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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노 조율사
궈창성 지음, 문현선 옮김 / 민음사 / 2024년 4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책을 읽기 전 접한 정보는 딱 두가지였다. 얼마전 아내를 잃은 사업가와 사망한 아내의 피아노를 조율해주던 조율사가 사업상 피아노를 찾아 여행을 떠나게 된다는 간결한 줄거리와 이 책이 아주 좋다는 것. 실제로 손에 들어본 책의 두께도 중편 정도라 부담감 없이 가볍게 읽기 좋아 보였다. 그렇게 큰 기대 없이 시작한 소설인데 첫 챕터가 끝나기도 전에 이 책에 푹 빠져버렸고, 간결한 줄거리 사이에 숨겨져 있던 진짜 이야기들이 튀어나올때마다 놀랍고도 즐거운 당황스러움이 몰려와 잠시 책을 덮고 책 표지에 담긴 책 소개글을 뚫어지게 응시하곤 했다. 아니 분명 책 표지에 적혀 있는 소개글이 맞긴한데, 아닌건 아닌데, 그게 또 전부는 아닌 이 상황을 대체 뭐라고 해야한단 말인가.
이야기는 제 3자의 시점에서 담담하게 묘사되는 린쌍의 근황에서 시작된다. 성공한 사업가인 그는 얼마전 아내를 암으로 떠나 보낸 뒤, 아내가 운영하던 피아노 학원 처분을 놓고 고민하다 우연히 피아노 학원에서 연주를 하던 조율사를 만나게 된다. 조율사는 천부적인 재능을 지녔지만 피아니스트가 되는걸 원치않아 조율사의 길을 택한 사람으로, 제 3자의 시점에서 진행되는 린쌍의 이야기와 달리 조율사의 이야기는 '나'인 조율사의 시점에서 진행된다.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나'인 조율사가 토로하는 감정이 깊어질수록, 린쌍의 이야기는 점점 비중이 줄어들고 그의 감정에 대한 묘사는 점점 담백해진다. 그러다 어느순간 문득 깨닫게 된다. 제3자의 시선으로 담담히 묘사하며 시작됐던 린쌍의 이야기 화자가 '나', 즉 조율사였다는 것을.
그때부터 이 이야기는 피아노를 매게로 서로의 시간이 어긋나 공명하지 못한 인생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놓쳐버린 것들에 대한 달콤 씁쓸함에 공감하며 서로의 상처를 보듬는 이야기가 아니라, 다른 궤적을 살아온 두 사람이 공명하는, 운명처럼 이끌린 사랑에 대한 이야기였음이 드러난다. 이후 이야기는 단숨에 절정으로 향하며 폭발하기 시작하는데 초반과는 다른 흐름 속에서도 거칠어지거나 일관성을 잃어버리지 않고 전체적인 분위기와 품위를 지키며 마침표를 향해 나아간다. 자신을 잃어버리고 마는 순간 속에서, 그 무엇보다 절제하며 전개되는 이야기라니. 폭발 이후 끝나버릴 것 같던 이야기의 잔해는 하얀 눈처럼 소박하게 점점이 이어지다 담백하게 마침표를 찍고, 잘 조율된 이야기는 이렇게 마무리 되지만 그들의 이야기는 마무리가 되지 않길, 둘은 자신들만의 이야기 속에서 영원히 공명하길 바라게 됐다.
이 작품의 이야기만큼이나 좋았던 것은 이야기의 흐름 속에 글의 호홉이 살아 있다는 것이었다. 간결하고 정확한 단어 사이의 띄어쓰기 하나, 문장과 문장 사이의 공백 한줄까지 공기의 흐름이 이어지며 숨겨진 이야기가 아른거리듯, 가끔은 산문이 아니라 운문을 읽는 것만 같은 느낌을 자아냈다. 만약 번역의 질이 좋지 않았다면 이야기의 흐름을 느낄새도 없이, 원문은 몰라도 눈치챌 수 있는 오역들 때문에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겠지. 오랜만에 영어 번역본 특유의 어색한 문장도 없고, 같은 한자문화권이지만 은근한 회피성향을 드러내는 일본어 번역본 특유의 문장도 없이, 간결하게 자로 잰 것처럼 딱딱 떨어지는 문장을 번역본에서 볼 수 있다는 것도 이 책을 읽는 즐거움이었다. 궈창성의 다른 작품들도 언젠가 번역되어 읽어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