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야 언니에게 소설Q
최진영 지음 / 창비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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끔찍한 오늘을 찢어버리고 싶다
2008년 7월 14일,
그날 이후로 제야의 모든 세상이 부서졌다

P9 어차피 태울 거 뭐 하러 써? 제니가 물었다
어차피 죽을 거 뭐 하러 사니. 제야가 대답했다
제야에게는 그런 시간이 필요했다 하루를 묻는 시간, 가만히 앉아서 글자에 일상을 가두는 시간이. 일어난 일을 나열하다보면 불분명하던 감정도 한군데로 고여 어떤 단어가 되었다 엉켜 있던 생각을 정리하다보면 생각지도 못한 결말에 닿기도 했다 일기를 쓰면서 울기도 졸기도 했다. 미소 지을 때도 있었다

2008년 7월 14일에는 일기를 쓰지 못했다 15일도, 16일도, 17일도... 보름 가까이 쓰지 못했다

P32 이상하게 꼭 사과해야 할 사람은 사과하지 않고 사과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이 사과를 하고 그런다

P86 사람들은 내가 겪은 일이 먼지인 줄 안다 먼지처럼 털어내라고 말한다 먼지가 아니다 압사시키는 태산이다 꼼짝할 수 없다 나는 살아 있다 나는 움직일 수 있다 걷고 보고 말하고 달릴 수 있다 울고 웃고 판단할 수 있다 나는 쓸 수 있다 나는 하고 있다 나는 할 수 있다

P164 제야는 사람을 죽이는 방법을 생각하는 사람이 되었다 여름에는, 특히 비가 오는 날에는 안정제를 먹어야 잠들 수 있었다 남자와 단둘이 있거나 무리에 있으면 비명을 지르지 않으려고 입술을 물어뜯는 사람이 되었다

셀 수 없이 많은 것이 변했지만 변하지 않은 것도 있었다 이를테면, 살 수 있는 만큼 다 살아내고 싶은 마음 같은 것. 제야는 살아내고 싶었다

나는 내가 쓸모없는 것 같아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만 같아 나쁜 생각을 끊지 못하고 벌벌 떨고 사람을 경계하고 겉돌면서 점점 더 나를 쓸모없는 인간으로 만드는데만 집중하는 것 같아 쓸모없어야 아무것도 안 할 수 있으니까 아무것도 안 하는 게 당연해지니까 왜냐면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인간이니까

P186 두려워서 두려움 속에 뛰어들었다 무슨 일이든 일어날 것만 같아서 먼저 일을 저질렀다 가까운 불행으로 먼 불행을 가렸다 샘솟는 자기비하를 견딜 수 없어 타인의 입에서 그 말이 나오게 만들었다

제야는 몰랐다 그때도 지금도,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늘 뒤늦게 깨달았다 깨달았다는 건 이미 늦었다는 뜻이었다

P200 그래도 나는 후회하지 않아 내 생존을 내가 도모한 것을 후회하지 않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면 나는 또 당했을 것이다 지속적으로 당하면서 학교를 다녔겠지 그의 노예가 되었겠지 그의 죄가 쌓일수록 나는 나를 저주했을 것이다

나는 그가 스스로를 혐오하고 증오하길 원한다 내가 나를 혐오하게 된 만큼, 증오하고 자책하고 망가뜨린 만큼, 아니 나보다 훨씬 크고 깊게. 변명 없이 자기 잘못을 인정하고 수치스러워하길

P216 친절하고 비열할 수 있다 다정하고 잔인할 수 있다 진실하고 천박할 수 있다 그게 사람이다

꼬맹이 애기때 미아방지 목걸이, 팔찌를 하고 있음에도 엄마, 아빠 이름, 전번, 주소를 외우게 했었다 작은 어린 아이가 술술 외우는게 신기했던지 어른들이 자주 물으면서도 근데 막상 닥치면 너무 놀라서 잊어버린다고 했었다 교육?받은 것도 잊어버리는 마당에 제대로 성교육을 받아본 적이 없는 아이는 어떻게 대처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 후의 삶은?
가해자는 이전과 다름없이 잘 살고 있는데 피해자는 잘못도 없이 도망쳐야하고 행실을 문제 삼으며 손가락질을 받고 고통을 받아야 했다 끔찍한 찢어버리고 싶지만 찢을 수도, 잊을 수도 없다

이제야 말할 수 있는, 끝낼 수도 없고 끝나서는 안 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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