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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얼굴의 여우 ㅣ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85
미쓰다 신조 지음, 현정수 옮김 / 비채 / 2019년 11월
평점 :
책 소개글 정도의 스포 함유
동전의 앞면과 뒷면이 동시에 보이는 세계
미쓰다 신조는 일상과 비일상을 뚜렷하게 구분지으면서도 그 둘을 한데 잘 섞는다. 비일상이 일상 속으로 침투하는 순간과 공간을 찾아내거나 만들어내는 감각이 좋다. 새로이 거주하게 된 집, 가볍게 산책하기에 좋지만 어딘가 꺼림칙한 숲, 기이한 분위기가 감도는 산촌 등의 여러 장소.
이러한 곳에서 비일상은 괴이의 가면을 쓴 채 인물들의 일상에 점점 다가간다. 가면의 종류는 다양하다. 초자연적인 현상, 타인의 일탈 및 범죄, 생활 소음으로 가장한 귀신의 소리. 가면을 쓴 비일상이 막무가내로 주최한 무도회에서 인물들은 서서히 공포에 질리거나, 용기를 내거나, 줄행랑을 치는 둥 다양한 반응을 보인다.
그 과정 속에 미스터리와 호러의 비율을 작품에 따라 조절하여 스며들게 하고, 이에 독자는 자극을 받는다. 공포든 쾌감이든 뭐든. 그래서 탄광을 배경으로 한 새로운 모토로이 하야타 시리즈인, <검은 얼굴의 여우>을 보자마자 감탄이 나왔다. 광산은 일상과 비일상이 혼재하기에 더할 나위 없는 장소인 덕에.
아랫땅의 일상과 비일상
광산. 광석을 캐는 곳. 광석을 캐기 위해 캐면서 들어가야 하는 동굴, 땅 아래 깊숙한 곳. 개인 단위로 소소히 광물을 캐며 돈을 벌다가, 점점 기업 단위로 주체가 커진 곳. 굴 안에서 한나절 이상을 보내야 하는 광부들의 일상 공간.
그럼에도, 그곳은 언제 침투할지 모를 비일상을 대비하고 경계해야만 하는 장소다. 왜냐하면 광산에서의 비일상은 대부분 생명과 직결되는 까닭이다. 갱도가 무너지고, 가스가 새고, 큰 부상을 입고. 일상을 영위하면서도 광산의 특성상 건강을 조심할 수밖에 없는데, 비일상적 사건까지 닥치면...? 그리하여 광부들은 신에게 하루의 무사함을 빌고 미신에 가까운 특유의 불문율이 자생해 지배한다. 광산 자체를. 정말 무섭고 미스터리한 사건이 일어나기 좋은 공간이다.
탄광. 석탄을 캐는 광산. 한때 산업의 동력이 되었던 에너지원인 석탄. 공업과 군수업, 여러 사업을 지탱했던, 오래된 옛 자원. <검은 얼굴의 여우>의 핵심 배경.
왜 하필 탄광일까. 구리. 금. 다른 광물을 캐는 광산도 많다. 배경이 미국이었다면 금광이 등장했을 터다.
왜 하필 석탄일까. 아마도 근대에 가장 많은 이들이 몸으로 직접 채탄했던 광물이 석탄이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더군다나 석탄은 당시 일본에서 공업 발전을 위한 연료 그 이상 가는 중요 자원이었다. 일본을, 회사를 위한다는 명분 아래. 탄광은 국적을 가리지 않고 많은 이들이 희생된 장소였던 것이다.
공간에 얽매인 시간
따라서 작품의 시간적 배경이 일본의 제2차 세계대전 패전 직후인 것은 필연이다. 석탄이 아직 중요한 에너지원으로 기능하고, 식민 지배와 강제 노동의 흉터가 선명히 남아 있으며, 첨단 기술이 도입되어 광산에서 육체 노동의 필요성이 줄어들기 이전―천대와 편견에도 아랑곳 없이 저 어둡고 숨 막히는 갱내를 일상 삼아 살아가는 이들이 많았던 시대.
아마 작가는 광산을 소재로 한 작품을 염두에 두고 자료를 조사하다 탄광, 패전 직후 두 포인트를 짚어내지 않았을까. 탄광만큼 일상과 비일상이 혼재하며 자본가와 노동자, 식민자와 피식민자의 대치가 극명했던 장소는 없었을 테니.
시간에 얽매인 역사
따라서 작품에 사회파 미스터리의 색채가 진한 것 또한 필연하다. 배경을 정했다면 그 시절을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필요한데, 그들에게 깊숙이 영향을 준 역사와 사회와 문화를 빼놓고 당대 사람들을 그릴 수는 없기 때문이다. 설령 등장할 인물이 탄광 노동자가 아니라 하여도.
채탄량 증가를 통한 이득만 신경 쓰는 탄광 회사, 전쟁을 위해 채탄량을 극도로 끌어올릴 것을 요구하는 국가. 그 과정에서 이리 휘둘리고 저리 휘둘릴 수밖에 없었던, 사람. 이들의 애환과 칡뿌리처럼 얼키고 설켜 맺어진 관계를 자원 삼아 나아가는 이야기는, 석탄을 자원 삼아 나아가는 기관차와 닮아 있다.
그러하므로 <검은 얼굴의 여우>에서 조선인 강제 징용이 주요 화두인 것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탄광 노동과 강제 징용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니까. 우리에게 정말 익숙한 이름과 지명이 나오고, 한국 국적인 이들도 등장해 사건의 소용돌이 속에 함께 휘말리는 것이다.
이쯤되면 과거는 과거라는 명목하에 일제의 식민지배와 관련해 어느 정도 미화된 부분이 있지 않으려나…싶지만, 예상을 뛰어 넘는 균형잡힌 관점으로 관련 부분이 담담하게 서술된다. 극우 단체로부터 테러라도 당하지 않을지 걱정될 정도로.
역사에 얽매인 사람
작가가 그러한 시각으로 정성들여 창조해낸 인물과 사건은 작중 배경과 완벽하게 어우러진다. 잔혹한 국가적, 집단적 폭력 앞에서도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저항하거나 상대를 배려하기 위해 노력한 이들부터, 그 폭력을 앞장서서 휘두른 이들까지. 군국주의란 기치 아래 사람 사이에 우열을 가르고 숨쉬듯 혐오와 차별을 가하기는 얼마나 쉬운지….
놀라운 것은 이 모든 역사적 조형에 미쓰다 신조 특유의 호러 요소마저 빼어난 솜씨로 덧대었다는 점이다. 탄광을 둘러싼 고유의 여우 신앙, 땅 속에서 엄습해 오는 공포, 팔에 소름이 돋게 만드는 기기묘묘한 경험…. 탄광 마을을 둘러싼 암운. 탁월한 묘사, 방 구조와 물건의 이해를 돕기 위해 친절하게 삽입된 삽화를 바탕으로, 암운은 점점 더 짙어진다. 눈을 감으면 눅진한 분진 냄새마저 코 끝에 맴도는 것 같다는 평은 그저 과장일 뿐일까?
과거에 대한 묵시의 저편
결국 작가는 작품의 주요 소재와 주인공을 정할 땐 어떤 의미를 부여한다고 여겨 본다. 독자인 우리는 이에 주관적인 해석을 덧붙여 자신만의 작품을 완성해간다.
상술했듯 <모토로이 하야타 시리즈> 첫 번째 작품인 <검은 얼굴의 여우>는 사회파 미스터리 성향이 강하다. 이는 앞으로 나올 <모토로이 시리즈>의 작품도 사회파 성향이 짙을 거라는 예상을 하게 만든다. 일본 패전 직후의 지식인인 모토로이 하야타가 주인공이기 때문에. 이상이 현실 앞에서 무너지는 과정과 군국주의로 점철된 전쟁의 참혹함을 직접 체험하고, 결국 방랑을 결심한 그가 중심이기 때문에. 방랑 중에 인과 연이 닿아 탄광부로 일하게 되어 '검은 여우신' 사건에 휘말렸음에도 그의 심지는 꺾이지 않는다. 오히려 스스로 깨닫고 변해간다. 그는 사람들과 현장에서 부대끼며 어떤 답을 찾아 갈까. 전체주의의 폐단과, 그로 인해 무너져버린 잔해를 수습하고 일어나기 위한 답을.
이러한 모토로이 하야타의 모습은 언뜻언뜻 과거의 폐단을 내비치는 현재 일본의 정치 사회에 묵직한 울림을 주는 것만 같다. 그래서 어촌 마을을 향한 그의 다음 행보가 담긴 작품인 <백마의 탑>은 어떤 내용일지, 한시바삐 확인해 보고 싶어―바다와 배 또한 미신과 고유 신앙이 지배하는 곳이니―좀이 쑤실 지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