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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떠 있는 것 같아도 비상하고 있다네 : 니체 시 필사집 ㅣ 쓰는 기쁨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유영미 옮김 / 나무생각 / 2025년 6월
평점 :
니체의 시는 앎의 암을 유발하는 하나의 염증이다
그냥 떠 있는 것 같아도 비상하고 있다네
쓰는 기쁨 - 니체 시 필사집
니체는 ‘시쓰다’보다 ‘시하다’로 일생을 살았다
김혜순 시인이 ‘시를 쓰다’는 말보다 ‘시하다’라는 표현을 사용해서 시 쓰기의 본질적 의미를 다른 각도에서 해석한다. '쓰다'는 주로 글을 종이나 화면에 기록하는 행위를 의미하지만 '하다'는 어떤 행위를 수행하거나, 어떤 상태에 있음을 나타내는 훨씬 포괄적인 동사다. 김혜순 시인은 여성이 시를 창작하는 것이 단순히 언어를 배열하는 것을 넘어, 여성으로서 겪는 삶의 모든 경험, 즉 차별, 혐오, 폭력 등 남성과는 다른 고유한 현실을 온몸으로 겪어내고 그것을 시로 '체현'하는 과정임을 강조한다. 특히 여성에게 시는 단순한 창작물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재구성하는 행위니다. 시인은 자신의 내면에 있는 '여성'이라는 존재를 찾아 헤매고 끄집어내는 작업을 '시하다'라고 설명한다. 이는 시가 여성의 몸과 정신, 그리고 삶 전체와 분리될 수 없는, 존재론적인 행위임을 나타낸다. 일반적으로 '글을 쓰다'는 문자를 기록하는 행위다. 하지만 만약 '글하다'라는 표현이 있다면, 이는 단순히 글을 쓰는 것을 넘어, 글을 통해 세상을 이해하고, 자신의 사상을 펼치며, 글 자체가 그 사람의 삶의 방식이자 정체성이 되는 깊은 의미를 담을 수 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김혜순 시인의 '시하다'는 여성이 시를 창작하는 행위가 단순히 언어를 기록하는 것을 넘어, 여성으로서의 고유한 삶의 경험과 존재론적 투쟁을 온몸으로 겪어내고 이를 시로 승화시키는 총체적인 과정임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마찬가지 맥락에서 니체는 시를 쓰지 않고 시를 살아가는 사람이다. 시를 쓴 철학자가 아니라 삶 자체가 시다. 니체는 시를 쓰지 않고 쓴(쓰라린) 삶을 쓴다. 시하다는 니체에게 신을 죽임으로써 기존의 형이상학적 가정이나 사람들이 무비판적으로 따라가며 지켰던 도덕이나 규범을 파괴하고 새로운 인식의 지평을 열어가는 모든 활동 그 자체다. 니체에게 시는 고난의 역사적 기록이나 당연한 가정에 짓눌려 헐떡거리는 일상의 비루함에 통렬한 문제를 제기하기 위한 문장건축이 아니다. 니체게 다른 사람을 비롯해 모든 사물이나 현상은 시적 탐구나 상상력의 대상으로 존재하는 명사적 실체가 아니라 존재증명을 위해 다른 존재와 치열한 관계 맺기를 통해 부단히 움직이는 동사들이다. 니체에게 ‘시하다’는 이런 저마다의 존재들이 자기존재를 증명하기위해 다른 존재와의 부단한 관계맺기를 통해 부딪히며 살아가는 일상의 다른 이름이다. 시를 쓰는 사람은 시인 이외의 다른 타자를 관찰대상으로 간주하지만 시하는 사람은 주체와 객체의 이분법적 관계에서 벗어나 동사로서의 저마다의 존재들이 부딪히며 타자의 몸과 몸으로 만나 부단히 살아 숨쉬는 움직임이는 사람이다.
니체의 시는 눈뜨고 차마 볼 수 없는 빛나는 삶의 찬가다
이런 점에서 니체에게 시(예술)는 삶의 고통과 혼돈을 미적으로 승화시켜, 존재 자체를 긍정하게 만드는 행위니다. 니체에게 '시하기'는 마치 삶을 표현하는 무용수와 같다. 무용수는 건축가처럼 어떤 이론을 제시하거나 기존의 건물을 부수지 않는다. 대신, 그는 자신의 몸으로 음악에 맞춰 아름다운 춤을 춘다. 때로는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때로는 환희에 찬 몸짓으로 삶의 비극과 아름다움을 동시에 표현한다. 이 춤은 어떤 논리나 개념으로 설명될 수 없는, 그 자체로 완전한 미적 경험이다. 관객은 이 춤을 통해 삶의 고통과 혼돈조차도 아름답게 승화될 수 있음을 느끼고, 존재 자체를 긍정한다. 예술은 이렇게 삶의 모든 면을 끌어안고, 그것을 아름답게 만들어 우리에게 삶을 사랑할 이유를 제공한다.
“삶‘이’ 시답지 않아도 사람‘은’ 시답게 살아야 사람답게 산다.” 《인생이 시답지 않아서》 표지에 쓴 글이다. 삶‘이’와 사람‘은’은 조사가 다르다. ‘은는이가’ 조사 중에서 ‘은는’은 주관적 느낌의 표현이고 ‘이가’는 객관적 사실을 표현할 때 사용한다. 김훈이 《칼의 노래》에서 꽃은 피었다로 썼다가 한 나절 고민하다 다시 꽃이 피었다로 고쳤다는 일화가 있다. “꽃은 피었다”라고 쓰면 작가의 주관이 개입된 신념의 표현이고, “꽃이 피었다”라고 쓰면 누가 봐도 밖에 꽃이 핀 사실을 확인하는 표현이다. 지금의 현실 자체는 시답지 않은 건 주관적 감정의 강도가 다를 뿐 객관적 사실이라서 삶‘이’ 시답지 않아도라고 썼고, 그래도 사람‘은’ 시답게 자기 주관을 갖고 살아야 밖의 좋다는 이야기에 휩쓸려 떠내려가는 원심력에 끌려가지 않을 수 있다. 시답게 살아야 비로소 사람다움의 아름다운 모습이 드러난다. 삶 자체가 한 편의 시임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사람답게 살지 못하고 시답지 않은 인생을 억지로 꾸리며 살아간다. 시답게와 사람답게는 동의어다. 시답게와 사람답게의 거리가 좁아지지 않을 때 삶은 시답지 않게 변질된다. 니체의 《쓰는 기쁨》을 읽으면서 시종일관 들었던 생각은 시답게 살아가면서 사람답게 살아가려는 한 인간의 총체적 몸부림이 이렇게도 유쾌한 유희지만 통렬한 가르침이자 속깊은 아픔이자 심연을 알 수 없는 어둠이지만 눈뜨고 차마 볼 수 없는 빛나는 삶의 찬가다.
니체에게 ‘시하다’는 ‘사랑하다’와 동격이다
하늘을 흐리게 하는 자들을 몰아내자
세상을 어둡게 하는 자들
구름을 떠밀고 오는 자들을 쫒아내자
우리의 천국을 환하게 만들자
휘몰아치자, 더 없이 자유로운 영혼이여
-북서풍에게-
암울과 우울이 판치는 세상에서도 니체는 판을 뒤집을 정도로 과격하지만 서광이 비치는 희망으로 명랑하고 쾌활한 광인의 삶을 보여준다. 시답지 않은 세상에 시답게 살아가는 것은 사람처럼 시를 사랑하며 사는 삶이다. 시평론가 데이비드 오어(Daivd Orr)에 따르면 “나는 X를 좋아한다”와 “나는 X를 사랑한다”를 구글 검색하면 ‘사랑한다’보다 ‘좋아한다’가 세 배 많다고 한다. 나는 맥주를 좋아한다, 나는 책 읽기를 좋아한다, 나는 와인을 좋아한다, 나는 여행을 좋아한다. 하지만 ‘시(poetry)’를 X자리에 집어 넣으면 ‘좋아한다’보다 ‘사랑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두 배 더 많다고 한다. 시를 좋아하는 일과 사랑하는 일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다른 예를 하나 들어보기로 하자. “나는 나무를 좋아한다”와 “나는 나무를 사랑한다”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나무를 좋아한다는 말은 나무가 멋있을 때나 나에게 나무가 어떤 혜택이나 잇점을 제공해줄 때다. 나무를 사랑하는 사람은 나무 그 자체를 사랑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나무가 헐벗었어도 나무의 진면목 그 자체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암에 걸리면 여전히 좋아하는 감정이 유지될까? 좋아하는 사람은 그녀의 건강한 모습을 좋아했을 것이다. 암에 걸려 생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면 아마도 그녀 곁을 떠날 것이다. 하지만 그녀를 사랑하는 사람은 그녀가 암에 걸렸어도 사랑하는 감정을 버리지 않는다. 사랑은 그 사람의 모든 걸 목숨걸고 아끼는 감정이다.
이런 점에서 “‘시하다’는 ‘사랑하다’입니다. 나를 타자에게 내주지 못해 안달하는 말이 시입니다”(57쪽). 김혜순(2023)의 《김혜순의 말- 글쓰기의 경이》에 나오는 말이다. 지금보다 나은 사람이 되고 싶다고 결단하는 순간이 사랑하는 감정이 생겼을 때다. 시인의 시쓰기는 사랑하기와 동격이다. 그 사람 덕분에 내가 좀 더 나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는 근간에는 사랑하는 감정이 흐른다. 시를 사랑하는 순간, 나도 시보다 더 멋진 삶을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시는 우리에게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살아가게 만드는 감정을 품고 있다 시를 읽는 사람의 심장에 의미를 심어준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명사로 사는 사람이 아니라 동사로 사는 사람이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자신을 사랑에 빠뜨린 사람이나 사물의 실체나 정체를 잘 모르는 사람이다. 아니 다 알 수 없기고 모르는 게 남아 있기에 알고 싶어서 질문이 쏟아지고, 질문이 어제와 다른 사랑의 방법을 알려준다. 알았다고 생각하는 순간 알고 싶은 욕망의 물줄기는 멈추고 질문도 멈춘다. 정희진 작가가 “사랑의 끝은 질문이 없어진 상태”라고 표현한 까닭이다. 부단히 다른 모습으로 끊임없이 변신하는 사랑에 빠뜨린 사람은 한 순간도 자신을 고정된 명사형태로 정체되어 있지 않다.
니체의 시는 우울을 없애고 하늘을 빗질하는 청소부다
니체에게 시는 쓰기의 대상이 아니라 ‘시하다’와 같이 차라투스트라가 위버멘쉬가 되기 위해 오늘과 다르게 늘 바뀌는 부단한 자기변신과정이다. 니체에게 시는 숨막히는 순간에 숨통 트이게 하는 지적 호흡이다 다름없다. 정현종 시인의 《빛-언어 깃-언어》에 따르면 시는 읽는 게 아니라 “시를 숨쉰다” 또는 “시를 산다”가 맞다. 기대했던 일이 잘 안 풀리거나 뜻밖의 사건이나 사고가 발생할 때 “숨막히다”는 표현을 쓴다. 생명의 상징인 숨이 막히니까 그만큼 힘들고 어려운 난국에 직면했음을 직감적으로 드러내는 은유적 표현이다. 시를 읽지 않고 “시를 숨쉰다”는 말이 결국 “시를 산다”는 말로 연결되는 까닭은 숨막히는 긴장과 초조 속에서 시를 숨쉬면 그것으로 다시 살아갈 수 있는 힘이 생긴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시를 읽으면 막혔던 숨통도 트이고, 갈등과 모순의 사안 사이에서 잠시 한 숨을 쉴 수 있는 여유도 찾아온다. 이런 저런 일로 무겁게 짓누르는 세상의 무게감으로 답답하고 탈출구 조차 보이지 않을 때, 한 편의 시를 읽으며 숨막혔던 위기의 순간을 벗어나는 한가로움을 만끽하는 순간, 깊이 쌓였던 시름조차 잊어버리고 심기일전(心機一轉)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다. 세상이 답답하고 마음도 갑갑할 때 그 어떤 생각조차 하기 싫어서 심신이 마비된다는 느낌이 들 때도 시는 온몸에 흐르는 활력과 생기다. 시는 숨막히는 순간에 숨통이 트이게 만들고 한 숨 쉬면서 대안을 모색할 때 나도 모르게 내 몸을 따라 흐르는 숨결이다.
니체는 허무주의(虛無主義)가 온 세상을 뒤덮을 암울한 전조가 보이자 허무주의에 오하려 주의(注意)를 기울이며 우울함 속에서도 우리가 살아갈 삶의 빛나는 운명을 역설적으로 칭송하면서 언제나 보통 사람보다 높은 곳에서 시대의 조짐을 예언한 철학자 시인이다. 낙타처럼 도덕에 무조건 복종하는 노예의 인생도, 사자같이 울부짖으며 불만만 토로하는 반항자도 거부하고 오로지 삶을 놀이와 긍정으로 해석, 웃음으로 세상의 낙원을 건설하는 어린아이처럼 “목적이 없는 온전한 시간”을 만끽하며 “모든 것이 그저 놀이일 뿐이다”(실스마리아)라고 주창하고 있지 않은가. “니체의 시는 무력하고 우울할 때, 더 이상 꿈의 추구가 불가능해보일 때, 자신이 벌레처럼 누추하다고 느껴질 때 읽을 만하다. 니체의 시가 우리 몸과 마음을 꼼꼼하게 진찰하고 써준 명의의 처방전이 될 수도 있을 테다”(9쪽). 장석주 시인의 추천하는 글에 나오는 말이다. 니체의 시는 “길 잃은 선원들에겐 불빛 신호/답을 가진 사람들에겐 의문부호”(등대)이고 “공간에도, 무상한 시간에도/결코 묶이지 않는 나는/독수리처럼 한껏 자유”(고향없는 사람)로운 영혼을 꿈꾸는 방랑자의 고뇌이자 결단이다. 니체의 시는 “우울을 없애고 하늘을 빗질하는 청소부”이자 “네 부름을 듣고 바위 계단으로, 바닷가에서 우뚝 솟은 누런 절벽으로”(북서풍에게) 위풍당당하게 뛰어내리는 과감한 도전이며, “금빛 햇살이 발그레한 아침놀 사이로 돌진하듯, 화살처럼 몸을 움츠렸다가/심연으로 돌진하는” 철없는 예술가다. 니체는 ‘틀 밖’에서 호기심의 물음표(?)를 던져 ‘뜻밖’의 느낌표(!)를 찾으며, 일상에서 비상하는 상상력의 날개를 달고 힘든 세상을 온몸으로 끌어안고, 시답지 않은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시답게 살아갈 수 있도록 힘과 용기를 주는 희망의 전도사다.
춤추는 별도 극심한 혼돈이 낳은 자식이다
헌 책방에서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읽고 인생 방향전환을 결심한 니체도 흥미롭게도 쇼펜하우어의 염세주의를 받아들이면서도 궁극적으로는 이를 극복하고 생의 긍정으로 나아갔다다. 쇼펜하우어의 암울한 인생관에도 불구하고, 니체는 이를 바탕으로 자신만의 독창적인 철학을 발전시키며 “누구에게도 복종하지 않았다”(아르 투르 쇼펜하우어). “사유의 가장 깊은 어둠 속에서 타오르는 불꽃”(12쪽)이라고 해석한 유영미 번역자의 말에서도 짐작하듯 니체는 평범함과 편안한 일상을 거부하고 스스로 정상적 사유를 전복하며 비정상적 삶을 즐기는 가운데 몸을 관통하고 남은 얼룩과 무늬를 씨줄과 날줄로 직조해서 철학적 삶을 살고 시하기를 통해 세상의 부조리에 온몸으로 항거한 광기의 전범(典範)이다. “춤추는 별을 탄생시키기 위해 사람은 자신 안에 혼돈을 품고 있어야 한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나오는 말처럼 니체는 극심한 혼돈 속에서도 질서를 창조하고 “하나의 바람이 나를 거부한 뒤로/닥치는 대로 모든 바람을 붙잡고/항해할 줄 알게 되었네”(나의 행복)처럼 생의 모든 순간을 배움과 익힘의 소중한 순간으로 포착한다. “내가 좋아하는 건/숲과 바다의 동물처럼/한참동안 헤매며 한 눈을 파는 것/사랑스런 혼란 속에 쪼그려 앉아 사색에 잠기는 것/그리고 마침내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지는 것/나 자신에게로 이르는 것”(고독한 자)이다. 불안과 혼란, 걱정과 두려움에 정면으로 맞서며 인생반전과 역전의 발판으로 삼아 어제와 다른 위버멘쉬로 변신하기 위해 언제나 생의 찬가를 부르며 긍정의 디오니소스적 인간으로 평생을 살아가려고 안간힘을 썼다.
니체는 흔들리되 뿌리까지 뽑히지 않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네가 서 있는 곳을/깊이 파고들어라/그 밑에 샘이 있다!”(겁먹지 말고)는 걸 알아차려여 한다고 하면서 동시에 깊이만 파다 기피 대상이 되니 높은 곳에 올라가 내가 어떤 샘물을 찾아 깊이 파고들어가는지를 조망해보라고 한다. “때로는 태양/때로는 구름이 되어/길을 간다네/늘 그 사람들보다 높은 곳에서!”(현자는 말한다). 높은 곳에 있어야 세상의 흐름을 예견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작은 구석의 뒤안길에 매몰되어 전체적인 구조와 관계에 어둡지 않을 것이다. “그는 멀리, 높은 곳으로 가야하리/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그가/나의 별이 될 수 있겠는가”(가장 가까운 사람). 누군가의 별이 된 사람은 한 두 번의 노력을 높은 곳에 올라간 사람이 아니다. 부단한 노력으로 범접할 수 없는 곳에서 아우라를 내 뿜으로 세상의 어둠을 밝히는 별이 된 사람들이다. 그들은 동경을 넘어 존경의 대상이다. 별은 단순히 높은 곳에서 내리비치는 빛의 의미를 넘어선다. 고독한 자에게 벗이 되어주고 힘든 자에게 밤을 배경으로 전경으로 드러나게 힘 실어주는 위로의 손길이다. “그대는 내 마음 깊은 곳에서 외로이 떠올라/별이 되어 내 생의 밤하늘에서/가물가물 반짝인다”(지는 별). 높은 곳에 올라 밤하늘의 별이 된다는 의미는 어둠을 밝히는 벗이 되어 존재를 드러내지 않더라도 삶의 뒤안길을 밝혀주는 등대가 되어주겠다는 뜻이다,
모든 편견은 꼬인 내장에서 비롯된다
“그는 사람들의 칭송을 뛰어 넘은 곳에/살고 있다/그는 저 위의 사람이다!”(높은 곳의 사람들). 저 위의 사람은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과 물리적으로 떨어져 높은 곳에서 자기 과시를 일삼는 사람이 아니다. 치열한 일상을 살면서도 일상에서 비상하는 상상력을 잉태하기 위해 몸으로 겪어본 신체적 깨달음을 정신적 각성제로 제조해서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삶의 지침과 방향을 제시하는 사람이다. 발은 낮은 곳에 두되 머리는 늘 이상을 지향하면서 현실에서 진실을 캐내는 사람이다. 하지만 저 위에서 새상을 관념적으로 파악하며 지적 유희만 즐기지 않는다. 몸이라는 신체성을 현장성과 맞닥드리며 전쟁을 일삼는다. 생각의 발로(發露)는 발로에서 나온다. “근육이 축제를 벌이지 않는 생각들은 도무지 믿지 마라/모든 편견은 내장에서 나온다/전에도 말했지만/엉덩이를 붙이고 끈덕지게 앉아 있는 건/신성한 정신을 거스르는 죄다”(가만히 잊지 마라). 땀은 근육이 흘리는 눈물이다. 그 눈물을 흘려보지 않은 사람은 근육에 상처가 아물며 험난한 세상을 샇아갈 근력(根力)도 없다. 근육의 힘, 근력(筋力)이 근본을 파고드는 힘, 근력(根力)이 되는 까닭이다. 몸을 수직으로 세워 움직이지 않고 책상에 오랫동안 앉아 골머리를 앓다보니 내장은 꼬이고 생각을 뒤틀리며 마음은 정처를 찾지 못하고 헤매기 시작한다. 견딜 수 없는 창자의 고통이 애간장을 녹이다 마침내 굽어지는 허리 압력에 못이겨 근거없는 편파적 의견을 대책없이 쏟아낸다.
니체는 신체를 커다란 이성으로 위치지우고 우리가 말하는 이성을 작은 이성으로 전락시켜, 머리가 생각하는 로고스 중심의 철학을 전복시키고 몸이 철학의 중심으로 등장시킨 철학자다.
“이성이란 얼마나 지긋지긋한 것인지!/그런 우리를 너무 빨리 목적지로 옮겨다 놓는다네”(남쪽 나라에서). 이성은 목적지에 도달한 최단거리를 계산하고 거기에 이른 효율적인 방법을 모색한다. 직접 목적지에 이르는 현장에서 현실을 만나 몸으로 진실을 캐내는 즐거움을 만끽하지 못하고 논리적 정합성만 무수한 담론으로 따져물어본다. 당연히 골머리를 앓으니 두통은 심화되고 내장은 꼬여서 자신이 생각하기에 편리한 의견만 임기응변적으로 쏟아낸다. 내장에서 나온 편견으로 쓰는 글은 심장박동을 가속화시키지 못한다. 니체가 말하느 《쓰는 기쁨》도 느끼지 못한다. 니체는 그래서 일장훈시를 시작한다. “나는 손으로만 글을 쓰는 것이 아니란다/언제나 발이 함께 쓴단다/굳건하고 자유롭게/그리고 용감하게/발은 때로는 들판을/때로는 종이 위를/뛰어다니지.” ‘발로 글을 쓰다’라는 시 전문이다. 손발이 움직이지 않고 손가락만 움직여 쓰는 글의 관념적 폐해의 역기능을 일갈하는 주장이다. 니체의 시가 심오하면서도 경쾌하고 의미심장하면서도 유쾌한 까닭은 격전의 현장을 발로 뛰어다니면서 오감각으로 받아들인 자연과 세상의 목소리르 번역한 몸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영혼은 행위란다/몸이 없는 성자들을 믿지 마라.” 김선우 시인의 《녹턴》이라는 시집에 나오는 ‘햇봄, 간빙기의 순진 보살’에 나오는 시 구절이다. 인공지능이 감탄을 자아내는 시를 써도 몸이 없는 논리기계로 편집한 시라서 감동을 주기는 어렵다.
니체에게 위험은 의지(依支)하고 싶은 의지(意志)다
니체는 “미끄러운 얼음판/춤출 줄 아는 자에게는/그곳이/바로/파라다이스”(춤추는 이를 위하여)라고 우리에게 말한다. 모든 것이 얼어붙은 엄동설한의 추위에도 그냥 떨고있지 않고 세상의 위기에 맞서 춤을 추는 위버멘쉬였다. 바람에 맞서는 방법은 책상에 앉아서 아이디어를 생각해내고 고민하는 가운데 나오지 않는다. “반갑다, 느닷없이 불어오는 바람들아/너희는 오는구나/너희 서늘한 오후의 정령들이여!/중략/강인함을 잃지마라, 내 용감한 심장이여!/이유는 묻지 마라!”(해가 저문다). 어떤 바람이 느닷없이 불어와도 관념의 거품을 걷어내고 내면을 가리는 포장을 뜯어내며 위장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고 모든 것을 버리고 혹한의 시련을 견디는 나목(裸木)처럼 껍데기로 가려진 자신을 드러내는 나체(裸體)가 될 때, 그러고도 견디고 극복할 수 있는 힘이 곧 나력(裸力)의 지혜임을 니체는 온몸으로 가르쳐주었다. 하지만 세상의 진리를 몸으로 증명하지 않고 기존 관념에 기생하거나 의존해서 해결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는 순간 내장은 꼬여서 온갖 편파적 의견이 나도 모르게 쏟아져 나온다. 바람이 불면 바람과 맞서 싸우는 수밖에 없다. “바람과 더불어 춤출 수 없는 자들/붕대를 감아야 하는 약한 자들/묶인 자들과 늙어 몸이 불편한 자들/위선에 찬 무리들/명예만 따지는 얼간이들/시시콜콜 도덕을 따지는 인간들/우리 낙원에서 물러가라!”(북서풍에게). 변화와 위기는 관리대상이라기보다 함께 맞서 춤추는 가운데 그 물결과 흐름 속에서 난국을 돌파하는 지혜를 얻을 수 있는 법이다.
작은 위기에도 넘어지고 고정관념에 묶여 관념조차 고장난 사람들이 온갖 명예와 위선에 묶여 내가 주어가 되지 못하고 언제나 그들이 말하는 도덕에 억눌려 생각만으로 살아가려는 사람들에게 니체는 늘 고통스러운 충고를 던져주어 고충이 되는 사람이다. “명성을 얻고자 하는가?/그렇다면 이 교훈에/귀 기울여야 하리라/너무 늦지 않게/명예를 포기하라”(충고). 명성을 얻고 싶으면 명예를 포기하고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를 얻고 싶으면 기존의 도덕과 규범에 종속되어 노예의 인생을 살아가지 마라고 니체는 일갈한다. “이제 차갑게 직시하라!/너는 길을 잃었다/네가 의지할 건 이제 위험뿐이다!”(헤매는 자). 모든 시작을 위험하지만 시작하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는다. 위험을 무릅쓰고 겪어본 경험이 삶의 지침이되는 경전이다. 때로는 기존 앎에 심각한 생채기를 의도적으로 만들어야 더 큰 시련을 견뎌낼 앎의 근육이 생기는 법이다. “녹이스는 일도 필요하다/예리함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니!(녹). 녹이 슬어 철이 산화되는 화학적 변화를 겪어내야 제3의 새로운 물질로 탄생하는 것처럼 고통의 자막을 주체적으로 해석해내야 그 누구도 갖지 않는 나만의 해답을 장착, 세파에도 흔들리지 않는 용기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다. ”내 고통은 자막이 없다 읽히지 않는다/바람은 내가 알지 못하는 시간 속으로 유배된 자들이 내게 띄우는 편지다.“ 김경주 시인의 ‘비정성시(非情聖市)’ 라는 시의 일부다.
인간은 대답할 수 있는 질문만을 듣는다
그대들 독자들이여
튼튼한 치아와 튼튼한 위를
가지고 있기를 바라겠소이다!
내 책을 잘 소화해야만 비로소
나와 친하게 지낼 수 있으리니!
-나의 독자들에게
니체의 글과 시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읽기 어렵다는 이야기는 우리가 니체처럼 극심한 고통 속에서 삶의 정수를 걸러내는 아프고 힘든 삶의 깊이와 넓이를 모르기 때문이다. 내 삶을 능가하는 글을 읽을수도 쓸 수도 없다. 니체처럼 살아가려면 튼튼한 치아와 튼튼한 위를 갖고 니체가 말하는 메시지를 잘 씹어 소화시켜야 한다. 경험해보지 않으면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주체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틀이 생기지 않는다. “극복해낸 것에 대해서만 말해야 한다-다른 모든 것은 잡담이고 ‘문학’이며 교양의 부족이다”(9쪽). 니체의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II》 중에 나오는 말이다. 니체의 시가 짧지만 긴 울림을 내포한 상태로 통렬하면서도 동시에 통쾌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몸을 관통한 흔적으로 시처럼 살아가는 삶을 살아갔기 때문이다. “결국 어느 누구도 책이나 다른 것들에서 자기가 이미 알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이 얻어들을 수 없는 법이다. 체험을 통해 진입로를 알고 있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그것을 들을 귀도 없는 법이다” (377쪽). 니체의 《비그너의 경우·우상의 황혼·인티크리스트·이 사람을 보라·디오니소스 송가·니체대 바그너》 중에 나오는 말이다. 이런 맥락에서 니체는 《즐거운 학문 메시나에서의 전원시》에서 이어서 말한다. “우리 청각의 한계: 인간은 대답할 수 있는 질문만을 듣는다”(231쪽). 아무리 좋은 질문을 던져도 자신이 겪어본 경험으로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은 알아들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들으려고도 하지 않는다.
한 번도 떠나보지 않은 사람들에게
당신이 사는 시대를 좀 더 객관적으로 파악하고 싶은가?
시대의 진면목을 보고 싶은가?
한 번 쯤 멀리 떨어져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말하자면, 시대의 해안에서 발을 빼어
멀리 과거의 바다로 떠밀려 가보라,
먼 바다에서 해안을 바라보면
해안의 전체 모습이 눈에 들어올 것이다.
그런 다음 다시 해안에 가까이 오면,
해안을 한 번도 떠나보지 않은 사람들보다
해안을 전체적으로 훨씬 더 잘 알 수 있다
어제와 다른 곳으로 떠나야 어제와 다른 마주침을 얻을 수 있고 그 마주침이 나에게 삶을 살아가는 낯선 깨우침으로 다가온다. 그 깨우침이 어제와 다른 시를 쓰는 원동력으로 작용한다. ”나는 오로지 작가가 피로 쓴 글만을 사랑한다.” 니체는 경험해본 것만 피로 쓴다고 한다. 이런 점에서 니체에게 글을 쓴다는 것과 삶을 바꾼다는 것은 하나이며 니체에게 ‘시쓰기’는 ‘시하다’로 바뀌는 이유다. 경험하며 흘린 땀과 눈물의 이중주가 사투를 벌이며 흘린 피를 만나 땀과 눈물과 피의 3중주가 만든 흔적과 얼룩을 특유의 통쾌한 서사적 문체로 써내려간다. 니체의 시를 읽노라면 피눈물이 고여 있고 피땀어린 흔적이 숨어 있지만 초긍정의 디오니소스적 광기와 열정을 녹여내는 진중한 발걸음으로 하늘을 날아가는 명쾌함과 유쾌함이 통쾌함이 뒤섞여 노래를 부르며 행진을 하는 듯한 느낌에 사로잡힌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라는 책도 철학서이기 이전에 차라투스트라의 격동적인 삶을 담아낸 음악이자 그림이며 장편의 서사시다. “생각을 하는 것은/그만하고 싶네/생각을 하는 자는/생각의 손아귀에 붙잡힌 자/난 더 이상 생각에/봉사하고 싶지 않다”(은자는 말한다). 생각하지 않는 철학자는 없다. 니체가 그만두고 싶은 생각은 자기 생각에 빠져 자기 생각으로 자기 생각을 갉아먹으면서까지도 몸을 움직이고 않고 생각만 거듭하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라 기존 생각에 갇뎌 자기 생각의 틀을 깨고 밖으로 나오지 못한 상태에서 기존 생각으로 생각의 자손을 무한 출산하는 사람들이다. 진짜 생각하는 사람은 니체가 말하는 ‘부자유한 자’다. “그는 서서히 귀를 기울인다/어쩌다 이 모양이 되었을까/귓전을 맴도는 소리는 무엇일까/그를 아래로 끌어내리는 건 무엇일까”(부자유한 자).
시는 나는 나의 해석자가 될 수 없음을 알려주는 경고등이다
진짜 생각하는 사람은 기존 생각의 꼬리를 물고 자기 생각이 낳은 통념이나 고정관념에 갇혀 있는 사람이 아니라 귓전을 맴도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이전과 다르게 다가오는 모든 외부적 자극에 대한 내면적 반응의 목소리를 경청하며 생각하는 사람이다. 한 없이 치솟아 오르려는 자만심을 땅으로 끌어내려 낮은 곳으로 임하려는 겸손한 자세와 노력 속에 치열한 생각이 잉태된다. 니체가 그렇게 해서 찾아낸 진리가 드디어 우리 곁으로 찾아온다. “가만! 나의 진리가 왔다!/머뭇거리는 눈으로, 비단처럼 부드럽게 전율하며/진리의 눈이 나를 쳐다본다/사랑스럽고 심술궂은 소녀의 눈빛…”(가장 부유한 자의 가난에 대하여). 니체는 언제나 확신이나 기존 진리는 부패하기 때문에 통념에 걸려 넘어지기 전에 어제와 다른 질문으로 언제나 믿음의 근거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가정에 통렬한 문제를 제기한다. 자기자신의 해석틀에 갇히는 좌정관천의 어리석음에서 벗어나기 위해 스스로 구축한 철학체계와 기반도 수시로 전복했던 망치철학자였다. “사회 현상의 실존적 영향력은 그것이 팽창할 때가 아니라 더할 나위 없이 미약한 상태인 초창기에 가장 날카롭게 인지될 수 있다”(178쪽). 밀란 쿤테라의 《커튼》에 나오는 말이다. 영향력이 도처에 산재해서 익숙한 힘으로 작용하기 시작하면 사람들은 별다른 느낌을 갖지 못하고 습관적으로 다가오는 자극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니체도 같은 맥락에서 “타락의 초기에만 타락을 참을 수 없다고 느낀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타락도 타성에 젖으면 관성이 되어 별 다른 느낌을 갖지 않은 채 습관적으로 반복한다는 의미다. “어떤 현실이 전혀 부끄러움 없이 되풀이 된다면, 그 반복되는 현실에 직면한 사상은 결국 언제나 입을 다물게 되는 법이다”(179쪽). 밀란 쿤데라의 같은 책에 나오는 말이다. 시는 반복되는 현실에 의문을 던져 부끄러움을 낳고 죄책감을 느끼게 하여 타성에 젖은 생각을 세탁, 날 좋은 햇빝에 말리는 가운데 탄생된다.
“내가 나를 해석하면/스스로를 속이게 되리라/나는 나의 해석자가/될 수 없으니!/오직 자신의 길을 꾸준히 오르는 자, 그 사람만이/나의 모습도 더 밝은 빛에서/비추어주리라”(해석). 시는 나는 나의 해석자가 될 수 없음을 알려주는 경고등이다. 있는 곳에서 머무르고, 자기 전공 틀안에 갇혀서 전공지식간 부단한 순혈교배를 통해 자기들만 알아듣는 지식을 생산, 자기들이 갇혀 있는 이론적 틀로 해석하는 자가당착적 오류를 범하는 지식인들에게 던지는 경고다. 내가 나를 해석하기 위해서는 나 스스로를 가두고 있는 편견과 선입견은 물론 나도 모르는 사이에 믿고 있었던 신념이 통념으로 바뀌고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부단히 질문을 던져야 한다. 물음 앞에 나의 해석된 지식이 불안에 떨고 위험에 노출되어 언제나 긴장과 불안 속에서 세상을 밝히는 온전한 앎이 삶이라는 전쟁터에서 단련당하고 옳음이라는 소금에 뿌려져 썩지 말아야 한다. “스스로를 그렇게/부풀리지 마라/계속 부풀리기만 하면/풍선처럼 조금만/찔러도 터져버릴 테니”(오만에 대하여).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허장성세를 구가하며 위장하고 치장하는 관념적 거품을 걷어내고 ‘해방된 정신’으로 세상의 흐름을 이끄는 이면의 구조를 구조적으로 파악하려는 노력을 게을리리하지 않았다.
시는 몸안으로 침입해 통증을 유발하는 염증이다
해방된 정신
다른 의견을 용납할 줄 아는 것이
문화의 표지라는 건 이제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
더 나아가 수준 높은 인간은 자신에 대해
이의가 제기 되기를 원하고 그런 상황을 일부러 만들어낸다.
지금까지 몰랐던 자신의 잘못을 깨닫기 위함이다.
하지만 이 두가지보다 더 위대한 것은
다른 의견을 말 할 수 있는 것이다.
거리낌 없는 양심으로
지금까지 관습적으로 내려오던 익숙한 것,
신성하게 여겨지는 것에 맞서 다른 생각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우리 문화의 위대하고 새롭고 놀라운 면이며,
해방된 정신이 걷는 가장 앞선 걸음이다
니체가 생각하는 시는 관성에 따라 움직이는 ‘발상’이 아니라 생각의 물구나무를 서서 관성을 거부하고 거꾸로 바라보는 ‘역발상’이며 닫힌 생각의 감옥에서 탈출하는 해방이다. 니체가 생각하는 시는 책속의 깨알 같은 ‘글씨’가 아니라 책을 쥔 손에 맺힌 작은 ‘땀방울’이다. 니체가 생각하는 시는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관망'이 아니라 낮은 곳에서 밑바닥의 절박한 현실을 몸으로 느끼며 부대끼는 ‘치열함’이다. 그래서 니체의 시는 하나의 염증이다. “사랑은 하나의 염증/너라는 이물질이/내 안에 침입해/통증을 유발하는 것/미열처럼 너는/궤양처럼/너는.” 조원희의 ‘염증’이라는 시다. “시는 하나의 염증/시라는 이물질이/내 안에 침입해/통증을 유발하는 것/미열처럼 시는/궤양처럼/시는.” 니체의 《쓰는 기쁨》에 나오는 시는 모두 하나의 염증을 유발한다. 니체의 시을 읽고 나면 기존 앎에 심각한 암(癌)이 생긴다. 그래도 두렵지 않다. 그 암이 기존 앎을 뒤엎고 새로운 앎으로 인도하는 거룩한 고통 끝에 찾아오는 새로운 앎의 신호탄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자신이 어떤 암에 걸렸는지도 모르고 새로운 앎도 추구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있다. 이성복 시인이 ‘그날’이라는 시에서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고 생각한 것처럼. 앎의 암이나 염증을 치료하는 특효약이 바로 니체의 《쓰는 기쁨》에 나오는 시다. 니체가 전해주는 치료약으로 힘들고 우울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도 명랑하고 행복한 일상이 주는 소중한 순간을 만끽할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