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 측 죄인
시즈쿠이 슈스케 지음, 김은모 옮김 / arte(아르테)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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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가미는 검사라면 법으로 정의를 실현해야 한다는 탄탄한 의지를 가지고 있으나 실제 현실에서 법은 완전하지 못하며 법 망을 통해서 범죄자를 처벌하지 못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한계를 절감하고 있다.
따라서 용서할 수 없는 범죄자 마쓰쿠라가 자신의 법망에 들어오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를 처단하기로 결심한다. 그의 논리는 간단하다. 법은 결국 정의를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범죄자를 처벌하는 것이 곧 정의이다. 따라서 법을 어기더라도 범죄자를 처벌할 수 있게 된다면 그것은 잘못된 행위가 아니다. 잘못은 오히려 범죄자를 자유롭게 만드는 것이다.
결국 모가미는 정의를 실현하게 위해 법을 어기기로 한다. 그것은 뚜렷한 증거없이 참고인을 압박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증거조작, 급기야는살인까지 자행한다. 하지만 그는 그 행위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범죄자를 처벌하려고 했고 정의를 실현하고자 했다.
젊은 검사인 오키노는 강직한 모가미 검사를 동경하여 검사로서 정의를 실현하고자 한다. 그러나 그는 점차 모가미의 행위가 적법하지 못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적법하지 못한 행위는 그것이 불의를 처벌하고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옳지 못한 행위라고 생각한다. 그는 그것이 정의가 아니라고 판단하고 모가미에 대항하기로 한다. 그리고 모가미의 불법행위가 세상에 알려지는데 일조하여 정의를 실현하고자 한다.
모가미를 동정하는 사람들은 모가미의 고뇌와 고통, 그의 결단에 공감한다. 오키노를 응원하는 사람들은 그가 불의에 대항해 정의롭지 못한 행위를 저지하려는 용기를 높이 산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모가미는 불법적인 수단으로 악인을 처단했지만 오키노는 정의로운 방식으로 악인에게 면죄부를 주고 비열한 기회주의자에게 이용당한다. 정의로운 방식으로 정의를 실현하고자 한 젊은 법조인은 자신이 넘어야 하는 큰 산이 모가미가 아니었음을 깨닫게 된다. 그가 부딪힌 것은 바로 ‘정의’라는 벽이다.
과연 정의란 무엇일까? 사실 모가미의 범법행위를 밝히기 위해 오키노가 선택한 방식도 결국 범법행위 였다. 그 자신도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법을 어긴 것은 마찬가지 이다.
법의 허점을 잘 알고 있는 모가미는 결국 그 자신은 법을 어기는 방식으로 밖에 정의를 실현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런 그는 그렇기 때문에 젊은 오키노를 응원한다. 자신은 결국 이런 방식으로 밖에 할 수 없었지만 오키노가 언젠가는 법을 어기지 않고도 정의를 실현할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 갈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면서.
법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변화하는 것이고 변화된 세상에서는 오키노의 방식으로 정의가 실현될 것이다. 그렇게 세상은 변화해나가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오키노의 방황은 그 정의를 찾아가는 과정일 것이다.

시즈쿠이 슈스케는 정의를 실현하는 두 검사의 시선을 교차해서 진중하게 이야기를 진행시켜 나간다. 모가미가 살인을 결심하는 과정도, 오키노가 동경하던 모가미에 대항하기로 결심하는 과정도 작은 변화들을 짚어가며 천천히 진행된다. 좀 더 스피드하고 집약되어 진행되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도 남는다.

p.s 기무라 타쿠야가 모가미로, 니노미야 카즈나리가 오키노로 캐스팅 된 동명의 영화가 곧 개봉한다. 두 사람 캐스팅이 너무 적절해서 기대된다.

https://youtu.be/pZRs-HmStr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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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손톱
빌 밸린저 지음, 최내현 옮김 / 북스피어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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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리소설 중에서도 고전물을 좋아한다.
고전이라기 보다는 근대 시기, 과학수사나 부검같은 것이 사용되고 있지만 DNA나 미생물 검사 같은 하이테크한 수사기술이 적용되지 않은 시대를 배경으로 한 추리소설.
이런 시기의 추리소설을 배경으로 하면 수사관도 범인도 운신의 폭이 늘어나고 스토리 안에서 각자의 기술을 “이야기적”으로 풀 수 있는 기회가 늘어난다. 생활경계가 무한대로 확장된 현대 사회를 배경으로 하다보면 인물 간의 관계의 집중도가 떨어지는 경향이 많은데 적당히 현대화된 시기의 인물관계는 이 또한 그저 가지고 있는 환상일 수도 있지만 가까이 있는 사람들에게 서로서로 영향을 주고 받고 상호작용 하는 정도가 더 높은 것 같다.
지금이야 같은 집에 살면서도 각자 다른 사회적 영역에 속해있어 관계의 밀접성이 과거보다는 떨어지는 것 같아 가정에 대해서도 관계의 뒤틀림에서 벌어지는 모순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도 현대적인 공허함이 스토리 몰입을 방해한달까?
아마 이것이 내가 근대시기의 추리물을 좋아하는 이유인 것 같다.
이와 손톱은 근대물이라 등장인물의 관계에 집중하면서도 루가 얼굴도 본명도 모르는 살인범을 추적하는 과정은 보다 더 확장되고 개방된 사회를 무대로 하고 있다.
추리에서 범인에 이르는 과정이 우연과 가정에 기대고 있기 때문인지 탄탄한 트릭을 가지는 추리소설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오히려 무에서 유를 찾아가듯 범인을 실체해가는 과정이, 즉 현실적 관계로 링크해가는 과정이 흥미롭달까.
그리고 그 관계가 일방적이고 다른 한 사람은 그 연유도 까닭도 모르고 있다는 데에서 트릭이 완성된다.
따라서 밸린저의 이와 손톱은 여전히 ‘이야기’에 방점을 둔 고전적인 추리소설이라는 생각이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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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와 장소상실 논형학술총서 14
에드워드 렐프 지음, 김덕현.김현주.심승희 옮김 / 논형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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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와 장소상실’은 물리적인 공간에 인간의 감각, 지각, 인식, 감정이 투영됨으로써 특별한 의미가 형성된다는 점을 중요시 한다. 에드워드 렐프는 이를 통해 객관적이고 물리적인 공간이 ‘장소화’된다고 본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공간은 외재적인 것이나 장소는 인간의 주관에 의해 크게 좌지우지 되며 내재적인 성격을 가진다고 볼 수 있다. ‘장소성’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사적이고 개인적인 활동으로 통해 이를 지각하는 것이다. 렐프는 실제 활동을 하는 실존공간, 그리고 생활공간에서 여러 가지 경험을 하고 이러한 경험을 통해 공간을 자각하게 된다고 하였다. 따라서 장소는 매우 개인적이고 주관적이며 감정적이다.
세상 만물이 그러하듯 공간 또한 변화한다. 새로운 건물이 들어서기도 하고 낡은 건물이 허물어지기도 한다. 새로운 도로가 만들어지기도 하고 오래된 골목이 사라지기도 한다. 도시가 변화하는데 있어 렐프에게 더 중요한 것은 바로 의미를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만약 인간의 주관적이고 사적인 감정에 의해 공간에 의미가 부여되는 것이라고 한다면 공간의 변화 없이 의미의 상실로도 장소는 사라지는 것이다. 물리적인 변화 없이 특정 공간이 변두리로 낙인찍히게 되는 것은 결국 도시 공간이 그 의미를 상실하였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인간은 공간 없이 존재할 수 없다. 개인이 특정 공간에 대해 지속적으로 갖는 자각은 곧 특정 장소의 고유한 특성으로 인지되고 개인이 부여한 이러한 정체성은 다시 공통의 정체성을 형성한다. 렐프는 카뮈를 인용하여 장소의 정체성이 세 가지 구성요소, 정적인 물리적 환경·활동·의미를 통해 부여된다고 보았다.(114) 비교적 정적인 물리적 환경에 대해 개인은 다양한 수준의 경험을 하게 된다. 그는 이를 장소 내에서의 행동적 내부성, 즉 육체적 개입, 둘째는 장소에의 감성적인 참여와 개입을 수반하는 감정 이입적인 내부성, 그리고 셋째는 실존적 내부성, 즉 장소에 완전히 그리고 무의시적으로 빠져드는 것으로 분류하였다. 그리고 직접 경험하지 않는 장소경험의 방식, 소설이나 다른 미디어를 통해 장소를 경험하는 대리적 내부성, 장소가 아닌 단순히 다른 활동을 위한 배경이 되는 부수적 외부성, 장소가 개념이나 입지로 다루어지는 객관적 외부성, 그리고 모든 장소로부터 심각한 소외를 겪는 실존적 외부성으로 분류하였다.(118~119) 렐프가 장소의 정체성을 인간과 장소의 상호작용 방식에 따라 위와 같이 분류한 것은 특정 장소가 특정 그룹의 사람들(지역주민, 이주자, 여행객)에게 어떻게 인지되고 있는지를 검증하는데 효과적인 분류기준이 될 것이라고 판단된다.
렐프에게 있어 참된 장소감은 장소에 대한 깊은 정신적 유대로부터 비롯된다. 그는 진정한 장소감이란 무엇보다는 내부에 있다는 느낌이며 개인으로서 그리고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나의 장소에 속해 있다는 느낌이다. 진정한 장소성은 무의식적으로 동질화된 상태이며 판에 박힌 정의나 모호한 존재에 귀탁하지 않는다. 그러나 최근 이러한 장소성은 상실되어 가고 있다. 장소란 본질적으로 나, 나의 생활, 나의 경험, 나의 인지로 동질감을 형성하게 되는 것이 중요한데 최근의 장소성은 이러한 유대를 붕괴시킨 위에서 형성되고 있다.
추상적인 공공성, 효율성에 근거하여 설계된 (기술적인) 도시 계획들은 일상생활을 통해 자연스럽게 장소의 물리적 환경이 변화하는 것을 제한한다. 국가나 민족, 정부의 지도자는 이러한 공공성을 대표하는 상징적 존재들이다. 또한 장소의 상품화가 진행되면서 무비판적으로 수용된 스테레오 타입(아파트, 관광지, 디즈니랜드)이 우후죽순으로 등장하면서 장소성이 상실되었다. 이러한 장소는 인간과 장소가 상호작용을 통해 의미를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고정된 이미지를 장소에 재현함으로써 기표를 소비하게 만드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렐프는 우리가 현재 무장소성의 힘에 의해 지배당하여 장소감을 상실하고 있으며 그 결과 광범위한 스케일로 획일화가 이루어지고 있고 무장소적인 획일성이 각 지역적 상황에 적응하면서 토착화되는 과정이 부재하다는 점을 지적한다. 따라서 어느 곳에서나 장소경험이 빈약해졌다고 한다.(177) 이제 우리는 이제 우리를 대신하여 익명의 권력자 형성한 이미지(신화)로 장소를 소비할 뿐이며 빠르게 타고 지나가는 자동차의 안락함과 편안함에 기대어 우리와 상관없는 경관으로 장소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우리는 더 이상 장소를 경험하지 않으며 우리 자신의 주관적인 장소성을 갖는 것도 어렵게 되었다.
렐프는 이러한 무장소성이 극복되기 위해서는 장소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세 가지 요소, 물리적 환경·활동·의미가 결합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일상세계, 생활체계 안에서 장소가 만들어지기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라고 지적한다. 그러나 현대 정부와 상업자본의 권력이 날로 강력해지는 현대 사회에서 어떻게 이러한 변화가 가능한지에 대한 대안은 구체적으로 제시되지 못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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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만 번 산 고양이 비룡소의 그림동화 83
사노 요코 글 그림, 김난주 옮김 / 비룡소 /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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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모든 반려자가 맘에 들지 않았던 고양이가 있다. 반려자들은 고양이의 죽음을 슬퍼해 목 놓아 울았지만 그는 아무렇지 않았고 다시 살아나 또 다른 반려자를 찾았다.

이제 그 자신의 차례가 되었다. 그는 자신이 다른 반려자에게 그런 것처럼 자신에게 냉소적인 하얀 고양이를 사랑하게 된다. 그리고 그 고양이가 죽었을 때 자신의 다른 반려자가 그랬던 것처럼 목 놓아 울었다. 그리고 그는 더 이상 다시 태어나지 않게 되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약자다.
사랑하지 않을 때 100만 번 살 수도 있다.
그러나 단 한 번의 사랑으로 그 인생이 끝날 수도 있다.

어떤 삶이 보다 더 가치가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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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고양이라고! 생각하는 숲 9
사노 요코 글 그림, 이선아 옮김 / 시공주니어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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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가의 본성은 절대 변화지 않는다.

아무리 후회하고 고통스럽더라도 그 본성은 바뀌기 힘들다.

고양이가 고등어를 좋아하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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