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 쓴다는 것 - 일상과 우주와 더불어
다니카와 슌타로 지음, 조영렬 옮김 / 교유서가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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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시인 다니카와 슌타로의 가벼운 인터뷰집이다. 좋은 책을 놓칠 수도 있다는 아쉬움을 감수하고서라도 일본 책은 안 읽은지 몇 년이 되었다. 교유서가 서포터즈 활동 덕분에 오랜만에 일본 문학을 접한 것인데 만족스러워서 다행이다.
열일곱 때부터 시를 쓰기 시작한 시인의 노년에 진행된 인터뷰를 통해 솔직한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부유한 집안의 외동 아들로 태어나 풍족하게 살아와 세상에 불만을 가진 적도 없고, 그저 여기저기서 들어오는 의뢰에 맞춰 시를 써왔다고 하면서도 사실은 항상 독자를 염두해두고 청자를 고려한 창작을 해왔다는 게 느껴진다. 독자가 없으면 원고료나 인세가 들어오지 않으니 독자가 있다는 것은 중요하다는 농담도 할만큼 청자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언어에 대해 말하는 페이지를 보면서는 어떤 글이든 저자의 삶이 통째로 녹아들 수밖에 없겠다는 점을 배웠다. 세상에는 수 만개의 단어와 표현이 존재하지만, 내가 어떤 단어를 알고 있고 어떤 단어를 사용해서 문장을 완성하느냐는 개개인마다 달라지므로 시는 완전한 자기표현의 수단이다. 과하게 멋부리지 않고 소탈한 인터뷰 내용이 시에서도 드러나는 것 같았다. 특히 나이대마다 적었던 시 형식의 자기소개가 가장 마음에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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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의학사 교유서가 첫단추 시리즈 18
윌리엄 바이넘 지음, 박승만 옮김 / 교유서가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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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 철학, 과학 등 여러 분야 학문을 짧은 책으로 훑어볼 수 있는 교유서가의 첫단추 시리즈. 누가봐도 좋은 시리즈인 이 책들을 매번 장바구니에 담아만 두고 구매하기를 망설였다. 이해 못할 게 뻔했기 때문😇 그러다가 서포터즈 활동을 계기로 그나마 익숙한 의학사를 첫단추 시리즈의 첫 책으로 택했다.

방대한 지식을 얇은 책자로 간단히 훑어볼 수 있는 시리즈로는 《살림지식총서》도 있는데 부족한 지면에 내용을 압축해서 담으려다보니 문체가 건조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딱딱한 주제의 《서양의학사》는 첫 장의 '내 삶의 필수 조건, 헬렌을 위해'라는 말을 보자마자 아 글쓰기 좋아하는 사람이 쓴 책이구나 싶어 안심된다. 실제로 읽는 내내 말이 빙글빙글 돈다거나 '뭔소리야' 하는 일 없이 편안하게 읽을 수 있었다. 용기를 얻어 다음엔 다른 주제의 첫단추까지 도전해보기로..!

책에서는 의학의 발달 과정을 머리맡, 도서관, 병원, 지역사회, 실험실, 현대 5가지로 구분해서 설명한다. 영역들 중에서 지역사회 의학이 가장 관심이 갔다. 지역사회 의학은 정수 처리와 폐기물 관리, 예방접종, 사업장 보건 및 안전 감독, 생활 습관, 유해물질과 같은 요인이 질병에 미치는 영향을 포괄적으로 다루는 공중보건 영역을 의미한다. 특히 흑사병과 콜레라는 방어 작용이나 미생물학 발달 과정을 가르치면서 간단히 언급하는 질병인데, 공중보건학이 발달하고 상수도와 의무담당관 의무 배정이 법제화 되는 과정을 자세하게 처음 알 수 있었다. 특히 정부의 강제적인 개입도 필요함을 인식하고 수량화 된 사고방식이 퍼지는 등 패러다임의 변화가 의학 발달에도 영향을 끼쳤다는 설명이 가장 흥미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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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를 듣는 소년
루스 오제키 지음, 정해영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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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거리를 찾아보는 것만으로는 진가를 알 수 없는 책! 꼭 직접 읽어봐야 어떤 책인지 알 수 있다. 보통 소설책은 50 ~ 70 페이지 정도 읽으면 대충 감상이 정해지는데 이 책은 뭐지? 뭐야? 하다가 다 읽어버렸다.

아버지를 사고로 잃은 후 베니는 사물이 하는 목소리를 듣기 시작하는데 상상력이 대단하다. 극현실주의자에 약간 회의주의자인 나는 초반부를 읽으면서 만들어진 사물과 만들어지지 않은 사물의 목소리가 그럼 사유까지할 수 있다는 건지, 여러가지 물질이 조합돼 만들어진 물질은 그럼 누가 주체가 되어 목소리를 낸다는 건지, 분자 수준인가 원자 수준인가 이런 생각만 들어서 집중이 안 됐다. 그러다 '책 속의 책'이 하는 이야기를 따라가며 어느새 나도 책의 목소리를 듣고 있었다.

* 서평단에 선정되어 도서를 지원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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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치 - 방대하지만 단일하지 않은 성폭력의 역사
조애나 버크 지음, 송은주 옮김, 정희진 해제 / 디플롯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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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만 100페이지가 넘는 책이다. 내용의 밀도가 높아 거의 전공서적 수준인데도 짧은 문장 덕에 가독성이 좋아 집중하면 (책 두께에 비해!) 금방 읽을 수 있다. 물론 간혹 치미는 역겨움에 쉬어가며 읽어야 한다. 책 한 권 가격으로 방대한 내용을 알 수 있는 좋은 책이었다.

그동안 철학, 인문학, 의학, 생물학, 국제 정치학이 발달하는 동안 배제되었던 여성 이슈를 제3세계, 소수자, 성폭력이라는 키워드로 재분석한 글이다. 특히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아파르트헤이트, 르완다의 대규모 학살과 같이 아프리카 대륙에서 있었던 일이 많이 서술돼 있다. 르완다 남성의 몇 명 중 한 명이 강간을 한 적이 있다더라 등의 문장을 읽으면 나도 모르게 그 나라 대부분의 남성에 대한 이미지를 마치 야만적이고 잠재적 성범죄자인 것처럼 고착화하게 된다. 그러나 바로 뒤따라오는 '백인 세계'의 통계수치를 보면 피차일반이다. 저자는 바로 이런 나같은 사람의 편견에 대해 경고하고 성 문제와 인종 문제를 분리시키기 않은 채 피해를 받아야 했던 사람들의 고통을 상기시켜 준다.

책 제목인 수치는 원래 부끄럽고 떳떳하지 못한 상태를 의미하지만, 그동안 의도적으로 숨기고 모른 척하고 불편해하던 것을 드러내고 가시화했다는 점에서 데이터를 숫자로 정량화한 의미의 수치로도 느껴졌다. 첫번째 챕터에서 수치와 모욕감은 희생자, 생존자의 것이 아니라 가해자의 것이어야 한다는 주장이 인상 깊다.

최근 직장에서 성적인 논란이 있었는데 가해자의 처분이 일주일도 되지 않아 아주 조용하고 빠르게 처리되었다. 물론 피해자가 계속 근무해야 하니 피해자를 배려한 처사였다. 이 책을 읽고 나니 이렇게 조용히 처리될 수밖에 없었는 이유 중 하나가 성문제는 가해자의 처벌 중심이 아니라 피해자의 피해 사실이 이슈가 되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고 가해자의 처벌을 원하며 내멋대로 공론화하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이런 아이러니한 상황의 해결책으로 책의 마지막 장인 '강간 없는 세계'에서 제시하는 것들이 해답이 되길 바란다. 모든 사람이 성폭력에 관한 인식을 바꾸고, "성폭력이 불가피하지 않다고 인정"할 때 가해자가 부끄러워하는 세상이 올 것이다.

* 서평단에 선정되어 도서를 지원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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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의 위로 - 답답한 인생의 방정식이 선명히 풀리는 시간
이강룡 지음 / 한빛비즈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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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 안 차리면 지금 읽고 있는 게 과학책인지 인문학책인지 알 수가 없다. 분명 MRI의 원리를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어느새 시너지 효과와 셰익스피어, 윌리엄 포크너까지 등장한다. 빛의 파동성과 입자성에 관한 이야기부터 우주에 관한 것까지 과학 지식은 물리학에 한정돼 있는데, 인문학적 사색으로 뻗어나가는 흐름이 참신하다. 분명 저자는 과학 비전공자라는데 상대성 이론을 일반인이 이해하기 쉽게 너무 간단하게 설명해버린다. (사실 한편으로는 이건 비전공자라서 가능한 서술이라는 생각도 들지만.. 전공자라면 이것도 알려주고 싶고 저것도 알려주고 싶어 글이 길어지는 바람에 결국 나같은 비전공자는 상대성 이론에서 또 멀어졌을 것이다.)

결론은 굳이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게 과학인가 인문학인가 고민할 필요가 없다. 모든 학문은 서로 연결돼 있고 그 학문은 삶의 지혜와 닿아 있기 때문이다. 몇 년 전 과학교육계에서 융합교육의 붐이 분 적이 있고 과학과 인문학을 버무리려 시도한 신간도 몇번 읽은 적이 있다. 그 때는 읽으면서 참신하긴 해도 그래도 어딘가 어색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 책도 문득 과학에서 사용하는 용어와 일상에서 사용하는 용어의 미묘한 차이에서 오는 갭이 느껴질 때도 있었지만, 나라면 쓸 수 없는 이야기를 읽었다는 점에서 좋았다. 그리고 저자도 '일상 용어와 과학 용어'라는 챕터를 따로 마련해서 혹시 오개념이 생기지 않도록 다시 짚어준다.

* 서평단에 선정되어 도서를 지원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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