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라색 히비스커스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지음, 황가한 옮김 / 민음사 / 2019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인간 존엄성을 회복하기 위하여

어머니가 방을 나가고 나서 침대에 누워 과거를, 오빠와 어머니와 내가 입술보다 마음으로 이야기할 때가 더 많았던 세월을 샅샅이 훑어 보았다 은수카가 등장하기 전까지. 모든 것이 은수카에서 시작됐다 이페오마 고모의 은수카 집 베란다 앞에 있는 작은 정원이 침묵을 밀어 내기 시작하면서. 지금 내게 오빠의 반항은 이페오마 고모의 실험적인 보라색 히비스커스처럼 느껴졌다 희귀하고 향기로우며 자유라는 함의를 품은. 쿠데타 이후에 정부 광장에서 녹색 잎을 흔들던 군중이 외친 것과는 다른 종류의 자유. 원하는 것이 될, 원하는 것을 할 자유

P239 "너는 맹렬하게 완벽을 추구해야 한다 죄악을 보고도 걸어 들어가선 안돼" 아버지가 주전자를 욕조 안으로 가져오더니 내 발을 향해 기울였다 그러고는 마치 실험을 하면서 어떤 결과가 나오는지 보고 싶어 하는 사람처럼 내 발에 뜨거운 물을 천천히 부었다 아버지는 이제 울고 있었다 눈물이 얼굴을 줄줄 흘러내렸다 나는 수증기를 먼저 보고 그다음에 물을 봤다 주전자에서 나온 물이 거의 슬로 모션으로 포물선을 그리며 내 발을 향해 흐르는 것을 지켜봤다 닿았을 때의 통증이 너무나 순연한 극열이라 일순간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비명을 질렀다

공포라는 감정은 익숙했지만 매번 (다른 맛과 색깔을 띠는 것처럼) 전과는 다른 공포를 느꼈다

<엄마는 페미니스트>로 많은 사랑을 받았던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의 첫 책이자 첫 장편 소설로 2003년에 발표된 작품이다
가부장적이고 가정폭력을 휘두르는 가톨릭 광신도 아버지 유진 아치케에게 오랫동안 학대 당해온 한 가족이 투쟁 끝에 마침내 그에게서 벗어난 이야기로 15살 소녀 캄빌리의 시선으로 섬세하게 묘사되었다 자전적인 이야기일까 싶을 만큼 빠져 들어 읽었다 나이지리아 상류층 가정, 절대적인 아버지가 정해준 일과표대로 행동하고 하고 싶은 말보다는 듣고 싶어 할 말을 하고 순종적인 삶을 살던 웃지 않는 캄빌리, 어느 날 은수카에 있는 고모 집에 머물면서 주체적인 삶에 눈을 뜨게 된다
실제 사건을 모티브로 한 소설 속 사건과 정치적 배경은 책은 재미를 더욱 배가시킨다
보라색 하비스커스, 그 아름다움에 빠져보기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