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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움의 문장들 ㅣ 쓰는 존재 4
림태주 지음 / 행성B(행성비) / 2021년 2월
평점 :
지식생태학자 유영만이 그리움의 생태학자 림태주 시인을 그리워한 까닭은?
림태주 시인의 《그리움의 문장들》을 읽고
우리들의 아지트, 양평의 〈꽃, 책으로 피〉에서 만난 그리운 사람들과 림태주 시인의 《그리움의 문장》을 함께 읽었다. 짧은 서문만 읽었는데 온몸에 그리움의 문신이 새겨진 듯, 그 동안 내 몸 구석구석에서 잠자고 있던 그리움의 세포들의 새 봄을 맞아 용솟음치듯 전율하는 격정이 그리움의 파도를 타고 몰려오는 듯 했다. “사랑의 화학반응은 끌림에서 시작된다. 너와 내가 이완되고 해체되고 결합돼야 우리라는 사이가 생겨난다”(13쪽). 림태주 시인의 글은 언제나 묘한 끌림으로 시작된다. 매력적인 문장으로 인간적인 마력을 마음껏 발휘하는 시인의 그리움은 독자 몰래 조용히 그리움의 씨앗을 뿌리 내리게 만든다. ‘끌림’은 ‘뿌림’과 ‘내림’의 부산물이다. 일단 그리움에 휘말려 ‘끌림’을 당하면 속수무책으로 ‘쏠림’과 ‘꼴림’과 ‘홀림’이 연달아 일어난다. 그리움의 스펙트럼은 끌림에서 시작되었지만 순식간에 사람을 완전히 홀리게 만들고 소리 없는 아우성으로 마음의 지진을 불러온다. 귀신에 홀린 듯 진한 여운에 빠져든 ‘홀림’은 ‘울림’을 넘어 굳게 닫힌 빗장까지도 아주 손쉽게 열어젖히는 ‘열림’까지 연결되면서 무림지존의 그리움의 생태학자 림 시인의 마법의 문장 속으로 빠져들지 않을 수 없다.
“그리움은 식물성이다”(8쪽). 동물과 식물은 존재방식의 차이로 인해 사랑하는 방식은 다르다고 주장한다. 적극적으로 움직여서 사랑을 쟁취하는 동물적 사랑 방식에 비해 기다릴 수밖에 없는 위치에서 자신의 존재를 저마다의 방식으로 알리려는 식물의 안간힘이 동물보다 더 간절하고 애잔하게 다가온다. 동물은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은 만나고 싶은 사람 만나고 만나기 싫은 사람은 안 만날 수 있는 선택권을 지닌다. 반면에 식물은 움직일 수 없으므로 주어진 위치에서 그리움의 대상을 마음 속에 품고 사무치게 기다릴 수밖에 없다. 기다림의 기간이 길어질수록 그리움의 강도는 높아진다. 이룰 수 없는 꿈을 향한 몸부림이 계속되지만 현실은 만남을 허락하지 않을 때 주어진 자리에서 감당하며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수동적인 감당이야말로 식물적 그리움의 정수이자 사람의 마음속에서 자라는 그리움의 끌림이자 쏠림이다.
그리움은 “‘보고 싶다’보다 더 멀리, ‘기다린다’보다 더 오래, ‘사랑한다’ 보다 더 굳세게 지키려는 마음이었다”(10쪽). 그리움은 보고 싶은 마음으로 더 멀리 나아가고, 기다리는 마음으로 더 오랫동안 심장으로 파고들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더 굳세게 온몸으로 각인된다. “여름이면 폭우로 쏟아지고, 겨울이면 대설로 덮는다. 봄이면 꽃그늘로 적시고 가을이면 단풍으로 물들인다”(10쪽). 그리움이 계절에 따라 변화무쌍하게 움직이는 모습을 생태학적으로 표현하는 림태주 시인의 다른 별칭은 그리움의 생태학자다. 겨울이면 지식동태학자로 변신하는 지식생태학자 유영만은 계절 변화 속에서 저마다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생명체의 생존방식과 원리를 남다른 관심과 관찰로 통찰을 이끌어내지만 그리움의 사계절 변화를 생태학적으로 묘사하는 그리움의 생태학자 앞에서는 저절로 탄성이 나오고 속수무책으로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다. 그리움의 생태학자 림 시인은 그리움의 전파 경로와 방식을 표현하는 서문에서 그리움을 표현하는 문장을 만나면 위장으로 숨어 있던 마음속의 그리움마저 자신도 모르게 수줍음을 머금고 밖으로 튀어 나오게 만든다. 그리움의 전파 경로가 공기중이 비말로도 옮겨진다면서 “가장 무서운 일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발병한다는 점이다”(11쪽).
사람으로 산다는 것은 그리움에 종사하다 그리움에서 퇴직하는 일이다(23쪽).
서문만 읽었는데 그리움에 사무치고 정적인 그리운 감정이 격정으로 바뀌면서 심장 박동을 재촉하게 만든다. 도저히 이 상태로는 본문 속으로 그대로 진입할 수 없다. 잠시 호흡을 가다듬고 산책을 하면서 그리움에 사무친 감정의 소용돌이를 멈추게 하고 다시 시인이 그리움을 긁으면서 새겨 넣은 그리움의 문장을 만나러 가야겠다. “그러므로 삶이라는 추상이 느낌으로 감각되는 생의 유효기간은, 무언가를 그리워하기 시작해서 더 이상 그리워하지 않게 된 동안까지다”(22쪽). 모든 추상명사는 느낌으로 감각되어 내 몸에 각인되지 않으면 관념적 파편으로 전락한다. 사랑을 구체적인 동사로 표현하지도 행하지 않고 사랑한다는 관념의 틀에 갇혀 산다면 얼마나 딱한 사랑일까. 모든 그리움은 몸이 감각적으로 인식할 때 그 강도와 수준은 상상을 초월한다. 그리움이 식는다는 이야기는 대상을 향하든 사람을 지향하든 인연의 끈이 끊어져간다는 의미다. 더 이상 기억 속에서 애틋한 감정으로 내 몸을 이끌어가는 삶의 에너지원이 못된다는 의미다. “논문이나 칼럼은 어쩔 수 있는 말로 돼 있다. 시는 어쩔 수 없는 말이다”(141쪽). 이영광의 《왜냐하면 시가 우리를 죽여주니까》에 나오는 말이다. 마찬가지로 그리움도 어쩔 수 없는 상태에서 어쩔 수 있기를 간절히 열망하는 가운데 소리 소문 없이 출몰하며 끝없이 주변을 맴도는 감정이다. 그래서 림 시인은 그리움 학위가 있지만 그 학위를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고 한다. 객관이 뒤집혀 관객의 입장으로 쓴 논문을 대신 해 어쩔 수 없는 시편으로 학위 논문을 대신하고, 심사도 사람의 힘으로 해낼 수 없어서 모든 그리움을 다 받아주는 바다가 대신했다고 한다.
사랑하면 질문이 많아지는 것처럼 그리움의 대상이 강렬해질수록 알고 싶은 욕망이 고개를 들지만 노골적으로 드러낼 수 없다. 다만 사랑과 그리움의 차이는 “사랑은 배신하는 일이 있지만 그리움에게 배신당하는 사람은 없다”(27쪽)는 점, 그리고 “사랑은 나 혼자만의 소유가 아니어서 권리 주장이 어렵지만 그리움은 온전히 단독 소유”(27쪽)라는 점이다. 나아가 “사랑은 육감만으로 들키지만 그리움은 바코드를 찍고 신원조회를 해도 나오지 않는다...사랑에는 고난도의 기술과 각종 매뉴얼이 필요하지만, 그리움은 특별한 학습이나 기술 없이도 누구나 사용할 수 있다”(28쪽). 사랑하는 사람을 그리워하지만 그리워하는 사랑을 함부로 사랑할 수 없는 경우도 많다. 그 이유는 현실적으로 저마다의 이유로 사랑할 수 없는 안타까운 이유가 존재한다. 그 이유는 전적으로 당사자의 개별적 삶에서 나온 상황맥락적 구속 요소라서 당사자가 아니고서는 설명이 곤란한 영역이다. 하지만 한 그리워하기 시작하면 그리움의 무게는 한정이 없다. 어떤 중력법칙으로도 막을 수 없는 막중한 무게감이 조용한 하중으로 우리 몸 구석구석을 들락거린다. 그리움은 체포 영장을 발급하지도 않고 느닷없이 들이닥치는 밀물과 같기도 하고 느닷없이 들어왔다 자기 편할 때 순식간에 밀려나가는 밀물 같기도 하다.
”부끄러운 살구향이 더 짙은 이듬해의 향에 덮여 환한 몸들을 섞었을 테지요”(87쪽).
얼마나 그리우면 말 못할 고통을 참고 견디면서 어쩔 수 없는 지경에서 밖으로 토해내는 각혈을 저녁노을에 비유할 수 있을까. “그리움의 수위가 높아지면 아무리 막아도 둑이 터진다”(58쪽). “세상의 모든 흔적은 느낌의 편린”(61쪽)이듯이 그리움 역시 뭔가를 향해 끊이지 않고 일어나는 침묵의 파도가 소리치는 감정의 흐름이다. 한 낮의 뜨거운 태양열을 품으며 참고 견디다 저녁 무렵에 한꺼번에 몸 밖으로 게워낸 각혈이 노을의 그리움으로 진하게 요동치며 다가오는 것이다. “심장의 실린더에 분사된 봄의 입자들은 혈액을 뜨겁게 펌프질한다. 참아내기 힘들다. 절제는 흐트러지고 육체는 흐느적거린다”(65). 그리움에 극에 달하면 그 어떤 이성적 통제장치를 들이대도 통하지 않는다. 차가운 이성의 얼음은 뜨거운 감성의 불꽃에 순식간에 녹아 물이 된다. 물로 변한 얼음은 이제 세상의 그리움을 품고 바다로 흘러간다. 흐르는 곳곳에 그리움의 웅덩이가 숨을 죽이고 기다리고 있지만 아무도 말하지 않고 물이 지나가길 기다릴 뿐이다. 시인은 그리움의 생태학자다. 온 세상이 그리움의 원료이자 대상이며 주체다. 내가 일방적으로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게 아니라 나를 둘러싼 모든 자연 삼라만상이 그리움의 상상력을 잉태하다 어디선가 날아오는 자극을 만나면 봇물 터지듯 대책 없이 아무 곳으로 흘러들어가 한 사람의 마음을 통째로 뒤흔든다. “달빛과 몸을 섞은 향기가 폐 속으로 유입됐다. 아찔하고 아득해서 허공이라도 붙잡고 서 있어야 했다”(67쪽). 살라고 명령받은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生命體)는 물론 나의 일상 주변에서 나와 직간접적으로 만나는 모든 사물과 현상 자체도 그리움이 나도 모르게 자라는 텃밭이다.
시인에게 세상은 “외로움의 귀퉁이, 그리움의 모서리”(101쪽)다. 외로움이 그리움을 만나 뜨거운 포옹을 하는 순간 고달픔이나 서글픔이 순식간에 보고픔의 농도로 말려든다. 생각하는 것만으로 발병된 “그리움이 외로움과 허기에 전이되면 곧 변이를 일으키고 달릴 손쓸 방법이 없게 된다”(11쪽). 그리움 바이러스는 어떤 백신으로도 예방되거나 치료되지 않는 데 변종 그리움 바이러스가 외로움이나이 허기, 보고픔이나 배고픔, 고달픔이나 서글픔을 만나면 내 품을 벗어나 통제 불능의 그리움 폭풍이 침묵 속에서 우렁차게 발버둥치기 시작한다. “섬진강 태생 매실이 머금었던 푸른 강 안 개를 토해냈을 것이고, 동해에서 뛰놀다 태백 덕장에서 북풍 한설을 쒼 북어가 단단한 살을 풀어냈을 것이고, 서해 압해도 염전에서 정갈하게 몸을 말린 천일염의 햇볕 냄새도 스며들었을 테지요”(87쪽). 매실과 북어와 천일염도 모두 그리움에 삭혀지고 숙성되어 우리 앞에 나타난 그리움의 생태계 식구들이다. 시인의 눈으로 바라보면 세상은 그리움을 주고받으며 공생하고 공존하다 갑자기 뭔가가 비상하면서 잠깐의 분란을 일으키는 전쟁터이기도 하다. 그리움에 못 이겨 싸움을 걸고 응수하지만 승자도 패자도 없는 언제나 무승부로 판가름 나는 그리움의 생태계다. 물론 어떤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을 포섭하거나 수용해서 통째로 흡수하고 합병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거기서 자란 그리움은 또 다른 그리움의 대상을 만나 나도 모르게 그리움은 한 없이 방전된다. 어느 사이 다른 그리움이 마음속의 혈류를 타고 온몸을 흐르며 절치부심하다 폭발하는 순간이 바로 시인이 말하는 그리움의 온도가 과열되는 순간이다. “당신이 올지도 몰라 동백을 삶고 산수유를 찌고 벚꽃을 무쳤습니다. 그리움의 온도가 과열되면 바닷가 우체국에 가서 편지를 씁니다(17쪽).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책은 그리움이 공습하는 속수무책이다
시인은 군복무 시절 선임병들의 연애편지 대필 사역을 했다. 시인의 회고에 따르면 “과로사할 뻔 했을 만큼 정신적으로 피폐하고 육체적으로 고된 임무였다”(105쪽). 여인의 마음을 뒤흔들어 답장이 오지 않으면 당연히 연애편지 대필 사역은 강제 정지 당했을 것이다. 하지만 여러번 성공하면서 나름 대필 사역도 선임병들의 한 여인에 대한 철통같은 일편단심을 품게 만든 원동력이었다. “나는 생각한다. 청춘이 앓는 모든 사랑의 열화는 은사시나무 잎을 흔드는 천 개의 바람과 같다고. 어느 잎이 먼저 흔들려 다른 잎을 흔들었는지 나무조차 모른다. 오로지 불고 지나간 바람만이 안다”(111쪽). 그리움의 공습경보도 없이 갑자기 휘몰아치고 지나간 뒷자리에는 그리움을 향한 소리 없는 몸부림만 남았을 뿐이다. “어떤 단어들은 발음이 혼동될 때가 있다. 사람과 사랑이 그렇다. 주로 가을에 나타나는 현상인데 마음이 건조해지거나 일조량이 부족해지면 흔히 발생한다”(114쪽). 촉촉이 젖어 있던 그리움도 건조해진 마음에 설상가상으로 일조량까지 부족해지면 그리움의 습도가 떨어지고 건조해지기 시작한다. 그러나 어쩌랴. 계절의 순환을 거슬러 인위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명은 곧 그리움의 산물임을 인정할 때 살아가는 동안은 곧 그리워하는 동안이다. “세상에 와서 내가 가장 잘한 일 중의 하나는 사람을 기다리고 그리워한 일이라고 생각한다”(141쪽)는 시인의 고백이 그리워하는 동안은 동안(童顔)임을 입증한다.
그리워하는 동안은 그리움의 대상을 향한 동경심이 발동하고 때로는 동심으로 돌아가 대책없는 상상력의 날개를 펼치기도 한다. 혼자 비상했다가 한 없이 추락하기도 하지만 돌이킬 수 없는 심각한 사고는 일어나지 않는다. 워낙 그리움 자체가 회복탄력성이 높을 뿐만 아니라 어떤 충격도 쉽게 받아들여 흐느적거리게 만드는 만병통치약이기도 하다. 단 전제조건은 그리움의 온도를 높여 고달프지만 기다림을 통해 지금의 아픔을 보고픔으로 만들어보겠다는 의지가 있는 그리움이다. 그리움의 온도가 과열 상태는 아니지만 쉽게 꺼지지 않는 불씨처럼 여전히 대상이나 사람을 향한 그리움의 씨앗을 발아시키려는 안간힘과 몸부림이 전제될 때 그리움은 그 어떤 아픔도 치유할 수 있는 심리적 각성제다. 그리움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은 살아가겠다는 다짐과 결의를 지닌 사람이다. 그러기에 숱한 그리움의 얼룩과 무늬가 씨줄과 날줄로 엮여 직조된 자기만의 삶을 만들어가려는 사람이야말로 그리움 학위를 논문이 아니라 시적 상상력으로 잉태하고 있는 사람이다. 그리움은 논리적 설명의 대상이 아니라 시적 상상력으로 헤아릴 수밖에 없는 감정의 흐름이다. 그리움은 “숱한 자기계발서에는 익숙한 것과 결별하고 낯선 것에 과감하게 도전하는 정신,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뜨거운 열정과 담대한 용기가 성공의 열쇠”(197쪽)와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그리움은 모든 것이 불확실해지고 모호하며 혼란이 가중되는 사회 속에서도 방향감을 잃지 않고 답이 없는 가운데 답을 찾아 나서려는 나약한 몸짓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리움이 있는 한 극도로 혼란스럽고 전대미문의 난국이 펼쳐질 지라도 끈질기고 집요하게 나에게 주어진 삶을 살아내려는 사람들의 간절한 몸부림은 적막을 뚫고 막막함을 이겨보려는 노력과 손을 잡을 것이다.
내가 무엇을 그리워하는지도 모른 채 하루를 살다가도 저녁노을을 바라보며 문득 생각이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그리움은 늘 당신보다 앞서간다”는 시인의 목소리가 이제야 몸 구석구석을 파고들며 깊은 그리움의 파도를 만든다. 목표를 달성하려는 강인한 의지와 열정으로 살다가 지친 우리들에게 그리움은 사치이자 향락에 가깝게 들릴 수 있다. 목표를 달성했지만 여전히 내 삶은 허둥지둥이 일상사고 허겁지겁이 하루 일과다. 목표가 목숨을 위태롭게 만드는 근본 동인임을 알아가는 황혼의 나이에 깨닫는 게 있다. 목표 중심으로 산다는 것은 뭔가를 그리워할 틈과 여유를 주지 않는 삶이다. 목표 달성 과정에 마주치는 우연한 조우는 효율에 위배되는 방해요인이다. 눈앞의 성과를 높이고 효율을 마치 일용할 양식처럼 살아가는 우리들의 슬픈 자화상을 누가 먼저 깨우쳐 줄 수 있을까. 내 몸과 영혼은 피폐해질 수 없을 정도로 만신창이가 되어갈 때 나의 그리움은 길을 잃고 어디서 어떤 방황을 하고 있는지 조차 알 길이 없다. 그리움은 내 곁에서 떠나버렸고 실종 신고를 한지도 오래다. 다시 그리움의 생태계로 돌아가 그리움에 물들고 싶은 사람들은 《그리움의 문장》을 인생독본처럼 읽으며 꺼져가는 그리움의 불씨를 되살려보기를 바란다. 그리움의 생태계에는 여전히 다양한 그리움이 서로가 서로를 그리워하며 살아가려는 사람이 서로를 보살피고 있다.
사람으로 산다는 것은 그리움에 종사하다 그리움에서 퇴직하는 일이다(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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