샐러드를 좋아하는 사자 - 세번째 무라카미 라디오 무라카미 라디오 3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권남희 옮김, 오하시 아유미 그림 / 비채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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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 본인도 알고 있듯이 소설가 하루키의 소설이 아니라 에세이만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 역시도 그런 케이스인데, 하루키의 소설에서 느껴지는 일본남자 특유의 허세나 마초스러움이 잘 맞지 않는 탓이다. 에세이와 비슷하거나 약간 더 긴 단편들까지도 재밌게 읽을 수 있으나 장편으로 넘어갈라치면 하루키의 개성은 매번 너무 큰 벽으로 느껴진다. 하지만 그 벽이 에세이에서만큼은 하루키를 평범한 동시대 아저씨로 느껴지게 만들어 그의 에세이들을 읽게 만드는 매력으로 변하니 아이러니하다. 그리고 그런 아저씨의 글이 젊은 아가씨들이 읽는 앙앙이란 잡지에 연재됐다는 것도. 역시 극과 극은 통하는건가 싶다.

 

하루키는 이번 에세이에서도 참 별거 아닌 얘기들을 한다. 매번 빠지지 않는 달리기, 채소, 재즈 얘기부터 여행, 섹스, 인간관계에 대한 어떻게 보면 참 신변잡기적인 애기들인데 그 담백하고 신변잡기적인 얘기들이 좋다. 연륜과 경험에서 아무렇지 않게 묻어나오는 예리함도 맘에 든다. 그래서 하루키의 에세이를 다 읽고나면 영락없이 진 기분이다. 이번에도 좋았어! 매번 늘어놓는 얘기를 이번에도 늘어놓았는데 또 좋았다고! 하는 기분이랄까. 하지만 어쩌겠나. 그게 하루키 에세이의 매력인것을. 이미 그 매력에 빠져버린 이상 하루키의 신간 에세이가 나오면 또 읽고 말겠지. 그리고 또 패배한 기분을 듬뿍 맛볼 것이다. 하지만 그 패배한 기분이 벌써부터 자뭇 기대된다.

 

하루키의 단편을 읽다보면 대체 이게 뭘 빗댄건가 싶은 얘기들도 있고, 어떻게 이런발상을 했지 싶은 소재들이 있는데, 이번 에세이의 헌욕獻欲 수첩이란 에피소드에서 그 생각들이 어떻게 발전해서 소설로써 탄생하게 된 것지 엿볼 수 있어서 좋았다. 그러고보면 철학자나 소설가나 같은 부류의 사람인 것 같다. 다만 같은 발상을 했을때 철학자는 논리정연하고 깔끔하게 이론화하여 사람들의 머릿속에 이해시키고 소설가는 풍성하고 감성적으로 이야기를 풀어내서 사람들의 마음을 감화시킨다는 차이점만 있을 뿐. 하루키가 철학자였다면 우리는 헌욕논리의 실현을 목격하게 됐으려나. 어쩌면 그냥 발상이 독특한 유쾌한 사람으로 남았을지도 모르겠다. 결국 어느쪽이든 하루키는 우리에게 즐거움을 주는 사람이 될 운명이였던 것 같다. 그리고 여전히 채소와 재즈와 달리기를 좋아했겠지.

 

하루키가 언젠가 에세이에서 소설을 쓰고 남은 소재들로 에세이를 쓴다고 했던게 기억난다. 그렇다면 그의 새 소설이 발표된지 얼마 안된 이 시점에서 새로운 에세이집을 기대해 봐도 좋지 않을까. 이번엔 엄청나게 두껍게 삼박 사일을 꼬박 읽을 정도의 분량으로 내준다면 좋으련만. 그의 장면 소설이 에세이집 같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 또 패배한 기분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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