 적대는 사전에 정해진 관계가 아니라 순간순간 바뀔 수 있는 비결정적 개념이다.

 

살아감이란 언제나 함께 살아감’, 나아가 함께--살아감이다.

 

데리다의 철학적 문제의식이 지향하는 곳은 어떻게 함께--살아갈 것인가라는 질문에 녹아들어 있다. 데리다가 말하는 함께 살아감은 인식과 관심을 같이하는 공동체 구성원이 끼리 끼리 어울려 살아감을 의미하지 않는다. 데리다가 진정으로 의도하는 함께 살아감은 나와 인식과 관심은 물론 종교, 인종, 가치관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상대의 아픔에 기꺼이 애도하고 연민하는 마음으로 연대를 이루어 살아가는 것이다. 동질성을 전제로 엮여 있는 공동체의 틀을 벗어나 다름을 차별하지 않고 존중하며 환대하며 서로의 아픔에 연민의 정을 품고 애도하는 더불어 살아감이 함께 살아감의 현실적 의미다. 함께 살아감은 더 이상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인식의 문제가 아니라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우리가 매일 매일 직면하는 난국을 돌파하고 서로가 손잡고 일궈 나가는 실천의 문제다.

 

함께 살아감의 근본적인 동력은 연민(compassion)에서 나온다. 연민에 해당하는 영어, compassion을 긍휼감으로 번역하고 강남순 교수가 번역한 동정(sympathy), 감정이입(empathy)을 각각 공감과 위로로 번역하는 사람도 있다. 어떤 말로 번역되든 sympathy는 아픈 감정을 공유하기는 하지만 머리로 이해하고 상대의 아픔을 치유하기 위한 구체적인 행동을 취하지는 않는다. 누군가 돌아가셨을 때 조의금을 내는 것으로 상대의 슬픈 심정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동정이다. 동정심이 발현되는 근간에는 동정 받는 너는 동정심을 베푸는 나에 비해 위계적으로 바닥에 놓여 있다는 심리적 우월주의가 숨어 있다. 이에 비해 감정이입이라고 번역되는 empathy는 동정처럼 동정심으로 심리적 위로를 받는 시혜자와 수혜자의 위계적 관계를 상정하지 않는다. 타인의 아픔을 나의 아픔처럼 끌어안고 체중이 실린 언어로 상대와 함께 살아가려는 마음을 온몸으로 보여준다. 상대의 감정 속으로 나의 감정도 이입되어 상대의 아픔으로 머리로 계산하지 않고 가슴으로 받아들이려는 안간힘이 바로 감정이입이다.

 

이에 반해 연민은 강남순 교수에 따르면 타자의 고통에 대면해서 고통을 제기한 원인을 제거하기 위한 적극적인 행동을 감행하면서 함께 살아감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애쓰기다. 연민은 동정과 감정이입과는 다르게 감정적 반응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이어지게 하는 힘”(276)이 있다는 점에서 전자의 두 가지 개념과 확연하게 구분된다. 연민은 타자의 고통을 인지적으로 이해하는 노력을 넘어서 상대의 고통이 나의 고통임을 몸으로 받아들이고 그 고통을 치유하기 위해 기꺼이 실천으로 옮기려는 비판적 행동주의(critical activism. 함께 살아가면서 발휘되는 연민은 관념적이고 인식론적인 문제가 아니라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매일 매일 결단을 내리고 행동으로 옮기는 실천의 문제다. 연민의 정을 나누면서 이루어지는 함께--살아감은 나와 전혀 다른 사람은 물론, 내가 아직 모르는 사람, 이미 과거로 돌아간 사람까지도 포함한다. 이런 사람과 잘 살아간다는 문제는 현재의 자신은 물론 과거의 자신과 다가오는 미래의 자신과도 함께 살아간다는 의미다. 생각보다 다양한 어려움과 직면할 수밖에 없다는 불확실성을 내포한다.

 

애도는 기억이자 책임성이다

 

“‘함께 살아감은 함께 고통함의 의미를 지닌 연민’, 그리고 상실에 대한 아픔을 드러내는 애도와 분리할 수 없다. 너와 나의 관계가 형성되자마자 애도는 시작된다”(288). 애도는 세상은 나 혼자 살아간다고 생각하는 사람에는 필요없는 인간적 미덕이다. 애도는 나는 누군가와 함께 살아가는 관계론적 존재임을 자각할 때 비로소 다가오는 숭고한 윤리적 결단이자 정치적 실천이다. 인간으로 살아간다는 의미는 나와 더불어 이 세상을 살아가는 다른 사람의 아픔에 기꺼이 감응하고 책임감을 지닌다는 의미다. 책임감을 의미하는 영어 단어, ‘responsibility’도 타자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 반응(response)’하는 능력(ability)’을 의미한다. 책임감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미묘한 움직임도 한 눈 팔지 않고 깊은 관심을 갖고 바라보기 시작한다. 다른 사람이 보여주는 작은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 순간 내가 어떤 반응을 보여주는 것이 상대를 진정한 마음으로 보살피는 행동인지를 심사숙고하고 주어진 상황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대안을 모색한다. 데리다가 애도는 먼저 떠난 사람을 기억하고 동시에 그 떠난 사람이 못다 한 삶까지 살아내는 책임성을 의미한다(288)”고 정의한 이유를 주목해보면 우리가 흔히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애도 개념과 근본적으로 다른 의미를 내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데리다에게 애도는 나보다 먼저 살아간 사람의 치열했던 삶의 족적으로 더듬어 알아보고, 그들이 이루고 싶었던 꿈이 무엇인지, 왜 그런 꿈을 이루지 못했는지를 주어진 사회역사적 역학관계 속에서 파악해보려는 노력으로 시작된다. 그들이 못다 한 삶까지 끌어안고 지금보다 더 멋진 세계, 앞으로 도래할 세상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구체적인 책임과 역할을 고뇌하고 결단하며 실천하는 과정이 바로 데리다가 말하는 애도의 진정한 의미다. 함께--살아감은 살아감을 넘어 살아남음에 담긴 비장한 각오와 책임감을 함의한다. 살아남은 사람은 먼저 살아간 사람의 족적을 더듬어 반추해보고 그들이 살고자 했던 세계를 함께 만들어가기 위해 치열하게 살아가려는 살아 남은자의 사투이자 안간힘이다. 이런 점에서 애도는 지금 이 순간 함께 잘 살아가기 위해 사투를 벌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을 향한 사랑의 표현이자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살아가기 위한 희망과 용기의 연대망을 구축하려는 인간 존재의 실존적 노력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인간의 실존적 노력을 포기하고 타자의 고통에 무관심하거나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는 수동적인 자세를 데리다는 인류에 대한 범죄의 시작이라고 강조한다.

 

나는 데리다와의 데이트를 읽을 때마다 언제나 처음이다

 

우리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데리다는 난해한 포스트모더니스트를 지향하는 철학자라기보다 환대의 예술가이며 시인”(263)이다. 데리다는 자신을 기도와 눈물의 사람(person of prayers and tears)(356) 주장한 바 있다. 절대적 확실성과 진리를 구원하기 위해 행하는 평범한 종교인의 기도와는 다르게 데리다의 기도는 여타의 확실성을 정지시켜놓고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도래할 신(a god to come), 절대적으로 알려져 있지 않은 비결정적 수신자의 이름”(359)에게 던지는 불가능성에의 열정이며 비결정성에의 열정’(359)이다.

 

반복 불가능하고 대체 불가능한 사건으로서의 해체를 평생 동안 추구해온 데리다는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철학자라기보다 사랑과 열정의 예술가이자 언제나 세상을 낯선 시선으로 바라보며 새로운 개념으로 다르게 바라보려는 시인에 가깝다. 이런 점에서 데리다는 주디스 버틀러가 말한 새로운 선생이며, 마이클 나스가 표현한 뛰어난 선생이다. 데리다의 시선(gaze)’은 언제나 당연함을 부정하는 낯선 시선이며, 고정된 의미를 무너뜨리고 색다른 의미체계로 건축하는 날선 시선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데리다의 시선은 세상을 낯설고 날 선 눈으로 바라보는 냉정한 지성주의자의 관점을 넘어선다. 언제나 를 바라보는 나의 시선를 바라보는 너의 시선이 맞닿으면서 함께 살아가려는 연민의 연대를 꿈꾸는 기도와 눈물의 시선이다. 우리가 해야 될 과제는 데리다가 남긴 유산을 상속받는 것이다. 데리다가 말한 대로 상속받는 것은 가만히 앉아서 수동적으로 얻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데리다가 남긴 사상적 족적으로 더듬어가면서 그것이 우리에게 던져준 의미가 무엇인지를 지금 여기서 재해석함은 물론 데리다가 꿈꾸었던 도래할 미래를 함께 건설하기 위해 분투노력하는 지상과제를 몸을 던져 수행하는 것이다. 데리다 강조했던 비결정성, 차연, 해체라는 개념에 비추어 보아도 그 누구도 데리다의 사상적 기반을 완벽하게 해석하는 완결성을 이룰 수 없다. 데리다가 남긴 유산으로서의 사유체계는 부단히 해체하지만 끝을 알 수 없는 비결정을 향한 열정의 대상이며, 영원히 온전한 앎의 총체성으로 정리해낼 수 없는 언제나 이미 도래할 유산(legacy to com)이다.

 

나는 데리다를 읽을 때마다, 그것은 언제나 처음이다라는 강남순 교수의 고백처럼 같은 맥락에서 나는 데리다와의 데이트를 읽을 때마다, 그것은 언제나 처음이다.” 다음에 다시 데리다와 데이트할 때는 이전과 다르게 설레는 마음으로 다시 만날 것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그리움이 스며들기 시작한다.

 

나는 데리다를 사랑합니다.

그리고 당신이 어디에 있든지 당신을 향해 미소 지을 것입니다.“

해체는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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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심는 CEO - 미래 경영에 자연의 가치를 심다
고두현 지음 / 더숲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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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름켜 경영으로 생태경영의 촛불을 밝히다

고두현 시인의 나무 심는 CEO를 읽고

 



CEO는 시이오(詩理悟)라고 작명한 적이 있다. 스티브 잡스가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에서 많은 영감을 얻었듯이 기업경영의 최고 자리에서 촌음을 다투는 의사결정과 과감한 행동을 통해 리더십을 발휘하는 최고경영자(CEO)에게는 늘 남다른 영감이 필요하다. 영감의 원천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시가 역발상이나 창의적 상상력을 자극하는 소중한 원천이 되는 이유는 사물이나 현상을 바라보는 눈이 다르고 세상을 묘사하고 기술하는 언어가 색다르다. 매번 반복되는 삶의 관성의 늪에 빠져 고정관념과 통념에 갇힌 언어적 사용방식에 막혀 있다. 경험이 다르지만 그 경험을 어제와 다르게 표현할 언어사용방식이 틀에 박히면 사고방식도 틀에 박힌다. 기존 언어 사용방식을 파기하지 않고 습관적인 언어를 사용할수록 끈적끈적한 언어적 점성(粘性)에 붙잡혀 습관과 관습의 덫에 걸려 세상은 늘 뻔해 보이기 시작한다. 하지만 시인은 뻔해 보이는 반복되는 삶도 관심과 애정을 갖고 관찰하면서 발상을 깨는 언어를 사용하여 색다른 깨우침을 선물로 준다. 경영자일수록 시인의 눈을 가져야 되는 이유는 익숙한 세상을 색다르게 바라보는 사업가적 안목과 통찰력이 누구보다도 필요하기 때문이다. 시인의 업의 본질은 물아일체(物我一體)의 생각으로 사물이나 도구, 사람이나 생명체가 지닌 아픔을 역지사지(易地思之)로 파악, 어제와 다르게 자아를 끊임없이 재서술하는 사람이다.

 

부름켜 경영에서 생태경영의 지혜를 배우다

 

많은 책을 읽는 것은 나무를 한 곳에 모으는 것과 같다. 그 나뭇더미에 불을 지르는 것은 단 하나의 문장이다”(5). 미국의 신학자, 존 파이퍼의 명언으로 시작하는 나무 심는 CEO는 시인이 쓴 인문학적 생태 경영서다. 책 첫 페이지부터 인두같은 한 문장이 책을 넘기지 못하도록 뜨겁게 심장을 달군다. 더불어 나무를 비롯해 생태계를 파고드는 깊은 사색의 향연으로 스며들게 만든다. 스치면 인연이지만 스미면 연인이 된다. 이 책은 첫 문장부터 스쳐 지나가지 않고 스며들게 만드는 시인의 문장이 부드럽게 애무하는 사이, 자신도 모르게 문장 속으로 빠져들게 만든다. 생태학자나 산림전공 학자가 과학적 사실을 근간으로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나무관련 전공서적과는 다르게 시인은 나무와 주고받는 대화 속에서 익숙한 일상에서 비상하는 상상력으로 날아오르게 만든다. 나무를 비롯해 자연의 생명체를 묘사하는 언어 자체가 시적이다. “나뭇가지는 하늘을 향한 고성능 안테나다”(6). 나뭇가지는 안테나 성능을 받아들이고 안테나는 잠시 나뭇가지로 변신하여 서로가 서로의 정체성을 비트는 사이 새롭게 태어나는 사유, 우리가 특히 시인의 언어에 주목해야 되는 가장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다.

 

나뭇가지를 나무와의 관계 속에서 해석하는 방식도 가지가지다. 예를 들면 지식생태학자인 유영만은 여러 가지지만 마찬가지라는 언어유희를 동원해 나뭇가지가 저마다의 방식으로 뻗어나가는 생태학적 지혜를 강조한다. 꼴불견으로 보이는 행동을 여러 가지 하는 사람에게 비아냥조로 하는 말이 바로 가지가지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시인은 나뭇가지를 고성능 안테나에 비유하는 사유방식을 채택함으로써 아무 생각 없이 뻗어나가는 나뭇가지의 존재이유를 시심으로 포착해서 맛깔나게 독자를 사로잡는다. 시인은 세계 최초 부름켜 경영을 창안, 나무에서 배우는 인문경영의 진수를 전수해준다. 부름켜는 새로운 세포로 줄기나 뿌리를 굵게 만드는 식물의 부위”(7). 부름켜(cambium, 形成層)불어나다의 어간인 과 명사형 ’, 층을 뜻하는 가 합쳐진 순우리말이라고 한다. 부름켜는 한 마디로 봄과 여름에는 식물 호르몬을 왕성하게 분비해서 안으로는 목재로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을 다지고 밖으로는 뜻하지 않은 위협에 대비하는 껍질을 만드는 성장기제다. 부름켜는 날씨가 온후하고 따뜻한 봄부터 여름까지 세포분열을 활발하게 전개해서 많은 부피생장을 하지만 날씨가 추워지는 가을부터 겨울까지는 부피생장속도가 갑자기 느려지면서 세포도 작고 단단하게 형성된다. 우리가 말하는 나이테는 부름켜가 일 년 동안 부피성장을 거듭하면서 줄기 안에 남긴 흔적이 바로 나이테다.

 

부름켜가 성장전략을 상징하는 나무의 속성이라면 떨켜는 겨울이 다가오면서 외부로 빠져나가는 에너지를 차단하고 병균이 침입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스스로 잎을 떨어뜨리며 만드는 생존전략이다. 나무는 성장하기 위해 서 있는 자리에서 치열하게 광합성을 하고 땅 속의 물을 끌어올려 양분을 만든다. 나무는 겨울이 되면 성장을 멈추고 그 동안 축적한 최소한의 에너지로 혹한의 추위를 견뎌내기 위해 불필요한 에너지 낭비를 최소한으로 줄이기 위해 무성했던 나뭇잎을 떨켜를 만들어 떨궈낸 다음 나목으로 새봄의 희망을 싹틔울 준비를 한다. 나무의 성장과 생존 여정은 고스란히 나이테로 나타난다. “나이테가 몸 안이 주름이라면 주름살은 몸 밖의 나이테다”(112-123). 사람의 이름은 주름이 만든 사회역사적 산물이다. 철학자 들뢰즈는 다중체(multiplicity)라는 개념을 만들었다. 다중체는 말 그대로 다양한(multiple) 주름(pli)이 축적되어서 생긴 한 사람의 정체성(multiplicity)이다. 여기서 말하는 주름은 사건과 사고를 겪으면서 나도 모르게 내 몸에 각인된 직간접적인 경험의 흔적들이다. 내가 겪으면서 내 몸에 남긴 얼룩과 무늬가 다양한 주름으로 축적되면서 나의 정체성이 생성되고 형성된다. 그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아보는 방법은 그 사람이 살아오면서 겪은 다양한 삶의 희로애락(喜怒哀樂)에 담긴 사연을 알아보는 것이다. 한 사람의 이름에는 그만큼 살아오면서 겪어낸 몸부림과 안간힘의 흔적으로 생기는 주름과 맥을 같이한다. ‘이름주름이 되는 이유다.

 

주름이 많은 구겨진 비행기가 멀리 날아간다

 

주름은 마치 구겨진 종이와 같다. 힘들고 어려울 때는 삶이 많이 구겨진다. 나의 의지대로 되지 않을 때 바깥의 뜻하지 않는 힘에 굴복당할 때도 있고, 멀쩡하게 걸어가던 사람이 느닷없이 나타나 장애물에 의해 넘어질 수도 있다. 우여곡절의 삶을 살다가 겹겹이 쌓이는 구구절절한 사연이 구겨진 종이처럼 내 몸에 얼룩으로 남는다. 종이가 많이 구겨질수록 정석대로 접은 비행기보다 멀리 날아간다. 우여곡절이 많은 구겨진 종이일수록 원하는 방향으로 멀리 날아간다. 똑바로 접은 비행기는 내 마음대로 날릴 수 없지만 종이를 구겨서 만든 종이비행기는 내 의지와 방향대로 멀리 날아간다. 시련과 역경을 경험하면서 나도 모르게 내 몸에 각인된 다양한 주름은 세상을 살아가는 밑거름이 된다. 그만큼 세상의 흐름을 타고 나의 주체적 의지대로 험난한 역경을 극복할 수 있는 내력(耐力)이 생긴다. 힘든 세상을 살아오면서 내 몸에 생긴 주름이 안으로 굽어지면서 그 안에 내가 겪은 숱한 삶의 애환이 사연으로 쌓인다. 주름이 안으로 생겨서 의미가 겉으로 드러나지 않고 함축된다. 그게 바로 시사점(implication)이나 암시(暗示). 주름(pli)이 안(im)으로 생겨서 내포되거나 함축된 의미, 즉 함의(含意). 반대로 그 주름의 의미를 겉으로 드러내 놓고 의미를 따져보는 게 설명(explication)이다. 주름이 안으로 접히면서 의미를 품고 있는 시사점이나 그 주름을 펼쳐보면서 주름에 내포된 의미를 따져보는 설명은 모두 한 사람이 이름값을 하면서 만들어온 주름의 역사를 이해하고 해석하는 행위다. 안으로 품고 있는 주름의 시사점은 쉽게 파악되지 않는다.

 

사람은 인생의 주름씨름하면서 나름의 의미를 만들어가며 자기 이름값을 하면서 살아간다. 인생의 고비마다 먹구름이 낄 때도 있고, ‘시름시름앓아가면서 힘든 삶과 사투를 벌이지만 여전히 뜬구름잡는 이야기 같아서 공허할 때가 많다. 그러다가 갑자기 누군가의 부름을 받고 심부름을 하거나 한 시대의 흐름을 타고 소름끼칠 정도로 일이 잘 풀리면서 승승장구할 수도 있다. 하지만 여전히 인생은 모름의 바다이며 생각대로 풀리지 않는 일들이 고름처럼 우리들을 괴롭히며 아픔을 얼룩으로 남긴다. ‘한시름놨다고 생각하는 순간 느닷없이 고드름이 뚝 떨어지듯 절망과 좌절의 주름이 나도 모르게 늘어만 간다. 내가 겪은 모든 주름의 흔적은 밑거름이 될 수 있고 용오름처럼 어느 순간 폭발적으로 상승기류를 타며 자기 존재를 아름답게 드러냄으로써 한 편의 화양연화(花樣年華)와 같은 필름으로 남기기도 한다. 나무는 살아가면서 나무가 겪은 모든 주름을 나무테로 만든다. 나무테의 무늬 속에서는 나무가 살아오면서 겪은 얼룩이 저마다의 사연을 담고 있다. 나무는 나무테로 자신이 살아온 역사를 증명하는 것이다.

 

사실과 사연이 생태학적 사유를 낳는다

 

나무 심는 CEO에는 과학자의 객관적 사실과 시인의 인문학적 감수성이 절묘하게 뒤섞이면서 세상을 바라보는 창의적 영감을 가져다준다. “심마니에게도 등급이 있다. 초보자는 마구 돌아다니는 천둥마니’, 다음은 둘째마니혹은 소장(젊은) 마니’, 그 다음은 경험 많고 노련한 어인마니.” 심마니들에게 얼치는 오래 묵어도 약이 되지 않는 이것도 저것도 아닌 어중간한 중간치를 말한다. ‘천둥마니둘째 마니에게는 최상품 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어인마니에게는 어림도 없다. 산삼에 관한 전문적인 식견은 자연을 오랫동안 관찰한 결과 생기는 통찰력의 산물이다. 비슷해 보이지만 어제와 미묘하게 다르게 변화되는 디테일의 차이를 눈여겨 살피지 않으면 뭔가를 보살필 수 없다. 그래서 어인마니에게 산삼을 채취할 때에는 캔다는 말 대신 돋운다는 표현을 쓴다”(54). ‘캔다는 말은 캐는 사람의 기술적 전문성을 중심으로 개발되는 능수능란한 전문가의 작업 행위를 지칭하지만 돋운다는 말은 자연이 선물해준 경이로운 산삼을 대하는 심마니의 지극 정성과 경건한 자세를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말이다. 캐내면 물질적 상품이 되지만 돋우면 존재 자체가 풍기는 신비로운 자태로 저절로 고개가 숙여지는 자연의 작품이 된다.

 

시인의 관찰력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곡우전에 따는 녹차 잎을 우전차라고 하는데, “맨 먼저 딴 찻잎이라 해서 첫물차라고도 하는데, 맛이 좋고 향이 은은하며 생산량은 적어 값이 비싸다. 곡우가 지나면 순이 잎으로 변해 맛이 줄어들기 때문이라고 한다”(220). 우전차 맛이 특별히 녹차향을 내는 이유는 순이 잎으로 변하기 전에 땄기 때문이라는 관찰, 연한 새순이 진한 잎으로 바뀌는 순간, 그 미묘한 순간의 차이가 자연이 전해준 놀라운 맛의 차이로 드러난다. 곡우를 앞두고 내리는 비는 그야말로 단비다. 그 단비가 내려준 수분 덕분에 온 세상은 각양각색의 꽃들이 때를 두고 피어나기 시작한다. “꽃잎 뒤태를 슬며시 들추며 딴청 피우는 빗소리 때문에 서러운 풀빛이 짙어오는 것도 모를 뻔했다”(220). 시인이 아니면 표현할 수 없는 시심으로 물든 앓음다운문장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인두 같은 문장 덕분에 오늘도 활자의 바다를 건너고 있다. 자연을 객관적으로 묘사하는 문장보다 자연이 우리에게 말하고 싶은 느낌을 감지한 시인이 그들의 입장에서 말하는 걸 받아 적는 시인의 문장에서 의미가 심장에 꽂히는 의미심장함을 발견한다. “많은 책을 읽는 것은 나무를 한 곳에 모으는 것과 같다. 그 나뭇더미에 불을 지르는 것은 단 하나의 문장이다라고 했던 존 파이퍼의 명언이 실감나는 이유다.

 

산수유와 생강나무를 구분하는 시인의 안목에는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다. “자세히 보면 산수유 꽃은 길이 1센티미터쯤의 가는 꽃가루 끝에 달려 있고, 생강나무 꽃은 그냥 가지에 붙어 있다. 꽃을 피운 줄기 끝도 산수유는 색깔이 갈색이고 생강나무는 녹색이다”(226). 주변에 널려 있는 삼라만상이 모습이 누군가에는 늘 반복되는 일상이지만 누군가에는 어제와 다른 상상력의 텃밭이다. 시인이 바라보는 눈은 육안(肉眼)과 과학적으로 분석하는 뇌안(腦眼)을 넘어 측은지심의 눈으로 바라보는 심안(心眼)과 보이지 않는 세계를 꿰뚫어 통찰하는 영안(靈眼)이다. 누구나 갖고 있는 육안과 뇌안으로 바라보는 세계와 아무나 갖고 있지 않는 심안과 영안으로 바라보는 세계는 다를 수밖에 없다. CEO가 배워야 할 사업하는 안목은 육안과 뇌안보다 심안과 영안에서 비롯됨을 이 책은 침묵의 목소리로 우렁차게 주장한다. “산수유는 재배하지만 생강나무는 자생한다”(227). 산에는 생강나무가 많고 도시나 마을 근처에는 산수유가 많은 이유다. 야생성의 핵심은 자생성이다. 스스로 자라려는 안간힘과 시련과 역경을 견뎌내려는 애쓰기는 누군가의 돌봄에서 비롯되지 않는다. 야생에서 비바람과 천둥번개도 맞고 자라는 가운데 자기도 모르게 형성되는 야생성이 자생성을 낳고, 그 자생성이 한 생명체의 정체성을 결정한다. 선수유와 생강나무의 다른 정체성도 삶의 무대가 다른 곳에서 자랐기 때문에 생기는 자기 존재 증명이다.

 

물아일체의 자세가 역지사지의 지혜를 가져온다

 

비슷한 맥락에서 억새와 갈대도 혼동하는 풀이다. 첫째, 억새가 주로 산간지방에서 자라고 갈대가 주로 물가에서 자란다. 갈대는 갈 데가 없어서 물가에서 주로 자라고 억새는 살아가기 힘든 세상임에도 불구하고 억세게 자라서 붙여진 이름일까. 순천만 습지와 같은 곳에 자라는 것은 갈대이고, 제주도 오름 언덕에서 장관을 이루는 것은 억새다. 산에 가서 갈대를 만날 수 없고, 물가에서는 억새를 만날 수 없는 이유다. 둘째 갈대와 억새는 색깔이 다르다. 갈대는 갈색이고, 억새는 은색이나 흰색깔을 띤다. 셋째 갈대와 억새는 상징적인 의미도 다르다. 억새는 이름처럼 억센 줄기를 갖고 바람에 흔들리지만 굽히지 않는다. 갈대는 흔들리며 자라는 가을 들판의 대명사처럼 여리고 연약하지만 척박한 땅에서 잘 자라는 강한 생명력을 보여준다. 넷째, 갈대와 억새는 이삭의 모습이 다르다. 갈대의 이삭은 사방으로 흩어져 풍성한 모습을 보이지만, 억새의 이삭은 한쪽 방향을 향하는 모습을 띤다. 갈대의 이삭이 사방으로 퍼져 있는 까닭은 바람에 흔들리며 자신의 종족을 사방에 퍼뜨리기 위한 생존 차원의 전략처럼 보인다. 억새는 이름 그대로 초지일관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한 방향으로 이삭을 만든다. 신경림 시인의 <갈대>만 봐도 시인은 억새보다 갈대에게 태생적으로 끌리는 시심이 흐르는 것 같다. “바람도 달빛도 아닌 것/갈대는 저를 흔드는 것이 제 조용한 울음인 것을/까맣게 몰랐다/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그는 몰랐다.”

 

시인이 나무를 바라보는 심안(心眼)의 정수는 정독 도서관 앞 회화나무 아래서 발동된다. 아버지의 빈 밥상이라는 시를 읽다보면 저절로 우리 모두의 아버지가 심상에 떠오르면서 눈가에는 눈물이 맺히지 않을 수 없다.

 

정독도서관 회화나무

가지 끝에 까치집 하나

 

삼십 년 전에도 그랬지

남해 금산 보리암 아래

토담집 까치둥지

 

어머니는 일하러 가고

집에 남은 아버지 물메기국 끓이셨지

겨우내 몸 말린 메기들 꼬득꼬득 맛 좋지만

밍밍한 껍질이 싫어 오물오물 눈치 보다

그릇 아래 슬그머니 뱉어 놓곤 했는데

잠깐씩 한눈팔 때 감쪽같이 없어졌지

 

얘야 어른 되면 껍질이 더 좋단다

 

맑은 물에 통무 한쪽

속 다 비치는 국그릇 헹구며

평생 겉돌다 온 메기 껍질처럼

몸보다 마음 더 불편했을 아버지

 

나무 아래 둥그렇게 앉은 밥상

간간이 숟가락 사이로 먼 바다 소리 왔다 가고

늦은 점심, 물메기국 넘어가는 소리에

목이 메기도 하던 그런 풍경이 있었네

 

해 질 녘까지 그 모습 지켜봤을

까치집 때문인가, 정독도서관 앞길에서

오래도록 떠나지 못하고

서성이는 여름 한낮아버지의 빈 밥상

참고: 고두현의 아버지의 빈밥상 (낭송 김귀숙)https://youtu.be/bn_MoCCv-z4

 

보리암이 내려다보이는 토담집에서 몸보다 마음이 불편했을 아버지의 얼굴이 연상되지 않을 수 없으며, 부자간에 말없이 통하는 사연의 서글픔이 파도 소리에 실려 보리암 등성이를 타고 오르는 듯하다. 이렇게 자연의 모든 나무는 늘 그 자리에 있지만 저마다의 사연을 품고 예고 없이 옛날의 풍경을 현실로 데리고 온다. 그래서 이영광 시인의 소금창고옛날은 가는 게 아니고 이렇게 자꾸 오는 것이었다라고 읊은 게 아닐까.

 

자연이 담고 있는 사연은 사람이 품은 사연만 있는 게 아니다. 사람에게 전해주는 생태학적 지혜는 그 어떤 교과서에도 배울 수 없는 살아있는 지혜다. “자연은 오랫동안 많은 이야기를 담아왔다. 그리고 인간은 그 각각의 다양한 사연과 이야기들로부터 또 다른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왔다”(245). 자연에서 자생하는 기업경영의 노하우를 배워야 할 이유다, 나무는 자연의 생명체 중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무엇을 위해서 왜 살아야 하는지를 조용하지만 무릎을 치는 깨우침의 메시지를 던져준다. 사업의 근본(根本)과 기본(基本)에도 나무가 들어가 있다. ()이라는 글자는 나무 목()이 세찬 비바람에도 불구하고 중심을 잡고 똑 바로 서 있느 형상이다. “뿌리에 가로 줄을 그으면 근본 본()이 된다. 나무의 근본이 뿌리라는 의미다. 가로줄을 가지에 짧게 그으면 아직 열매를 맺지 않았다는 뜻의 아닐 미(), 길게 그으면 가지 꼭대기라는 뜻의 말()이 된다”(112). 나무의 줄기처럼 줄기차게사업이 번창할 때도 있지만 미지(未知)의 세계에 도전하다보면 생각대로 풀리지 않아서 미완성(未完成)의 작품으로 남는 사업영역도 있다. 미완성()에서 완성()으로 향하는 여정에 사업가의 열정과 도전이 숨 쉬고 있는 것이다. 영원한 완성은 관념적 희망, 허망한 꿈일 뿐이다. 목적이라는 완성을 향해 오늘도 어제와 다르게 흔적을 축적해서 어느 순간 반전이 일어나면서 기적을 꿈꿀 뿐이다.

 

관리자는 평면적으로 결합하고 리더는 입체적으로 융합한다

 

주어진 자리에서 가장 치열하면서도 이기적으로 살아가는 나무 덕분에 한 여름의 녹음이라는 그늘에서 쉴 수 있고, 불타는 가을단풍을 즐길 수 있는 것이다. 한 분야의 경지에 이른 사람은 철저하게 이기적으로 살아가면서 축적한 전문성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베푸는 기적을 일으킨 사람들이다. 이기적으로 살아가야 한 분야의 깊이 있는 내공을 축적할 수 있다. 남들이 보기에 이기적으로 살아가는 사람처럼 보이지만 자신을 보다 완성도 높은 작품을 창조하기 위해 고독한 몰입을 스스로 즐기고 있는 것이다. 완결된 사업은 없다. 언제나 부단히 도전하면서 어제와 다른 작품을 만들어가려는 안간힘이 있을 뿐이다. 나무가 비바람에 흔들릴수록 뿌리가 뽑히지 않기 위해 뿌리를 더 깊이 내리려고 노력하는 것처럼 사업가 역시 남들이 쉽게 뿌리치지 못하는 필살기를 개발하기 위해 오늘도 뿌리를 깊이 내리기 위해 전쟁과도 같은 사투를 벌일 뿐이다. 아래로 뻗은 뿌리의 깊이가 위로 성장할 수 있는 높이를 결정한다는 사업의 지혜도 나무가 가르쳐준 생태경영의 지혜다. 뿌리를 깊이 내려야 뿌리치지 못한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는 CEO일수록 세상의 흐름에 야합하거나 일희일비하지 않고 사업의 근본을 파고들어 기본으로 돌아가려는 본질적인 노력을 전개한다. 이 책은 시인의 눈으로 바라본 나무를 비롯해 생태계의 다양한 생명체가 저마다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지혜를 우리들의 삶과 경영에 색다른 관점과 통찰로 연결시켜주는 시인의 자연생태경영 지침서다.

 

자연은 인간의 계획과 통제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나무 역시 장기 비전과 거창한 꿈을 꾸지 않는다. 지금 있는 그 자리에서 하루하루 목숨을 걸고 치열하게 살아갈 뿐이다. 이런 점에서 나무는 방랑하는 예술가다. 나무는 자신의 씨앗이 어느 곳에 떨어질지 자신이 결정할 수 없다. 바람에 날아가다 떨어지는 곳이 바로 자신이 살아갈 자리다. 나무는 계획이나 의도롤 선택한 결과대로 살아가는 생명체라기보다 사전에 예측할 수 없을 정도로 우연한 마주침이 수시로 일어나는 자연표류의 결과다. 나무는 환경에 따라 표류하면서 부딪히는 돌발적 변수가 낳은 우연의 산물이다. 목재는 운 좋게 씨앗이 날아가다 비옥한 땅에 떨어져 자라다 목수에게 목숨이 끊기는 나무다. 반면에 분재는 씨앗이 날아가다 바위틈에 떨어져 성장하면서 갖은 고생을 하며 뒤틀리는 인생을 살다 분재 채집가에서 발견되어 평생 양지 바른 곳에서 극진한 대접을 받으면서 백년해로하는 나무다. 태어난 자리나 사업을 시작한 환경을 탓하는 사람에게 나무는 자리를 탓하지 않는 엄중한 깨우침을 준다. 씨앗이 떨어진 그 자리가 내가 목숨 걸고 살아갈 삶의 터전이라고 생각하는 나무는 환경을 탓하지 않는다. 나무에게는 자리 선택권은 없고 오로지 자세를 선택할 수 있을 뿐이다. 나무는 선택한 자세가 나의 자질과 역량을 결정해주는 선물이라고 생각한다. 사업가 역시 사업을 시작하는 환경이나 영역을 탓하기보다 사업에 임하는 나의 자세와 태도 사업가의 자질과 역량을 좌우하는 결정적인 지표로 작용한다.

 

노하우가 과거형 정보와 지식의 평면결합이라고 한다면, 노왓은 미래형 지혜와 성찰의 입체융합이라고 할 수 있다. 경영 현장에서도 주어진 역할만 해내는 사람은 단순한 관리자이고 앞으로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알고 움직이는 인재는 리더”(176). 관리자와 리더의 차이에 대한 수많은 주장이 있었지만 노하우와 노왓, 평면결합과 입체융합과 같은 개념적 차이로 명쾌하게 구분하는 시인의 통찰력에서 다시 한 번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를 배운다. “노하우는 선택과 집중과 같은 효율성의 영역이고, 노와이는 독창적인 차별성의 영역이다”(177). 결국 기존 자원을 효율적으로 배분해서 성과를 극대화시키려는 관리자의 영역에서 벗어나 미지의 사업 영역을 개척하고 세상을 근본적으로 뒤바꾸는 새로운 콘셉트를 디자인하는 리더나 사업가로 변신하기 위해서는 보이지 않는 세계를 꿰뜷어 보는 혜안과 안목을 단련할 필요가 있다. 그 실마리나 단서가 생태계 속에서 살아가는 수많은 생명체의 생존 방식이나 살아가는 이유를 남다른 관심으로 관찰하는 가운데 얻어지는 통찰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나무 심는 CEO는 조용히 항변하고 있다. 알량한 과학적 지식과 개발지상주의 패러다임으로 자연을 자본으로 활용하려는 발상을 멈추고, 위대한 삶의 지혜를 배울 수 있는 학습의 원천지가 바로 자연 생태계임을 각성할 때 지금 우리가 겪는 지구 온난화를 비롯해서 자연 재해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이 떠오를 것이다. 생태계를 파괴해서 생계가 걱정되는 전대미문이 팬데믹도 생태학적 성찰로 이어지는 인간의 대오각성이 동반될 때 비로소 극복가능해질 것이다.

 

처지가 입장을 결정하고 배경이 전경을 결정한다

 

숲의 건강이 그 속에서 자라는 나무들의 개성이 조화를 이룰 때 나타나듯이 CEO가 이끄는 조직 역시 건강한 조직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조직을 구성하는 저마마다의 인재(人材)들이 주어진 위치에서 자기 본분을 다해야 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CEO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쓰임새 있는 인재를 적재적소(適材適所)에 잘 활용하는 능력이다. 나무가 자란 환경이 나무가 쓰일 용처(用處)를 결정한다. 기둥으로 쓰일 나무와 서까래로 쓰일 나무는 나무 자체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나무가 어떤 환경에서 자랐는지가 결정한다(적지적수適地適樹). 한 사람은 전문성이나 능력은 그 사람의 독립적인 노력의 산물이 아니고, 주변 환경과의 역동적인 상호작용을 통해 형성된 사회역사적 합작품이다. CEO가 주어진 자리에 잘 어울리는 인재를 채용할 때는 그 인재가 어떤 환경에서 누구와 인간관계를 맺고 자라왔는지를 우선 봐야 되는 이유는 그 사람의 전문성은 그 사람이 맺어온 사회적 인간관계의 합작품이기 때문이다. 입장이 처지를 결정하는 게 아니라 처지가 입장을 결정한다. 나무가 자란 처지는 나무가 어떤 속성을 지녔는지에 따라 결정하는 중요한 판단 기준이다.

 

나무 심는 CEO에서 CEO가 적지적수(適地適樹)에서 자란 나무를 적재적소(適材適所)에 심는 이유는 저마다의 나무가 자기 강점을 드러내는 명목으로 육성하려는 데 있지 않다. 생태계가 살아 움직이는 이유도 생명체의 다양성이나 다름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CEO가 나무를 심는 가장 큰 이유는 나무마다 지니고 있는 저마다의 생존방식과 살아가는 이유, 나무의 고유한 개성과 특성이 어울 어지면서 지속가능한 숲처럼 지속가능한 조직을 만드는데 있다. 숲이 다양성의 보고이듯, CEO가 이끄는 조직도 수많은 인재들이 지닌 고유한 개성과 강점이 하모니와 시너지를 이루면서 멋진 숲의 교향곡을 연주해내는 무대다. ‘이름 모를 잡초는 인간의 오만한 발상이 낳은 산물이다. “저마다 이름과 역사가 있는 풀들이다. 잡초는 없다”(145). 마찬가지로 저마다의 분야에서 근무하는 인재는 핵심인재와 저변인력으로 나누는 게 아니라 해당 분야에서 수행하는 역할이 다를 뿐이다. 전경은 배경 덕분이고, 스타 플레이어는 도움을 준 어시스트 덕분이다. 아메리카노는 뜨거운 물과 뒤섞이면서도 불평불만하지 않는 에스프레소 덕분이고, 야구에서 선발과 마무리 투수는 중간계투를 담당하는 미들맨 덕분이다. 숲에 사는 모든 나무는 저마다의 존재이유를 갖고 아름다운 숲을 가꾸어 나가듯, 조직에서도 저마다의 위치에서 묵묵히 일하는 수많은 인재 덕분이라는 사실도 나무 심는 CEO가 알려주는 소중한 생태학적 삶의 지혜이자 경영학적 안목과 식견이다. 기업을 경영하는 모든 CEO가 이 책을 필독해야 될 이유다.

"많은 책을 읽는 것은 나무를 한 곳에 모으는 것과 같다. 그 나뭇더미에 불을 지르는 것은 단 하나의 문장이다"(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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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움의 문장들 쓰는 존재 4
림태주 지음 / 행성B(행성비)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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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생태학자 유영만이 그리움의 생태학자 림태주 시인을 그리워한 까닭은?

림태주 시인의 그리움의 문장들을 읽고

 

우리들의 아지트, 양평의 , 책으로 피에서 만난 그리운 사람들과 림태주 시인의 그리움의 문장을 함께 읽었다. 짧은 서문만 읽었는데 온몸에 그리움의 문신이 새겨진 듯, 그 동안 내 몸 구석구석에서 잠자고 있던 그리움의 세포들의 새 봄을 맞아 용솟음치듯 전율하는 격정이 그리움의 파도를 타고 몰려오는 듯 했다. “사랑의 화학반응은 끌림에서 시작된다. 너와 내가 이완되고 해체되고 결합돼야 우리라는 사이가 생겨난다”(13). 림태주 시인의 글은 언제나 묘한 끌림으로 시작된다. 매력적인 문장으로 인간적인 마력을 마음껏 발휘하는 시인의 그리움은 독자 몰래 조용히 그리움의 씨앗을 뿌리 내리게 만든다. ‘끌림뿌림내림의 부산물이다. 일단 그리움에 휘말려 끌림을 당하면 속수무책으로 쏠림꼴림홀림이 연달아 일어난다. 그리움의 스펙트럼은 끌림에서 시작되었지만 순식간에 사람을 완전히 홀리게 만들고 소리 없는 아우성으로 마음의 지진을 불러온다. 귀신에 홀린 듯 진한 여운에 빠져든 홀림울림을 넘어 굳게 닫힌 빗장까지도 아주 손쉽게 열어젖히는 열림까지 연결되면서 무림지존의 그리움의 생태학자 림 시인의 마법의 문장 속으로 빠져들지 않을 수 없다.

 

그리움은 식물성이다”(8). 동물과 식물은 존재방식의 차이로 인해 사랑하는 방식은 다르다고 주장한다. 적극적으로 움직여서 사랑을 쟁취하는 동물적 사랑 방식에 비해 기다릴 수밖에 없는 위치에서 자신의 존재를 저마다의 방식으로 알리려는 식물의 안간힘이 동물보다 더 간절하고 애잔하게 다가온다. 동물은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은 만나고 싶은 사람 만나고 만나기 싫은 사람은 안 만날 수 있는 선택권을 지닌다. 반면에 식물은 움직일 수 없으므로 주어진 위치에서 그리움의 대상을 마음 속에 품고 사무치게 기다릴 수밖에 없다. 기다림의 기간이 길어질수록 그리움의 강도는 높아진다. 이룰 수 없는 꿈을 향한 몸부림이 계속되지만 현실은 만남을 허락하지 않을 때 주어진 자리에서 감당하며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수동적인 감당이야말로 식물적 그리움의 정수이자 사람의 마음속에서 자라는 그리움의 끌림이자 쏠림이다.

 

그리움은 “‘보고 싶다보다 더 멀리, ‘기다린다보다 더 오래, ‘사랑한다보다 더 굳세게 지키려는 마음이었다”(10). 그리움은 보고 싶은 마음으로 더 멀리 나아가고, 기다리는 마음으로 더 오랫동안 심장으로 파고들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더 굳세게 온몸으로 각인된다. “여름이면 폭우로 쏟아지고, 겨울이면 대설로 덮는다. 봄이면 꽃그늘로 적시고 가을이면 단풍으로 물들인다”(10). 그리움이 계절에 따라 변화무쌍하게 움직이는 모습을 생태학적으로 표현하는 림태주 시인의 다른 별칭은 그리움의 생태학자다. 겨울이면 지식동태학자로 변신하는 지식생태학자 유영만은 계절 변화 속에서 저마다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생명체의 생존방식과 원리를 남다른 관심과 관찰로 통찰을 이끌어내지만 그리움의 사계절 변화를 생태학적으로 묘사하는 그리움의 생태학자 앞에서는 저절로 탄성이 나오고 속수무책으로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다. 그리움의 생태학자 림 시인은 그리움의 전파 경로와 방식을 표현하는 서문에서 그리움을 표현하는 문장을 만나면 위장으로 숨어 있던 마음속의 그리움마저 자신도 모르게 수줍음을 머금고 밖으로 튀어 나오게 만든다. 그리움의 전파 경로가 공기중이 비말로도 옮겨진다면서 가장 무서운 일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발병한다는 점이다”(11).

 

사람으로 산다는 것은 그리움에 종사하다 그리움에서 퇴직하는 일이다(23).

 

서문만 읽었는데 그리움에 사무치고 정적인 그리운 감정이 격정으로 바뀌면서 심장 박동을 재촉하게 만든다. 도저히 이 상태로는 본문 속으로 그대로 진입할 수 없다. 잠시 호흡을 가다듬고 산책을 하면서 그리움에 사무친 감정의 소용돌이를 멈추게 하고 다시 시인이 그리움을 긁으면서 새겨 넣은 그리움의 문장을 만나러 가야겠다. “그러므로 삶이라는 추상이 느낌으로 감각되는 생의 유효기간은, 무언가를 그리워하기 시작해서 더 이상 그리워하지 않게 된 동안까지다”(22). 모든 추상명사는 느낌으로 감각되어 내 몸에 각인되지 않으면 관념적 파편으로 전락한다. 사랑을 구체적인 동사로 표현하지도 행하지 않고 사랑한다는 관념의 틀에 갇혀 산다면 얼마나 딱한 사랑일까. 모든 그리움은 몸이 감각적으로 인식할 때 그 강도와 수준은 상상을 초월한다. 그리움이 식는다는 이야기는 대상을 향하든 사람을 지향하든 인연의 끈이 끊어져간다는 의미다. 더 이상 기억 속에서 애틋한 감정으로 내 몸을 이끌어가는 삶의 에너지원이 못된다는 의미다. “논문이나 칼럼은 어쩔 수 있는 말로 돼 있다. 시는 어쩔 수 없는 말이다”(141). 이영광의 왜냐하면 시가 우리를 죽여주니까에 나오는 말이다. 마찬가지로 그리움도 어쩔 수 없는 상태에서 어쩔 수 있기를 간절히 열망하는 가운데 소리 소문 없이 출몰하며 끝없이 주변을 맴도는 감정이다. 그래서 림 시인은 그리움 학위가 있지만 그 학위를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고 한다. 객관이 뒤집혀 관객의 입장으로 쓴 논문을 대신 해 어쩔 수 없는 시편으로 학위 논문을 대신하고, 심사도 사람의 힘으로 해낼 수 없어서 모든 그리움을 다 받아주는 바다가 대신했다고 한다.

 

사랑하면 질문이 많아지는 것처럼 그리움의 대상이 강렬해질수록 알고 싶은 욕망이 고개를 들지만 노골적으로 드러낼 수 없다. 다만 사랑과 그리움의 차이는 사랑은 배신하는 일이 있지만 그리움에게 배신당하는 사람은 없다”(27)는 점, 그리고 사랑은 나 혼자만의 소유가 아니어서 권리 주장이 어렵지만 그리움은 온전히 단독 소유”(27)라는 점이다. 나아가 사랑은 육감만으로 들키지만 그리움은 바코드를 찍고 신원조회를 해도 나오지 않는다...사랑에는 고난도의 기술과 각종 매뉴얼이 필요하지만, 그리움은 특별한 학습이나 기술 없이도 누구나 사용할 수 있다”(28). 사랑하는 사람을 그리워하지만 그리워하는 사랑을 함부로 사랑할 수 없는 경우도 많다. 그 이유는 현실적으로 저마다의 이유로 사랑할 수 없는 안타까운 이유가 존재한다. 그 이유는 전적으로 당사자의 개별적 삶에서 나온 상황맥락적 구속 요소라서 당사자가 아니고서는 설명이 곤란한 영역이다. 하지만 한 그리워하기 시작하면 그리움의 무게는 한정이 없다. 어떤 중력법칙으로도 막을 수 없는 막중한 무게감이 조용한 하중으로 우리 몸 구석구석을 들락거린다. 그리움은 체포 영장을 발급하지도 않고 느닷없이 들이닥치는 밀물과 같기도 하고 느닷없이 들어왔다 자기 편할 때 순식간에 밀려나가는 밀물 같기도 하다.

 

부끄러운 살구향이 더 짙은 이듬해의 향에 덮여 환한 몸들을 섞었을 테지요”(87).

 

얼마나 그리우면 말 못할 고통을 참고 견디면서 어쩔 수 없는 지경에서 밖으로 토해내는 각혈을 저녁노을에 비유할 수 있을까. “그리움의 수위가 높아지면 아무리 막아도 둑이 터진다”(58). “세상의 모든 흔적은 느낌의 편린”(61)이듯이 그리움 역시 뭔가를 향해 끊이지 않고 일어나는 침묵의 파도가 소리치는 감정의 흐름이다. 한 낮의 뜨거운 태양열을 품으며 참고 견디다 저녁 무렵에 한꺼번에 몸 밖으로 게워낸 각혈이 노을의 그리움으로 진하게 요동치며 다가오는 것이다. “심장의 실린더에 분사된 봄의 입자들은 혈액을 뜨겁게 펌프질한다. 참아내기 힘들다. 절제는 흐트러지고 육체는 흐느적거린다”(65). 그리움에 극에 달하면 그 어떤 이성적 통제장치를 들이대도 통하지 않는다. 차가운 이성의 얼음은 뜨거운 감성의 불꽃에 순식간에 녹아 물이 된다. 물로 변한 얼음은 이제 세상의 그리움을 품고 바다로 흘러간다. 흐르는 곳곳에 그리움의 웅덩이가 숨을 죽이고 기다리고 있지만 아무도 말하지 않고 물이 지나가길 기다릴 뿐이다. 시인은 그리움의 생태학자다. 온 세상이 그리움의 원료이자 대상이며 주체다. 내가 일방적으로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게 아니라 나를 둘러싼 모든 자연 삼라만상이 그리움의 상상력을 잉태하다 어디선가 날아오는 자극을 만나면 봇물 터지듯 대책 없이 아무 곳으로 흘러들어가 한 사람의 마음을 통째로 뒤흔든다. “달빛과 몸을 섞은 향기가 폐 속으로 유입됐다. 아찔하고 아득해서 허공이라도 붙잡고 서 있어야 했다”(67). 살라고 명령받은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生命體)는 물론 나의 일상 주변에서 나와 직간접적으로 만나는 모든 사물과 현상 자체도 그리움이 나도 모르게 자라는 텃밭이다.

 

시인에게 세상은 외로움의 귀퉁이, 그리움의 모서리”(101). 외로움이 그리움을 만나 뜨거운 포옹을 하는 순간 고달픔이나 서글픔이 순식간에 보고픔의 농도로 말려든다. 생각하는 것만으로 발병된 그리움이 외로움과 허기에 전이되면 곧 변이를 일으키고 달릴 손쓸 방법이 없게 된다”(11). 그리움 바이러스는 어떤 백신으로도 예방되거나 치료되지 않는 데 변종 그리움 바이러스가 외로움이나이 허기, 보고픔이나 배고픔, 고달픔이나 서글픔을 만나면 내 품을 벗어나 통제 불능의 그리움 폭풍이 침묵 속에서 우렁차게 발버둥치기 시작한다. “섬진강 태생 매실이 머금었던 푸른 강 안 개를 토해냈을 것이고, 동해에서 뛰놀다 태백 덕장에서 북풍 한설을 쒼 북어가 단단한 살을 풀어냈을 것이고, 서해 압해도 염전에서 정갈하게 몸을 말린 천일염의 햇볕 냄새도 스며들었을 테지요”(87). 매실과 북어와 천일염도 모두 그리움에 삭혀지고 숙성되어 우리 앞에 나타난 그리움의 생태계 식구들이다. 시인의 눈으로 바라보면 세상은 그리움을 주고받으며 공생하고 공존하다 갑자기 뭔가가 비상하면서 잠깐의 분란을 일으키는 전쟁터이기도 하다. 그리움에 못 이겨 싸움을 걸고 응수하지만 승자도 패자도 없는 언제나 무승부로 판가름 나는 그리움의 생태계다. 물론 어떤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을 포섭하거나 수용해서 통째로 흡수하고 합병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거기서 자란 그리움은 또 다른 그리움의 대상을 만나 나도 모르게 그리움은 한 없이 방전된다. 어느 사이 다른 그리움이 마음속의 혈류를 타고 온몸을 흐르며 절치부심하다 폭발하는 순간이 바로 시인이 말하는 그리움의 온도가 과열되는 순간이다. “당신이 올지도 몰라 동백을 삶고 산수유를 찌고 벚꽃을 무쳤습니다. 그리움의 온도가 과열되면 바닷가 우체국에 가서 편지를 씁니다(17).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책은 그리움이 공습하는 속수무책이다

 

시인은 군복무 시절 선임병들의 연애편지 대필 사역을 했다. 시인의 회고에 따르면 과로사할 뻔 했을 만큼 정신적으로 피폐하고 육체적으로 고된 임무였다”(105). 여인의 마음을 뒤흔들어 답장이 오지 않으면 당연히 연애편지 대필 사역은 강제 정지 당했을 것이다. 하지만 여러번 성공하면서 나름 대필 사역도 선임병들의 한 여인에 대한 철통같은 일편단심을 품게 만든 원동력이었다. “나는 생각한다. 청춘이 앓는 모든 사랑의 열화는 은사시나무 잎을 흔드는 천 개의 바람과 같다고. 어느 잎이 먼저 흔들려 다른 잎을 흔들었는지 나무조차 모른다. 오로지 불고 지나간 바람만이 안다”(111). 그리움의 공습경보도 없이 갑자기 휘몰아치고 지나간 뒷자리에는 그리움을 향한 소리 없는 몸부림만 남았을 뿐이다. “어떤 단어들은 발음이 혼동될 때가 있다. 사람과 사랑이 그렇다. 주로 가을에 나타나는 현상인데 마음이 건조해지거나 일조량이 부족해지면 흔히 발생한다”(114). 촉촉이 젖어 있던 그리움도 건조해진 마음에 설상가상으로 일조량까지 부족해지면 그리움의 습도가 떨어지고 건조해지기 시작한다. 그러나 어쩌랴. 계절의 순환을 거슬러 인위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명은 곧 그리움의 산물임을 인정할 때 살아가는 동안은 곧 그리워하는 동안이다. “세상에 와서 내가 가장 잘한 일 중의 하나는 사람을 기다리고 그리워한 일이라고 생각한다”(141)는 시인의 고백이 그리워하는 동안은 동안(童顔)임을 입증한다.

 

그리워하는 동안은 그리움의 대상을 향한 동경심이 발동하고 때로는 동심으로 돌아가 대책없는 상상력의 날개를 펼치기도 한다. 혼자 비상했다가 한 없이 추락하기도 하지만 돌이킬 수 없는 심각한 사고는 일어나지 않는다. 워낙 그리움 자체가 회복탄력성이 높을 뿐만 아니라 어떤 충격도 쉽게 받아들여 흐느적거리게 만드는 만병통치약이기도 하다. 단 전제조건은 그리움의 온도를 높여 고달프지만 기다림을 통해 지금의 아픔을 보고픔으로 만들어보겠다는 의지가 있는 그리움이다. 그리움의 온도가 과열 상태는 아니지만 쉽게 꺼지지 않는 불씨처럼 여전히 대상이나 사람을 향한 그리움의 씨앗을 발아시키려는 안간힘과 몸부림이 전제될 때 그리움은 그 어떤 아픔도 치유할 수 있는 심리적 각성제다. 그리움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은 살아가겠다는 다짐과 결의를 지닌 사람이다. 그러기에 숱한 그리움의 얼룩과 무늬가 씨줄과 날줄로 엮여 직조된 자기만의 삶을 만들어가려는 사람이야말로 그리움 학위를 논문이 아니라 시적 상상력으로 잉태하고 있는 사람이다. 그리움은 논리적 설명의 대상이 아니라 시적 상상력으로 헤아릴 수밖에 없는 감정의 흐름이다. 그리움은 숱한 자기계발서에는 익숙한 것과 결별하고 낯선 것에 과감하게 도전하는 정신,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뜨거운 열정과 담대한 용기가 성공의 열쇠”(197)와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그리움은 모든 것이 불확실해지고 모호하며 혼란이 가중되는 사회 속에서도 방향감을 잃지 않고 답이 없는 가운데 답을 찾아 나서려는 나약한 몸짓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리움이 있는 한 극도로 혼란스럽고 전대미문의 난국이 펼쳐질 지라도 끈질기고 집요하게 나에게 주어진 삶을 살아내려는 사람들의 간절한 몸부림은 적막을 뚫고 막막함을 이겨보려는 노력과 손을 잡을 것이다.

 

내가 무엇을 그리워하는지도 모른 채 하루를 살다가도 저녁노을을 바라보며 문득 생각이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그리움은 늘 당신보다 앞서간다는 시인의 목소리가 이제야 몸 구석구석을 파고들며 깊은 그리움의 파도를 만든다. 목표를 달성하려는 강인한 의지와 열정으로 살다가 지친 우리들에게 그리움은 사치이자 향락에 가깝게 들릴 수 있다. 목표를 달성했지만 여전히 내 삶은 허둥지둥이 일상사고 허겁지겁이 하루 일과다. 목표가 목숨을 위태롭게 만드는 근본 동인임을 알아가는 황혼의 나이에 깨닫는 게 있다. 목표 중심으로 산다는 것은 뭔가를 그리워할 틈과 여유를 주지 않는 삶이다. 목표 달성 과정에 마주치는 우연한 조우는 효율에 위배되는 방해요인이다. 눈앞의 성과를 높이고 효율을 마치 일용할 양식처럼 살아가는 우리들의 슬픈 자화상을 누가 먼저 깨우쳐 줄 수 있을까. 내 몸과 영혼은 피폐해질 수 없을 정도로 만신창이가 되어갈 때 나의 그리움은 길을 잃고 어디서 어떤 방황을 하고 있는지 조차 알 길이 없다. 그리움은 내 곁에서 떠나버렸고 실종 신고를 한지도 오래다. 다시 그리움의 생태계로 돌아가 그리움에 물들고 싶은 사람들은 그리움의 문장을 인생독본처럼 읽으며 꺼져가는 그리움의 불씨를 되살려보기를 바란다. 그리움의 생태계에는 여전히 다양한 그리움이 서로가 서로를 그리워하며 살아가려는 사람이 서로를 보살피고 있다.

사람으로 산다는 것은 그리움에 종사하다 그리움에서 퇴직하는 일이다(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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