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을 열면
오사키 고즈에 지음, 김해용 옮김 / 크로스로드 / 2020년 3월
평점 :
절판



책 소개글 정도의 스포 함유



 

거리감과 정, 오묘한 관계



가깝지만 멀고 멀지만 가깝다. 가족에게도, 이웃에게도 통하는 말이다. , 왜 적당한 거리를 두고 사는 게 오히려 가족의 정을 불러일으킨단 말도 있잖은가. 이웃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든다. 이쪽은 거리는 가깝지만 심리적 친밀감이 먼 것이니까. 가까운 만큼 정이 더 떨어질 수도, 깊어질 수도 있는 이웃. 오며가며 인사를 가끔 나누더라도 그어진 선을 서로 넘지 않으려 하는 사이. 이웃이라는 공동체로 묶인 사이. 최근엔 예전보다 이웃간의 교류가 더 적어져 인사조차 하는지 의문이지만.



공간으로 이어진 인연, 갑작스런 일상의 붕괴



오사키 고즈에가 배경으로 삼은 ㄷ자형 맨션. 중앙의 짧은 변에 출입구와 계단을 두고 양 측면에 복도식으로 집이 들어선 건물. 복도식이다. 복도식이기에 같은 층의 이웃과 얼굴을 자주 맞대며 살아간다. 반상회 형식으로 이런저런 활동에 참가하면 더 가까워질 수 있는. 작정하고 무시하거나 피하지 않는 한, 마주쳤을 때 얼굴에 희미하게나마 웃음을 걸고 꾸벅 숙이는. 간혹 누군가와는 더 가까워져 서로 왕래하며 이야기꽃을 피우고 물건과 도움과 정도 주고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 맨션에서 살아가는 평범한 이웃 중의 하나. 쓰루카와 유사쿠. 50대 중반의 지극히 소시민적인 사람이다. 다른 세계의 어느 누군가가 진심으로 부러워할 만큼. 소시민의 삶을 영위하는 그에게, 갑자기 일상을 뒤흔드는 사건이 벌어진다. 같은 층에서 그와 제일 친하게 지내던 한 할아버지, 구시모토가 죽었다. 단지 일상의 일환으로 물건을 돌려주려 갔을 뿐이었다. 그랬을 뿐인데... 유사쿠가 아무런 전조도 없이 맞이한 비일상의 자세. 괴로운 듯 몸을 구부린 채 숨을 거둔 구시모토의 시신.


응당 신고를 해야 마땅하나, 유사쿠는 너무 당황하여 그 자리를 피하고 만다. 이 장면이 너무 일찍 나와서 잠시 혼란스러울지도 모른다. 유사쿠라는 인물의 골조를 쌓기도 전에 그가 중대한 일을 저질러서. 당연하게 이런 의문이 뒤를 잇는다. '112로 신고하기 꺼려졌다면 119로 하든 다른 이웃의 도움을 받든 어떤 식으로든 대처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선공개, 후해설



의문의 꼬리를 잡아채 차차 답을 보여주겠다는 듯, 작가는 사건이 벌어진 이후에야 천천히 인물을 조각하기 시작한다. 물론, 구시모토의 죽음이라는 충격적인 사건에 더 충격적인 사건을 더해 보여준 뒤에. 유사쿠가 구시모토의 집에 출입하는 장면을 폰으로 녹화한 고등학생이 등장하는, 더 충격적인 사건. 학생은 알밉게도 유사쿠의 집에 즉시(유사쿠가 구시모토의 죽음을 발견하고 돌아온 직후) 찾아와 협박을 한다. 협박을 한다는 건 학생도 구시모토의 죽음을 안다는 뜻.


이 대목에서 뭐 이런 경우가 다 있나? 너무 음험한 것 아닌가, 하고 손사래를 치고 만다. 이름조차 제대로 밝혀진 게 맞는지 의심스러운 학생. 구시모토의 죽음과 학생으로부터의 협박. 충격에 충격을 더한 충격을 기점 삼아 이야기는 출발한다. 이쯤되면 막장 전개일 거라 예상하는 게 일반적이다. 그런데 읽다가 또 충격을 받고 만다. 작가가 유사쿠와 학생이라는 캐릭터를 섬세하게 조각하고, 같은 맨션에 사는 이웃들과의 관계도 자유자재로 날아다니는 거미처럼 잘 엮어내기 때문이다.


유사쿠가 그렇게 행동했던 이유. 차근차근 잘 풀었기에 납득된다. 학생이 그렇게 행동했던 이유. 역시 잘 풀었기에 납득된다. 다만, 학생에 대한 조각은 소설 전 구간에 걸쳐서 진행되기에, 끄트머리에 이르러서야 더 이해가 잘 된다. 깨달음이 온다. 이러한 형식 탓에 차갑게 생각하면 흠...을 중얼거리게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금요일 다음엔 토요일이 오는 일상처럼 부드럽고 자연스레 서사를 다루어서, 다 읽고 나면 입매가 부드럽게 올라갈 것이다.



같이, 가치



작품은 주거생활 및 이웃생활의 애환을 전반에 걸쳐 묘사한다. 당장 이야기의 시발점이 되는 구시모토의 사망(자극적이지만)부터, 이후 전개되는 과정 안에 콕콕 박혀 있는 것이다. 이를테면 오지랖 넓은 몇몇 주민부터, 이웃의 일이라도 책임감 있게 다루는 주민, 마당발 역할을 하는 주민 등등. 일부는 서로 대립하다 오해가 풀려 화해하기도 하고 일부는 처음부터 믿고 협력하기도 한다. 일본 소설이니 묘사에 일본의 문화가 많이 가미된 게 아닐까 했는데, 읽어보니 꼭 그렇지도 않다. ㄷ맨션과 비슷한 주거형태라면 어디서나 일어나지 싶은 일들.


끝으로, 극히 평범하고 소시민적이라 한번에 독자를 사로잡는 매력 따윈 찾아보기 힘든 주인공과 주변 인물의 성장담이기도 하다. <문을 열면>이라는 작품은. 매력적인 주인공을 내세우지 않는다. 서로가 서로에게 엮이며 자라나고 배우는 과정의 매력을 내세운다. 비록 시작은 충격적이었지만 끝은....그들의 성장 여정에 온 감각으로 동참해 보면, 잔잔한 봄의 미풍을 느끼며 사람과 사람이 '함께' 한다는 것의 가치를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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