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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번째 원숭이 ㅣ 모중석 스릴러 클럽 49
J. D. 바커 지음, 조호근 옮김 / 비채 / 2020년 2월
평점 :
책 소개글 정도의 스포 함유
장점의 조율에 성공한 이야기
그런 작품이 있다. 자신의 장점을 너무나 잘 알아서, 장점을 내세워 우직하게 독자를 이끌고 가는 작품. 장점'만' 내세우는 게 아니라 장점'을' 내세운다. 곁을 신경 쓰느라 밧줄을 여러군데 잡다하게 걸어놓지 않는다. 밧줄은, 그 장점을 돋보이게 하는 데 쓰인다. 이음매를 더 단단하게 동여매는 식으로.
<네 번째 원숭이>는 그런 작품 중 하나다. 압도적인 긴장감, 추리적 요소. 이 장점을 내세워 독자를 사로잡아 끝까지 이끈다. 줄거리가 진행될수록 추리하는 재미는 더욱 깊어지며 긴장감은 더더욱 강하게 느껴진다. 개인적으로 현재 영미권 작가들의 정발작들은 스릴에 치중한 것들이 많다고 생각했는데, <네 번째 원숭이>는 모처럼 스릴과 미스터리 둘 모두를 단단히 두른 채 나타났다. 그래서 아주 기쁘다.
첫 번째 원숭이: 보이는 것
악이 보여주는 그림은 정말 다채롭다. 일상의 사소한 악행부터 타인의 목숨을 앗아가는 행위, 그보다 더 심한 행위까지도. 이 작품에서도 악이 무수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가장 눈에 띄는 악은 네 마리 원숭이 킬러, 속칭 4MK가 저지른 악행이다. 여러 명의 피해자, '현명한 원숭이 부조'에서 따온 독특한 살인 방식, 차례대로 배달되는 피해자의 신체 부위, 그리고 시체.
그런데 너무 안타깝고 슬픈 일이 이야기의 시발점이 된다. 바로 악행의 주된 인물인 4MK의 죽음. 그것도 하필 마지막 피해자를 남겨둔 채로. 피해자의 귀를 포장한 상자만을 남겨둔 채로. 죽음으로써 업보를 치렀다는 건, 너무 비겁하지 않은가. 4MK는 죗값을 제대로 받지도 못 했는데. 허나 그런 생각을 할 여유도 없이, 샘 포터를 필두로 한 시카고 경찰국은 살인자의 마지막 발자취를 추적한다. 마지막 피해자를 구하기 위해. 그들의 수사는 4MK가 저지른 악행에 대한 수습이자 응징인 셈이다.
수사가 정말 급박하게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보여주듯, 작가는 각 챕터에서 일어난 일이 몇 번째 날, 몇 시의 상황인지 분 단위로 시간을 상세하게 적어둔다. 이로써 사건의 타임라인을 머릿속에 그리기 쉬워지고, 긴장감은 그만큼 더 커진다. 그리고 수사의 진행상황을 독자들도 알기 쉽게, '증거 목록'이 따로 제시된다. 사건의 경과, 수집한 증거, 수사관들의 임무 등이 적혀 있는 목록. 이 덕분에 우리는 그들과 같은 눈높이에서 사건을 바라보고 추리를 할 수 있게 된다. 엘러리 퀸처럼 '도전' 페이지가 따로 있지는 않으나, 갱신되는 증거 목록과 챕터의 내용으로, '이쯤에서 책 덮고 추리해보면 되겠다' 싶은 지점이 뚜렷하게 나타난다. 이 지점에서 적당히 추리를 한 뒤, 사건의 진상이 추측한 대로의 것인지, 예상밖의 것인지 확인해 가는 과정이 정말 즐겁다. 이 점이 가장 좋았던 기억이다.
두 번째 원숭이: 들리는 것
마지막 피해자, 에머리 코너스. 소설은 에머리에게도 챕터를 할당한다. 에머리의 시점으로 서술되는 챕터. 에머리는 어디에 있는가? 기, 승, 전, 결 어디에서 에머리가 있는 곳이 밝혀지는가? 에머리가 맞이할 종장은 어떨까? 작가는 에머리가 처한 상황과 심리, 고통에 대해서는 실감나게 서술하면서도 독자가 가장 궁금해할 것들은 천천히 풀어 나간다. 사람을 초조하게 만드는 법을 제대로 아는 것만 같다.
에머리의 챕터가 있는 만큼 에머리에 관해 여러가지 생각을 떠올리게 된다. 왜 에머리가 마지막 피해자인지. 4MK의 죽음이 자살이라면 다른 부위도 도려낼 시간적 여유가 있었을 텐데, 왜 귀만 도려낸 채 죽었는지. 이 때문에 악을 '듣지' 말라는 메시지에 뭔가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악을 듣는다는 것의 의미는 대체 무엇인지. 사람의 악의가 취할 수 있는 형태는 너무도 다양하니 듣는다는 것도 말은 된다. 누군가 악의를 품고 내는 소음, 악행에 수반되는 여러 소리 등. 어쩌면 유행가조차 들리는 악이 될 수 있지 싶다. 신경을 곤두세워 이야기 속에서 청각의 형태로 나타나는 악을 찾아보는 건 어떨까.
세 번째 원숭이: 속삭이는 것
4MK가 교통사고로 사망하며 남긴 물건 중, 일기가 있다. 일기는 그가 읽는 이에게 말로 속삭여주듯 서술되어있다. 꼭 의도적으로 품에 안고 죽은 것마냥. 이걸 반드시 봐 달라고 당부하는 것마냥. 이제껏 몇 년에 걸친 범죄를 저지르면서 단서를 전혀 남기지 않은 4MK가, 단서를, 남기고 죽은 것이다. 이상한 일이다. 다른 것도 아닌 하필 일기장이라니. 자신의 면면을 내보이기에 이만큼 적합한 게 없다. 이해를 바라는 걸까? 연쇄살인범 특유의 오만함 때문인 걸까? 혹은 명성을 위해?
어떤 의도로 일기를 남겼든 간에 이를 지나칠 수는 없다. 샘 포터는 수사 중에도 일기를 지니고 다니면서 틈틈이 읽는다. 이 일기도 별도의 챕터로 제시되며, 전체 이야기의 흐름과 기승전결이 비슷하다. 끝으로 갈수록 긴장이 점차 고조되는 것이다. 일기장에는 4MK가 어릴 적에 겪었던 사건이 적혀있다. 유소년기에 겪은 가정사. 애초에 일기의 문체가 조곤조곤 속삭이는 구어체와 비슷하여, 꼭 그가 직접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처럼 보인다. 자신의 기원에 대해, 연쇄 살인에 이르게 된 배경에 대해. 결국 작가(4MK, J D 바커 둘 다)의 의도는 제대로 먹혀든다. 일기와 소설, 두 독자 모두 무언가에 홀린 듯 붙박여 읽게 되므로.
네 번째 원숭이: 행한 것
악을 보고 듣고 말하고. 시청후미촉 무엇으로 감각하든 이들 모두는 행동으로 수렴한다. 악행. 4MK가 저질러 온 악행. 어떠한 의도로 한 행동이든 죄는 죄고 벌은 받아야 한다. 그렇기에 4MK는 정말 최악의 범죄자다. 가장 허무한 방법으로 도망치다니. 자신이 저지른 죄업의 대가를 정면으로 받아들일 배짱도 없다니. 하지만 또 그렇기에 너무나 이상하다. 마지막 피해자인 에머리를 구하면, 이 모든 게 끝나나? 관련된 이들이 충격에서 벗어나 일상으로 돌아가나?
일기와 몇 가지 증거품, 그리고 흔적. 4MK가 어떤 의도로 남긴 것. 범죄자와 경찰의 시점에서 교차 서술된 소설. 작가가 어떤 의도로 남긴 것. 따라서 의도가 궁금해지고 이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우리는 이야기를 끝까지 읽어나갈 수밖에 없다. 마지막 악행의 여파는 어느 정도 크기일지 직접 목격해야만 한다. 4MK의, 작가의, 이야기가 지닌 힘이 그러도록 만든다. 마음을 단단히 여미고 이야기에 올라타 이 작품을 마음껏 만끽해 보자. 다른 장르로 얼마든지 뻗어나갈 여지가 많은데도, 자신의 장점을 극대화한 이 작품을. 과거에도, 미래에도, 독자를 경탄과 경악에 빠뜨릴 조각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