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정체성 ㅣ 밀란 쿤데라 전집 9
밀란 쿤데라 지음, 이재룡 옮김 / 민음사 / 2012년 5월
평점 :
#1 -˝남자들이 더 이상 나를 돌아보지 않아“
여주인공 샹탈의 대사다. 샹탈은 자신의 정체성을 타인과의 관계와 자신의 외모에서 확인받으려 한다. 샹탈이 사랑하는 연인 장마르크에게 ˝남자들이 더이상 나를 돌아보지 않아˝라고 말한 것은 아마도 희미해져가는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 싶었던 간절함 혹은 괴로움의 형태였을지도 모르겠다.
#2
-“그러면 난 뭐야?나는 당신이 어딜 가나 당신 뒤를 졸졸 따라다니는데 당신은 당신을 더 이상 돌아보지 않는 남자들을 생각하다니 그게 말이나 돼?”
-그것은 샹탈, 한치의 의심도 없이 그의 샹탈이었지만 모르는 여자의 얼굴을 한 샹탈이었으며 그것이 끔찍했다, 참을 수 없을 만큼 끔찍했다.
연인인 장마르크는 자신의 지극한 사랑에도 다른 남자의 관심을 받지 못한다는 이유로 우울해하는 샹탈에게 불만스러움을 느낀다. 그리고 그 역시 책의 초반에서 해변에 서있는 여자를 보고 샹탈이라고 오해했던 것을 토대로 ‘샹탈’이라는,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의 정체성에 대해 혼란을 느낀다. 그러던 그는 사랑하는 샹탈을 위해 `시라노`라는 이름의 익명으로 그녀에게 연애편지를 적어보낸다. 익명의 남자가 샹탈에게 구체적 욕망을 드러낼수록 샹탈은 설렘을 느끼고 장마르크는 편지를 쓴 장본인임에도 익명의 시라노에게 질투를 느낀다.
샹탈이 끊임없이 이야기하는 이 세계에 존재하는 특정인에 의한 감시와 간섭, 전남편의 가족 이야기를 할 때 느끼는 불안감, 그녀가 속해 있는 공동체의 억압, 그리고 죽어버린 전 남편과의 아이가 가져다준 현재의 자유 속에서의 죄책감, 동성과의 축축하고 끈적한 키스, 장미향, 빨간 진주목걸이, 빨간 커튼, 빨간 추기경 재킷, 수없이 빨간 색깔의 추상적 물체들. 샹탈을 둘러싼 이 모든 정체성의 산물들을 통해 그렇다면 샹탈은 도대체 어떤 인간인지에 대한 의구심을 던지게 만든다. ‘샹탈은 과연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자연스럽게 `과연 나는 누구인가?` 라는 철학적 질문을 연속해서 던지게 만들고, 수없이 많은 `나`의 모습 중 진정한 `나`는 무엇인가. 혹은 나로 인한 `나`와 타인에 의한 `나`의 거리는 얼마나 가까우며 얼마나 멀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게 만드는 짧지만 매력적인 그런 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