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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서양미술 순례 ㅣ 창비교양문고 20
서경식 지음, 박이엽 옮김 / 창비 / 2002년 2월
평점 :
책이나 저자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 채 무작정 『나의 서양미술 순례』를 펼쳤다. 200페이지가 조금 넘는데다가 중간중간 도판이 실려 있어 어렵지 않게 읽어내려갔다. 나도 여행을 떠나면 꼭 그 도시에 있는 미술관이나 박물관에서 많은 시간을 보낸다. 아는 만큼 보일 거란 생각에 작품이나 작가에 대해 미리 알아보고 가기도 하지만 사실 막상 마주했을 때, 내가 눈을 떼지 못하게 만드는 건 전혀 예상치도 못했던 작품인 경우가 많다. 그럴 때면 숨소리를 죽이고 시간을 들여 찬찬히 작품을 감상하고 준비한 수첩에 이것저것 끄적이기도 한다.
저자 서경식은 미술 전공자가 아니다. 『나의 서양미술 순례』라는 제목만 보고 서양미술에 관련한 저자의 해박한 지식을 기대하며 책을 읽기 시작한 이들도 있을 것이다. 물론 본문에서 저자는 작품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시대 상황이나 작가의 생애를 언급한다. 하지만 이 책은 작품 설명보다는 저자의 감상에 충실하다. “그 그림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거나 그 작품을 마주하는 순간 “뭐라 이름하기 어려운 광풍이 소용돌이쳐 도무지 진정할 줄을 모른다” 등 저자는 솔직한 감상을 시작으로 자기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어느 부분에서는 작품의 탄생 배경이나, 화가의 일생을 풀어내고, 어디에서는 같은 주제별로 작품을 비교한다. 작품보다 장소 위주로 말할 때도 있다. 어떤 방식이든 저자는 자유롭고 자연스럽게 써내려간다. 텍스트의 흐름에 끌려가다보면 어느새 그의 삶에 도달한다. 일테면 피카소의 <게르니카>에 감명 받은 그는 그 그림이 나오게 된 시대배경 즉 스페인 전쟁에 대해 설명한다. 그런 다음 전쟁을 배경으로 한 일본의 전쟁화와 <게르니카>를 비교하면서 자연스럽게 한국전쟁 그리고 광주사건으로 시선을 움직인다. 시선은 자유롭게 이동하지만 저자는 “굴욕을 당하고 살육을 당해온 우리 민족은 과연 우리들 자신의 <게르니카>를 산출해냈는가”라는 질문으로, 다시 우리 시선을 <게르니카>라는 작품에 고정시킨다. 그의 이야기는 자유롭지만 결코 산만하지 않다.
『나의 서양미술 순례』에는 그와 가족, 민족에게 지워진 무거운 운명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의 부모님은 해방 이후 귀국 시기를 놓치고 그대로 일본에 남았다. 저자는 일본에서 태어나고 자라, 말과 생활은 일본에, 국적과 정신은 한국에 적(籍)을 두고 두 나라의 애매한 경계에서 살아왔다. 두 형은 한국 유학 시절 군사독재정권에 의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되어 긴 형무소 생활을 해왔다. 형들은 10년 넘게 이어진 수감생활 이후에 석방되었고, 옥바라지에 몸을 아끼지 않으셨던 부모님은 형들이 석방되는 모습은 보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저자의 순례는 병으로 부모님을 잃은 후이자, 아직 형들이 석방되기 전인 1983년 누이와 기분전환 삼아 유럽 여행을 떠나는 걸로 시작된다.
그는 본문에서 외젠 뷔르낭의 <성묘로 달려가는 사도 베드로와 요한>을 마주했을 때 자신을 잡아끄는 강력한 힘을 느꼈다고 고백한다. 불안에 쫓기며 질주하는 베드로와 요한의 절박한 표정이 꼭 자신의 모습과 닮아 있다 여긴 것일 게다. 저자의 불안은 그가 고야의 <모래에 묻히는 개>라는 작품을 보고 개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지점에서 더 분명히 드러난다. 이 개는 얼굴만 내놓은 채 모래에 파묻혀 옴짝달싹 못한다. 절망적이고 초조해 보인다. 함께 다니던 누이가 먼저 교토로 돌아간 이후에도 저자는 홀로 여행을 이어나간다. 쉽사리 일본의 생활로 돌아가지 못하는 이유는 재일 조선인으로서 저자가 숙명적으로 가지는 불안과 맞닿아있다. 그는 “나는 혼자서 이런 비일상적인 방황을 계속하려 하고 있다. 왜? 무엇 때문에?”라고 질문을 던지며, 그가 짊어진 고뇌와 운명에 대한 해답을 찾고자 한다. 그는 그림의 개처럼 그와 그의 가족을 짓누르는 고된 운명에 파묻힌 채 깊은 불안 속에서 도쿄로 돌아가지 못하고 방황한다.

고야 <모래에 묻히는 개>
저자는 제목과 본문에서 자신의 방황을 ‘순례’라고 썼다. 보통 순례를 떠나는 이에겐 뚜렷한 의도와 목적지가 있기 마련이다. 저자는 미술관과 성당을 전전하며 예상치 못한 작품에 마음을 빼앗기곤 한다. 산티아고에서는 미술관 대신 우연히 옆에 있는 성당을 방문했다가 거대한 벽화와 마주한다. 또 그를 사로잡은 작품 중 하나인 <상처를 보여주는 그리스도>는 시간을 때우려고 들린 박물관에서 발견한 조각상이다. 그런 의미에서 저자의 순례는 자유롭게 어디든 갈 수 있는 ‘방랑’과 닮았다. 그렇다고 이 여행이 순례가 아니란 건 아니다. 고흐의 그림을 보고 그의 정념에 감응한 나머지 고흐가 숨을 거둔 땅으로 발길을 돌리거나, 스페인령과 프랑스령으로 강제 분할된 바스크를 방문하면서 분단된 고국을 떠올리는 일 등 저자에게는 순례자의 모습도 보인다. 그의 여행은 방랑과 순례의 경계를 넘나든다. 방랑이자 순례고, 순례이자 방랑이다.
『책과 세계』(살림)에서 저자 강유원은 책을 읽고 이해하는 일에 당대 상황과 작가의 의도가 토대가 되어야 함을 강조한다. 책은 텍스트를 둘러 싼 세계와 함께 존재한다는 것이다. 나아가 한 권의 책으로 묶인 텍스트는 책을 읽는 독자의 세계와 만난다. 책을 읽는 일처럼 미술 작품을 감상하는 일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저자는 고야의 작품 중 <1808년 5월 3일> 복제품을 가지고 한국에 들어올 때 세관에서 문제가 된 일화를 소개한다. 형들이 수감되어 있던 90년대 초반 한국은 사상적으로 예민한 시기였다. 그림 속 총을 쥔 나폴레옹군을 소련군으로 오해한 세관원은 이 그림이 문제가 될 수도 있다 여긴다. “거의 2세기 전에 그려진 한 장의 그림이 그 작가하고는 아무런 인연이 없는 극동의 한 나라의 관헌”들에게 오해를 불러일으킨 것이다. 저자는 이때 이 그림은 “한국 세관원들의 눈살을 찌푸리게”하는 ‘힘’을 지닌 것이라고 말한다. 마찬가지로 미술 작품에는 그의 여행을 순례로 바꾼 어떤 ‘힘’이 존재하는 게 아닐까. 미술 작품을 보고 감상하는 과정에서 저자나 작품을 둘러싼 삶과 관계는 저자 입장에서 재구성된다. 미켈란젤로의 <반항하는 노예>를 보고 감옥 속에서도 군사정권을 향한 긴 반항을 멈추지 않는 형을 떠올리고, 레옹 보나가 그린 <화가 누이의 초상>에서 누이에 대한 아련함을 느낀다. 고흐 형제의 무덤에서는 고흐와 테오의 관계에 형제들과 자신의 관계를 투영한다. 『나의 서양미술 순례』는 몇 차례의 순례 같은 여행이 차곡차곡 쌓인 결과물이다. 저자의 여행은 끝이 있을지 몰라도, 그의 순례는 끝이 없다. 또다른 작품이 그의 삶으로 치환되는 것으로 언제고 미술관과 성당을 뒤지는 그의 순례는 다시 시작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