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불란서 안경원
조경란 지음 / 문학동네 / 2006년 2월
평점 :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당신은 고독을 느끼지는 않습니까? 사는 것이 재미없고 무의미하지 않습니까? 기분이 늘 울적하고 매사에 의욕이 없지는 않습니까? 사람만나기가 부담스럽고 불편하지는 않습니까? 혼자 있는 것이 두렵고 불안하지 않습니까? 항상 누군가가 옆에 있어주기를 바라지는 않습니까? 그렇다면 이 글을 잘 읽어 보십시오‘
-<목이 긴 사내이야기>中
당신이 이런 증상을 갖고 있다면 이 책을 잘 읽어 보십시오. 조경란은 당신과 같은 사람을 소개해줄 테니까요. 지난 3일간을 나와 함께 해주었던 조경란의 첫 번째 소설집은 유독 내 기억 속의 사람들을 많이도 꺼내주었습니다. 또한 불면의 시간을 2:1로 싸울 수 있게 해주었구요.
처음에 나는 불란서 안경원을 읽었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내 사랑 클레멘타인을 읽었더랬지요. 그 두 주인공은 다르면서도 닮았습니다. 치매에 걸린 아버지 때문에 집을 떠나고 싶은 동시에 떠날 수없는 그녀와 자신을 안경원에 스스로 가두고 오직 그 유리를 통해 세상을 보는 그녀가 그 주인공이죠. 결국 같은 삶을 사는. 앞으로도 둘은 결코 스스로 목숨을 끊을 것 같지는 않아 보입니다. 둘은 오늘도 삶을 견뎌내고 있습니다.
그를 만나면서 껌을 씹는 행위도 일종의 견딤이 아닐까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그녀는 그가 하루종일 껌을 씹으면서 제 몫의 일상을 견디고 있다고 생각했다. 아니면 삶의 어떤 진부함 같은 것들을 말이다. -<내 사랑 클레멘타인>中
내가 아직 무엇 때문에 죽음을 생각하지 않고 있는지 나는 명확히 알지 못한다. 그러나 죽음을 떠올리는 순간, 시간은 고집을 부리며 내 옷소매를 잡아당길 게 분명하다. 아직 견뎌야 하는, 내 나이는 그런 나이다. 나에게 삶이란 단지 오늘을 견디는 것, 바로 그것뿐이다. 아직 더 견뎌야 했다. 그러나 아직 아무도 내게 삶을 견디는 방법을 가르쳐준 사람은 없다.
-<불란서 안경원>中
정말 리얼하게 본인의 이야기를 가공하지 않고 쓴 느낌을 주는 소설도 있습니다. 날 것 그대로의 느낌을 살린, 그래서 더 매력적이었던 사소한 날들의 기록과 중독. 아마, 장르 중에 리얼픽션이라는 장르는 없겠지만, 있다면 이 두 소설을 넣고 싶습니다. 사소한 날들의 기록은 상담워크숍에서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고, 중독은 함께 글쓰기를 하던 언니의 자살을 목도하게 된 이야기입니다.
대학때 과 특성상 심리치료하는 것을 지켜본 적이 있습니다. 그때 제게 한 친구가 이런 말을 했었습니다. “야, 우리가 한 사람 바보 만드는 것 같지 않냐.” 그 친구에 대한 기억은 없지만, 그때 치료를 받던 K에 대한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군요. 친하지 않았는데도, 이름까지 기억이 날 정도니까요. 한 사람에 대한 상처를 안다는 것은, 그리고 치부를 드러내 보인다는 것은, 참 이상한 일입니다. 그 일이 있고난 후, 저는 꽤나 그녀에 관해 걱정스러웠습니다만...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해보였습니다. 아니, 아무렇지 않은 척 했을지도 모릅니다. 한 사람을 깊숙이 안다는 것은 참 묘한 일입니다.
푸른나부는 한 소녀와의 추억을 이야기합니다. 언젠가 목욕탕에서 자신의 열쇠와 바꿔치기를 시도하고 캐비닛에서 가방을 훔쳐간 한 어린 여자와의 짧은 추억에 대한 이야기를요.
나는 잊혀져가는 것들에 매달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잊혀지는 것은 나름대로 어떤 필연적인 이유들이 있을 터이니까.
그녀와 나. 우리는 더 이상 만나지 않아도 좋을 사람들이었다. 단 한 번의 만남으로도 평생 지울 수 없는 추억을 남기는 사람이 있는 법이니까. -<푸른나부>中
아아, 내게도 그런 아저씨가 있습니다. 어느 날, 내 삶에 뛰어들어 나를 얼벌벌하게 만들었던 아저씨... 인상 깊은 단편이 더 많지만, 정말 하나도 버릴 것 없는 소설집이지만, 그만해야겠어요. 이야기가 너무 길어질 테니까요. 그들은 어떤 이유로 내 기억 속에 남아있는 것인지. 이렇게 잊혀지지 않는 사람들이 제게도 있는 것은 필경 무슨 이유가 있을 텐데요. 오늘은, 그 아저씨와의 추억을 글로 남기고 싶은 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