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다정한 우주로부터 오늘의 젊은 문학 4
이경희 지음 / 다산책방 / 2022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경희 작가의 소설집 『너의 다정한 우주로부터』를 읽었습니다.

표지 디자인과 제목부터 띠지의 문구까지 뭔가 말랑말랑하고 따스한 SF를 기대했는데, 어머나 세상에! 그건 저의 크나큰 오산이었어요. 물론, 전혀 따스함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마지막 작품인 「저 먼 미래의 유크로니아」를 제외하고는 말랑말랑함은 거의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그것마저도 가장 비극적인 순간에 터져나오는 온기로부터 생명성이 부여되는 작품이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SF장르를 좋아하시는 분들이라면 분명 시간가는 줄 모르게 푹 빠져서 읽게 될 거예요. 전 첫 작품부터 헉, 이건 뭐지? 하면서도 순식간에 읽어버렸거든요.

『너의 다정한 우주로부터』는 2019년부터 2021년 겨울까지의 SF단편들을 모은 작가의 첫 소설집인데요. 이것이 본격 SF 소설이다, 라고 표현해도 좋을 것 같아요. 뼛속까지 문과인 저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용어들에 주석이 막 달려있는데, 작가의 말을 읽고 나서 살짝 속은 느낌도 들었어요. 다 그런 건 아니지만 '「바벨의 도서관」에 나온 모든 과학기술은 가짜고 엉터리'라지 뭐예요? 'SF는 과학 문학이 아니며, 과학적이지 않아도 SF를 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일종의 실험'이었다는데, 이미 말씀드렸다시피 그런 복잡한 무언가를 머리에 담기에 이미 제 뇌는 늘 포화상태인지라 읽는 동안에는 전혀 그 의도를 알 수 없었습니다. 가짜고 엉터리인 과학기술이라지만, 그런쪽으로는 1도 모르는 제가 보기엔 너무 그럴듯해서 어떠한 의심 없이 당연히 진짜로 여겨졌으니 작가의 실험은 저에 한해서 100퍼센트 성공입니다.

소설집은 「살아 있는 조상님들의 밤」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저로서는 살짝 충격적인 소설이었는데요. '이 작품으로 많은 상을 탔지만 여전히 부모님께 보여드리기가 참 죄송스럽다'는 작가의 말이 십분 이해가 갔습니다. 네, 그럴 수 밖에 없는 이야기지요. 눈에는 눈, 이에는 이가 떠오르는… 그러나 그 끝이 비극으로 치닫는 걸 수긍할 수 밖에 없었던 건 아마도 예로부터 뿌리 깊게 내려온 유교사상에 의한 일말의 양심이 때문일지도 모르겠어요.

「우리가 멈추면」은 '2014년 KTX민영화 저지 투쟁과 2018년 파리바게트 제빵기사들의 투쟁을 모티브'로 하고 있다고 하더군요. 작가의 말을 맨 나중에 읽었기 때문에 다 읽고나서야 아, 그렇구나 했어요. 우주 정거장 근로자들의 투쟁과 파업에 이르는 과정들이 실로 구체적이었던 건 아마도 모티브에 관한 사실적 이해가 밑바탕이 되어서였겠지요. 이 소설의 마지막 장면에서는 정말 붉은 빛이 온 우주에 터져 나오는 것 같은 벅찬 느낌을 받았습니다. 만약, 제가 그곳에 있었다면 저 역시 붉은색 조명의 버튼을 누르고 말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다층 구조로 감싸인 입체적 거래의 위험성에 대하여」는 급박하게 벌어지는 사건들을 따라가기에 급급했어요. 이야기를 읽고 난 후 이어지는 단편들로 오히려 더 이해가 갔던 작품입니다. 모든 것을 잊어버린다해도 인간의 본질적 욕망은 '자유'를 찾게 될까요? 이러한 질문은 다음 소설인 「바벨의 도서관」의 결론과도 어쩌면 맞닿아 있는 것 같아요. 인간이 아닌 인공지능에게 '너희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으란들 그들은 명령만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으니까요.

「신체강탈자들의 침과 입」은 '코로나 19 바이러스가 퍼지기 시작하던 2020년 봄'에 쓰여진 작품이라고 하네요. '특정 종교를 의식하'지 않았다고도 하고요. 뭐가 됐든간에 이 지긋지긋한 코로나가 소설처럼 싸그리 잡혀 사라지면 좋을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가장 최근작인 「저 먼 미래의 유크로니아」는 극히 주관적인 견해로 앞의 단편들에서 얘기하고자 하는 바를 조금씩 다 축약해 놓은 게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소설집 전체에서 가장 큰 울림을 주는 소설이기도 했고요. 띠지에서 저를 설레게했던 말랑말랑한 문장도 바로 이 작품에서 나옵니다. 사랑하는 하나를 쫓아서 무수한 게이트를 통과해 끝없이 미래로 나아가는 정원의 이야기를 따라가다보면, 인간의 외로움을 뼈져리게 느낄 수 있어요. 메워도 메워도 채울 수 없는 마음 속 구멍은 과연 채워지게 될까요? 읽는 동안 가장 따뜻한 건 어쩌면 인간인 정원과 하나보다 게이트를 수만년동안 지키고 있는 휴머노이드 직원인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기계의 위로가 오히려 서로를 욕망하여 죽고 죽이는 인간보다 낫네, 싶어질 정도로요.

"다정함을 잃지 않으면 돼요. 한 사람에게 모든 걸 빼앗으려 들지 말고 많은 사람들에게 조금씩 얻으려 해봐요. 더 많이 나누려 해봐요. 당신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것들을 지니고 있으니까."

저 먼 미래의 유크로니아 중에서_P.305

합리적인 선택이라고 정원은 생각했다. 누군가와 함께하는 한 욕망은 영원히 충족될 수 없었다. 사람들의 욕망이 서로 교차하고 간섭하기 때문이었다. 온전히 욕망을 충족하려면 각자의 세계에 홀로 존재하는 수밖에 없었다. 욕망을 실현할 힘이 커질수록, 그 힘의 크기만큼 서로를 멀리하는 수밖에 없었다. 혹은 욕망하기를 포기하거나.

저 먼 미래의 유크로니아 중에서_P.328

그리고,

이윽고 두 사람의 손끝에서 온기가 닿아.

그곳에서,

새로운 은하가 태어났다.

부디 지금보다 다정한 우주가 탄생하기를.

저 먼 미래의 유크로니아 중에서_P.354

『너의 다정한 우주로부터』는 단편 소설집이기 때문에 각각의 다른 이야기가 담겨 있지만 동일한 등장인물을 '재사용'하기도 하고, 단편들마다 전체적으로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어서 거대한 세계관 속에 존재하는 이야기를 옴니버스처럼 보여준 것 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다 읽고 나니 그제야 작가 프로필에 다시 눈이 가더라구요. 'SF소설가. 죽음과 외로움, 서열과 권력에 대해 주로 이야기 한다'는 말이 정말 딱이라고 생각했어요. 각기 다른 문예지에 실린 단편을 모은 작가의 첫 소설집을 읽을 수 있어서 행운이었다는 생각도 들고요. 작가의 다음 소설에는 과연 어떤 이야기가 실려 있을지 기대해 보며 글을 마칩니다. 감사합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