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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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는 행위는 일종의 “선택”이다. 선택은 일종의 “의지”의 반영이다. 그렇기 보는 것은 또한 보여지는 것은 모두 누군가, 혹은 무언가의 의지가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존 버거에게 이미지는 “자연”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특정한 장소, 순간을 포착하고 분리해낸 것이며 이러한 포착과 분리, 그리고 다른 순간과 장소와의 연결은 이미 인위적인 재창조와 재생산의 과정이다. 따라서 이미지를 만드는 것도, 이미지가 보여지는 것에도 권력이 작동하게 된다. 대표적으로 유산계급과 무산계급, 여성과 남성, 원본과 복제, 전문가와 대중 등이 그러하다.

특히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이미의 선택과 재창조, 재생산은 양적으로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으며 권력(자본)과의 유착관계도 훨씬 강력해졌으며 그 방법도 훨씬 교묘해졌다. 이미지(특히 광고)를 통해 이미지는 원본의 희소성을 차용해 “고급짐”을 흉내내어 결핍을 파고드는 효과는 현대 사회에 들어서 보다 더 강력한 효과를 만들어내고 있다.

이를 위해서 존 버거는 주체적으로 보는 것을 선택하고 이를 해석하고 권력에 의해 신비화된 가치에 현혹되지 말하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근본적이 질문은 이 지점에서 다시 제기 된다. 어떻게?

그러나, 말에 선행하며, 말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이 본다‘는행위는, 자극에 기계적으로 반응하는 따위의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보는 행위가 이런 식으로 생각될 수 있는 경우는, 보는 행위 가운데 단지 망막에 관련된 아주 조그만 부분만을 따로 떼어내 생각했을 때뿐이다) 우리는 단지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만 본다. 이렇게 보는 것은 일종의 선택 행위다. 선택의 결과, 우리는 우리가 보는 것을 시야의 범위안으로 끌어들인다. 11p

이미지는 재창조되었거나 재생산된 시각이다. 그것은 특정한 장소, 특정한 순간의 사물의 어떤 모습 또는 모습들을 본래의 장소 및 시간에서 따로 분리해내 일정 기간 또는 몇 세기 후까지 보존하기 위한 것이다. 모든 이미지는 하나의 보는 방식을 구현하고 있다. 사진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흔히 사진을 기계적 기록이라고 생각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한 장의 사진을 볼 때 우리는 막연하게나마 그 사진이 사진을 찍은 사람의 무한히 많은 시각들 가운서 특별히 선택된 것이라는 사실 을 의식하게 된다. p12

애초에 이미지가 만들어진 것은 현재 존재하지 않는 어떤 것의 모습을 되살리기 위해서였다. 그러다가 점차 사람들은 재현한 사물이 사라 진 후에도 이미지는 그대로 남는다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 동시에 하나의 이미지는 한때 무언가를 누군가가 본 적이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 준다. 이와 함께 그것을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보았는지도 보여준다. 나중에는 이미지 제작자의 특수한 시각 역시 기록의 일부로 인정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한 이미지는 X라는 사람이 Y라는 대상을 어떻게 보았는지에 대한 기록이 된다. 이는 역사에 대한 인식이 점차 커 감에 따라 개성에 대한 자각도 점점 커지는 결과로 생겨난 것이다. p13

만약 과거의 미술을 ‘본다면’ 우리는 자신이 역사속에 있는 것처럼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만약 누군가가 방해해서 그것을 볼 수없게 된다면 우리에게 속하는 역사를 박탈당하는 셈이 된다. 거기서 이득을 보는 사람은 과연 누구일까. 결국 과거의 미술은, 특권을 지닌소수가 지배계급의 역할을 정당화할 수 있는 어떤 역사를 새로 꾸며내려고 하기 때문에 신비화하는 것이다. 오늘날에는 이런 식으로 정당화하려고 해 봤자 쓸데없는 일이다. 그래서 과거를 신비화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14-15

그 결과 복제는, 그 원작의 이미지가 어떠한 것인지 보여 줌과 동시 에 다른 이미지에 대한 참고사항이 된다. 한 이미지의 의미는 바로 그에, 또는 바로 그 다음에 무엇이 오느냐에 따라서 변하게 된다. 그리하여 이미지가 간직한 권위는 그것이 등장하는 전체에 배분된다. p35

미술작품은 복제 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이론적으로는 누구나 그것을 사용할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 미술서적, 잡지, 영화, 또는 거실의 금빛 액자 속에서 - 여전히 아무것도 변화하지 않았다는 환상을 유지하기 위해 복제는 계속 사용된다. 미술이란 그것이 지닌 유 일무이한 변함없는 권위를 통해 다른 형태의 권위를 정당화시켜 주는역할을 한다. 미술은 불평등을 고상한 것으로 보이게 하고, 위계질서를 짜릿한 긴장감을 주는 것으로 만든다. 소위 국가의 문화유산이라는 개념은 현재의 사회시스템과 그것이 우선적으로 중요시하는 것을 찬양하기 위해서 미술의 권위를 이용하는 것이다. 복제 수단은 정치적으로나 상업적으로 복제로 인해서 존재가능하게 된 모든 것을 위장하고 나아가 부정하는데 사용된다.p36-36

- 시각예술은 언제나 어느 정도의 보호영역 안에서 존재해 왔다. 본래그 영역은 신비스럽고 성스러웠다. 하지만 그 영역은 물질적이기도 했 으 어떤 장소, 동굴이나 건물 그 안에, 혹은 그곳을 위해 그려졌다. 최초에는 제의(祭儀)의 경험이었던 예술적 경험은 삶의 나머지부분과는 분리된, 정확하게는 그 나머지 부분을 지배하려는 목적으로행해진 것이었다. 나중에 예술의 보호영역은 사회적인 영역이 된다.
지배계급의 문화 속에 편입되는 사이 물질적으로는 궁전이나 저택 안에 고립되어 따로 존재하게 된 것이다. 이런 역사 내내 예술의 권위는그 보호영역이 가지는 특정한 권위와 분리되지 못했다.
현대의 복제 기술이 해낸 것은 예술의 권위를 파괴하고 예술을 -혹은 새로운 기술로 복제한 예술 이미지를 - 그 어떤 보호영역으로부터떼어낸 일이다. 역사상 처음으로 예술 이미지가 순간적이며, 도처에존재하고, 실체가 없으며, 어디서나 얻을 수 있고, 무가치하며, 자유로운 것이 되었다. 이제 예술 이미지는 마치 언어처럼 우리 주위를 둘러싸고 있다. 예술 이미지는 삶의 주류에 합류했는데, 이제 예술 자체의힘만으로는 더 이상 삶을 지배할 수 없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런 변화를 인식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복제 수단은, 이제이들도 그런 복제 덕분에 한때 문화적 혜택을 받은 소수들만 누릴 수 있었던 예술을 향유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만 제외하고는, 여전히 아무 것도 바뀌지 않았다는 환상을 끊임없이 선전하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대중은 여전히 무관심하고 회의적인 상태로 남아 있다. 39-40

미술관을 찾은 관람객은 종종 전시된 작품의 숫자에 압도당해, 그들 중 겨우 몇몇 작품만 주의를 집중해서 볼 수 밖에 없는 자신등의 무능함에 놀라기도 한다. 이러한 반응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미술사는 유럽의 회화 전통 속에서 탁월한 작품과 평범한 작품을 구분하는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했다. ‘천재‘ 라는 개념은 이에 대한 적절한 해답이 될 수 없다. 그 결과 혼란은 미술관의 전시 벽면에 그대로 드러난다. 흔히 수많은 삼류 작품들이 탁월한 작품 하나를 둘러싸고이는데 - 이에 대한 해명은 고사하고 무엇이 그 둘을 근본적으로 다른 것으로 만들어 주는지 전혀 알 수가 없다.
어떤 문화에서든 예술의 영역에서는 재능의 차이가 폭넓게 드러난다. 하지만 서구의 유화에서만큼 ‘걸작‘ 과 보통 수준의 작품들 사이의차이가 크게 드러나는 문화는 없다. 이 전통에서 이러한 차이는 단지기술이나 상상력의 차이일 뿐만 아니라 예술적 의욕에서의 차이이기도 하다. 특히 십칠세기 이후에 점점 더 숫자가 늘어나는 보통 수준의평범한 유화 작품들은 냉소적인 태도로 제작된 것들이다. 그러니까,
이런 작품들이 표현하는 명목상의 가치가 화가 본인에게는 별 다른의미가 없었다. 화가 본인에게는 주문받은 그림을 완성하는 일 또는그림을 파는 일이 더 중요했다. 진부한 작품은 서투름이나 무지함의 결과가 아니었다. 그것은 시장의 요구가 예술 자체의 요구보다 더 강했기 때문에 생긴 결과였다.
문에 생긴 결과였다. 유화시대는 미술품을 거래하는 공개시장이 등장한 시기와 일치했다. 103-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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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함께 늙어가는 사이가 된 왕가위.

아마 내가 전 작품을 모두 본 몇 안되는 감독 중 하나인 거 같다.

청춘의 아이콘이라고 여겨졌던 그가 자신의 작품 인생을 회고 하는 것을 보니 새삼 그도 클래식이 되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왕가위 작품 중 경외해 마지 않는 아비정전, 동사서독, 해피투게더도 작품을 쭉 나열해 놓고 보니 초기작으로 분류되는 것도 알겠다.

오랜 기간 그의 작품을 따라가며 그의 머리 속을 탐험하는 여행을 해온 터라 이 인터뷰집이 새로운 사실을 깨닫게 해주었다고 할 수는 없지만 두 가지 점에서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서양음악을 즐겨 삽입하고 평범한 거리를 영화적으로 만드는 능수능란한 기술을 가진 이 감독이 생각보다 훨씬 더 동양인 특유의 가족적인 사고방식으로 비즈니스를 하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신뢰하는 배우를 계속적으로 반복해서 여러 작품에 기용하는 것을 보면 그가 이성적임과 동시에 정서적인 측면의 연결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점을 어느 정도는 눈치채고 있었지만 말이다.

타락천사의 이가흔과 여명이 그와 한 작품 밖에 하지 못한 것도, 타락천사가 왜곡되고 과장된 영상으로 점철된 것도 그와 배우들이 정서적인 신뢰가 완성되지 못했기 때문에 나온 뜻밖의 수확(?)이었던 것도 재미있는 에피소드 였다.

그의 작품에서 배우들이 특히 아름답게 나오는 이유는 그가 그 배우들을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하던데.... 기괴한 줌인으로 가득찬 영상을 보면서 이가흔과 여명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두 번째 흥미로운 점은 그가 걸음걸이에 집착한다는 점이다. 스크린의 화면은 배우의 몸 전체를 보여주기 때문에 배우의 몸, 특히 걸음걸이가 캐릭터를 보여준다.

그래서 왕가위는 첫 촬영에서 배우에게 걸어보라고 시킨다고 한다. 그 걸음걸이가 그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점을 자극시킨다고 한다면 그는 과감하게 배우의 걸음걸이에 맞추어 작품의 내용과 대사, 캐릭터의 설정을 바꾼다.

일부 배우와 스텝들이 속 터져 하는 즉흥 연출은 이렇게 시작된 것이다.

그래서 뻣뻣하거나 기성상품 같은 연기를 흉내내는 배우를 만날 때 그는 매우 난감해진다.

그리고 이 예로 그는 또 이가흔과 여명을 거론하다.

타락천사가 가장 실패한 영화가 아니었음에도 불가하고 그에게 그 두 배우에 대한 평가는 가혹하다. 심지어 “너무 매력적”이기 때문이라는 이유를 대기는 했지만 과거로 돌아가 캐스팅을 바꿀 수 있다면 바꾸고 싶다고도 한다.

암튼 배우의 신체를 포착하고 이를 담아내는데 그가 이렇게 집착하는 감독이라는 것을 새삼깨달았다.

그러고 보면 그의 영화에서 가장 인상깊는 장면은 바로 인물들이 걷고 있는 때이다. 인물의 캐릭터가 신체를 통해 형상화 되는 순간이다.

이 두껍고 무거운 인터뷰집은 왕가위의 팬이라면 반드시 소장해야 하는 아이템이다. 아마 이 인터뷰집을 통해 당신이 그의 영화를 통해 인지하게 되었던 실타래의 다른 한 쪽을 그가 잡고 있다는 것을 인지할 수 있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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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가위 - 영화에 매혹되는 순간
왕가위.존 파워스 지음, 성문영 옮김 / 씨네21북스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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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함께 늙어가는 사이가 된 왕가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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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도시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38
이탈로 칼비노 지음, 이현경 옮김 / 민음사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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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비노는 도시를 무엇이라고 생각하고 있을까? 책의 제목을 통해 보건데 그는 도시를 보이지 않는 것이라고 한 것은 도시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 존재한다는 이분법적 사고에서 기원한다고 볼 수 있다. 사실, 도시 혹은 도시적 삶이라고 특징짓는 것 자체가 도시를 다른 무엇인가로 규정하는 것이고 도시는 그 이전 인간이 생계를 위해 1차 산업에 종사하던 삶의 모습과 구별되기 시작한 상징이다. 상업과 교역, 여행자들, 소비와 사치, 부유함과 빈곤함, 악습과 발전, 정착과 이주가 공존하는 도시와 도시적 삶의 방식은 무엇인가와 대착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대착점은 고정불변의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형성되어 융합되고 사라지고 잊여지는 것이다. 특별함은 지나왔던 과거나 경험, 알고 있던 도시, 몸에 익숙한 풍습을 통해 인식되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을 통해 별로 중요하지 않았던 과거나 경험, 지나왔던 도시, 익숙한 풍습이 다시 소환되어 기억되고 의미가 발굴된다. 그러나 칼비노는 이러한 발굴이 영원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인식은 형성과 동시에 과거가 되고 다시 새로운 구별을 만들어내는 토대가 되어 사라진다. 폴로가 새로운 도시의 발견은 결국 떠나온 곳에서 기원한다는 말과 일맥상통하며 현재가 존재하는 순간 존재하지 않게 된다는 것과도 . 책을 읽다보면 칼비노가 추상적인 관념의 연결뿐만 아니라 도시와 도시 사이의 네트워크와 공통된 특성의 공유에 주목하는 것도 이와 같은 의미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칼비노에게 도시란 특별하면서 특별하지 않는 것, 한 인간의 삶과 그리고 인간 세상의 노정 그 자체인 거 같다. 그렇기 때문에 도시를 관찰한다는 것은 삶의 과정과 인류사와 연결되며 그것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노정이다.

살아 있는 사람들의 지옥은 미래의 어떤 것이 아니라 이미 이곳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지옥에서 살고 있고 함께 지옥을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지옥을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 방법은 많은 사람들이 쉽게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지옥을 받아들이고 그 지옥이 더 이상 보이지 않을 정도로 그것의 일부분이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 방법은 위험하고 주의를 기울이며 계속 배워나가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즉 지옥의 한가운데서 지옥 속에 살지 않는 사람과 지옥이 아닌 것을 찾아내려 하고 그것을 구별해 내어 지속시키고 그것들에게 공간을 부여하는 것입니다.(207~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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