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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운디드니에 묻어주오 - 미국 인디언 멸망사
디 브라운 지음, 최준석 옮김 / 나무심는사람(이레) / 2002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인디언과 관련된 책은 예전에 잠시 일본 파견 근무 당시 "それでもあなたの道を行け"라는 책을 접한 적이 있다.
짤막짤막한 이야기들과 그 추장들의 사진들이 함께 실려있던 책이다.
많은 이들이 한 두 번쯤은 아메리카 인디언의 지혜의 말들을 들어 보았을 것이다.
이 책 <나를 운디드니에 묻어주오>는 1800년대에 유럽에서 신대륙으로 이주가 시작되면서 이주할 땅을 찾아 나서고 노다지를 찾아 이동하고, 광부를 포함해서 이주가 가속하는만큼 축소되거나 멸망해가는 미국 인디언 멸망사에 관한 책으로 1971년 출간되어 기록문학의 걸작으로 평가되는 작품이다.
저자 디브라운의 서문(개정판)에서처럼 '과거에 불의와 압제의 역사를 지닌 어느 한 작은 나라를 거명해 본다면 이 책은 그곳에서도 발간될 수 있을 것이다"라는 구문에서 처럼 우리 대한민국의 역사도 불의와 압제가 많았기 때문에 출간되고, 독자들에게 읽히면서 무언가를 생각하게끔 만들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700페이지에 이르는 두꺼운 책이지만 책의 크기가 작기에 활자수는 생각보다 많지 않게 느껴진다.
인디언이라고 하면 서부 영화에서는 대부분 미개문명이고 해악한 모습으로 많이 묘사되어 왔다. 광고가 그러하고 반복적인 주입교육, 세뇌가 그러하듯 그런 모습을 접하다 보면 자연스레 마치 그것이 전부이고 사실인 것인양 우리의 뇌 속에는 그대로 새겨져 기억되는 못된 습성을 가진다.
문제는 정말 그것이 사실인가 하는데 있을 것이다. 그것이 정말로 진실이라면, 아니 절대적 진실까지는 아니더라도 객관적 사실이라면 관점에 따라 허용될 수 있다. 이 책 속에서는 머릿가죽을 벗기거나 하는 잔혹한 짓은 인디언과 같은 미개 원시족이 했던 것이 아니라 백인 이주민이 먼저 했했고, 보복을 하는 과정에서 인디언들이 따라서 했다는 부분도 나온다. 가족이나 친구를 포함한 종족에게 그런 짓을 했다면 그 당시라면 충분히 보복으로 할 수 있었지도 않았겠는가 하는 생각도 든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고 흔히 말한다. 이것은 과거의 역사를 되짚어 보고, 현실의 사건과 사고들이 어떤식으로 해석되고 보도되고 있는가 하는 것을 면밀히 살펴본다면 누구의 가르침이 필요없이도 스스로 납득할 만한 진실이라고 보는 것은 어떻겠는가.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해서도, 일본의 독도를 둘러싼 야욕에서도, 북한으로 인해 2년 이상 불가피하게 희생해야 하는 젊은이들의 청춘에서도, 미국으로 대표되는 강국에 의한 다양한 종류의 제약이나 감시 속에서도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굴종적 태도는 바로 나약함의 상징적인 표출이 아닐까 싶다.
이제는 인종차별이라는 이름으로 무슨 무슨 인종이라는 교육도 없어진다고 하던데, 소위 홍인종이라 불리던 아메리카 인디언들은 사실상 오랫동안 아메리카 대륙의 오랜 주인이었다. 그러나 신대륙을 찾아 떠나던 자들에 의해 조금씩 조금씩 정복을 당했다. 그것도 피로써.
미국의 역사가 짧은 것은 바로 정복을 마친 역사가 근래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 많던 인디언의 수가 이제는 과연 얼마나 남았을까 하는 의문만 가지더라도 얼마나 가혹하고 잔혹하게 인디언들을 멸망시켰는가 하는 상상을 할 수 있을 법하다.
인디언들을 멸망시키고 그들의 땅과 자원, 그리고 생명까지도 고스란히 거둬간 유럽에서 건너온 백인으로 대표되는 침략과 정복자들의 3-4세 후손이 미국을 움직이며 동시에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아닐까.
물론 어떤 조직에서나 가장 야비한자가 있는 것처럼 선량한 사람도 있음은 누구나 알고 있는 것처럼, 백인이라고 해서 누구나 인디언에게 죽음을 선사한 것은 아니다. 사람과 사람이 살아가면 자연스레 적도 있고 친구도 생기듯 인디언과 백인간의 친구도 있었으며, 이들 사이의 결혼을 통한 혼혈의 자녀도 생기는 것은 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이 자연스러움은 지극히 일부분일 수 밖에 없다.
이 책을 보면서, 미국은 정말 산만 파면 금이 나왔던가 싶을 정도다. 인디언의 땅을 빼앗는 것은 완전 정치가들과 자본세력들에 의한 사기와 배신행위. 그리고 군부에 의한 살육과 종족몰살까지도 시도 했던 흔적이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더구나 먼저 땅을 빼앗기 위해 전쟁을 일으키고 반항을 하면 몰살시키면서도 대외적으로는 항상 인디언의 호전적인 모습때문에 제거하지 않으면 안되는 대상이라고 대다수 백인들이 인식하도록 허위보고와 선전을 일삼은 언론플레이야말로 기가 찰 정도이다.
인간으로서 양심과 소신이 있는 일부 백인이나 영향력을 행사하려던 사람들도 있었지만 이들의 영향력이라고 해 봐야 결국 이 대세를 꺾기에는 절대적으로 부족해 대다수 인디언의 멸망을 막을 수는 없었다.
약간의 낯선 손님에게 경계감은 가지되 친구가 되고자 했던 이들에게 기독교로 개종을 따르지 않고, 강제 이주정책에 의한 정착문화를 따르려 하지 않는다는 이유를 들어 하나 둘 부족들을 몰살시켜 나가는 참혹한 모습이 그대로 보여진다. 이에 대응하면서 인디언들도 몇 자루의 총들을 입수하고 활과 칼로써 총과 대포를 상대로 노인과 아이들 그리고 부녀자와 자신의 목숨과 종족을 지키기 위해서 이기기 어렵다는 것을 알면서도 싸워야만 했던 추장들과 그 전투전사들의 이야기로 넘쳐난다. 항복을 하더라도 약속과 달리 배고픔과 병으로 죽어나가는 종족때문에 다시 탈출해야만 하는 참삼만 보더라도 답답하고 피가 끓어 오르기까지 한다.
피로 얼룩진 역사위에 세워진 역사.
그 피를 부른 자들과 그럴 수 밖에 없었던 행동주의자. 살기 위해 죽여야만 했던 참극의 현장들. 피가 부르는 복수의 고리.
이 모든것은 결국 소수의 여론형성자들과 정책입안자에 의해서가 아니겠는가? 이론적으로는 협상을 통해서 서로 윈윈하는 길을 찾으면 된다지만 이것은 이미 수천년전부터 시도했을 터인데,..바로 백수십년전에 한 대륙의 인류가 몰살에 가깝게 도륙되고 그 땅이 침탈당했다는데 인간의 잔혹성을 엿볼 수 있는 것은, 소수의 우두머리의 잔혹성과 야욕이 그대로 드러난 결과가 아니겠는가? 어쩌면 20세기에 히틀러를 악인으로 꼽는 것보다 더 악랄한 행위였을텐데, 누가 히틀러에 버금가거나 그보다 더 악인으로 불리우는 자가 있었던가?
역시 역사는 승자들의 역사일수 밖에 없고, 결국은 승자가 되어야만 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을 일깨우는 책이라 볼 수 있겠다.
어떤 페이지를 넘기더라도 안타까움이나 여운이 남는 모습들이 보이는 듯하고 때로는 마치 옆에 있는 가까운 이웃이나 친구, 또는 내가 당사자가 되어 쫓기거나 싸워야 하는 게 아닌가하는 생각마저 들기도 한다.
마치 성경책을 무작위로 넘겨 위안을 얻을 한 토막 글을 찾아 읽어내듯, 이 책을 한번 펼쳐본다.
"대학살이 아니었더라면 지금 이곳에는 훨씬 더 만은 사람이 살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일을 당하고 나서 누가 견뎌낼 수 있었겠는가! 휘트먼 중위와 화친을 맺었을 때만 해도 내 마음은 행복에 부풀어 있었다. 투산 시와 산 사비에르 사람들은 미쳤음에 틀림없다. 그들은 머리도 가슴도 없는 듯이 행동했다. ...그들은 피에 굶주린 인간들이다. ...투산 사람들은 자기들한테 유리한 얘기를 써 대지만 아파치족은 입장을 대변해 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 -아라비이파 아파치족의 에스키민진- (p.3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