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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노우맨 ㅣ 형사 해리 홀레 시리즈 7
요 네스뵈 지음, 노진선 옮김 / 비채 / 2012년 2월
평점 :
며칠째 내리기만 하고 녹지 않는 새하얀 눈을 보며 이제는 이 책을 해치워야겠다고 결심했다. 지난 가을 사람들의 강력한 칭찬과 입소문에 힘입어 이 책을 선택했으나, 이와 비슷한 이유로 선택한 "658 우연히"가 기대와 달리 날 실망시킨터라 이 책의 첫장이 그동안 쉬이 넘어가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손에 쥐고만 있으며 마음의 짐으로 이 책을 남겨둘 순 없는 일, 이제 눈이 녹기 전에 이 책을 읽어야 했다. 이 책은 해리 홀레 시리즈의 7번째 작품이다. 한 캐릭터를 주인공으로 한 작품이 7번째까지 나올 수 있었다는 건 그만큼 이 작품이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매력과 재미를 갖고 있다는 강력한 증거일거다. 그러니 나는 이 사실을 알게 됐을 때, 진즉 이 책을 읽었어야 했다. 그랬다면 이제서야 이 책을 읽게 됐다는 진한 아쉬움이 조금이나 적어졌을테니까. 나는 이 책의 책장을 10장도 채 넘기기 전부터 내내 이런 후회에 시달려야 했다. 아, 눈이 조금만 더 빨리 내렸더라면 좋았을 것을.
이 책의 이야기는 눈과 함께 시작한다. 눈이 내리고 세상이 하얗게 뒤덮이면서 여인들이 하나둘씩 실종되어간다. 처음엔 단순가출이라고 생각했것만, 곧 그 여인들이 실종이 아니라 살해당했다는 부인할 수 없는 증거들이 속속 드러나고 만다. 그리고 사건 현장에 반드시 남겨진 의문에 눈사람은 이 사건들이 연쇄살인범에 의한 사건임을 암시하며 사람들의 목을 서늘하게 옥죄어온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새벽녘까지 읽고 나선 침대 옆 스탠드를 꼭 켜고 잘 수 밖에 없었다. 왠지 창밖으로 보이는 눈들이 바로 내 목뒤에서 찬 기운을 뿜어내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만큼 이 책은 스칸디나비아의 긴장감을 늦출 수 없는 차가운 겨울을 꼭 닮아 있었다.
사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여성 캐릭터들을 생각하면 머리에 열이 오르면서 서늘했던 기분을 담백하게 만들어주긴 했다. 나는 이 책속에 등장하는 여성캐릭터들이 단 한명을 제외하곤 죄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들은 내 기준에선 너무나 파렴치하고 몰상식했다. 물론 그들보다 더욱 파렴치하고 몰상식한 남자 캐릭터들도 한가득이였지만, 이 책 자체의 중심소재를 생각하면 이 책에서 그려지는 여성 캐릭터들의 이미지가 개운치 못한게 사실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에 등장하는 여성 캐릭터들의 단점이 해리 홀레란 캐릭터의 단점 앞에서 가볍게 상쇄되고, 이 소설이 여성들을 파렴치하게 만든 바로 그 마초성향이 나를 이 책으로 이끌었다는 것이 아이러니하다.
이 책의 주인공은 해리 홀레 시리즈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해리 홀레라는 이름을 지닌 중년의 남자다. 그는 오슬로에 거주하고 있고, 노르웨이에서 유일하게 연쇄살인범을 잡아본 경험이 있으며, 또 그럴 능력이 있는 뛰어난 실력을 갖춘 형사다. 여기에 그는 여느 하드보일드 소설에 나오는 주인공들과 마찬가지로 사회성이 부족하고 일중독에 알코올 중독 등등 온갖 마초적인 단점들을 당연하다는듯이 지니고 있다. 그런데 너무나 전형적이고 특별할 것 없는 이 설정들이 여타 소설들에서는 주인공에게 주어진 훈장처럼 보이다 못해 그 주인공들의 빼어난 능력을 강조위한 악세사리처럼 사용된다면, 이 소설의 주인공 해리 홀레에겐 그를 영웅이 아니라 평범한 인간으로써 보이게 만들어준다. 그리고 바로 이 점이 내가 이 책에 홀딱 빠져버린 가장 큰 이유였다. 전형적인 클리셰를 전형적이지 않게 풀어나간다는 것.
어느 헐리웃 관계자가 그랬더란다. 헐리웃의 오리지날 영화를 만들지 않고 다른 나라 영화들을 리메이크하거나 소설원작들의 영화가 점점 늘어나는 현상에 대해, 헐리웃이 영화로 하고 싶은 말은 이미 다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직설적으로 표현하자면 이제는 참신한 아이디어가 다 고갈되어 무엇을 만들던 새로울 것이 없다는 것이다. 이건 비단 헐리웃 영화계에만 해당되는 말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문학계 역시 자유로울 수 없다. 이미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나올 수 있는 설정들은 이미 다 나와 버렸으니까. 로미오와 줄리엣과 오만과 편견 이후로 이들의 클리셰를 따르지 않는 로맨스 소설이 존재하기나 하는가. 내가 "658 우연히"를 읽고 실망한 이유도 이미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다 나와 있는 전형적인 클리셰를 사용했기 때문이였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실망했던 진짜 이유가 그게 아니였음을 깨달았다. 내가 그 책에서 실망한 진짜 이유는 그가 전형적인 클리셰를 너무나 전형적으로 사용했기 때문이였다. 그래서 굳이 그 소설을 읽지 않아도 충분히 느낄 수 있는 감정과 소설의 장치들이 날 지치게 했던 거다. 하지만 요 네스뵈는 달랐다. 그는 전형적인 클리셰를 전형적이지 않게 사용했다. 해리 홀레의 설정은 물론이고, 너무나 전형적인 주변상황까지 그 특유의 변주로 새하얀 눈결정처럼 날카롭고 반짝반짝하게 그려 놓았다. 그래, 작가란 이런것이다. 전형적인 클리셰를 전형적이지 않게 쓰는 사람들, 닳고 닳은 표현도 참신하게 재창조 해내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작가들이고, 그런 사람들의 소설을 나는 읽고 싶었던 거다. 그래서 우리는 로미오와 줄리엣과 오만과 편견의 클리셰를 고대로 쫒아가는 로맨스 소설을 읽으면서도 감동받고 눈물을 흘리는 것이 아니겠는가. 덕분에 난 이 소설을 읽는 내내 요 네스뵈의 담백한 글솜씨와 참신한 표현들에 감탄을 금할 수 없었고, 그의 이야기에 포로가 되어버렸다. 아마도 나는 눈이 내릴때마다 이 책이 생각날 것만 같다. 그의 서늘하고 아찔한 글솜씨와 함께 말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 책은 해리 홀레 시리즈의 7번째 책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국내에 번역된 해리 홀레 시리즈는 이 책포함, 꼴랑 두권이 전부다. 내 짐작으론 이 책이 영화화된다는 소식에 부랴부랴 번역된 게 아닐까 한다. 하지만 계기가 어떻든 앞으로 이 시리즈가 꾸준히 번역되어 내 책꽂이에 주르르 꽂혀지길 바래본다. 이대로 단 두권의 번역본만으로 묻히기엔 너무 아까운 시리즈란 생각이 이 단 한권만으로도 강렬하게 느껴지므로. 그래서 솔직히 헐리웃 영화화를 계기로 번역되는 책들을 만날 때마다 헐리웃의 영화인들의 소재가 고갈된게 안타까운 한편 고맙기도 하다. 그들 덕분에 내가 이런 재미난 책을 만나게 된 셈이니까. 그렇지만 역시 헐리웃 영화를 좋아하는 입장에서의 안타까움이 더 큰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 안타까움을 스노우맨으로 상쇄할 수 있었으니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