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경계에서
미카이아 존슨 지음, 이정아 옮김 / 황금가지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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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재밌다. 그동안 SF 소설을 읽으면서 '내가 이만큼 과학적 고증을 잘 했다'고 알리는 데 바쁘거나, 본인이 만든 세계관을 설명하는 데 너무 많은 장을 할애하는 서술 방식 때문에 재미가 반감되는 걸 많이 겪었다. 이 책은 저 두 가지 문제점(?)을 전혀 드러내지 않고도 내용을 이해하는 데 전혀 무리가 없이 이야기에 몰입할 수 있게 한다.
수많은 차원의 세계 중 비슷한 수준의 우주로 이동할 수 있지만, 그 지구에 살고 있는 '나'의 존재가 죽어야만 탈없이 이동할 수 있다는 게 참신하다. 새로운 지구로 이동할 때마다 '같으면서도 다른 나'를 알게 되는 기분은 어떨까. 성벽 외부 출신에 늘 비슷하게 죽던 주인공은 유일하게 성벽 안 도시에서 살고 있는 225호 지구의 '나'를 보며 부러움과 위안을 느낀다. 나도 현재가 너무 힘들 때 다른 삶을 사는 수많은 '만약에'를 생각해본 적이 있는데, 저런 삶이 진짜 존재한며 심지어 대체로 똑같고 가끔 다르다는 걸 알았을 때 느낄 허무감과 절망감을 생각하면 무섭기도 하다. (사실 나보다 더 잘 살고 있어도 허무하고 나보다 못 살아도 절망할 것 같다.)
《세상의 경계에서》 내용 중 무엇보다 재밌는 포인트는 계급이 다른 카라와 델의 애증 관계, 카라와 닉닉의 관계가 완전 혐관맛집이라는 것이다..👍 같은 현상을 두고 과학과 종교의 해석이 갈리는 걸 보는 것도 재밌다. 
한 가지 조금 아쉬운 것은, 소금병에 걸린 상태를 원작에서는 '롯의 아내'라고 표현했다고 하는데 번역도 '소금 기둥'으로 바꾸지 않고 그대로 사용하고 각주로 설명해줬으면 어땠을까 싶다. 그럼 이후 문장에서 "내 방에 롯의 아내를 두는 것 이상으로 위험한 일도 없을 테다."가 더 표현이 재치 있게 느껴졌을 것 같다.

* 출판사 서평단에 선정되어 도서를 지원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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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샤 창비청소년문학 117
표명희 지음 / 창비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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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남기 위한 우리의 변장술은 눈물겹다."
동북아에서 가장 큰 공항인 인천공항. 하루에도 어마어마한 수의 사람이 드나드는 이곳에 어찌 들어오긴 했는데 몇 달 째 나가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난민 심사 통과를 기다리며 의자에서 쪽잠을 청하는 외국인이 그들이다. 책은 버샤의 가족 6명이 국제공항 출국장에서 난민 심사를 기다리며 생활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야기의 주된 화자인 버샤는 실어증이 있어 목소리를 내지 않는다. 화자이면서도 말을 못하는 주인공의 아이러니는 한국에 왔으면서도 한국에 온 것이 아닌 상황을 대신 보여주는 듯하다. 버샤는 말을 줄인 대신 눈과 귀로 상황을 세심하게 살피고 속으로 고민하고 관찰한다. 어차피 말을 할 줄 알았더라도 낯선 땅에서의 거주를 허락 받기 위해서는 쓸 데 없는 말은 줄이고 할 말을 삼키며 벙어리처럼 지내야함을 잘 아는 인물이다. 줄거리로 보면 버샤는 분명 20살임에도 서술하는 문체를 보면 '일찍 철 든 아이'를 넘어서 40대~50대 부모 나이의 사람이나 하는 생각들 같아 조금 아쉬운 점은 있다.(어떤 애가 동생을 보며 "어린 것이 놀이와 휴식을 용케 가릴 줄 안다."라고 탄식할까.) 그렇더라도 난민 문제 뿐만 아니라 열악한 무슬람 여권, 가파른 물가 상승, 비정규직의 고용 불안정성, 로봇의 일자리 대체 등 현재 우리 사회에서 같이 고민해봐야 할 사안들을 담고 있어 교과 시간에 활용하여 함께 읽은 후 토론하기 좋은 책이다. 버샤와 진우는 각자의 사정으로 하늘을 바라보며 별과 달을, 우주를 그리며 지구에서의 삶을 잠시나마 잊으려 한다. 그럼에도 어느 목사의 이야기처럼 아무리 천국이 좋아도 지금 당장 가기보다 '지금 여기'에서 잘 살아보려 노력하는 '애씀'은 두 주인공만의 것은 아닐 것이다. 책을 덮으며 세상 곳곳에 있는 내가 아는, 또 내가 모르는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의 안식을 기대해 본다.

* 출판사 서평단에 선정되어 도서를 지원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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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남은 여자들은 세계를 만든다 - 분단의 나라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
김성경 지음 / 창비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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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 아직 발매 전이라 책 정보가 없었을 때는 그저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의 우리나라 버전이라는 정도만 알았고, 책을 받고 나서야 북한 여성들의 이야기임을 알았다. 위의 소개 문구를 보고서도 순간 '우리나라의 전쟁 중 여성들의 이야기?? 여남차별 현상을 비유적으로 표현한건가?'라고 생각했던 내 자신에게 황당하다. 정치적 프레임도 남북공작에서 벗어나 여남 차별, 장애인과 비장애인 차별 같이 더 예민하고 미묘한 것으로 옮겨간 요즘, 나도 모르게 북한을 과거 한켠으로 밀어 넣어버린 것이다. 벌써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도 70년이 넘었다. 어릴적 학교에서 통일교육을 받고, 이산 가족이 상봉하는 장면을 티비로 보며 통일을 그려본 적도 있는 세대임에도 북한이 잊혀지고 있는데, 나보다 어린 세대들은 정말 남으로 느껴질 듯하다. 이런 시기에 북한의 괴로움을 알고 연대감을 느끼게 하는 이 책이 나와서 참 좋다고 생각했다. 책 날개 뒷편에 함께 읽을만한 책이 4권 소개돼 있는데, 다음에 기회가 되면 읽어보려 한다.
♦️ 이 책은 지리적으로 가장 가까우면서도 낯선 북조선 사람의 이야기, 특히 여성이 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어 특별하다. '다큐멘터리 산문'이라는 것도 궁금했는데, 읽고 나면 정말 한편의 다큐를 본 것 같다. 인터뷰 등으로 수많은 사람을 만나며 겪고 느낀 것을 딱딱하게 정리만 한 게 아니라 한 편 한 편의 이야기로 만들어 전달하고 있어 소설을 읽는 듯 하기도 하고, 감상은 더 현실감 있게 다가온다.
♦️ 1부에서는 '천리마작업반' 운동의 영웅이라 불리던 길확실의 이야기가 나온다. 출석률 70퍼밖에 안 되는 작업반을 자진해서 맡아 불과 몇개월만에 출석률 100퍼, 생산률 140퍼를 만들어낸 길확실은 30년대 북조선이 아닌 지금 태어났다면 훌륭한 여성 리더가 되었을 것이다.

* 출판사 서평단에 선정되어 도서를 지원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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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호자들
존 그리샴 지음, 남명성 옮김 / 하빌리스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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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은 첫 문장이 중요하다. 그래서 한때는 소설을 읽을 때마다 첫 문장을 기록해두기도 했다. 존 그리샴의 소설은 <카미노 아일랜드>와 마찬가지로 <수호자들>도 첫문장에서부터 책 전체의 분위기를 파악할 수 있다. ("차마 입에 담을 수조차 없는 범죄를 저질러 유죄 판결을 받은 듀크 러셀은 사실은 결백하다.") 그리고 역시나 속 터지는 전개 없이 챕터 1에서 진짜 범인의 이름도 공개한다.
♦️ 무고한 죄수를 위해 일하는 수호자 재단은 센추리온 재단이라는 실제 모델이 존재하며, 소설 속 사건도 실화를 바탕으로 재구성된 것이다. 때문에 사건 배경이 디테일하고, 재단 운영의 어려움과 재판과 관련된 인물들의 권태감, 부도덕함이 굉장히 사실적으로 묘사돼 있다. 말도 안 되는 추정과 매수된 증인에 의해 치러지는 재판에 속 터져서 잠시 읽기를 멈출 때도 있었지만, 꽤 두꺼운 책임에도 집중하면 앉은 자리에서 다 읽을 수 있는 책이었다.

* 출판사 서평단에 선정되어 도서를 지원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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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미노 아일랜드 - 희귀 원고 도난 사건
존 그리샴 지음, 남명성 옮김 / 하빌리스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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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랜만에 흥미 위주의 재밌는 책을 읽었다. 추리소설은 아니기에 답답하고 단서를 숨기는 일 없이 시원시원하다. 첫 문장부터 범인이 등장하는 이 책은 mbti가 jjjj인 사람의 철저한 범죄 계획에 의해 피츠제럴드의 원고가 사라졌다는 기발한 저자의 상상력으로 시작된다. 그러나 구멍이 아예 안 생길 수는 없는 것이 도둑이 ^한 명 이상^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나같이 pppp인 사람이 끼어 있었을 것이다. 예를들면 제리라든가.. 제럴드 A.스틴가든이라든가.. 완벽한 계획 속에 사소하게 존재하는 '그건 그때 가서 해결할 문제' 때문에 금세 사달이 난다.​
♦️전체적으로 3인칭 서술이지만 편의에 따라 인물 중 한 사람이 된 듯 감정과 속마음이 묘사되기도 하는데, 덕분에 영화의 장면장면을 보고 있는 듯 하다. 전문 절도범이 등장하면서도 (여색도 있고) 문학을 찬양하고 희귀판을 모으는 서점 주인도 나오는 참 희한하고 즐거운 책이다. 배경이 미국이긴 하지만 도정제 시행 이전 출판 업계 상황이 등장하기도 해서 아마 책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다들 재밌게 읽을 것 같다.
♦️ 사실 피츠제럴드의 단편집 <리츠호텔 만 한 다이아몬드>를 읽으며 피츠제럴드는 경제 대공황 속에서도 그저 부유한 삶만 향유하려 했던 '사회는 보지 못하고 그저 황금만 좇는 상업 작가'라고 완전히 결론 내리고 흥미를 잃었는데, 어마어마한 금전적 가치를 지닌 원고 범죄의 소재로 등장하니 참 잘 어울린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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