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고 싶다는 농담 - 허지웅 에세이
허지웅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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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지웅 4년 만의 신작 에세이

P14 오래 버티지 못한다면, 삶으로 증명해내고 싶은 것이 있어도 증명해낼 수 없다 나는 행복이 뭔지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매대 위에 보기 좋게 진열해놓은 근사한 사진과 말잔치가 행복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안다 아마 행복이라는 건 삶을 통해 스스로에게 증명해나가는 어떤 것일 테다 망했는데, 라고 생각하고 있을 오늘 밤의 아이들에게 도움을 청할 줄 아는 사람다운 사람의 모습으로 말해주고 싶다 망하려면 아직 멀었다

P45 살면서 성실하게 노력한 만큼 공정하게 돌려받은 경험이라고는 몸을 쓰는 일밖에 없었다 그 외에는 노력한 것보다 결과가 훨씬 더 좋거나 나빴다 이와 같은 경험을 축적해서 쌓아나가는 일은 중요하다 이기는 경험을 쌓으면 주저앉아 비관하지 않고 다시 한번, 이라고 말할 수 있다

형편이 좋은 집에서 태어난 청년들은 이기는 경험을 쌓는 일이 비교적 수월하다 스스로 형편이 불리하다고 생각한다면 다른 무엇보다 몸을 이기는 경험을 쌓아나가자 출발선이 다르고 상황이 여의치 않으니 몸을 이기는 경험을 대신 쌓는 것이다 이기는 경험을 쌓는다는 건 언제 힘을 주고 뺐는지, 언제 숨을 들이쉬고 내쉬었는지 근육의 쓰임과 호흡의 감각을 기억해내는 것과 같다 지는 것에만 익숙해지면 뭐가 진짜 이기는 거고 지는 건지조차 구분이 어려워진다 되는 놈만 늘 되는 이유가 그런 것이다 이겨본 사람만이 다시 이길 수 있고, 지더라도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요컨대 끝까지 버틸 수 있는 몸을 만들자는 것이다

P150 대부분의 성공에는 운이 따른다 반면 실패는 악운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실패는 선택에 의해 결정된다 내가 직면한 실패가 자연스런 결과로서의 실패인지, 혹은 의도에 의한 음모와 배신인지는 사실 중요하지 않다 벌어진 일은 벌어진 일이다 중요한 건 다음이다 나라는 인간의 형태는 눈앞의 문제에 대처하는 방식을 선택하는 순간 결정되는 것이다

피해의식은 사람의 영혼을 그 기초부터 파괴한다 악마는 당신을 망치기 위해 피해의식을 발명했다 결코 잊어선 안 된다

P167 나는 솔직히 사는 게 지긋지긋하다 재발을 두려워하고 있는 건지 기다리고 있는 건지 구분이 되지 않는다 환멸이 느껴지고 짜증이 나고 화가 난다

그래서 나는 니체를 다시 읽기로 했다 걱정할 필요 없다 어쩌면 이건 그냥 사랑 이야기다

니체는 1889년 광장에서 마부에게 학대당하고 있던 말을 부둥켜안고 울부짖다 쓰러진 뒤 완전히 미쳐버린다 그리고 정신을 차리지 못한 채 1900년 죽는다 삶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 생각되고 연필을 들 의지조차 생기지 않을 때 나는 <즐거운 학문>이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예전에 읽으면서 형광펜으로 칠해놓았던 부분만 다시 읽는다 그리고 그의 삶을 그의 글 위로 펼쳐본다 그가 "다시 한번!"을 외칠 때 어떤 표정과 목소리였을지 상상해본다 그러고나면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슬퍼졌다가 금세 말로 다 할 수없는 용기가 샘솟는다

이렇게 글로 쓰고 나니 마음으로부터 어둠이 걷히고 햇살이 비추어오는 기분이다 이제 나는 괜찮다 이 글이 부디 여러분에게도 괜찮다고 말해줄 수 있으면 좋겠다

P253 도처에 불행이 있다 불행은 발견되는 것이고 행복은 주장되는 것처럼 보인다 고통과 불행으로부터 시달려보지 않은 사람은 없다 극복해보려 발버둥 쳐보지 않은 사람도 없다 그것을 극복하는 사람과 끝내 주저앉는 사람 사이의 차이가 무엇인지 규명해보고 싶지만 쉽지 않다 불행의 양과 질을 계산할 수 없으며 그것을 견뎌낼 수 있는 능력 또한 상대적이기 때문이다 불행에 대응할 수 있는 단 하나의 검증 가능한 공식을 만드는 건 불가능하다는 이야기다

"악성림프종 진단을 받았습니다 혈액암의 종류라고 합니다 붓기와 무기력증이 생긴 지 좀 되었는데 미처 큰 병의 징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확진까지 이르는 요 몇 주 동안 생각이 많았습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미리 약속된 일정들을 모두 책임지고 마무리할 수 있었다는 점입니나 마지막 촬영까지 마쳤습니다 마음이 편해요 지난주부터 항암 치료를 시작했습니다 <버티는 삶에 관하여>에서 말씀드렸듯이 저는 '함께 버티어 나가자'라는 말을 참 좋아합니다 삶이란 버티어 내는 것 외에는 도무지 다른 방도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모두 마음속에 끝까지 지키고 싶은 문장 하나씩 담고, 함께 버티어 끝까지 살아냅시다 이길게요 고맙습니다"

악성림프종 투병 소식에 많이 안쓰럽고 안타까웠었는데 잘 버티고 이겨내고 반가운 신작으로 돌아왔다
투병 후 첫 책이라 어떤 내용일까 하는 기대도 컸지만 <살고싶다는 농담>이라는 제목에 마음이 아프기도 했다
여전한 그의 필력과 폭넓고 깊은 지식과 조언
허지웅의 책을 다시 읽을 수 있어 그저 감사하다

버티고 버티어내어 끝까지 살아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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