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키나와의 목소리 - 누치두 다카라 - 생명은 귀한 것 평화징검돌 1
마루키 도시 글, 마루키 이리 그림, 신명직 옮김 / 평화를품은책(꿈교출판사)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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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 아픈 이야기를 다 읽고 책을 덮으면
'누치두 다카라' 즉 생명은 소중하다는 목소리가 가슴 속에 깊은 울림으로 남습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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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 손 꿈꾸는 그림책 4
마거릿 H. 메이슨 글, 서애경 옮김, 플로이드 쿠퍼 그림 / 평화를품은책(꿈교출판사)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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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로이트 쿠퍼의 따듯한 파스텔 톤 그림이 돋보이는 책입니다. 할아버지가 손자에게 속삭이듯이 말하는 서정적인 글과 그림이 잘 어우러지네요. 인권 이야기를 이렇게도 풀어갈 수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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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 손 꿈꾸는 그림책 4
마거릿 H. 메이슨 글, 서애경 옮김, 플로이드 쿠퍼 그림 / 평화를품은책(꿈교출판사)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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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제도가 있었던 <노예 12년>의 배경인 1840년대는 꽤 멀리 떨어진 과거이다. 오늘날 특정한 인종이나 민족을 ‘노예’로 삼고 그걸 법적인 ‘제도’가 뒷받침해주는 나라가 있을까? 물론 노동자를 노예처럼 대우하려고 하는 곳들은 사회 곳곳에 남아 있지만 한 인간을 물건처럼 소유해서는 안 되고 사고 팔 수 없다는(본질적으로 인간은 평등하다는) 생각엔 누구나 동의할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영화관에 앉아 이 영화를 보면서 경악한다. 살갗이 벗겨지고 등이 패일 정도로 채찍을 휘두르는 등 노예에게 가해지는 참혹한 폭력, 그리고 쉬지 않고 일을 시키기 위해 곳곳에 관리인을 배치하여 그들을 감시하는 운영 체계, 무엇보다도 ‘노예’라는 이름으로 그들을 인간으로 보지 않고 돈으로 살 수 있는 물건처럼 대하는 태도가 그렇다.

 

영화 <노예 12년>이 노예라는 이름으로 수많은 흑인들을 착취했던 시대를 관객들에게 환기시킨다면, <할아버지 손>은 1964년 미국에서 ‘인종차별철폐법’이 만들어졌을 무렵을 겪어낸 한 할아버지가 손자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형식의 그림책이다. <할아버지 손> 역시 실화이다. <노예 12년>은 자전적 소설을 영화화한 것이고, <할아버지 손>은 디트로이트의 빵 공장에서 흰 빵 반죽을 만질 수 없었던 조 바넷이라는 흑인의 이야기를 친구인 마거릿 H. 메이슨이 쓰고 플로이드 쿠퍼가 그린 그림책이다.

 

<할아버지 손>은 흑인의 인권 이야기를 '손'이라는 키워드로 풀어낸다.

조지프의 할아버지는 크고 검은 손으로 피아노도 잘 치고 야구공도 멀리 날리고, 손자의 운동화 끈도 매어 주지만, 젊은 시절 일하던 빵 공장에서 흰 빵의 반죽은 만질 수 없었다고 한다. 공장 관리자들이 흰 빵을 검은 손으로 만지지 못하게 했기 때문이다. 할아버지를 비롯한 흑인들은 검은 손 차별을 막는 법을 만들기 위해 길거리로 나서고 결국 자기들의 권리를 찾는다.

그리고 그 다음 세대를 살아갈 손자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제는 맛있는 흰 빵을 구울 수 있다고.'

 

<노예 12년>의 무대인 1800년대에는 자유를 찾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 있었고, <할아버지 손>의 배경인 1900년대에는 흑인에 대한 차별을 없애려는 운동이 있었다. 100년이 넘는 세월동안 흑인들이 본질적으로 인간은 누구나 평등하다는 (당연한) 인식과 제도를 만들기 위해 투쟁해온 것이다. 영화를 보고 나오며 그리고 책을 덮으며 이런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의 손자, 손녀이고 그 후세대인 우리들이 100년 전의 그 아픔을, 그들의 희생과 노력을 잊지 않고 그 마음을 이어나갔으면 좋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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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는 왜 하나? - 빵점 맞은 고만두 열두 명의 실학자에게 물어보다
조은수 글.그림 / 해그림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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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 공부 공부해라 공부해야지 공부를 안 하니까 시험 점수가 이 꼴이지!

공부해야 훌륭한 사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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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소 초등학교, 중고등학교 12년 꼬박 아이들 입에서 나오고 귀로 들이는 단어가 공부다. 그것도 공부 중에 제일 재미없기로 악명 높은 시험공부.

아이들에게 '공부'는 어떤 걸까? 반드시 해야만 하는 거? 선생님이, 부모님이 시키니까 하는 거? 학교라는 세계에서 공부를 통하지 않고 어른이 될 수는 없으니 아마 '하기 싫어도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것' 정도 일테다. 도서관에 와서 공부와 관련된 어린이 책을 쭉 훓으면 공부 그 자체에 도움이 되는 책도 있고 공부의 의미를 생각해 보게 하는 책도 있다. 해그림에서 나온 <공부는 왜 하나?>는 후자에 가깝다.

이 책의 주인공 만두는 시험을 망치고 집에서 쫓겨나 매화빵장수에게 이끌려 '나무꾼과 물고기 도서관'이라 불리는 실학 서당에 당도한다. 서당에는 조선시대 대표 실학자 이익, 김육, 이덕무, 박제가, 유형원, 한백겸, 홍대용, 유득공, 박지원, 백동수, 정약용, 김정희가 한창 공부중이다. 만두는 공부를 즐거이 여기는 이들의 태도에 한번 놀라고 공부하는 이유에 또 한번 놀란다. 

 



누구는 책밖에 모르는 바보여서, 누구는 의심하기 위해서, 누구는 남 주기 위해 공부한다. 실학자 라면 공자왈 맹자왈 하던 공부가 아니라 상업이나 농업 같은 백성의 실생활에 유용한 학문을 연구했겠고, 서자로 태어나 똑똑해도 빛을 보지 못한 신분의 사람들이 다수겠거니 추측해 볼 수 있다. 이 책에서도 실학자의 그런 특징이 잘 드러난다.

이 책에서 또하나 주목할 만한 점은 일러스트이다. 작가 조은수의 그림은 <옛날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창비,1997) 를 통해 실력을 인정받은 바 있다. 저자 약력을 보니 2003년 볼로냐 국제아동도서전에서 '올해의 일러스트레이터 85인'에 선정되었었다고도 한다. 이 책에서는 신선하고 세련된 다양한 기법을 사용했다. 찍어 누른 듯한 프로타주 기법이나 패턴 페이퍼를 잘라 붙인 느낌을 살리고, 크레파스나 수채화 물감 등을 적절히 섞어 사용했다. 실물 도판 위에 덧칠하는 형식의 콜라주 기법이 눈에 띈다.

이 책의 구성은 입체적이다. 공부를 왜 해야 하지? 라는 질문으로 시작해 나무꾼과 물고기 도서관이라는 전혀 다른 장소로 이동한다. 도서관에서 다시 현실로 돌아오기까지 여정을 다뤘다고도 할 수 있다. 책 제목은 <공부는 왜 하나?>이지만 나무꾼과 물고기 도서관에서 만나는 이들이 조선시대 실학자로 한정되어 있다는 점에서, 실학자를 소개하는 책에 가깝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관련 기사 경향신문 [책과 삶]이익·박제가 할아버지, 공부는 왜 해야 하나요?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203301915535&code=90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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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서양미술 순례 창비교양문고 20
서경식 지음, 박이엽 옮김 / 창비 / 200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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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나 저자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 채 무작정 『나의 서양미술 순례』를 펼쳤다. 200페이지가 조금 넘는데다가 중간중간 도판이 실려 있어 어렵지 않게 읽어내려갔다. 나도 여행을 떠나면 꼭 그 도시에 있는 미술관이나 박물관에서 많은 시간을 보낸다. 아는 만큼 보일 거란 생각에 작품이나 작가에 대해 미리 알아보고 가기도 하지만 사실 막상 마주했을 때, 내가 눈을 떼지 못하게 만드는 건 전혀 예상치도 못했던 작품인 경우가 많다. 그럴 때면 숨소리를 죽이고 시간을 들여 찬찬히 작품을 감상하고 준비한 수첩에 이것저것 끄적이기도 한다.

저자 서경식은 미술 전공자가 아니다. 『나의 서양미술 순례』라는 제목만 보고 서양미술에 관련한 저자의 해박한 지식을 기대하며 책을 읽기 시작한 이들도 있을 것이다. 물론 본문에서 저자는 작품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시대 상황이나 작가의 생애를 언급한다. 하지만 이 책은 작품 설명보다는 저자의 감상에 충실하다. “그 그림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거나 그 작품을 마주하는 순간 “뭐라 이름하기 어려운 광풍이 소용돌이쳐 도무지 진정할 줄을 모른다” 등 저자는 솔직한 감상을 시작으로 자기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어느 부분에서는 작품의 탄생 배경이나, 화가의 일생을 풀어내고, 어디에서는 같은 주제별로 작품을 비교한다. 작품보다 장소 위주로 말할 때도 있다. 어떤 방식이든 저자는 자유롭고 자연스럽게 써내려간다. 텍스트의 흐름에 끌려가다보면 어느새 그의 삶에 도달한다. 일테면 피카소의 <게르니카>에 감명 받은 그는 그 그림이 나오게 된 시대배경 즉 스페인 전쟁에 대해 설명한다. 그런 다음 전쟁을 배경으로 한 일본의 전쟁화와 <게르니카>를 비교하면서 자연스럽게 한국전쟁 그리고 광주사건으로 시선을 움직인다. 시선은 자유롭게 이동하지만 저자는 “굴욕을 당하고 살육을 당해온 우리 민족은 과연 우리들 자신의 <게르니카>를 산출해냈는가”라는 질문으로, 다시 우리 시선을 <게르니카>라는 작품에 고정시킨다. 그의 이야기는 자유롭지만 결코 산만하지 않다.

 

『나의 서양미술 순례』에는 그와 가족, 민족에게 지워진 무거운 운명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의 부모님은 해방 이후 귀국 시기를 놓치고 그대로 일본에 남았다. 저자는 일본에서 태어나고 자라, 말과 생활은 일본에, 국적과 정신은 한국에 적(籍)을 두고 두 나라의 애매한 경계에서 살아왔다. 두 형은 한국 유학 시절 군사독재정권에 의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되어 긴 형무소 생활을 해왔다. 형들은 10년 넘게 이어진 수감생활 이후에 석방되었고, 옥바라지에 몸을 아끼지 않으셨던 부모님은 형들이 석방되는 모습은 보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저자의 순례는 병으로 부모님을 잃은 후이자, 아직 형들이 석방되기 전인 1983년 누이와 기분전환 삼아 유럽 여행을 떠나는 걸로 시작된다.

그는 본문에서 외젠 뷔르낭의 <성묘로 달려가는 사도 베드로와 요한>을 마주했을 때 자신을 잡아끄는 강력한 힘을 느꼈다고 고백한다. 불안에 쫓기며 질주하는 베드로와 요한의 절박한 표정이 꼭 자신의 모습과 닮아 있다 여긴 것일 게다. 저자의 불안은 그가 고야의 <모래에 묻히는 개>라는 작품을 보고 개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지점에서 더 분명히 드러난다. 이 개는 얼굴만 내놓은 채 모래에 파묻혀 옴짝달싹 못한다. 절망적이고 초조해 보인다. 함께 다니던 누이가 먼저 교토로 돌아간 이후에도 저자는 홀로 여행을 이어나간다. 쉽사리 일본의 생활로 돌아가지 못하는 이유는 재일 조선인으로서 저자가 숙명적으로 가지는 불안과 맞닿아있다. 그는 “나는 혼자서 이런 비일상적인 방황을 계속하려 하고 있다. 왜? 무엇 때문에?”라고 질문을 던지며, 그가 짊어진 고뇌와 운명에 대한 해답을 찾고자 한다. 그는 그림의 개처럼 그와 그의 가족을 짓누르는 고된 운명에 파묻힌 채 깊은 불안 속에서 도쿄로 돌아가지 못하고 방황한다.

 

 

고야 <모래에 묻히는 개>

 

 

저자는 제목과 본문에서 자신의 방황을 ‘순례’라고 썼다. 보통 순례를 떠나는 이에겐 뚜렷한 의도와 목적지가 있기 마련이다. 저자는 미술관과 성당을 전전하며 예상치 못한 작품에 마음을 빼앗기곤 한다. 산티아고에서는 미술관 대신 우연히 옆에 있는 성당을 방문했다가 거대한 벽화와 마주한다. 또 그를 사로잡은 작품 중 하나인 <상처를 보여주는 그리스도>는 시간을 때우려고 들린 박물관에서 발견한 조각상이다. 그런 의미에서 저자의 순례는 자유롭게 어디든 갈 수 있는 ‘방랑’과 닮았다. 그렇다고 이 여행이 순례가 아니란 건 아니다. 고흐의 그림을 보고 그의 정념에 감응한 나머지 고흐가 숨을 거둔 땅으로 발길을 돌리거나, 스페인령과 프랑스령으로 강제 분할된 바스크를 방문하면서 분단된 고국을 떠올리는 일 등 저자에게는 순례자의 모습도 보인다. 그의 여행은 방랑과 순례의 경계를 넘나든다. 방랑이자 순례고, 순례이자 방랑이다.

 

『책과 세계』(살림)에서 저자 강유원은 책을 읽고 이해하는 일에 당대 상황과 작가의 의도가 토대가 되어야 함을 강조한다. 책은 텍스트를 둘러 싼 세계와 함께 존재한다는 것이다. 나아가 한 권의 책으로 묶인 텍스트는 책을 읽는 독자의 세계와 만난다. 책을 읽는 일처럼 미술 작품을 감상하는 일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저자는 고야의 작품 중 <1808년 5월 3일> 복제품을 가지고 한국에 들어올 때 세관에서 문제가 된 일화를 소개한다. 형들이 수감되어 있던 90년대 초반 한국은 사상적으로 예민한 시기였다. 그림 속 총을 쥔 나폴레옹군을 소련군으로 오해한 세관원은 이 그림이 문제가 될 수도 있다 여긴다. “거의 2세기 전에 그려진 한 장의 그림이 그 작가하고는 아무런 인연이 없는 극동의 한 나라의 관헌”들에게 오해를 불러일으킨 것이다. 저자는 이때 이 그림은 “한국 세관원들의 눈살을 찌푸리게”하는 ‘힘’을 지닌 것이라고 말한다. 마찬가지로 미술 작품에는 그의 여행을 순례로 바꾼 어떤 ‘힘’이 존재하는 게 아닐까. 미술 작품을 보고 감상하는 과정에서 저자나 작품을 둘러싼 삶과 관계는 저자 입장에서 재구성된다. 미켈란젤로의 <반항하는 노예>를 보고 감옥 속에서도 군사정권을 향한 긴 반항을 멈추지 않는 형을 떠올리고, 레옹 보나가 그린 <화가 누이의 초상>에서 누이에 대한 아련함을 느낀다. 고흐 형제의 무덤에서는 고흐와 테오의 관계에 형제들과 자신의 관계를 투영한다. 『나의 서양미술 순례』는 몇 차례의 순례 같은 여행이 차곡차곡 쌓인 결과물이다. 저자의 여행은 끝이 있을지 몰라도, 그의 순례는 끝이 없다. 또다른 작품이 그의 삶으로 치환되는 것으로 언제고 미술관과 성당을 뒤지는 그의 순례는 다시 시작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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