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58 제너시스 내인생의책 푸른봄 문학 (돌멩이 문고) 7
버나드 베켓 지음, 김현우 옮김 / 내인생의책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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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소재의 영화와 소설들이 봇물처럼 쏟아지던 시절이 있었다. 그런 영화와 소설들은 주로 기계에게 인간이 지배당하는 암울한 미래사회를 다루었는데, 이런 소재들이 한동안 계속적으로 쏟아지고 흥행가도를 달린 것을 보면 당시 대중들에게 꽤 새롭고 흥미로운 주제로 각광 받았던 것 같다. 또 2000년 전에는 밀레니엄 버그같은 미래에 대한 불확실한 요소들과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같은 미신들이 우리의 불안을 고조시키고 있던 때인지라 이런 소재들이 제법 그럴듯하게 보였던 까닭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한동안 이렇게 주류를 이루던 SF 영화와 소설들은 2000년도를 넘어가면서 점점 사라져가기 시작했다. 실제로 그 영화와 소설들에서 다루었던 미래가 되었지만 결코 그런 문제들이 일어나지 않았을 뿐더러, 이제 이런 SF적 소재는 너무 반복되어 식상한 주제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도 이런 이유로 이 책을 처음 접했을 때 이미 유통기한이 지난 식상한 소재를 다루고 있는 뻔한 책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먼저 들었다.  

하지만 이런 내 의구심은 기우에 불과했다. 닳고 닳은 소재라도 작가가 어떻게 가공하느냐에 따라 이렇게 이야기의 힘이 달라진다는 것을 미처 떠올리지 못하고 있었던 덕분이였다. 사실 나는 가끔씩 이렇게 뻔해보인다는 편견과 의심으로 섣부른 결론을 냈다가 읽고 후회하는 책들이 종종 있었는데, 바로 이 책이 그런 류의 책이였다. 그리고 이 책은 처음에 내가 짐작했던 내용들을 죄다 비껴나갔다. 결론에 대한 포석들로 인해 결말에 대해 약간은 눈치를 챌 수 있었지만, 이야기의 진행과 결말 모두 내 예상과는 많이 달랐다. 책은 처음 예상보다 얇았으며, 내용은 기존 SF소설들과 달리 어렵지 않았고, 또한 화자가 여성의 형태를 취하고 있었기에 문체 역시 부드러웠다. 이 역시 모두 내가 그동안 접했던 SF소설들과 많이 다른 느낌들이였기에, SF란 장르에 압도당하지 않고 책이 말하고자 하는 주제에 대해 생각하며 천천히 읽을 수 있었다. 

이 책은 액자구성을 통해 동시에 두가지의 이야기가 진행된다. 2058년을 배경으로 아낙스가 공화국의 최고지성집단인 학술원에 들어가기 위해 면접을 치르면서, 공화국의 역사적 인물 ‘아담’에 대한 이야기를 발표하는 형식으로 둘의 이야기가 번갈아 진행된다. 처음에는 현재의 인물이 과거의 인물에 대해 단순히 지적 호기심을 갖게 됐고, 그것이 둘을 잊는 접점이자 이 이야기를 이루는 주축이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그 접점의 밑에 흐르는 갈등이 이 책의 주제라는 것을 곧 눈치챌 수 있었다. 사실 이 두가지 이야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많지 않고 대화체 역시 간결하며 이야기의 흐름은 정적이였다. 하지만 그 잔잔한 표면 밑에서는 막 터져버리려는 갈등이 들끓고 있음이 등장인물들의 대화 곳곳에서 분명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결말에 이르러서 왜 아낙스가 아담에 대해 끌릴수밖에 없게 되었는지 깨닫게 되는 순간, 등장인물들의 갈등이 터지면서 그 갈등의 반전이 나를 압도해 버렸다.  

그동안 내가 접한 SF장르의 소설과 영화들은 대부분 흥미롭고 재미 있었지만, 그 작품들의 결말 후에 이렇게나 내 마음이 불편하게 만든 적은 거의 없었다. 내가 접한 대부분의 영화와 소설 작품들은 SF의 표면적인 이미지 묘사와 전체적인 이야기의 흐름에 주로 집중했었기 때문인 것 같다. 물론 SF의 내면적인 요소에 대해 치중을 했던 이야기들도 있었지만 그런 이야기들 역시 인간과 기계의 본질에 대해 묻기보다는 서로 살아남아야 한다는 긴박한 목적성에 주목했던 것이 대부분이였다. 그래서 간혹 인간이 아니라 기계와 인간성이 결여된 미래 사회의 승리로 이야기의 결말이 나더라도 내 마음이 불편한 적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이 책은 이런 표면적인 SF적 요소에서 벗어나 인간의 본질에 대해 묻고 있었다. 인간이 인간일 수밖에 없는 본질에 대해 똑똑하고 잘나빠진 기계가 바로 그 인간이 본질이라고 믿었던 것들을 하나하나 논리적으로 반박하는 모습은 내 폐부가 찔려버린 듯한 느낌을 받게 만들었다. 마치 내 본질이 공격받은 것 같은 그 느낌이 나를 한없이 불편하게 만들었다. 그것은 내가 그런 논리적인 공격을 받는 아담과 같은 인간이였기 때문에 오는 필연적인 느낌이였을 것이다. 사실 작가는 인간이 인간일 수 밖에 없는 요소를 기계에게 남겨 놓음으로써 미묘한 인간의 승리가 엿보이는 결말을 보여주긴한다. 하지만 그 실날같은 승리의 느낌조차 나를 이 불편함에서 벗어나게 만들수는 없었다. 이 공격으로 받은 상처는 앞으로 시간을 갖고 이 주제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해 보는 것으로 치유할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경제학 전공 출신에 과학 교사라는 독특한 이력을 가진 버나드 베켓은 현재 뉴질랜드에서 가장 유명한 소설가라고 한다. 하지만 한국에선 아직 이 책 한권만이 유일한 그의 저서로 번역되어 있을 뿐이다. 그래서 이 책을 다 읽고 난 뒤에는 그의 다른 책들을 번역본으로 만날 수 없는 것이 꽤 섭섭했다. 그의 담담한 문체와 주제의식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내가 영어에 통달해서 그의 저서를 원서로 읽게 되는 것은 너무나 요원한 일 같으니, 부디 앞으로 그의 저서들을 한국어로 많이 접해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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