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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신교신학 입문
칼 바르트 지음, 신준호 옮김 / 복있는사람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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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나는 9년 동안 신학공부를 했다. 학부 4, 대학원 3, 석사 2. 외국에서 박사과정까지 제대로 공부한 분과 비할 수는 없지만 나름 신학에 잔뼈가 굴다. 하지만 칼 바르트는 생경하다. 가르침 탓도 있겠다. 교수님도 제대로 모르는 분을 어찌 학생들에게 가르칠 수 있었으랴~ 신학적 분위기도 한 몫 했다. 난 소위 성경만 죽어라 본다고 생각하는 왕보수주의 출신이다. 여전히 자랑스럽지만 협소한 신학적 스펙트럼은 아쉽다. 최소한 다른 소리도 있음을 알았으면 더 좋았을 걸~

    허나 가장 중요한 이유는 나의 신학적 관심 때문이다. 굳이 말하자면 난 실천신학자다. 학문의 상아탑에 갇혀 지적 유희만을 즐기는 것이 싫었다. 말은 무성한데 움직이지 않으려는 손과 발이 싫었다. 신학이 구현되는 교회가 내 관심이었다. 그러니 장황하고 길게 늘여져 언제 마침표가 나올지 모르는 칼 바르트는 관심 밖이었다.

    그런 내가 변하고 있다. 난 요즘 신학이 고프다. 16년간 교회 사역을 했으니 일은 겁나지 않다. 시쳇말로 노하우가 있다. 하지만 뭔가 아쉽다. 아쉬움의 진원지는 신학적 빈곤함이다. 아니 9년이나 신학을 했는데 그렇다고? 그렇다. 그래서 난 다시 신학생 자리로 돌아갔다. 자존심을 내려놓고 성경을 공부하고 있다. 어느 잡지의 제목처럼 목회와 신학의 균형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그런 차에 만난 책이 칼 바르트의 <개신교 신학 입문>이다.

    입문이라 했기에 쉽게 생각했다. 큰 코 다쳤다. 은사인 유해무 교수가 번역도 물 흐르듯 매끄럽다하여 기대했으나 쉽게 읽히지 않는다. 물론 이것은 번역가의 문제가 아니라 순전히 내 탓이다. 그러나 겁내지는 마시라. 그래도 읽을 만하다. 그러니 호기로 <교회 교회학>이나 <로마서 강해>으로 바로 뛰어들지 말고 이 책부터 읽어보라고 당부하고 싶다.

    이 책을 통해 두 가지 큰 도전을 받았다. 우선, 칼 바르트가 가진 성경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다. 이것은 나와 같은 보수주의자에게는 더없이 반가운 소리다. 1부 신학의 자리(난 재료로 이해했다)에서 가장 먼저 둔 것이 말씀이다. 사실 이 책의 면면에 흐르는 것이 성경에 대한 신실성이다. 바르트는 말씀에 대한 우선적 관심과 그 의미에 대한 숙고의 필요성을 소리친다.

    나의 신학적 빈곤의 이유를 바르트를 통해 발견했다. 실천, 현장, 목회를 말하다보니 말씀을 놓쳤다. 말씀을 놓치니 사역이 얕았다. 온갖 방법을 찾아 기웃거렸다. 결국 한계점에 이르렀다. 시쳇말로 나름 열심히 한다고 했는데 하나님과 관계없는 교회, 말씀과 상관없는 사역이 된 것 같다. 따라서 말씀은 어떤 상황에서도 사수해야 하는 진지라는 바르트의 말은 의미심장하다(22).

    또 하나의 도전은 현장에 대한 관심이다. 신앙생활은 외줄타기와 유사하다. 자칫하면 율법적 혹은 무율법주의에 빠지기 쉽다. 목회도 마찬가지다. 목회와 신학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말씀, 말씀하면 이상하게 현실의 리얼리티가 준다. 물론 반대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바르트는 계속해서 신학이 목회를 힘껏 돕는 역할을 해야 함을 역설한다. 그가 말하는 성경의 강조는 옛 언어에 감금이 아니라 새 시대에 맞는 새 언어를 뜻한다(189). 그는 계속해서 말하기를 성경 연구의 언어가 가나안의 언어인 동시에 또한 애굽의, 바벨론의, 각각 현대적인일상 언어여야 한다.”(196)한다고 말한다.

    이같은 신학의 현재성은 앞서 말한 대로 나의 관심이었기에 격하게 공감했다. 결국 바르트의 그 유명한 말 한 손에는 성경을 한 손에는 신문이 여기서도 유감없이 드러난 것이라 하겠다. 허나 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 그러나 이것이 목사가 짊어지고 가야 할 십자가일게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연구는 보수주의자가 되어야 하고, 전달은 자유주의자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이 영원한 과업을 안고 책을 덮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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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과 씨름하다 - 악, 고난, 신앙의 위기에 대한 기독교적 성찰
토마스 G. 롱 지음, 장혜영 옮김 / 새물결플러스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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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에 대한 목회적 돌봄

 

안드레축제 때 데리고 올 친구가 저한테 그랬어요. 지금은 교회를 안다녀요. 그 이유가 아무리 하나님을 믿고 기도를 해도 하나님이 안 들어 주시고 계속 안 좋은 일만 일어난데요. 하나님이 진짜 계신지도 모르겠고 신이라는 게 존재하는지도 모르겠데요. 그래서 이제는 교회를 안다니는데 제가 그 친구를 교회로 데리고 올 수 있게 기도해 주세요.” 내가 지도하고 있는 중학교 1학년 제자가 건넨 기도제목이다. 구체적으로 무엇을 기대했고, 반대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겠으나, 하나님께 실망한 10대 소녀의 마음을 얼마나 아플까?

그러고 보니 내 10대 시절도 그랬다. 모두가 즐거워야 할 설 명절. 오히려 하나님은 내 아빠를 교통사고로 불러가셨다. 그때 내 나이 13, 국민학교 6학년이었다. 사람이 너무 기가 막히면 눈물도 나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그때 알았다. 어린 나이 상주 노릇을 하며 조문객을 맞는데 눈물샘이 터지지 않았다. 그러나 사람 앞에서는 눈물을 보이지 않았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울었다. 영안실 옆 성당으로 향했다. 내 속마음을 드러내보이기라도 하듯 하늘에서는 폭우가 내렸다. 2월의 어느 날 온 몸으로 맞는 비는 정말 추웠다. 성당 안으로는 감히 들어갈 생각도 못하고 밖에 무릎을 꿇고 하염없이 울부짖었다. “? 그러시냐고? ? ?”

시간이 약이라고 했던가? 눈물이 상처가 되어 흔적은 남았지만 더 이상 아프지는 않았다. 저자가 고난에 대한 잘못된 접근법이라고 누누이 말했지만, 내 경우에는 달랐다. 그때는 이해할 수 없지만 결국 이것도 하나님의 선한 계획의 일부임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203).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그 동안 고요히 가라앉아 있었던 항의가 스멀스멀 일어났다. 그렇게 믿었던 건 이유가 타파되어서가 아니라 그냥 그렇게 믿는 것이 편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숱한 삶의 타격 앞에 힘들어하는 자에게 나도 이렇게 극복했다는 말이 얼마나 무정하고 잔인한 것인지도 알게 되었다. 그러면 고통으로 씨름하는 자에게 어떻게 말해주어야 할까?

토마스 G. 롱은 <증언하는 설교>로 유명한 설교학자다. 설교학자가 고통을 어떻게 다룬다는 걸까? 의아하다. 허나 그래서 더 매력적이다. 그가 말한 대로 이 책은 설교자가 고통에 대해 무엇을 말할 수 있고, 말해야 하는지를 다룬다(16). 곳곳에 성도와 함께 호흡하는 목회자의 따뜻한 돌봄이 주의를 끈다. 그의 말을 들어보자. “이 책은 설교적 충언이다. 궁극적으로 성도와 같이 서 있어야 하는 설교자들과 함게, 사랑의 하나님을 믿는 것이 고통 받는 세상에서의 삶의 진실들과 어떻게 한데 어울릴 수 있는지를 생각해 보려는 노력이다.”(18).

롱은 고통의 문제를 알곡과 가라지 비유로 풀었다. 풀기 위해 세 가지 질문을 던진다. 첫째 하나님 당신이 원인이십니까?” 답부터 말하면, 아니다. 원수가 원인이다. 그는 말하기를 하나님이 이 악을 의도하지 않으셨고 이 악의 원인도 아니시며 이 악이 하나님으로부터, 심지어 그의 왼손으로부터도 오지 않았다는 사실이다.”(204) 그러면 이 원수는 도대체 어디서 온 것일까? 롱은 우리에게 비쳐진 빛의 한계를 설정한다. 그래서 악의 근원은 아쉽게도 그에게서는 찾을 수 없다.

둘째 질문은 우리는 이것을 바로잡을 수 있을까?” 답부터 말하면, 없다. 인간에게는 가라지를 뽑아낼 말한 능력이 없다. 인간이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은 오만이다(214). 그래서 주인은 가만히 두라고”(13:29)했던 것이다. 상황이 이쯤 되면 또 다시 첫 항의로 돌아간다. 그러면 하나님이 모든 고통과 악의 가라지를 뽑아 버리시면 되지 않는가? 왜 그렇게 하시지 않는가? 이에 대해 저자는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에게 원하는 방법대로 그렇게 하실 수 없기 때문이다”(219-220)이라고 답한다. 이 말은 내가 생각할 때 이 책의 백미다.

그는 인간이 원하는 방식으로 역사하는 하나님은 더 이상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이 아니라고 단언한다(220). 사실 고통 앞에서 우리는 우리의 방식을 투사한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셔야 한다고 격분한다. 그러나 저자는 우리가 원하는 방식대로 일하시는 하나님을 생각해 보라고 제안한다(221). 어떤 세상이 될까? 저자의 말이다. “모든 질병, 탐욕, 폭력, 증오, 나태함을 잘라내시며 큰 칼을 든 무자비한 농부로서 모든 가라지를 쳐내러 오신다고 가정해 보라. 그 누가 견딜 수 있겠는가? 우리 모두가 악과 얽혀 있다. 그런데도 하나님이 악을 뿌리 뽑기 위해 복수심을 불태우며 오신다면 살아남을 사람이 있겠는가? 따라서 하나님이 우리가 드리는 기도에 대해 우리가 상상하는 식으로 응답하지 않으시는 것을 은혜로 여겨야 한다.”(221)

마지막 질문은 언제까지 이런 식으로 계속될 것인가?” 종말의 때까지 지속된다. 가라지는 영원하지 않다. 종말의 때 하나님께서 복수해 주신다. 그렇다고 그때만 바라볼 순 없다. 지금 이 순간도 하나님은 악을 다루고 계신다. 어떻게? 겨자씨와 누룩처럼 비밀스럽게, 몰래, 서서히 변화되다가 마침내 큰 나무가 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의 굴복을 통한 역설적 승리인 것이다.

원제목 “What Shall We Say”를 고통과 씨름하다로 번역했다. 탁월하다. 고통의 문제가 호락호락하지 않을 것이라 예상은 했지만 책을 덮으면서 여전히 고통스럽다. 저자는 줄곧 쓰나미, 대량학살 등과 같은 큰 주제를 던졌다. 그런데 결말에서 탐욕, 폭력, 증오, 나태함과 같은 개인적 수준으로 축소하여 결론짓는 것이 못내 아쉽다. 뭔가 시원함을 기대했는데 조금은 아쉽다. 그만큼 고통의 문제는 씨름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지금도 숱한 고통으로 씨름하는 자들이여 이 책으로 씨름해 보자. 그래서 고난 당하는 이와 함께 있어주는 것을 넘어 무슨 말이라고 건네 보자(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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